조선의 역대 국왕 | ||||||
25대 철종 이변 | ← | 26대 고종 이희 | → | 27대 순종 이척 |
대한제국의 역대 황제 | ||||||
칭제건원 | ← | 초대 고종 이희 | → | 2대 순종 이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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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고종(高宗)[1] | |
시호 |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 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 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2] | |
연호 | 개국(開國)[3], 건양(建陽)[4], 광무(光武)[5] | |
본관 | 전주(全州) | |
능묘 | 홍릉(洪陵) | |
휘 | 이명복(李命福)[6] / 이재황(李載晃) / 이희(李熈)[7] | |
자 | 명부(明夫) / 성림(聖臨). | |
호 | 주연(珠淵) | |
출생지 | 조선 한성 정선방 흥선군 사저 | |
사망지 | 식민지 조선 경성부 덕수궁 함녕전 | |
즉위식 | 1864년 1월 21일 (음력 1863년 12월 13일) | |
장례식 | 1919년 3월 3일 | |
배우자 |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 |
양아버지 | 조선 익종(문조익황제, 효명세자) | |
양어머니 | 신정익황후(효유대비) | |
아버지 |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 이하응(李昰應) | |
어머니 | 순목대원왕비 민씨(純穆大院王妃 閔氏) | |
생몰기간 | 1852년 9월 8일 ~ 1919년 1월 21일. (66년 3개월 23일, 2만 4220일.) | |
재 위 기 간 | 전체 | 1864년 1월 21일 ~ 1907년 7월 20일. (43년 5개월 30일, 1만 5885일.) |
조선 국왕 | 1864년 1월 21일 ~ 1897년 10월 12일. (33년 8개월 22일, 1만 2318일.) | |
대한제국 황제 |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20일. (9년 9개월 8일, 3567일.) | |
대한제국 태황제 | 1907년 7월 20일 ~ 1910년 8월 29일. (3년 1개월 9일, 1136일.) | |
식민지조선 이태왕 | 1910년 8월 29일 ~ 1919년 1월 21일. (8년 4개월 23일, 3067일.) |
대한제국의 태상황 | ||||||
고종 이희 |
일본 제국 덕수궁 이태왕 | ||||||
고종 이희 |
1 개요
조선 왕조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연호는 광무. 조선의 마지막 군주이다.[8]
안으로는 개혁을 통한 부국강병, 바깥으로는 제국주의로부터의 국체 보존이라는 2가지 시대적 과제를 맡았으나 지나치게 자신의 권력유지에 집착한 나머지 어느 것 하나 달성하지 못한 군주. 달성하면 사실상 먼치킨이지만 고종이 보여준 행각은 너무 어처구니 없었다.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읽지 못 하는 어두운 바보는 아니었지만 민첩하고 영리하진 못 했고, 큰 힘에 맞설 시도조차 하지 않고 굴복할 만큼 나약하진 않았으나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결기는 부족했다. 불가능에 가까운 시대과제를 해결할 비범한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에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떠안은 범부. 심지어 국내의 개혁세력들을 철저히 탄압하고 개혁을 하는 척 하면서 뒷통수를 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정치술은 대단했지만 정작 외세에는 한없이 나약한 모습만 보여줘 가뜩이나 어려운 시절에 해악을 많이 끼쳤다.
즉,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고 열심히 했으나 운도 따라주지 않고 상황도 변변치 못하고 무엇보다 어정쩡한 태도로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결국 일제의 강제 합병을 막지 못한 비운의 군주
상명지통[9], 고분지통[10]은 물론, 망국지통[11]에 독살의혹까지 겪게 된 비운의 군주로도 유명하다. 혜경궁 홍씨를 능가한다.[12]
재위기간이 영조(52년), 숙종(46년)을 제외하고 가장 긴 임금이다. 게다가 태황제 3년을 더하면 숙종을 뛰어넘고, 이후 이태왕으로서의 기간을 더하면 56년(+ 15일)로 영조를 거뜬히 뛰어넘는다. 아마 망국이 없었다면 살아있는 기록이 되었을 인물.
그의 치세에 조선이 개항부터 시작해 실질적으로 망했으므로 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는 찾아보기 힘들며 단지 '잘 해보려 했는데 시대가 따라주지 않았다', '운도 안 따라줬고 결과도 안 좋았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식으로 졌지만 잘 싸웠다식의 동정론적 평가를 받거나, 제국 멸망 후 안습한 왕족들의 삶[13]등으로 인한 동정표도 많이 받으나, 그의 근대화 노력 자체는 민씨 일가의 부패와 그 자신의 권력욕과 두루뭉술한 행정, 서양 문화와 기술에 대한 불이해 등의 여러 실정으로 점철되어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마디로 결론 내리기 어려운 왕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혼란한 시대였지만, 동시에 뚜렷한 능력을 보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14] 그의 재위 시기가 차라리 세도정치 시기였거나 단명했더라면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2 생애
2.1 즉위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의 둘째 아들로 한성부 안국방 구름재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사저 운현궁은 처음 구름재댁으로 불리다가 그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비로소 운현궁이라는 궁의 이름을 받게 된다. 처음 이름은 개똥이었다가, 소년기에 명복(命福)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조선의 26대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이름을 다시 재황(載晃)으로 개명했다. 또한 처음 자(字)는 명복(明福)이였다가 즉위 후 성림(聖臨)으로 개명하였다.
그는 본래 영조와 사도세자의 후손이 아니라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9대손이었다. 왕족이라지만 10대조까지 거슬러가야 왕이 나오며, 선왕인 조선 철종과는 18촌 간일 정도로, 왕위에서는 한참 멀어진 일개 방계 왕족에 불과한 처지였다. 그러나 양자관계를 통해 왕위 계승권을 논할 만큼 많이 가까워질 수 있었다(양자관계까지 포함하면 7촌).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은 조선 숙종의 서자 연령군의 양손자이자 낙천군의 양자가 되었지만 후사 없이 사망했는데, 이에 조선 순조는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7대손 진사 이병원의 차남 이채중을 사후 양자로 입양하였다. 이로써 남연군 이채중은 인조의 8대손으로 왕위 계승권이 없었지만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영조의 양증손자가 되어 왕위계승권을 획득했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흥선 대원군과 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효유대비)의 후원으로 1863년 음력 12월 조선 익종(효명세자)와 신정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익성군의 군호를 받고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형인 이재면 대신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나이가 어려 청정을 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2.2 친정 시작
어린 시절에 그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의지와 생각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지만, 즉위 10년이 지나 22세의 성인이 되자,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을 옹호하는 신하들을 몰아내어 자기 주도적으로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친정을 하였다. 대원군 시기의 고종 시대의 치세와 대원군의 실각 과정은 흥선대원군 항목 참조. 흔히 부인 민씨나 그 일족과 힘을 합쳤다는, 야사에서 기인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민씨 세력은 강성하지 못했다.
외척 세력이 득세하던 세도정치를 엎고 등정한 흥선대원군이 과거의 전철을 밟으며 제대로 된 지지기반이 있는 왕비를 뽑았을 리가 없다. 물론, 흥선대원군의 생각과는 달리 민 씨 본인이 고분고분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명성황후는 가까운 가족과 친지가 없던 고아였다. 그런데 어떻게 여흥 민씨가 척족세력으로 고종 때 득세를 했을까?
여흥 민씨는 고종뿐 아니라 흥선대원군, 그 아버지 남연군에게는 처가이면서 외가이자 사돈이었다. 심지어 고종 뒤의 순종까지도 부인이 여흥 민씨였다. 단순히 명성황후 때문에 민씨 세력이 득세했다고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다.
고종은 즉위 초기에 박규수, 이경하를 비롯한 대원군파, 중도의 안동 김 씨들, 흥인군 이최응, 김병학을 비롯한 대원군 반대파를 골고루 등용하여 조정의 균형을 잘 맞추었고, 대원군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민승호와 민겸호를 비롯한 여흥 민씨들을 등용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고종은 대원군의 개혁을 대부분 계승하여 호포제, 사창제, 서원 철폐 등을 고수했고, 만동묘는 복구하였으나 국가가 제사를 주관하게 하여 유림의 명분은 충족시켜주되 힘은 돌려주지 않는 교묘한 방법을 썼다. 당백전 만큼은 아니었지만, 화폐 경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던 호전(청전)을 혁파했고, 문세도 없애어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튼 이 무렵의 정치를 보면 기본 능력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어도 '전통시대 군주'로서 평타 이상은 되는 게 이 시기.
2.3 운요호 사건과 개항
그러던 중 1875년 운요호 사건이 터진다. 측량을 구실로 접근한 운요호는 조선군이 위협사격을 하자 즉각 공격을 감행했고 영종도 수비대가 일본 수병 36명 (전원 전장 식 단발총 무장)의 상륙에 전혀 저항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그런데 바로 그 영종도는 1866년에는 무장한 선원 200명의 공격에 그래도 어느정도 저항한 전과가 있는 곳이고, 운요호 한 척에 초토화되었다는 초지진 또한 그보다 고작 4년 전인 1871년에는 미 해군 포함 2척과 슬루프함 2척의 함포사격을 하루종일 받으면서도 미군 상륙 개시 전까지 계속 응사하던 포대였다.
그런데 미군이 이토록 포격을 오래 한 것은 제네럴 셔먼호 사건의 영향이 좀 있었다. 제네럴 셔먼호는 무장 상선이었기 때문에 미국 측에서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킨 조선군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여 일단 화력 제압을 시도해서 오래 포격한 것이다. 게다가 조선의 화망도 매우 정교하고 밀집되어 있어서 남북전쟁에 참여했던 미군 베테랑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고, 워낙 잘 은폐된 포대의 위치 때문에 미군은 조선군 대포의 위치를 처음에는 가늠도 못했다. 결국 초지진 포격전은 미군도 조선군 합쳐 2명의 사상자가 전부였고 본격 전 전투는 어재연이 지키던 광성보에서 터진다. 자세한 것은 신미양요 항목 참조.
그런데 왜 이렇게 쉽게 무너졌느냐 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874년 1월부, 즉 고종의 친정 이후 강화도 일대의 군영에 돌릴 예정이던 예산들이 모조리 박살났던 것. 청전(청의 동전) 폐지로 갑자기 극심한 디플레이션이 야기되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강화도 일대 군영의 주요 수입원이던 경강수세(한강 통행세)를 혁파하여 가뜩이나 재정력이 부족했다. 때문에 운요호 사건 시점에서 경기도 서해안의 주요 수군영은 몇 달째 군수지원이 끊긴 상태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부득이한 조치들이었다. 국가 1년 예산의 15배도 넘어가는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1866년 11월에 당백전을 찍어낸 대원군의 화폐 정책 때문에 당시 조선의 화폐유통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이후 2년 만에 말도 안 되는 악화[15]인 당백전이 폐지되었는데 인플레이션[16]이 벌어진 상황에서 당백전이 폐지되자 조정의 재정난이 극도로 심화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원군이 주력한 것이 관리들이 밀수입한 청의 동전 청전 유통을 강화 하는 것이었다.
