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여름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에서 시작한 사업으로, 각급 학교에 교육용 PC를 보급하기 위한 계획이다.
참고로 이 사업의 예산은 공중전화의 낙전 수입으로 충당되었다. 본격 손 안대고 코풀기[1] 때문에 당시 공중전화에 이를 알리는 스티커가 붙어 있기도 하였다.
기종으로는 이미 상당수 보급되었던 8비트 PC와, 성능이 좋은 16비트 컴퓨터(IBM PC 호환기종)[2] 중 어느 것을 채택할 것인지에 대해 상당한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결국 16비트 PC를 교육용 PC로 지정했다.
이전까지 학교에 보급된 대부분의 PC는 8비트 MSX와 SPC-1000였으며[3] 교육용 소프트웨어도 여럿 개발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미래를 내다본다지만 파격적인 결정이라 할 수도 있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PC의 보급률은 매우 저조했고[4] 기업이나 기관에서 8비트 PC를 업무용으로 쓰기엔 문제가 있어 PC가 없거나 아니면 있으면 16비트이거나 한 상황이었다.[5] 무엇보다 8비트 PC는 그 구조상 한글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6] [7]
아키텍쳐와 OS가 같아도 제조사마다 호환성도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16비트 IBM PC 호환기종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특정 업체의 제품(아키텍쳐가 아니다)을 밀어줘야 하는 부담[8]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당시 PC 업계에서 오히려 16비트 IBM 호환기종이 타당하다고 의견을 개진했으니 당연할 결과였다.
가정용 전기의 승압(110V에서 220V로) 건과 마찬가지로 보급률이 높지 않은만큼 기회비용도 작은 이유로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사례.
상당한 파급효과가 있어서 1990년대 국내에 보급된 퍼스널 컴퓨터는 1989년도에 비해 55.7%가 증가한 68만5천대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업 시행의 여파로 그때까지 잔존하고 있던 8비트 PC 시장은 순식간에 멸망해버렸다. 특히 애플 II 호환기종 시장이 그러한데, 이것을 만들던 세운상가(및 용산상가) 소규모 업체들이 거의 모두 16비트 IBM PC 호환기종 생산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9] 문제는 그 여파로 기존 애플 호환기 대상 컴퓨터 잡지들이나 소프트웨어 판매점이 모두 소멸되는 바람에 기존 애플 II 사용자들을 멘붕하게 만들었다는 것. 특히나 당시 애플 호환기종이 거의 모두 II+였는데 1988년 독자기술로 어렵게 애플 IIe 호환기종을 개발(?)했던 업체[10]는 1년만에 완전히 새 되었다.
그나마 8비트 중에서 MSX계열은 사정이 좀 나은데 애당초 마이크로소프트가 8비트 MSX를 가정용으로, 16비트 IBM 호환기종을 업무용 컨셉으로 잡았기 때문에 VGA카드[11]가 대중화되기 전까지는 그래픽 기능이 형편없는 상황이였고, MSX가 일본에서 주로 생산되다보니 오락실 게임의 MSX판이 제법 있는 관계로 컴퓨터로의 생명은 끊겼으나 게임기로의 생명은 8비트 PC 시장 멸망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본체 생산은 중단되었지만 적어도 기존 유저들은 소프트웨어 수급 등에서 큰 문제는 없었다.
무엇보다 정부 권장 컴퓨터라는 것이 가장 커서, 사업 시행 직후 각급 학교의 컴퓨터반은 8비트를 접고 16비트만 가르치기도 했다. 가격면에서도 대기업 제품[12]이 세운상가제 물품 수준으로 떨어졌다. 단점은 게임하기 안 좋다는 것 정도.하지만 부모님은 좋아하시는 그리고 이 가격은 빠르게 떨어져서, 91-92년 정도가 되면 386컴퓨터 본체(HDD, SVGA, 사운드카드)+모니터+프린터 세트가 120만원 정도로 떨어졌고, 그 다음 해에는 486과 더 나은 비디오카드를 넣은 시스템이 그 값이 되었다. 반면 8비트 기종은 그 즈음 MSX2+ 정도가 나왔지만, 국내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고 본고장인 일본에서도 마이너하게 사라져갔다.[13]
국산게임 1호인 신검의 전설을 개발한 남인환은 당시 애플 II로 잠입 액션 게임 을 개발하다 이 일 때문에 출시를 포기하고 개발중인 게임도 모두 날려버렸다고 한다.
훗날(1999) 컴퓨터 보급 사업으로 국민PC사업이 있다.- ↑ 지금의 안습한 공중전화 사정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당시에는 핸드폰은커녕 삐삐도 대중 보급이 안 되던 때였다.