청전 유통이 합법화 된 것도 1867년의 일로 이것도 대원군의 작품이다. 그리고 유통되던 당백전을 회수하는 과정도 당백전을 청전으로 바꿔준 다음에, 당백전을 다시 녹여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청전도 악화다.[17] 관리들이 청나라 동전을 밀수 했겠는가. 이 청전은 삽시간에 상평통보 유통량의 40%를 점유하였고, 조선 내에서는 화폐에 대한 불신풍조가 다시 일어났다. 당백전으로 불안했던 경제사정에서 인플레이션이 다시 시작된 것도 당연한 수순. 이렇게 당백전의 발행과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재정위기를 그나마 넘어가기 위해서 도입된 청전이 한순간에 조선을 다시 휘청하게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4~5년.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화폐부실 문제로 1874년 청전이 폐지되자 다시 올랐던 인플레이션을 포함해서 역작용으로 디플레이션이 이어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다시 극심한 재정난으로 돌아가야 했다. 경강수세가 폐지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고종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왕실 재정에 집착하고, 모든 국가 재정을 자신이 장악하려고 하였는데, 이런 초기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이 등골 빼먹는 수준으로 조선 정부의 재정적 여력을 악화시켰다는 것과 당백전과 청전의 유통과정에서 발생했던 인플레이션과 폐해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왜 고종이 부작용을 감수하면서도 다시 폐지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천천히 폐지하는 것이 어떠냐는 비판조차 말이 안 되는 것이 화폐개혁을 시간을 두고 진행한 경우는 거의 100% 그레샴의 법칙이 왜 무서운지 알게 된다. 단적으로 당백전이 발행되자 말자 조선에서는 상평통보가 씨가 말랐고, 당백전이 폐지된 이후에도 관북 이상 지방과 영남 지방은 청전 같은 악화는 쓰지도 않았기 때문에 부작용은 더더욱 집중되었다. 그 부작용은 안 그래도 허약한 조선 조정의 재정난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왜 청전을 폐지해서 군사력을 더 떨어트렸느냐 라는 것은 억지비판이 된다.
어쨌거나 그 뒤로 고종은 새로 화폐 발행하는 데에 상당히 신중을 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한다. 묄렌도르프가 당오전 주조를 주장하자 김옥균의 차관 도입에도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이 뒤통수치는 바람에 차관 도입은 실패하고 당오전은 당오전대로 막장으로 굴러가서 효과는 못 봤다.
그러나 중국이 무너지고 일본이 개항되는 상황에 군비를 삭감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조선 경제가 초토화되는 사태라도 불과 수년 전 외침을 겪어왔던 나라에서 "당장 쓸 일도 없는 군대" 라고 신경쓰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다. 조선 조정의 인식이 "가난하고 먹을 것도 없는 우리나라에 서양 놈들이 와서 뭐 하겠어" 하는, 인식이었던 것.
각설하고, 운요호의 무력에 조선은 놀라긴 했지만 이최응과 박규수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과 고종은 문호개방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 문을 열고 관을 설치하여 통상을 하면 백성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러 유림과 대원군의 결사반대조차 옳지 않다고 씹고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항목 참조. 여기까지는 좀 아쉬워도 그럭저럭 봐줄 만 한데...
2.4 임오군란
그러던 중 민씨 일가가 장악하고 있던 선혜청의 부패로 인해서 가뜩이나 별기군 창설 이후에 푸대접받고 있던 구식 군인들이 13개월이나 월급을 못 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나마 훈련도감을 비롯해서 특별한 소속이 있는 군인들은 제때 월급을 받을 수 있었으나, 별기군 창설 이후 수많은 구식 군인들은 특별한 소속 없이 방치되었고, 그들은 왕십리에서 채소를 재배해서 부업으로 겨우 먹고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위험 수위에 이르자 그들에게 1개월 치 급료가 지불되었는데, 문제는 급료로 지불된 쌀이 겨와 모래가 섞인 썩은 쌀들이었다. 분노한 군인들이 항의하자 고지기들은 겁도 없이 군인들에게 꺼지라고 큰소리를 쳐댔고, 분노한 군인들은 고지기를 묵사발로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13개월이나 급료를 받지 않고도 규율을 지킨 것이 가상하다고 칭찬하다면서[18] 나라에서 월급 못 준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니 잘 타이르란 정상적인 결론을 내린다. 근데 민씨 일가의 수장인 선혜청 제조 민겸호는 왕의 명령을 씹고 주모자들을 감금한다.
이에 구식군인들 사이에서 민겸호가 잡아간 군인들을 죽일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폭발한 군인들은 선혜청 제조 민겸호, 흥인군 이최응을 비롯해 원성을 하고 있던 고관대작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고 일본군 교관들과 민간인도 살해했다. 일본 공사 요시모토 하나부사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고, 겁에 질린 고종은 허겁지겁 대원군을 모셔와 군인들을 달래달라고 요청하며 다시 전권을 내어주었다. 군인들은 대궐에 나타난 대원군을 보고 환호했다. 대궐에 몰려든 군인들은 민중전을 내어 줄 것을 대원군에게 요구했지만, 대원군은 "중전은 이미 승하하셨으니 안심하고 물러나라"는 말을 하여 군인들을 해산시키고 별기군을 해체하고 강화도 조약을 비롯하여 일본과의 모든 통상조약의 파기를 선언한다.
그런데 이홍장의 지시로 청나라 군대가 들이닥쳐 대원군을 자신들의 진지로 초청하는 체 하며 그를 납치하여 청으로 끌고 가는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동시에 홍계훈의 기지로 목숨을 건졌던 명성황후가 청나라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와 다시 집권하게 된다. 청이 나름 친 청적인 면모를 보인 대원군을 납치해간 이유는 대원군의 쇄국 재개가 일본을 자극하여 동북아의 균형을 망치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한편 정여창의 눈에 들어 출세한 23세의 젊디젊은 원세개는 북양군벌의 철수 이후 조선에 잔류한 청군을 지휘하며 조선에서 총독이라도 되는 양 행세하게 된다.
2.5 갑신정변
이 와중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필립 제이슨 등의 젊은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의 지원을 얻어 정변을 일으키니 이것이 곧 1884년의 갑신정변이다. 우정국 사건을 시작으로 민영익을 베어 넘긴[19] 그들은 민씨 일파, 고종과 명성황후를 확보하여 경우궁으로 옮기고 자신들에 반대하고 청에 사대하던 관료들을 입궐시킨 후 닥치는 대로 베어 죽였다[20][21].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제발 그들을 살려달라고 김옥균 등에게 애원했지만 흥분한 급진 개화파들은 고종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급진 개화파는 정강 14조를 발표하여 개각을 선언했지만, 눈치 빠른 명성황후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리고 "신정왕후께서 넓은 곳으로 옮기길 원한다"고 말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가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다고 자신하여 넓어 방어하기 어려운 창덕궁으로 옮겨가는데 이것이 패착이 되어 원세개가 지휘하는 1,500명의 청군과 이에 합세한 조선군이 몰려들면서 급진 개화파는 완전히 궁지에 몰린다. 급진 개화파는 고종을 데리고 인천으로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려 했지만 고종이 죽어도 대비(신정왕후)가 계신 창덕궁에서 죽을 것을 고집하여 결국 고종을 놔두고 자기들만 양복으로 갈아입고 상투를 자른 후 일본으로 도주하는 처지가 된다.
이중에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 홍영식은 남아 오조유가 이끄는 청군에 합류하려던 고종을 만류하던 중에 느닷없이 공격해온 조선 병사들에게 도륙당해 죽는다. 결국 이들의 반정으로 인해 개화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말았고 급진 개화파의 친족들은 무참한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은 오히려 공고해지고 말았다. 한편 일본은 적반하장으로 조선에 한성 조약[22]을 강요하며 배상을 받아냈고 청에겐 무력시위를 하여 1885년에 톈진 조약[23]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2.6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갑신정변 이후 10년 간 조선은 청이 주도권을 잡고 유럽, 미국, 일본의 세력이 기웃거리는 묘한 공백 상태에 빠진다. 원세개가 총독에 준하는 권력자가 되어 조선에 군림하긴 했지만 그의 행보는 다른 열강을 의식했는지 의외로 소극적이었고 별 의미 없는 10년이 훌떡 지나간다. 그 10년 간 고종은 5영을 3영으로 개편했다가 다시 4영으로 개편하는 군제 개혁에 착수했는데 기존 정변에서 거의 쓸모가 없었던 군에 대한 불신 때문에 급히 행한 것이었고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 했다. 그리고 개혁을 위해 내무부를 설치하여 궁내사무와 군국사무를 겸하게 했고 이 과정에서 친위세력인 여흥 민씨들을 기용했다.
육영공원을 비롯한 학교, 제중원 등의 근대식 병원, 전신, 전기 등이 이 시기에 들어왔다. 하지만 고종의 개혁들은 어디까지나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의 대혼란 이후에 극도로 불안해진 나머지 자신의 왕권 유지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두루뭉술했다. 정권 유지에 대한 집착은 정권 유지 기반인 재정 확보에 매달리게 했고 내무부는 개혁 조치가 아니라 고종의 비자금 확보에 더 주력했다. 서양 문물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마구잡이로 들여온 일부 무기와 군함도 거의 쓸모가 없었다.
한편 계속된 교세 확장에 고무되고 기존에 금지된 천주교, 개신교의 합법화에 자극받은 동학이 대대적으로 합법화를 요구하게 된다. 1892년 교주 최시형의 허락 아래에 공주에서 동학교도들의 집회가 열려 충청 감사 조병식을 통해 동학 합법화의 뜻을 전달했다. 조병식은 "나라에서 하는 일을 감영에서 와서 따지면 뭘 어쩌라는 거냐?"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동학 단속을 완화했다. 이후 삼례에서 더 큰 집회가 열렸지만 충청도에서 거둔 것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1893년 동학대표들은 서울로 상경하여 최제우를 신원하고 동학을 합법화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복합상소).
이에 고종 이하 조정은 매우 긴장했다. 고종은 이단을 탄압하는 것이 열성조의 법이란 입장을 분명히 했고, 유림들도 앞을 다투어 동학을 탄압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조정은 동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동학 지도부는 보은에 전국의 모든 교인들을 집합시켰고 보국안민, 척왜양창의의 깃발을 휘두르는 수만 명의 교인이 보은에 집결했다. 경악한 조정은 어윤중을 내려 보내 동학교도들을 달래려고 시도한다. 한편 조정은 동학교도들이 서울로 진공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는데 강화도와 평양의 병력을 수원과 용인에 급파하고 서울의 군사들을 대기시키자는 논의에 고종은 외국 군대를 동원하자는 의견을 내놓는다.
조정은 고종의 주장에 크게 반대했지만, 고종은 청나라 군사를 쓰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냐는 입장을 고수했다. 어차피 원세개가 지휘하는 청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으니 청군의 힘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한편 어윤중은 동학 교인들을 타일러서 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실 해산이 신속했던 것은 동학 지도부가 전봉준을 비롯한 과격파에 스스로가 놀랐기 때문이었다. 전봉준 등은 전라도 금구로 이동하여 또 집회를 가졌고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분노하여 마침내 봉기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동학농민운동 항목 참조.
조정은 황토재에서 관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듣자 홍계훈과 장위영 병력을 급파하지만 장성 전투에서 또 패전보를 듣고 전라 감영까지 함락 당하자 마침내 민영준을 보내 원세개와 접촉하여 청군의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원세개는 이에 간단한 일이라고 호언장담했고 이에 이홍장도 파병을 결정하여 아산만에 청군이 도착한다. 그런데 농민군은 홍계훈의 독일제 쿠르프 야포 포격에 잇달아 패해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있었고 청군의 등장에 일본군이 톈진 조약을 빌미로 덩달아 인천에 나타나면서 조선도 청도 농민군도 당황한다.
농민군은 이러다가 나라가 외세의 전쟁터가 되겠다고 전주 화약을 맺고 물러났고 조선 정부는 청과 일본에 모두 철수를 요구한다. 청나라는 이에 곧바로 응했지만 일본은 "우리가 알기론 동비들이 소탕되지 않았다."란 억지를 부리며 철수를 거부한다. 그러자 청나라는 일본군이 혹시 뒤통수 맞을 것을 두려워하여 저러는가 싶어서 동시에 철수하잔 제안을 했으나 일본은 이도 거부한다. 이에 조선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미국, 영국이 중재에 나섰으나 일본은 거부했고 역으로 청나라에 같이 동학운동을 진압하고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하잔 제안을 한다.
청나라는 "동학란은 이미 다 끝났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 사람들의 일인데 왜 니들이 더 난리냐?"라고 거부했고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을 퍼부어 아산 만에서 청나라 군함들을 침몰시키니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의 시작이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의 대청 독립선언을 강요한 다음에 고종을 위협하여 청나라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모든 청군은 조선을 떠나라는 명령서를 받아낸다. 일본은 대원군을 포섭하여 고종에게서 앗은 전권을 위임한다. 대원군은 민씨들을 숙청하면서 내정 개혁에 착수하려 했지만 문제는 대원군 역시 고종과 마찬가지로 별 힘이 없었다. 실세는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박정양을 비롯하여 일본의 후원을 받는 개화파들이었다. 군국기무처가 설치되고 갑오개혁이 실시된다.
이 시기에 드디어 노비제, 신분제가 폐지되었고 도량형의 통일, 화폐개혁, 조세의 금납화, 재정 일원화가 실시되었다. 재가 허용, 조혼 금지, 과거제 폐지, 연좌제 폐지도 실시되었으며 지방관의 사법권도 박탈했다(재판소 설치).
한편 자신이 일본에게 이용만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대원군은 전봉준[24], 이홍장 등과 접촉하면서 힘을 합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자신에게 권력을 쥐어달란 로비를 하고 있었는데 청군이 평양 전투를 비롯해서 일본군에게 개 박살나고 동학농민군도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자세한 것은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 항목 참조.
어쨌거나 조선의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요동을 토해내는 것을 본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할 생각을 가지고 인아거일,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몰아내는 외교정책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독일과 미국에도 구조 요청을 보내지만... 독일 황제도 힘이 없었고,[25] 미국은 금광만 먹었다.
2.7 을미사변
청일전쟁 와중에 일본은 김홍집 내각을 통해 조선과 동맹을 체결했고 20개조 개혁안을 통해 고종의 실권을 상당수 뺏고 명성왕후의 정사 개입도 금지했다. 이 와중에 청군, 동학군과 내통한 것이 걸린 대원군은 완전히 실각한다. 일본은 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서광범을 법무대신으로 내세웠고 고종으로 하여금 홍범 14조를 고묘하게 했다. 이 시기 고종의 호칭은 대군주로, 왕비가 왕후로, 세자가 태자로 바뀐다. 한편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 대사 베베르와 접촉하면서 "우리가 믿을 것은 러시아 황제 폐하뿐이다."라고 노골적으로 알렉산드르 3세, 그 뒤를 이은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 제국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이에 베베르도 고종 부부의 주장에 부응하면서 본국에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주장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소극적이었다.
이 와중에 이준용 역모 사건이 터진다. 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박준양, 이태용 등과 합세하여 김홍집 내각을 없애고 고종과 순종, 명성황후를 죽이고 스스로 왕좌에 앉으려 한 것이다. 이를 박영효와 서광범이 밝혀내어 자신들의 권위를 공고히 한다. 궁궐 수비대를 훈련대로 바꾸자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26] 역모를 꾀했다고 하는데 체포령이 떨어지자 박영효는 허겁지겁 일본 공사관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명성황후, 유길준, 이노우에의 모함으로 자신이 실각했다고 주장한다. 박영효에 의해 실각한 김홍집이 복귀했고 박정양, 이완용, 이운용, 이범진, 민영환 등의 정동구락부 출신의 친미파, 친러파들이 득세(3차 김홍집 내각)한다. 박영효 중심의 친일 내각이 완전히 실각한 것이다.
고종은 일본군에 의해 훈련받던 훈련대도 해산해버린다. 이에 분노한 일본은 군인 출신의 미우라 고로 공사를 부임시켰는데 이노우에 가오루는 바로 귀국하지 않고 보름이나 그와 같이 지내며 모종의 계획을 꾸몄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엔 대원군도 동석하여 대충 명분 비슷한 것을 갖추었고 홍계훈과 이경직을 죽이고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이 와중에 낭인들은 고종 앞에서 칼을 겨누고 순종의 머리채를 끌어잡는 등 행패를 부렸다. 미우라는 고종의 부름에 입궐하는 척하며 입궐하여 친미파, 친러파를 내쫓고 친일파 이재면, 조희연, 유길준으로 새로운 내각(4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한다. 그리고 각국 공사들의 추궁에 훈련대의 짓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워낙 증인이 많아서 곧 거짓말인 게 드러난다.
새로운 내각의 핵심은 유길준이었다. 그의 주도 하에 을미개혁이 실시되고 유명한 단발령이 실시되어 고종과 순종이 같이 머리카락을 자른다. 연금 상태의 고종은 러시아와 미국의 외교관들과 접촉하며 일본의 독살을 우려하여 아예 그들이 만들어온 음식을 먹으며 연명했다. 그 와중에 명성황후가 단순히 어디 피한 것이 아니라 살해되었단 정황이 포착되면서 근왕파와 민심이 매우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재순, 이도철 등의 근왕파들은 이완용, 이범진 등의 친미, 친러파,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관들과 합세하여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는 춘생문 사건을 일으키지만 일부 대대장의 밀고로 군부대신 어윤중에 의해 진압 당한다. 정동구락부 인물들은 각국 공관에 대피한다.[27] 한편 고종은 유림들에게 밀사를 보내 대대적으로 의병 궐기를 촉구했고 고종 33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궐기하여 애꿎은(?) 수령들을 참수하고 여러 고을을 점거했다.
2.8 아관파천
을미의병으로 인해서 한양에 주둔한 군세 대부분이 각 지방으로 내려가 감시가 소홀해지자 고종은 궁녀가 타는 가마를 타고 순종과 함께 대궐을 버리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한다. 베베르는 인천항에 정박시켜놓은 러시아 수병 117명을 동원해 즉각 공사관에 배치함으로 공사관을 지켰는데 단순히 117명이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 고종을 보호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한 제스처였다. 사실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는 일찍이 고종이 일찍부터 막대한 이권으로 매수하다 시피한 인물이었고, 후일 고종이 친러 정책을 펴는 배경이 된 인물이었다.[28] 고종은 즉각 김홍집 내각의 관료들을 죽이라는 교지를 내렸고 군중이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 등을 노상에서 살해했고 유길준 등은 황급히 일본으로 망명한다.
2.9 독립협회
아관파천 이후에도 고종은 한동안 러시아 공사관과 기존의 궁을 오가면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부각된 단체가 독립협회이다. 원래는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서 발족했던 단체였으나, 이후 독립신문 발간 등의 독자적인 활동을 하면서 조직이 그대로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별도의 단체가 되었다. 초기 독립협회는 친정부적인 형태로 출범하였으나, 개창자중 대표적인 인물인 서재필, 그리고 이후에 활동하는 박영효 계열 등의 영향으로 급진개화 단체의 성격이 강해졌다. 고종의 환궁 이후에는 개혁방안을 두고 고종과 갈등을 빚었으며 중추원 설립 과정에서 고종이 독립협회를 적대시하고 결국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독립협회, 독립문, 독립신문, 중추원, 광무개혁 항목 참고.[29]
2.10 광무개혁, 대한제국 선포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내외부에서는 외세의 간섭을 막고 자주적으로 근대국가를 세우자는 주장이 자주 벌어졌고, 외부에서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아관파천이 시작된 지 1년 뒤인 1897년 2월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또한 고종은 환궁직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며 원구단을 축조하여 그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조선이 자주국가임을 선포하였다.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고친 직후 고종은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 자세한 것은 광무개혁 항목에 상세히 나와있다.
결론적으로 고종은 이 개혁을 통하여 국력을 증진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지만, 내용과 진행이 불철저한데다 결국 일제의 러일전쟁 승리와 한일 의정서의 체결에 따라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면서 중단되었다. 게다가 근대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고종이 지나치게 황권에 집착한데다, 충분한 재정자금을 구하지 못하여 제대로된 일정규모이상의 근대식 군대를 보유하지 못했으며, 제도개혁조차 미완에 그쳤다.
2.11 러일전쟁
당시 대한은 삼국간섭 이후로 꾸준히 신경 쓰던 인아거일 정책을 통해 러시아의 힘으로 일본을 막으려 했고 일본은 대한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당연히 러시아와 일전을 벌여야 했다. 러시아-일본 간의 갈등은 첨예해졌고 결국 1904년에 러일전쟁이 터진다. 일본은 또다시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으로 만주의 러시아 군대를 공격했고 중립을 선포한 대한을 강제로 동맹국으로 끌어들였다. 이때 독도를 멋대로 자기네 땅이라고 선언. 일본군은 십 수년치의 국가 예산을 소모했으며 러시아 군대를 상대로 러시아 군대보다도 많은 희생자를 내며 신승한다. 사실상 일본의 가용병력 대부분이 죽거나 다친 상황에서 러시아는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더 동원하여 한판 벌일 수 있었는데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져 러시아 내부가 뒤숭숭해지고 러시아의 경제 사정도 좋지 않은 편이라 러일전쟁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 아래에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일본의 전략적인 승리로 끝을 맺는다. 단 러시아는 일본에 한 푼의 배상금도 주지 않았다. 어쨌거나 최후의 대일 견제세력인 러시아가 물러나면서 대한은 그야말로 일본 앞에 차려진 한 끼의 밥상이 되고 만다. 여담으로 루즈벨트는 포츠머스 조약 중재 대가로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2.12 을사조약
러일전쟁의 종전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덴노의 위협적인 국서를 가지고 고종을 알현한다. 국서의 내용인즉 '순순히 외교권을 넘긴다면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였다. 정말로. 메이지의 뜻이라기 보단 일본을 움직이던 수뇌부들의 뜻이었겠지만.
고종은 이는 나라를 망치는 일이니 죽는 한이 있어도 응할 수 없다고 처음에 매우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가 물러난 이후에 열린 어전회의에선 "어차피 일본 애들이 내가 거부한다고 그냥 물러날 놈들이 아니니 별 수 없다"며 현실을 인정했다.
이때 어차피 조약은 체결될 것이니 이왕 체결할 김에 우리에게 한 치라도 더 유리하게 조약을 개정하는 것이 옳다는 안을 내놓은 이가 있었으니, 이가 바로 학부대신 이완용이다. 그리고 고종은 그럼 경이 잘 처리해보라고 자신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어 물러나버리고 8대신을 이토 히로부미와 면담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완용은 거의 외교권을 송두리째 일본에게 갖다 바치는 결과를 낳았으니... 자세한 것은 을사조약 항목 참조.
이후 조선은 최익현을 비롯한 유림들은 물론이고 거의 전국이 발칵 뒤집혀서 대혼란에 빠졌다. 시일야방성대곡도 이때의 일. 곳곳에서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자결자들이 속출했고 백성들은 나라가 망했다고 혼비백산했다. 평민, 유림을 가리지 않는 광범위한 의병이 일어나니, 이가 바로 을사의병이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도 을사늑약을 되돌리진 못 했다.
2.13 헤이그 특사 사건, 퇴위
을사조약의 체결은 단순히 외교권 강탈의 수준이 아니었다. 고종이 노골적으로 도움을 요구했던 미국과 영국 등의 국가들도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30] 각국의 대사관을 철수시켜버렸다.
이쯤 되면 고종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일본은 고종의 발악을 막기 위하여 고종의 권한을 대폭 축소했고, 차례로 조선의 권리들을 박탈해나갔다. 고종은 최후의 시도로 이준과 이상설 그리고 이위종을 특사로써 모스크바의 이범진을 거쳐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였지만, 그들은 문전박대 당하였다. 이준은 헤이그에서 객사하고 말았는데, 이는 이준이 할복자살했다는 야사를 낳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앞에 나아가 "멋진 일을 하셨더군요. 근데 앞으로는 더 공공연하게 하시지 그러십니까?"라며 조롱했으며, 이완용과 송병준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고종의 퇴위를 강요했다. 이완용과 송병준 등은 앞을 다투어 고종이 일본 황제 폐하께 대죄해야 한다며 퇴위로 사죄하라고 고종을 압박했고, 고종은 단식까지 불사하며 강경하게 버티었다.