- ↑ 물론 16비트 PC가 IBM PC 호환기종만 있던 것은 아니지만, 국내에는 다른 기종이 거의 보급되지 않아서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 ↑ 애플 II는 주로 세운상가 기반 중소업체들이 만든 관계로 공공기관
저가대량 입찰을 해야 하는 관계상 학교 컴퓨터실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웠다. 단, 소프트웨어의 풀이 가장 넓었기 때문에 학교 업무처리 관계상 관련 교사가 개인적으로(혹은 학교의 예산지원으로) 1~2대 소량 구입하는 사례는 제법 있었다. - ↑ 거짓말 안 보태고 학교에서 집에 컴퓨터 있는 사람 손 들어 보라고 할 정도였다
- ↑ 지금의 엑셀격인 LOTUS 1-2-3 이 돌아가는 컴퓨터가 IBM PC 호환기종이었다. 8비트용도 멀티플랜, 비지캘크 등 선구적인 제품들이 있었지만 한글 사용이 사실상 불가능한 관계로 널리 보급하기에는 무리였다. 애당초 국내에 한글화되어 정발된 소프트웨어도 아니고.
- ↑ 본격적으로 업무에 이용하기에는 화면 해상도도 낮고 확장성도 떨어졌으며 메모리도 부족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별도의 그래픽카드라던가 한글카드라던가 하는 것이 있긴 했지만 이것들을 장착하면 16비트 IBM PC 호환기종과 사실상 가격차이가 없었다. 왜 8비트 PC로 행정전산망용 워드프로세서가 없었는지 생각해 보자.
소프트웨어로 동작하는 원시적인 워드프로세서는 있었다.그렇기는 해도, 사실 80년대 중반 각급 학교에 8비트 컴퓨터를 도입해 컴퓨터반을 운영하던 당시에는 그걸로 성적 전산처리도 했다. - ↑ 그때까지 8비트 컴퓨터는 한글 가로 40자, 세로 20자를 제대로 표시하지 못했다. 필요한 도트가 1/4에 불과한 알파벳은 가능했는데 그것이 CP/M, 애플기종이 영어권에서 1990년대까지도 업무용으로 사용된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가장 싼 허큘리스카드를 단 PC/XT는
늦ASE라고 표현되긴 해도어떻게든 가능했다. 주변기기도 프린터, 디스크 드라이브까지는 어떻게 나왔지만, 하드디스크, 모뎀 카드에 이르면 희소했다.물론 PC/XT 시절(80년대 후반)에는 16비트도 하드디스크, 모뎀은 희소했다. - ↑ 당장 1983년 교육용 5대 PC로 선정되었던 다섯 개 기종(삼성,금성,효성,삼보,한국상역)의 아키텍쳐가 모두 달랐다.
- ↑ 그게 그럴수밖에 없는게 애플 II나 IBM 호환기종이나 비슷한 사양(RAM,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FDD) 등)으로 제조할 경우 가격차이가 거의 없다. 8비트 기종이 저렴했던 것은 사양이 떨어졌기 때문. 1988년 기준 RAM 128KB의 애플 IIe 복제품이 FDD 1개를 포함하면 40만원대 중반인데 비해 IBM XT 호환기종을 256KB RAM, FDD 1개로 구성하면 50만원대 초반이였다.
CPU성능이 넘사벽인것은 일단 넘어가자.단지 애플 II+를 FDD 없이 구입하는 가격(10만원대 중반)과 일반적으로 많이 팔린 XT 호환기종 가격(70만원대 중반. 640KB RAM에 FDD 2개)을 비교했을 때 8비트가 싸다고 느껴진것 뿐이다. (모든 가격은 모니터제외, 세운상가제) - ↑ 미래교역 딱 한 업체만 제조했다.
물론 대만산 수입부품 - ↑ 우리 나라의 가정용 16비트 컴퓨터 비디오 출력은 대기업에서 한글표시를 위해 변형CGA를 사용한 것 외에는, 흑백 허큘리스카드에서 교육용컴퓨터 사업이 시행되고 얼마 뒤 SVGA로 바로 옮겨갔다.
- ↑ 현대전자, 삼보컴퓨터 등에서 만든 제품. 물론 사업 시행인 1988년도에도 1FDD, 256k 제품은 50만원에 구입 가능했다.
- ↑ 애플 IIgs는 훨씬 이전인 1986년에 나왔다. 물론 미국에서도 큰 반향 없었다. 참고로 MSX2까지는 국내에서 생산했지만 이후 기종은 국내에서 생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