고종은 박영효를 궁내부 대신으로 삼으며 박영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박영효는 고종의 부름을 무시하였고, 이완용과 송병준은 전화선까지 끊고는 고종을 사실상 감금하였다. 이에 고종은 마지못하여 대리청정의 명을 내렸지만, 얼마 후에 일본에서 새 황제 즉위를 축하한다는 문서가 오자, 이완용은 아예 내시 2명을 데려와서 각각 고종과 순종의 자리에 세우고 날치기로 황위를 교체해버렸다. 그렇게 한국사 최후의 군주인 순종이 즉위하게 되었다.
그렇게 1907년 고종은 일본의 압박으로 강제 퇴위를 하게 되고,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되었다.
고종은 이후에 비밀리에 의병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등 일본의 병합정책에 대하여 저항을 하였지만, 퇴위당한 이상 그에게는 사실상 아무 실권이 없었다. 결국 그는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2.14 사망과 독살설
망국의 군주로 물러난 이후 평소 야참으로 마시던 식혜를 마시고 잠에 들었다가 다시 깨어나 목이 마르다며 차를 마시곤 사망하였다.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여 그의 인산일로 하여금 3.1 운동이 전개되게 한, 3.1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여러 노력 끝에 마지막의 죽음으로써 겨우 민족을 뭉치게 한 격.
그리고 유난히 독살설이 많은 조선 임금들[31] 중에서 화려한 대미를 장식한다. 항상 야참으로 마시던 식혜[32]를 마신 뒤 잠자리에 들었다가 목이 마르다고 차를 마셨는데, 그 뒤 복통을 호소하다 사망하였기 때문에, 식혜에 독이 있었다는 소문이 쫙 퍼져 결국 3.1 운동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일본 황족인 이방자 여사 역시 회고록을 통해 독살설을 지지했다. 외국에 나가 망명 정부를 차려 독립운동을 하려 했던[33] 고종의 뜻을 알아챈 일본에서 직접 누군가에게 지시를 했다고도 한다. 고종은 강제 병합 직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서 망명 정부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벌인 기록도 존재한다. 망명 정부에 거리낌이 없었다는 증거가 된다.
고종 독살설의 증거로 제기되고 있는 것은
- 일제의 발표에 의하면 사인은 지병인 뇌일혈인데, 전조증상이 분명한 뇌일혈에 비해서 고종은 사망 당일까지 건강상태가 상당히 양호하였다. 때문에 독살이 아니라도 적어도 뇌일혈에 의한 사망 가능성은 낮다.
- 고종 사망 후 염습한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3일 만에 완전히 부패하여 이가 빠지고 살점이 떨어졌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독약으로 자주 사용된 비상의 비소성분으로 사망 시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다[34]. 고종 사망은 1월 21일 한 겨울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우라면 3일만엔 부패하는 경우는 당연히 있을 수 없다.
- 고종에게 최후의 간식을 올린 것으로 보이는 시녀들이 이후 의문사하였다.
- 이 시기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을 비롯한 고위층에서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기록도 존재하는데, 이를 고종 암살설과 연계시킬 수도 있다.
정확한 사인을 알 수는 없지만 살해당했다면 보통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속한 어떤 매국노와 1급 친일파인 이기용[35]이 배후일 거라고 지목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역시 1급 친일파로 일제에게서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으며 이왕직의 총관이었던 한창수와 한상학을 후보로 거론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데 2010년, 일본이 일부러 고종을 독살할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는 주장이 국내 연구자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같은 시기 일본에 머물고 있던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이 본래 1919년 1월 25일에 예정된 상태이므로, 불과 4일 후에 결혼식이 예정된 상황에서, '내선일체'의 이데올로기를 홍보할 좋은 기회를 맞이했던 일본이 일부러 신랑의 아버지인 고종을 제거해 물의를 일으킬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고종 망명설을 부정하거나 사전에 막아 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입장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고종의 사망 때문에 실제로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은 1년 뒤로 미루어졌으며, 그 사이에 3.1 운동이 발생하여 반일정서가 고조됨과 동시에 공화정 수립으로 민심이 이동했으므로, 일본은 큰 호기를 놓친 셈이 되었다.
2009년에는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지시로 친일파 대신들이 약을 탔다는 증거가 처음으로 발굴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이는 기자의 설레발 혹은 제목 낚시. 기사를 잘 읽어보면 "데라우치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음요. 님 혹시 들은 내용 없음?" 이라고 구라토미가 질문한 것뿐인데, 이를 독살의 증거라고 확대 해석한 것이다. 이 질문은 당시에도 독살설이 있었다는 증거이지 독살 자체의 증거는 아니다. 어쨌든 고종의 유해가 남아있으므로 나폴레옹처럼 현대 과학 기술로 검사해보면 독살당한 것이 사실인지 규명해 볼 수 있겠으나 황제의 능을 발굴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으므로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릉(洪陵)[36]. 명성황후와 합장되어 있다. 고종의 능은 전통적인 조선식 왕릉과는 다른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황제릉'의 형식으로 꾸민 것이라고. 본래 홍릉은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되고 처음에는 오늘날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 묻혔었는데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하고 당시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원래 홍릉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것이 고종의 후궁 귀비 엄씨의 묘소인 '영휘원'인데 오늘날에도 '구홍릉'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으며 이 근처에는 수목원이 있다.
뒷날 아들 순종황제가 죽은 후에도 홍릉 근처에 능을 써서 이 능역을 합쳐 '홍유릉'이라고 부른다. 홍유릉 뒤편에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나 의친왕, 덕혜옹주 등 한국의 마지막 황실 일원들의 묘소도 함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홍유릉 일대는 대한제국 황족들의 가족묘인 셈.
2.15 복제논쟁
고종 사망 이후 아직까지 잔존한 유림들 사이에선 대소동이 벌어졌다. 고종의 사망 이후 일부 유림들이 "우리는 대한제국 황제의 신하들이지, 일본 이태왕의 신하는 한 적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할 수 없다!"라고 고종에게 절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 때문에 한동안 유림계는 고종에게 절하는게 맞는가 아닌가를 두고 서로 대판 싸우게 되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고종이 일본에게 저항하다가 독살되었단 소식이 들어오자, 그렇다면 고종은 친일을 한 것이 아닌 것이 된다고 하여 고종에게 절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이후 유림계는 "고종께서는 무능하셨다. 근데 그것이 오직 그분의 책임인가? 우리도 여러 실책을 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니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간재 전우 등의 강경파를 제외한 대다수 유림들은 3.1운동 등에 참여하여 다른 종교인들과도 연대하고, 파리 장서 사건을 모의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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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능하지 않았지만 유능하지도 않았고, 약하지도 않았지만 강하지도 않았으며, 정치감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뛰어나지는 못하였으며, 일의 핵심에 있으면서도 핵심이 어디인지 혼동하였으며, 둔하지도 않았지만 민첩하지도 않았고, 인사를 알고 있음에도 인사를 몰랐으며, 자신의 시대가 근대라는 것을 알았지만 전근대적으로 행동했다.
결과적으로 수십 년 고종 재위기에 조선왕조가 사실상 망했으므로 평균 이상의 명군이라고 보는 시각은 거의 없으며, 이태진 교수 류의 근대화에 힘을 썼다는 것과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을 호평하여 나름대로 할 만큼은 했다는 우호적인 평가 vs. 암울한 한국근현대사를 개막한 총 책임자에 해당하는 구제불능의 암군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까는 쪽의 요지는 민씨 일파의 부패, 그의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는 유약함과 우유부단함, 내부의 민란인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인 청나라 군대를 부른 일[37]과 지나칠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여 독립협회도 무너뜨려버린 일 등을 꼽는다. 그리고 양무호 구입을 비롯해서 기분으로 밀덕질[38] 하다가 재정 파탄 내 버리고 사기까지 당한 일도 있었다. 이건 당시 대한제국 지도부가 근대전과 그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다는 근거이다.
아니 그 이전에 운요호 사건이나 임오군란 등을 보면 소수의 구식군대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 했다. 일단 자기 몫(내탕금) 챙기는 데만 열심이었을 뿐, 군사예산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주지도 않았다.
그렇다 해도 고종이 개혁면에서 실수를 저질렀다고 탓하기도 어려운 것이, 메이지유신을 보면 천황을 위시한 중앙집권화를 실시하고 입헌군주제를 실시했는데, 조선은 상당부분 그러한 제도개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법이 전근대적일 거라 생각해 토지소유권을 재정하려 했으나 조사결과 이미 토지소유권이 있었던 게 대표적 예.
고종도 박문국,전환국,기기창을 설치했고 경복궁에 전구를 부설했으나 근대무기 제작에 실패하면서 일본 식민지의 그림자로 다가서게 된다. 국왕이 제도개혁을 게을리해서 나라가 망한 게 아니라, 이미 근대화되어있던 기존의 제도가 현실에서 개막장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나라 전체가 총체적으로 부패해서 망했던 것. 고종의 실책은 비난받을 만하지만 이미 있는 문제를 가속화한 것뿐이다. 그러니 더 비판받야 할 수도 있지만....
광무개혁 등의 개혁도 효과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성과를 따지면 변변찮았고 식민지화를 막아낼 근본적 개혁과는 안드로메다 급 차이가 있었다.
커피나 자동차로 대변되는 자기 취미를 가졌다는 것도 훌륭한 것이 아니다. 송휘종이나 명 4대 암군들의 면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자기 취미에 너무 깊이 빠진 군주는 나라를 말아먹기가 쉽다.
게다가 고종은 명성황후처럼 직접 매관매직을 주도했는데 대한제국 선포 이후 그 정도는 더 심해졌다.[39] 그런데 대한제국군 항목의 해군 파트에서 볼 수 있듯이 돈을 모으는 데는 능숙했어도 돈을 제대로 쓸 줄은 몰랐다.
게다가 왕실 유지를 위해 걷는 내탕금도 과다해서 여러 개혁 이후에도 국가 세수는 여전히 부족했다. 물론 개혁핑계로 내탕금을 모으며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했기 때문에, 고종의 개혁정책으로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달파졌다.
물론 반박도 있다. 독립협회는 뚜렷한 권력기반도 없으면서 아예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자 하였고 이를 자랑하며 고종과 유림의 경계를 자초했다. 결국엔 자신들의 지지기반인 민중까지도 등을 돌려버릴 만큼 과격한 행보를 일삼았으니 독립협회는 고종때문에 몰락한 게 아니라 내부적인 모순에 빠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자세한 것은 독립협회, 중추원 항목 등을 참조.
동학 농민 운동도 결국 일본군이 아니라 신식무기를 갖춘 관군에게 동학군의 진격이 저지된 것이었지만, 만약 실패했을 경우 도성으로 수십만 반군이 몰려드는 처지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그러나 제물포 조약으로 일본군이 꼽사리 낄 것이란 고려도 못 한 것이니 정신 나간 판단인 건 맞긴 하다.
사실 동학농민운동에서 농민군을 청군으로 진압하겠다는 발상과 이 때문에 일본군이 올 것을 예상했으면서 묵인한 것,[40] 그리고 실제로 동학운동을 진압하면서 일본군의 학살과 진압을 조선관군이 직접적으로 지원해주면서 진압한 것은 전근대적인 왕조국가에서 할 발상이라고 이해해 줄 여지가 눈꼽 만큼은 있다. 하지만 더 정신나간 문제는 고종이 이런 정치적 문란, 민란이나 농민운동을 겪고서도 그에 대한 후속조치가 더 정신나가 있었다는 점이다.
일례로 동학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인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은 사태가 종식된 후 1년간 유배형을 가나 곧 고종이 직접 사면하여 법무민사국장에 이어 고등재판소 판사까지 승승장구하였다. 고등재판소 판사가 된 조병갑은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이자 2대교주였던 최시형에 직접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기까지 한다. 아무리 동학군이 당시로서는 반군이라지만 탐관오리에게까지 이런 처우를 한 것은 유교적 왕도정치에도 맞지 않은 것이었다.
고종의 이런 용인술은 역시 같은 탐관오리인 조병식을 후에 황국협회에 가담하게 하여 신나게 민권운동을 탄압하는데 이용했다는 예에서, 그리고 역사적 평가가 갈리는 홍종우의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고종은 전제군주적인 권력을 위해서라면 민생을 도탄에 빠트린 탐관오리건 누구건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종의 비자금이 당시 독립운동 및 반외세운동을 하던 이들에게 흘러들어가서 상당한 자금지원을 했다는 것도 밝혀지고 있다.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에서 활약한 최익현, 이인영, 민종식, 정환직, 허위, 신돌석 등은 모조리 고종의 밀지나 자금지원 중 하나, 혹은 둘 다를 받고 활동했다. 이는 고종의 사망전후까지 이어져서 을미의병부터 1920년대까지의 국내외 대일본투쟁에는 직간접적으로 고종과 연결되지 않은 인물을 오히려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전근대적일지언정 '국왕'이라는 매력적인 명분이 주어지고, 무엇보다 실제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고종의 비자금만한 자금줄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바로 그 무렵은 아직 전근대라면 전근대인 시기였다.
또한 조약으로 광산 개발권 등 각종 이권을 외국에 힘없이 내준 점도 비난받는 부분이긴 하나, 당시 조선은 근대화 개혁이 표류하면서 스스로는 개발할 기술도 능력도 부족했던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이권을 한 나라에게 몰아주는 게 아니라 여러 나라에게 흩뿌려 준 것도, 최대한 많은 열강들이 조선에 발을 걸치게 하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애당초 러시아, 청, 일본을 제외한 열강들에게 있어 조선에서 얻는 이득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수준이라, 청나라, 러시아가 조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자, 열강들은 조선을 일본에게 넘기는 걸 쉽게 인정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권을 내주면서 얻은 자금이라도 제대로 쓴 거냐면 위에서 말했듯 그것도 아니었다.
고종은 이권을 통해서 당시 외교관들을 매수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성공적 매수가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였고, 사실상 실패한 것이 미국공사 호너스 뉴턴 알렌이다. 이는 사실 시기적으로도 연결고리가 있는데, 베베르는 러일전쟁 전까지 주 활약시기였던 러시아 공사였고 정치적으로 영향력도 상당했기 때문에 효과가 아주 컸다. 반면에 알렌은 러일전쟁 패전 이후까지 남아 있었고, 실력에 비해서 욕심만 컸기 때문에 고종이 더 이상 이권을 제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바로 등을 돌리고 배신해버렸다.
만일 러일전쟁이 벌어지지 않았거나,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고, 이를 미국이 승인하는 형태로 결론이 나왔다면, 고종의 매수외교는 성공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뤼순을 점령하는 등의 러시아의 강경화와 무엇보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 승리로 이런 외교적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고종의 자금은 고종 본인이 앞장서면서 한 매관매직으로 인해 번 돈이었던 것이 매우 큰 문제였다. 매관매직으로 돈을 모으니 당연히 관리들의 기강이 무너지는 건 당연했고, 결과적으로 민생의 파탄을 불러 와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기 때문. 어떻게 보면 언 발에 오줌을 누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후에 조선에 미친 제일 확실한 영향으론, 왕비인 중전 민씨와 마찬가지로 그의 사망 시 국상일에 맞춰서 3.1 운동을 일으킬 기회나 주었다는 것 정도. 실제로 33인이라는 인물 중에는 고종의 밀사 역할을 하거나 고종을 지지하였던 오세창, 이상설, 한용운과 같은 부류 외에도, 독립협회 문제나 동학 관련으로 고종에 불만이 많았던 손병희, 윤치호, 안창호와 같은 부류가 존재했다. 이들이 고종을 지지하건 반대하건 고종의 영향력 자체는 존재했기 때문에 3월 1일이 된 것이다.[41] 이후 김구 등은 임시정부에서 왕정복고는 주장하지 않았어도 구황실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2009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재판권을 일본 법정에서 러시아 법정으로 옮기고 러시아 거류 한인들에게 변호 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밀사를 보냈다는 내용의 일본 기밀문서가 이태진 교수에 의해 공개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안중근의사 기념 사업회 책임연구원 신운용은 다른 방계 사료로 그런 사실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 안중근 의거를 병탄의 기회로 노리고 있던 통감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점, 일제 외무성이 고종 배후설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 고종과 황실이 안중근의 의거를 부정적으로 보았다는 점 등에서 성립될 수 없는 가설이라고 반박했다.[42][43]
그 외 업적으로 백범 김구 선생을 살려준 것 정도가 꼽히기도 한다. 하지만 김구 선생의 명성황후 시해관련 일본인 살해 건은 백범일지의 기록과 달리 실제 불투명한 점이 많아 고종이 그를 살려줬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고종이 궁전 내에 최초로 설치된 전화기로 전화를 걸어서 살려줬다는데, 그 당시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영사관에서 살고 있었다.[44]
그 외에 중국으로 망명해서 망명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다는 학설도 존재하는데, 만일 실제로 임시정부에 고종이라는 구심점(+자금줄)이 존재하였다면, 임시정부의 활동은 그 수준을 달리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고종이 확실하게 고평가를 받을 만한 점은, 일본에게 끝까지 저항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군 앞에서 벌벌 떨면서도, 뒤로는 일본 엿 먹일 궁리를 했고,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 면전에서 그 점을 비꼬기도 했다. 일본이 뭐 자기네 힘 과시하려고 고종 끌어내린 게 아니다. 고종이 일본의 계획에 실질적으로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끌어내린 것이다. 즉, 고종이 정말 일본에 저항할 의지도 없었다면 일본이 굳이 순종에게 양위를 강요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당시 고종을 비판했던 수많은 국내의 지식인들과 명사들 중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는 일제에 굴복해서 변절의 길을 걸었다. 고종을 비판했던 사람들은 거의가 개화파를 잇는 인사들이었고, 이들에게 일본이란 물리쳐야 할 대상이면서 근대화의 교사라는 양면성이 존재했기 때문에...
고종 역시 일제에 타협하거나 적어도 용인하는 형태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 이 경우는 물론 말 할 것도 없이 역사적 평가는 최악이 된다. 그리고 동시에 반대세력이 과격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단적으로 베트남국이 이런 식이 되었다. 제국주의 시기 식민지의 이전 군주들은 이런 형태로 다루어진 사례가 상당히 많다.
실제로 고종이 이런 길을 걸었다면 일제의 조선병합은 한결 수월하였을 것이다. 순종은 비교적 온순한 식민지 군주였지만, 일제에 의해서 옹립되었다는 근원적 문제에 더해서 김홍륙 독다 사건으로 폐인이 되었다는 평이 널리 퍼져 있어서 큰 의미 부여는 안 되었다. 단적으로 고종이 죽은 이후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 가운데 군주정(유교적인 전제군주정이든 근대적인 입헌군주정이든)이라는 정치체제를 주장한 단체는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다만 끝까지 저항했다는 그 자체에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지, 그 저항은 전혀 유효하지 못한, 부실한 방식이었으므로, 국가원수로서 까방권이 될 수는 없다.
또한 이전에 이미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독립조직인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를 자신의 전제권력에 반한다는 이유로 정치깡패를 동원해 해산시킨 시점에서 고종의 모든 저항관련 행위의 제1 목적은 결국 본인의 전제권력 복권이고, 민족의 해방은 결국 고종에게 이를 위한 사전 작업에 불과했다는 가설을 부정하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고종의 막장 행보가 아니었다면 개화파들이 친일로 넘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한일병합 이전 개화파의 행태는 전권을 요구하는 것이었고(입헌군주제) 이는 고종에겐 반역이나 다름 없는 요구였다. 사실 세계적인 추세로 따지고 보면 그렇게까지 전근대적인 것도 아니다. 당장 프랑스의 마지막 황제라고 불리는 나폴레옹 3세가 고종과 맞물리고, 독일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패전까진 무늬만 입헌군주국인 독일 제국이었다. 러시아 제국도 별반 다른 처지는 아니었고... 대영제국, 미국 같은 나라가 워낙 유명해서 그렇다.
과학만 근대적이었지 정치적으로 '근대적인' 국가는 당시에도 많은 편은 아니었다. 친청, 친러, 친일, 친미파등 개화세력도 중구난방으로 갈라져 정권 획득을 위한 연줄 만들기에 몰두했고, 자기들끼리 대립했다. 당시 중추원설립 과정에서 보여준 과욕이나 광무개혁 항목에서 설명하고 있는 부족한 현실 인식 등을 보면 고종의 레벨로는 무슨 짓을 해도 무리였다. 특히 급진개화파들의 국제 정세를 보는 눈은 위정척사를 외친 유생들보다도 더 이상주의적이라, 일본이 하는 제안은 속내도 의심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믿었다.
위태한 상황을 타개해 보겠다고 나름 나서던 엘리트 지식인층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하다가 나중에 일방적으로 탄압해 버리는 왕에게 질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파 세력을 키워준 건 고종이고 뒤통수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며 먼저 때렸다. 심지어 이때는 노선이 조금 온건하다고 다른 개화파 세력들까지 다 죽이려 했다.
갑신정변 이 사건으로 개화파는 왕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도 나라 팔아먹으려는 역적집단으로 몰린 터이고 개화파가 고종을 까는 건 사실 자기들의 이런 삽질들을 고종에게 떠넘기려는 측면도 어느 정도 있었다. 게다가 이후로도 개화파는 자기들끼리 반목했고, 권력을 잡기 위해 정치적 노선이 전혀 다른 대원군과도 손을 잡으려 하는 등 이미 막장화되어 있었다. 이후로도 을미사변 때 뒤통수를 쳐 댄 놈들인 건 마찬가지라 도긴개긴이다. 게다가 현대 시각으로 봐도 급진 개화파의 개혁 방안은 취지는 좋을지 모르나 방법론에서는 좋은 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고종이 권력에 집착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 대원군은 고종이 통치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스스로 물러나려 하지도 않아 민씨 일가와 힘을 합쳐 몰아내야 했고, 친정을 한 이후로도 계속해서 쿠데타 시도를 통해 정권을 잡으려고 했다. 대원군은 자신을 복권시킬 세력으론 노선이 완전히 다른 급진개화파, 청나라, 일본, 동학농민군,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군인들이든 가리지 않고 손을 잡으려고 할 정도로 위협적인 인물이었던 만큼, 고종으로서는 자기 측근들 빼고는 언제 뒤통수를 칠 지 모른다고 여겼을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는 했다. 물론 그것이 고종의 실정과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망국에 면죄부를 주지는 못하지만.
고종은 전제군주국의 왕으로 즉위했던 인물이었다. 선진국가라는 유럽의 군주들 역시 대부분 전제군주국인 상황이거나 막 입헌군주국으로 전환되어가는 상황이었는데, 그가 전제군주 했다고 일방적으로 욕먹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시아에까지 영향력이 있던 국가 중 영국은 입헌군주국이고 미국은 공화국이었다. 그나마 독일, 러시아가 황제의 권력이 막강했고 이때문에, 고종이 은근히 이들 국가에 친근감을 보여 결국 친러적인 정책을 폈는데, 정작 그 러시아의 상황이 개판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해 결국 낭패를 보았다. 괜히 러시아에 반감을 가진 서유럽 국가들에게 나쁜 이미지만 심어주는 결과를 자초했다.
그의 저항은 주로 아관파천, 의병 궐기 권유 같은 꼼수나 헤이그 특사, 이권 배분 같은 외교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자존심과 목숨까지 버려가며 저항한 전왕조인 고려의 우왕이나 공양왕과 비교된다. 물론 고려 왕족들은 힘이 닫는 한 적극적으로 저항한 탓인지 결국 왕씨 몰살을 당하기도 했다.
고종의 능력치나 정치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전통적 조선의 군주로서는 호포제, 사창제 유지, 유림 제지 등 최악은 아닌 수준이었고 독립협회 개발살내는 때의 꼼수는 혀를 내두를 만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청나라가 무너지고 일본이 개항되고 서양개항선이 몰려오는 이러한 현실 속에선 뭐... 서양인 하면 치를 떤 동시대 일본의 메이지 덴노와는 달리 나름 근대화에 관심은 보였지만, 기초적인 지식이나 개념이 전무한 상황에서 잘 되면 그게 이상한 거고...
종합적으로 보면 좋게 표현해봐야 위기인 상황에서도 대원칙이 없이 임기응변만 한 인물이고, 꼼수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아버지가 만들었다고 해도 자기도 그걸 타개하지 못 해 꼼수밖에 못 쓰게 된 인물로 볼 수 있겠다.
3.1 비교론
3.1.1 타국가에 비해 못했다.
역사를 성찰의 학문이라는 데서 가치를 찾는 합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몇 안 되는 선례에서 건설적인 해답을 도출해 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일본의 유신지사, 태국의 라마 5세, 에티오피아의 메넬리크 2세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은 근대적 과도기에서 나라를 이끌 책임을 맡은 전통적 지배층[45]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고종과 달리 세계사적 흐름에 부합하는 시대적 과제를 이뤄냈고, 자신들의 나라를 누군가의 발 아래 종속되는 처지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
일본의 유신지사들이야, 기본적으로 막부라는 주류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2등 내지는 3등 권력인데다,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국가 원수인 천황의 실질적 권한이 미약했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패기있고 과단성 있는 개혁정책을 발빠르게 이뤄낼 수 있었다. 이는 전통적 군주로서의 가치관에서 기어코 벗어나지 못해 그 자신조차 썩 내키지 않아 했음에도 울며겨자먹기로 개혁을 추진했던 고종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태국의 라마 5세의 케이스를 보면 고종이 더 더욱 할말이 없어진다. 똑같이 전근대에 태어나 전통교육을 충실히 받고 자랐음에도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정책에 대한 이해도와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혜안이 고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준수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고종이 개혁을 빙자하여 전제군주식 교통정리를 하는 동안, 라마 5세는 계급 문제·봉건제도 하의 적폐 등 단기간에 전근대적 요소를 청산하는 진정한 의미의 개혁에 성공했다.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겁을 양껏 집어먹고 국제적으로 고립된 러시아와 영미로 대표되는 선진 서구열강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일본을 두고 답없는 친러 몰빵 외교를 시전할 동안[46] 라마 5세는 이미 태국이 완충지대로서 갖는 외교 전략상의 가치를 파악, 궁여지책이 아닌 장기적 안목에서 도출된 합리적 외교 플랜이 마련된 상태였다. 태국이 식민지화를 면하게 된 것에 운적 요소가 매우 큰 것도 사실이나, 군주 본인의 능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으며, 조선 또한 역사상 한결같이 대놓고 전략상 요충지였다는 점에서, 태국의 그것에 비해 불운하다고 볼 수도 없었다. 고종은 개혁 정책에 대한 이해, 국제정세에 대한 혜안 그리고 애민의식, 모든 면에서 라마 5세의 아래였다.
에티오피아의 메넬리크 2세 역시 고종과 비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개혁 정책, 특히 외교와 군사분야에서 매우 두드러진 성과를 보여, 열강도 아니면서 국제연맹의 창설국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고, 단기간에 괄목할 수준의 역량을 가진 근대군을 키워내 서구 열강 중 하나인 이탈리아의 침략을 저지하는 먼치킨급 업적을 달성했다! 이때 '근대군 그게 뭐에요, 먹는 건가요?' 수준의 고종은 열심히 밀덕질하면서 재정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있었다. 광무개혁으로 키워낸 병력이 고작 3만인데 이 3만을 유지하는 데 재정의 40%나 쓰였다. 반면 일본은 육군만 12만이었다.[47][48]
3.1.2 반론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일본, 태국, 에티오피아의 사례가 세계사에서도 매우 예외적이고 천운을 타고 난 사례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몰라서 침략 당하고 주권을 잃은 게 아니다. 그에 걸맞는 시대적 행운을 타고나지 못 한 것뿐이다.
당장 일본의 경우만 봐도 흑선내항과 메이지 유신 사이 시기에 미국의 국내사정이 개판이었기에 망정이지 재수 없었으면 비슷한 역사를 걸을 뻔했다. 게다가 일본은 인구, 경제적으로는 꽤 큰 나라였다. 또 메이지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조선과 재정상황이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5% 실제로는 관련 비용 부담이나 지방관 수탈을 포함해 10%이상 정도, 일본은 25~30%[49]가 기본이었다. 게다가 영토와 인구는 거의 2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50] 그리고 일본은 조선과 달리 서구와의 교역을 한 경험이 풍부했던 나라이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개항한 역사가 얼마 되지도 않는 조선이 개항해서 일본처럼 성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조선보다 먼저 개항했던 다른 나라들도 식민지가 되어가는 판국에?
게다가 조선은 개항 이후에도 임오군란 이후 외세가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것에 눈치를 보아야 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외세의 개입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일본과 비교하면 조선은 더더욱 불리한 위치였고, 개혁하라고 키운 개화파는 스폰서인 고종을 뒤통수치고 외세나 대원군과 손 잡고 일 벌리는 처지였다. 무엇보다 메이지 덴노도 아니고, 유신지사가 고종과 비교대상이 되는 것은 도대체가...
태국의 경우에도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내정개혁도 내정개혁이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의 완충지대라는 지리적 문제가 더 큰 이유였고, 추가적으로 태국은 주권 유지하려고 영토 일부까지 떼어 줬다.(그렇게 떼준 영토 넓이는 한반도보다도 넓었다) 고종이 주권 유지하려고 영토를 떼 준다는 게 당시 상황에서 가능한 일인가?[51]
고종이 제주도나 거제도, 울릉도, 경상도, 부산 등 조선 영토들을 일본에게 떼어주는 시나리오와 태국이 라오스/캄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는 건 일치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소리.
하지만 구한말 당시 조선이 제주도나 거제도, 울릉도 같은 섬 지역 영토나 혹은 부산이나 울산 등 경상도 항구 도시 일부를 떼어 일본에게 할양했다 해도(조차지 혹은 정식영토) 일본이 일부 조선 땅을 차지하는 선에서 그치고 조선을 주권국으로 내버려뒀을지는 의문이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조선 영토 전역을 병탄하지 않고서는 동아시아에서의 세력을 확장,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 차라리 러시아에게 부동항을 내준다면 의미가 있을 수는 있겠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따져도 영국과 프랑스의 동남아 식민지와 한반도의 거리는 너무 멀다.
마찬가지로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일대가 이미 유럽 국가들의 안마당이나 다름 없었을 정도로 입김이 센데 주변 지역이 전부 유럽 식민지들이라 이곳을 함부로 침범할 경우 본토에도 자칫 외교적 갈등이 퍼질까봐 쳐들아가지 않은 것이 더 크다. 아프리카는 1880년대부터 영국, 프랑스가 나눠먹기 시작했고, 여기에 독일과 이탈리아, 벨기에, 포르투갈이 끼어서 난장판이었다. 이것을 아프리카 분할(Scramble for Africa)이라고 부른다. 특히 이 당시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아프리카를 나눠먹고 있었고, 이 와중에 벌어진 것이 파쇼다 사건이었다. 이 당시 에티오피아는 내전 중이었고, 영국이 에티오피아는 쓸모없는 땅이라고 점령하지 않았으며, 프랑스는 오히려 에티오피아를 지원해서 이탈리아가 아프리카에 진출하려는 것을 막는 등 엄청난 운이 따랐다.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 살아남은 곳이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밖에 없는데, 양국은 모두 프랑스와 영국이 완충지대로 남겨놓은 땅이었고, 그나마도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가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통해서 점령해버렸다. 무엇보다 아두와 전투 당시 에티오피아는 내전으로 단련된 군대 10만[52]으로 이탈리아 식민지군 2만을 상대했고, 당시 에티오피아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았으며, 고원지대라는 지형적 이점을 살렸다.
게다가 같은 지리적 요충지라도, 에티오피아와 태국은 열강들이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완충지대를 설정한 곳인 반면, 조선은 주변국 모두가 정면 충돌을 불사해서라도 자국 영향권으로 편입시키려 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애시당초 태국과 에티오피아는 저 멀리 떨어진 유럽 열강들이 이해당사자인 반면, 조선은 바로 이웃한 일본, 청, 러시아가 이해당사자였고, 자국 영향권에 넣지 않으면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는 점[53]에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당시 조선은 이미 개항 이후 내정간섭과 청, 러시아, 일본의 세력균형 하에서 아슬아슬하게 독립을 유지하던 상황이었고, 서구 열강은 만주와 부동항에 관심을 가진 러시아를 제외하면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일본을 용병으로 내세우는 쪽을 택했던 상황이었다. 이러니 일본, 태국, 에티오피아와는 상황 자체가 다르고, 심지어 식민지가 된 나라들 중에는 조선보다도 더 기회가 있었는데도 열강에게 삥 뜯긴 사례도 많다.
그리고 조선은 이미 쇄국하고 있던 대원군 시절이면 모를까, 강화도 조약 이후로는 임오군란에서 청나라의 간섭으로 정권이 다시 교체되는 등 내정에서도 외국의 간섭이 심해지고 있었다. 개화 과정에서 내정 간섭이 그리 심하지 않았던 일본도 개항 이후 유신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이후 입헌이 마무리 된 시기까지 또 10년이 넘게 걸렸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내전도 몇 번 겪어야만 했다. 내정에서 자유로웠던 일본도 이리 개화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미 내정에서 자율성이 크게 제약된 조선 조정이 톈진 조약 이후부터 동학농민운동 이전까지 10여 년간 일본 같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까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조선의 개혁을 주장한 급진개화파들은 자신들에게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반대파나 온건파들에게 칼을 들이대거나 상대의 요구도 무시하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다. 그러니 아무리 고종이나 지도층이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힘든 처사였다.
그리고 저 시절은 강대국과 약소국이 국력이 큰 차이가 나던 시기로 크기에 비해 나름 국력이 강한 국가들도 내부문제나 강대국들간의 외교 문제에 따라서는 아차 하는 순간 나라 하나가 사라지는 살벌한 시대였다. 조선의 국력이 신장되었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국력차와 개항기간의 차이에서 오는 외교적, 기술적 차이의 역량은 쉽게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 조선 정계가 내정문제에 외세 끌어들이는 걸 심각하지 않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만큼 오히려 더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장에 독립협회도 러시아의 이권개입에 대해서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그 이외 열강의 이권개입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4 개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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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조선 사람들이 기피하였던 사진 찍기를 거리낌 없이 즐겼다. 초기의 사진기의 특성인 무지막지한 대기시간도 조금의 불평 없이 잘 넘어갔다고 한다[54]
또 낮에는 일을 하지않고, 저녁 때부터 일을 해서 밤을 새, 아침이 되서야 잠이 드는 올빼미족이었다고 한다.
머리는 명석했던지, 당시 선교사나 외교 사절들은 그의 교양이나 지식에 감탄했다는 기록이 있다.(키는 작지만 너그러운 얼굴에 상냥하고 이야기가 잘 통했다 한다. 반면에 뒤에 자주 서있던 순종은 키는 크지만 어리버리하게 생겼다고 좀 까고 있다.) 직접 상대국인 일본의 평에서는 면전에서는 유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반항을 계속한 인물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많다.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고종을 찾아가 "한 건 하셨더군요, 폐하. 그런데 앞으로 대일본 제국에게 맞서려면 좀 더 공공연하게 하시는 게 어떨까요?"라고 조롱하였다. 실제로 고종의 대일본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단지 그것은 개인적일 뿐, 이미 망해가는 나라를 붙잡기에는 그의 역량도, 뒤를 받쳐줄 만한 힘도 너무 부족했다.[55] 그리고 그 결과는 조선의 멸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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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여자가 고종이 총애한 귀비 엄씨. 저 귀비 엄씨가 훗날 진명여자고등학교,[56] 숙명여자중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57] 숙명여자대학교의 창립자다. 왼쪽의 제복을 입고 있는 소년은 귀비 엄씨 소생 왕자인 영친왕.
야사인 매천야록에는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5일 만에 엄귀비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물론 야사이니 신빙성은 떨어진다.[58] [59]
그 외에도 명성황후 민씨의 사치가 심한 것을 알았을 텐데도 정작 이를 통제하려 한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커피니 양식이니 자동차니 하는 것에 취미를 붙여 돈을 썼다고도 한다.
게다가 선교사들이나 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점이 있으니,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는 인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을사조약을 체결할 때라든가 일본군이 경복궁에 난입할 때라든가 강하게 나서야 할 시점에 초반부에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면서 저항하다가도 사태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하면 두손두발 다 들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고종이 유일하게 끝까지 격렬하게 저항한 건 퇴위당할 때뿐이었다.
자동차에도 취미가 있었는데, 고종은 캐딜락을 타고 다녔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일제강점기 때 손병희가 캐딜락을 구입했는데, 자신의 차가 고종의 캐딜락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임금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탈 수는 없다면서 고종과 캐딜락을 서로 바꾸어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은 나중에 순종황제가 탔으며 순종황제가 타던 캐딜락은 순정효황후가 탔다. 이들 어차는 각각 등록문화재 318, 319호로 등록돼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95년 문화재관리국은 80여 년간 방치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던 어차를 꺼내 ‘복원’하려 했다. 당시 영국 재규어 다임러에서 고종 어차를 복원하기 위해 전문가가 파견됐다. 고종 어차를 본 전문가는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일부 녹만 슬었을 뿐 차의 상태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기 때문이다. 부품 손상도 없었다. 당시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전영선 소장은 “복원이라고 하기보다 보수라는 개념으로 보는 게 맞는다”고 말했다.
재규어 다임러에서 파견된 전문가는 “같은 종류의 차가 영국의 한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면서 “전 세계에 딱 1대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여기 또 있다니 놀랐다”며 값은 얼마든지 줄 테니 본인들이 보수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에서 보수해 창덕궁을 거쳐 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어린 시절부터 글씨나 문장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14세 때 의정부 청사가 중건되면 편액을 자신이 직접 쓰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고 고종 7년에 오례편고가 완성되자 자신이 직접 서문을 쓰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고종의 어필은 많이 남아 있다. 아버지가 추사 김정희에게 글씨와 그림을 배운 예술가이기도 했었으니 그런 아버지에게 글씨를 배운 자신감도 있었던 모양.
커피와 함께 냉면, 군밤 등을 즐겼다고 한다. 특히 군밤은 후술할 떡밥과도 관련 될 정도로 매우 즐겼다고 한다.
한국에서 에스페란토를 공부한 최초의 군주로 알려져 있다. 궁중의사의 권유로 간단한 에스페란토를 배웠다고 한다.
4.1 고종과 군밤떡밥
특이하게도 고종은 군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버전에서는 군밤이 호떡으로 변한 버전도 있다.
-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왕위에 오르자마자 군밤장수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죄목은 '공짜로 군밤을 주지 않은 것' 물론 이 군밤장수는 신하들의 반대로 사형은 면했다. 매천야록에 실린 야담(野談)이므로 승정원일기의 기록과는 많이 다르다. 바로 아래 문단 참조.#[60] 사실 고종의 서장자인 완친왕(완화군)이 군밤을 좋아했다는 일화가 있기 때문에 아들의 이야기가 잘못 와전되어서 나온 카더라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부전자전이든지현재로서는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호해서 사건의 진실여부를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고종에게 군밤 관련 이미지는 계속 따라다니게 될 것으로 보인다.조선의 빵 사건??
- 위에서 나온 군밤이야기에서 일부 진실부분이 있다면 실제로 고종이 즉위 초기부터 최소 즉위 중반기까지는 밤을 좋아했던 건 사실로 여겨진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다른 왕 시절 기록보다 유독 고종시절의 기록에 밤에 대한 진상기록이 많았기 때문이다.[61]
다만 나중엔 커피로 갈아탔다이 진상기록에서 밤의 진상이 늦는 경우 유독 관찰사[62]들이 대죄를 자주 청했는데 매번 봐준 걸 보면 꽤 인자한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생각해 보면 저런 군밤장수 사형 요구 루머가 공공연히 돌아다닐 정도인데, 고작 밤 따위로 죄를 족족 주었으면 민심이 엄청나게 흉흉해 졌을 것이고 고종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인 완친왕이 군밤을 좋아했다는 일화가 있는 걸 보면 완친왕의 이야기가 고종의 이야기로 잘못 알려지고 왜곡된 것일지도.
- 경술국치 이후에는 순종이 창덕궁 후원에서 주운 밤[63]을 손수 구워 다가 고종에게 자주 바쳤으며, 고종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순종이 구워 온 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고종이 군밤을 좋아했던 건 어느 정도 사실인 듯 싶다.
레알 군밤 왕
4.2 미국인 황후 에밀리 브라운 떡밥
해당 항목으로.
4.3 숨겨진 딸 이문용 떡밥
해당 항목으로.
5 가족관계
대한제국/가족관계 문서 참조.
6 어진과 사진
근대의 황제답게 어진과 사진이 많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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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시기 미상, 황제 일가 사진 | 1918년 영친왕 귀국을 기념해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사진 |
왼쪽의 황제 일가 사진은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황제, 덕혜옹주, 영친왕,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의친왕의 정실 덕인당 김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단, 이 사진은 후대에 조작 및 합성되었다는 의견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촬영 시기가 불확실한데다가 인물의 비율과 광원의 위치가 어색해 사실상 조작 및 합성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기사 참고[64]) 오른쪽의 황제 일가 사진은 1918년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기념해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것으로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덕혜옹주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황실 가족이 단독 사진이 아니라 여러 황족과 함께 사진을 찍을 때는 오른쪽 사진과 같이 서열이 제일 높은 사람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유사한 서열을 갖는 사람을 배치하며 각각의 인물들 또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른쪽 사진과 같은 서열 배치 및 거리 차이를 감안한다면 왼쪽 사진은 원래 의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의친왕비 김씨만 찍힌 사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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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 차림의 고종 | 군복 차림의 고종 | 정장 차림의 고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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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룡포를 입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왼쪽 흑백 사진을 컬러화한 것이 오른쪽 사진이다[65].
석지 채용신의 고종 어진 | 작자 미상의 원유관 강사포본 고종 어진[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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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승하한 해의 고종. 덕수궁
파일:HBKZdp9.jpg
최근 한국인이 찍은 가장 오래된 고종황제 초상 사진이 발견돼 화제다. 미국 뉴어크 박물관에 소장된 사진으로 근대 서화가이자 사진작가인 해강 김규진이 촬영했으며, 촬영한 해는 1905년이고 촬영장소는 덕수궁 중명전이다. 고종이 외교사절로 방문한 미국인 사업가 에드워드 해리먼에게 선물로 준 것으로 보인다.국외소재문화제재단 보도자료
7 현대 매체에서의 고종
조선이 근대화되는 시점의 군주였고 재위기간도 길었기 때문에 사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왕 중 한 명. 그런데 정작 고종 시대를 다룬 사극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나 부인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사극들이 많아서 고종 본인은 주역에서 한 발짝 벗어난 모습으로 등장하곤 한다. 자신의 치세가 사극에서 자주 다뤄지나 정작 본인이 사극의 주역이 된 적은 없다는 점에서는 사극 속 취급은 어쩐지 조선 중종과 비슷하다.
고종은 즉위 전에 익성군(翼成君)에 봉해지긴 했으나 아주 잠깐 동안 봉해졌다가 바로 즉위하였고, 따라서 특별한 벼슬이나 군호를 받지 못 했기 때문에 즉위 전 어린 시절의 고종이 등장하는 매체에서는 대부분 아명인 이명복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사극에서는 주로 아버지와 부인 등쌀에 기를 못 펴는 우유부단한 군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마냥 무능하다기보다는 동정적인 시선으로 묘사되곤 한다. 실제 고종에 대한 평가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사극 속에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 했는데 시대가 따라주지 않았다(운이 없었다)'는 식의 평가에 맞춰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 명성황후가 대표적인 예.
대체역사소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왕인데 이런 소설들에서도 아들 순종처럼 30%는 훌륭한 군주로 나머지 70%는 개 찌질이 왕고집 무능한 군주로 묘사되고 있다.
영화 한반도에서는 김상중이 분했다. 일본의 직접적인 침략을 대비해서 가짜 국새를 만들어놓고, 진짜 국새는 내관에게 맡겨서 봉인시켰다.
드라마 닥터 진에서는 아버지인 이하응과 함께 아명인 이명복으로 등장한다. 물론 본격적인 군왕의 모습은 아니고, 어린 시절의 모습만이 그려진다.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왕도의 개에서는 위안스카이의 위협에 벌벌 떨면서 아무 것도 못 하는 무능하고 한심한 인물로 나온다.[67]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나름대로 머리도 좋았고 재위기간이 길어지면서 노회한 면모도 보였으며, 개화에 대한 생각은 있었던 인물로 묘사하면서도 깔 부분은 제대로 깐다. 가령 전제적인 전제권(황제권) 강화에만 집착하는 면모도 묘사하고 있고 민씨 일족의 전횡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을 비판했으며, 무엇보다 우유부단하고 황제에서 퇴위되기 직전 말고는 전혀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군주로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권 말미에는 망국 이후의 고종의 후일담을 짤막하게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고종에 대한 총평을 볼 수 있다.
2016년에 개봉할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백윤식이 연기했고, 늦둥이 고명딸인 덕혜를 아끼는 딸바보 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감언이설을 늘어놓는 친일파 이완용, 한택수에게 일갈하는 모습이 나온다.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일제의 음모에 걸려 독이 든 수정과를 먹고 죽는다.[68]
8 고종이 등장한 대중매체
영화
드라마
기타
- ↑ 꽤 심상하게 받아들이는 묘호지만 이왕직에서 올린 묘호 망단자 고종(高宗), 신종(神宗), 경종(敬宗) 중에서 순종이 수망(首望)인 고종을 사왕(嗣王)의 자격으로 승인한 것이다.
- ↑ 약칭 고종태황제. 광무제가 아니다. 남양주시 주민이라면 홍유릉에서 간혹가다 고종태황제라는 명칭을 발견할 수 있는데, 홍유릉 권역에 고종의 후손인 의친왕, 덕혜옹주 등의 묘가 있기에 추모제향 때 현수막을 걸기 때문이다.
- ↑ 조선 왕조가 성립된 1392년을 원년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 사용은 1894년(개국 503년)과 1895년(개국 504년)뿐이었다.
- ↑ 1896년(건양 1년) 1월 1일부터 1897년(건양 2년) 8월 16일까지 사용.
- ↑ 1897년(광무 1년) 8월 17일부터 1907년(광무 11년) 8월 11일까지 사용.
- ↑ 아명. 어릴 때 이름. 자식의 아명을 천하게 지어 불러 액운을 막고 장수하길 바라는 전통으로 비롯한다.
- ↑ 참조.
- ↑ 순종은 대한제국의 황제였지 조선의 국왕은 아니었다.
- ↑ 아들을 잃은 슬픔
- ↑ 아내를 잃은 슬픔
- ↑ 나라를 잃은 슬픔
- ↑ 실정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동시대 니콜라이 2세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험난한 꼴을 당한 군주였다. 선통제와는 막상막하?
- ↑ 일제강점기 때는 고위 귀족 대우는 받으며 구왕족들은 충분히 잘 먹고 잘 살았다. 삶이 안습해진 건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대 이후. 그리고 그런 왕족들을 싫어한 것이 왕족인 이승만이라는 것도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어느 정도 자업자득이기는 하다.
- ↑ 그의 한계를 여실히 보이는 것이 바로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 때에 처신이다. 임오군란의 사태를 볼 때 자기 잘못으로 보지 않았고,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려고 외국 개입을 일으키는 오판을 했다는 점에서 사태를 분명히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 ↑ 명목가치는 이름 그대로 상평통보의 100배. 실질가치는 6배 정도.
- ↑ 당백전이 발행되고 조선의 물가는 엄청나게 폭등했다. 단적으로 쌀값은 당백전 유통 6개월 만에 6배로 폭등한다.
- ↑ 청전은 상평통보의 1/3의 가치밖에 없는 악화였다.
- ↑ 근데 이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에 13개월이나 급료도 못 받았는데 규율을 지키는 사람이 어디 있나...하지만 그런 사태를 만든 장본인이 본인이라는 것은 망각한 듯 하다.
- ↑ 서양 선교사 겸 외교관, 의사인 호레이스 알렌의 도움으로 죽진 않았다.
- ↑ 이때 죽은 이들을 온건 개혁파라고 부르는 견해가 있지만 갑신정변 때 숙청된 이들은 민씨, 조씨 척족세력들로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했던 이들이었다. 진짜 온건 개화파라 할 수 있는 김홍집, 김윤식 등은 전혀 해를 입지 않았다. 더불어 고종의 광무개혁때 인재가 없었던건 고종 스스로가 아관파천과 독립협회 탄압을 자행하며 많은 개화파 인사들을 죽이거나 몰아냈기 때문이지 갑신정변과는 무관하다.
- ↑ 갑신정변 항목에도 적혀 있지만, 당시에 죽은 이들은 우정국 축하연에 참석하던 이들이었고, 민씨와 조씨이건 그 외의 관료건 개화에 관심없는 인물이 없다. 온건개화파라서 안 죽은 게 아니라, 그때 안 죽고 살았으니까 이후에 온건개화파로 활약할 수 있는 거다.
- ↑ 일본공사관 신축배상 및 일본군 주둔.
- ↑ 양국군 철수 및 동시 진입 보장.
- ↑ 이 과정에서 대원군에게는 고종 밀서 위조 의혹이 있다. 동학세력은 고종의 밀서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대원군의 후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다 뻥이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이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해서 동학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고종은 경복궁 사건의 영향으로 일본군의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밀서를 보낼 상황이 아니었고 동학 내에서도 일본에게 왕이 위협받고 있는데 2차 봉기를 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했다고 본다면 이 모든 의문들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 ↑ 이때 독일 황제는 병신 황제(...)로 유명한 제1차 세계대전의 빌헬름 2세였다.
- ↑ 훈련대는 일본군이 훈련하는 부대고 시위대는 미군이 훈련하는 부대다. 일본을 경계하던 고종이 이걸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 ↑ 여담으로 일본은 이 사건을 핑계 삼아 미우라 고로를 풀어준다. 왜냐고? 서양이 조선에 간섭하는데 우리가 간섭 못할게 어디 있냐? 란 논리로(...)
- ↑ 실제로 베베르는 이후 열심히 친조선정책을 펼쳤는데, 너무 친조선적으로 활동한다라는 이유로 2번이나 조선공사 직에서 파면될 상황이 온다. 처음은 주일공사가 우연히 죽으면서 유임되는데, 이때 아관파천이 터진다. 고종이 베베르를 유임시켜 달라고 러시아 외무부에 편지를 보낸 것까지 남아있다. 이후에도 고종을 위한 활동을 많이 했으니, 매수는 대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 ↑ 워낙에 모순적인 부분도 많고 흔히 교과서 등에서는 쉽게 언급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아서 내막이 잘 알려지지 않은 단체이다.
- ↑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몇 개월 전 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고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권을 갖는 데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1905년 8월 영국과 일본은 제2차 영일동맹으로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갖는 이익을 보장하고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옹호하기로 합의하였다. 즉,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겠다는 내용에 대해 미국과 영국이 이미 승인했던 것.
- ↑ 조선왕 독살설 참고.
- ↑ 또는 홍차라는 설도 있다. 커피라는 설도 또한 있다. 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것에서 나온 듯.
- ↑ 실제로 신한혁명당은 망명 정부 계획을 수립하고 고종을 모시고 해외로 나가려 했다. 그 외에 고종의 측근들인 이회영, 이시영 들은 이미 망명하여 고종과 연락하면서 망명 계획을 세웠음을 알 수 있는 자료 또한 꽤나 많이 발견된다. 이미 고종 망명 시도 이전에도 이상설, 전협 등에 의해서 의친왕 망명 시도가 있었으나, 이 역시 실패한다.
- ↑ 비소중독의 경우는 세포단위부터 사망하기 때문에 부패가 이른 편이다.
- ↑ 일제강점기 자작 작위와 은사금 3만원을 받았던 인물로 고종의 5촌 조카이기도 하다. 친조카인 영선군은 정적이었던 것 등, 고종은 일가와 사이가 상당히 안 좋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 ↑ 한 가지 재미있는 건 강화도에 있는 고려 고종의 능호도 홍릉으로 한자까지 똑같다.
- ↑ 결과적으로 이 사건이 청일전쟁으로 발전해 위태위태한 동북아의 균형이 무너졌다.
- ↑ 보급을 원활하게 하려면 무기의 규격과 탄약의 종류가 통일되어야 하는데 독일제 쪼금, 프랑스제 쪼금, 러시아제 쪼금, 일본제 쪼금 이런 식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대한제국군이 해산될 때까지 병사들이 서로 사용하는 총이 달라 탄약 보급과 무기수선에 어려움을 겪었다.
- ↑ 매천야록에 따르면 관찰사의 경우 10만~20만 냥, 일등 수령이면 최소 5만 냥 선으로 벼슬의 구체적인 값까지 제시되어 있었다.
- ↑ 예상하지 못했다면 이것도 큰 문제이고, 예상했다 하더라도 일본군에 대해 완전히 오판한 셈이 된다.
- ↑ 실제로 고종의 장례는 3월 3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장례를 치루는 당일이 아니었던 이유는 장례를 치르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라는 이유였다. 여담으로 3월 2일이 제외된 것은 일요일이어서. 농담 같지만 기독교 인사들의 반대이유였다.
- ↑ 여기에는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와 관련하여 자신의 배후로 지목한 대한의군 총대장 김두성(金斗星)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태진은 김두성을 고종 황제 자신으로 지목했지만 신운용은 이를 반박하고 김두성은 가공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 ↑ 출처: 신운용 「한국의 안중근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둘)」 《남북문화예술연구》제11호, 2012)
- ↑ 앞서도 언급했지만 고종은 러시아 영사관과 궁을 오갔기 때문에 얼마든지 개연성은 존재한다. 오히려 문제는 의외로 많이 문제점이 제기되는 백범일지 자체의 신뢰도에 있다.
- ↑ 정확히 말하자면 유신지사의 경우 명분만 천황 옹위세력이지, 알맹이는 개혁세력이었다.
- ↑ 근데 답없기는 했어도 어차피 일본에게 먹힐 거, 친러로 몰빵하면서 그나마 조금은 버티기는 했다.
- ↑ 청일전쟁 직전의 수치. 러일전쟁 때 10만여 명이 증원된다. 러일전쟁과 일본군 항목 참조.
- ↑ 일본군가 보병의 본령에서는 '군기를 지키는 군인들은 그 숫자 모두 합쳐 20만여' 운운하는 구절이 있다.
- ↑ 공식적으로 세율은 4~50%, 경우에 따라 70%씩이나 되는 경우도 있었으니 과세기준 선정시 그만큼 깎아줬다.
- ↑ 당장 도쿄 수도권 전체 인구가 대한민국 인구 전체와 맞먹는다. 더군다나 에도시대의 경제력과 인구, 농업생산력은 조선보다 크게 앞서있었다.
- ↑ 다만 태국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프랑스에 넘겨준 것과 당시 한국의 상황을 비교하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다. 일단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시암(태국)의 속국이었지 정식으로 편입된 영토가 아니었고, 이 3국은 같은 민족 의식도 딱히 없었다. 심지어 캄보디아의 경우 태국이나 프랑스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 ↑ 이중 8만은 소총으로 무장했고, 2만은 창과 방패로 무장했다.
- ↑ 청과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도 부동항과 만주를 지키려면 조선이 필요했다.
- ↑ 많은 조선 사람들은 인물사진의 주인공은 1년 내에 죽고 풍경사진의 나무는 얼마 안 가 시들고 찍힌 성벽은 얼마 안 가 허물어진다는 미신을 믿었기 때문에 사진기만 들이댔다 하면 두려워하며 도망가곤 했다. 물론 1800년대 후반 이야기이긴 한데 조선 말고도 당시 대다수 아시아나 아프리카 멀리 중남미, 심지어 유럽 일부에서도 흔했던 일이다.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흡수한다는 미신은 워낙에 흔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개방되었다던 일본에서도 사진 찍다가 불길하다며 돌팔매질당한 이들의 기록이 20세기 초반까지도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이런 인식을 가진 이들이 세계 곳곳에 있으니 무턱대고 사진 찍지 말라는 여행가들 충고가 많다.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다고….
- ↑ 하지만, 그 당시 조선의 상황이라든지, 제국주의 국가들의 역량, 당시 사대부들의 태도 등을 고려해 봤을 때 그 어떤 왕일지라도 조선의 쇠락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망하지 않았다 해도 태국처럼 막후에서 지배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 당대 서구 열강 지도자들의 성향상 되든 안 되든 무장투쟁을 벌이는 게 외교전에서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 ↑ 서울시 양천구 목동 소재. 진명여중도 있었지만 폐교되었다.
- ↑ 서울시 강남구 도곡동 소재.
- ↑ 그리고 그 당시 왕비와 함께 고위급 상궁들이 죽어 내명부를 조율할 여인이 없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세자빈 민씨(순명효황후)가 있긴 했으나 을미사변의 충격과 시어머니 명성황후 민씨의 갈굼으로 인해 세력이 없다시피 했고,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명성황후의 투기로 다른 후궁도 없던 상황이었다. 또한 그때까지만 해도 명성황후의 죽음이 공인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 ↑ 한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저자 박시백 등은 자신의 저서에서 임오군란 때처럼 고종이 명성황후가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 맹꽁이 서당에서 나온 고종과 군밤장수 이야기의 출처가 여기다. 고종이 상당히 찌질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만 당시 고종 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일부러 기록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세도정치기를 지나면서 이쪽도 기록의 왜곡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가던 시기였다. 게다가 애시당초 승정원일기는 시행된 왕명을 기록한 사료이기 때문에 시행되지 않은 왕명인 군밤장수 어명 기록이 당연히 승정원일기에 기록될 리가 없다. 단, 고종 실록에 대해서는 좀 의문인 게, 고종 실록은 고종이 죽고 난 다음에 일본총독부가 실질적으로 작성했다. 이전에 고종 실록을 조선왕조실록으로 이어놨었는데, 고종 실록과 순종실록은 조선왕조실록에 포함되지 않는다.
- ↑ 정확히는 황율(黃栗).
- ↑ 대부분 경상도 관찰사
- ↑ 창덕궁 후원의 언덕을 동산(東山)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밤나무가 많아서 가을에는 산책 중에 길에 떨어진 밤을 주울 수 있다고 한다.
- ↑ 딱 봐도 의친왕과 영친왕의 모습은 빛과 그림자가 주변과 괴리가 큰 모습이다. 더불어 덕혜옹주의 출생 시기 및 영친왕의 일시 귀국 시점 등 시기적으로도 저 사진의 모습이 나타날 수 없다.
- ↑ 이전 왕들의 어진들에 비해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의 복장 간소화 조치로 인해 곤룡포의 용보와 머리에 쓰는 익선관의 크기까지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 ↑ 전통적인 어진과 달리 인물의 배경에 휘장을 드리운 것 때문에 일본의 화풍이 가미된 어진으로 추정된다.
- ↑ 이 만화 자체는 제국주의 비판 만화다. 오해하지 말자. 오히려 명성황후가 여기선 고종 대신 조선을 움직이는 날카로운 인물로 나온다.
- ↑ 상해임시정부는 3.1운동의 결과로 세워지기 때문에 고종 생전에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존재할 리가 없다. 고종이 망명시도를 한 흔적이 보이고, 망명을 준비해서 상해에 있는 독일 은행에 비자금을 마련했던 것은 호머 헐버트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그 대상이 상해임시정부가 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