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진천

仇珍川

1 개요

신라 중대 문무왕 시대의 쇠뇌 제작 기술자, 애국자.

최종 관등은 사찬으로 골품진골이거나 최소 6두품이었던 듯.

2 생애

2.1 당나라로 건너간 배경

삼국통일전쟁이 진행되던 당시는 쇠뇌(기계식 활) 기술자는 적국에서라도 스카우트해올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던 시대였다. 예를 들어 고구려는 6세기 말 고구려-수 전쟁을 예감하고 재물을 뿌려 수나라의 노수(弩手, 쇠뇌를 쏘는 군사)를 빼어 오기도 했다.

신라인 구진천이 개발한 쇠뇌는 천 걸음 거리까지 화살이 날아간다고 해서 '천보노(千步弩)'라고 불렸는데, 신당서(新唐書)에는 신라가 관문에 항상 노사(弩士) 수천 명을 주둔시켜 지킨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는 노를 신라를 대표하는 무기로 봤던 것이다. 신라 역시 쇠뇌를 애용해서, 아예 쇠뇌만 다루는 전문부대인 노당(弩幢)을 따로 만들 정도였다.

669년 겨울 당나라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당나라 확제의 칙명이라면서, 노사(弩師) 구진천을 당나라로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신라는 이때까지는 당나라와 싸울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나라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가 구진천을 데려간 것은 장차 신라와 전쟁을 하기 위함이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최종적으로 신라마저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신라 역시 당나라의 계획을 알고 고연무 등 고구려 유민들을 몰래 지원하기 시작했다. 670년 3월 신라가 설오유를 시켜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해 압록강을 건너 당나라를 선제 공격함으로써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진천은 당나라에 머물게 된다

2.2 당나라의 협조를 거부하다

당나라에서 구진천에게 쇠뇌를 만들게 했는데 첫 결과물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아 당고종이 그에게 물었다.

너희 나라에서 만든 쇠뇌는 1천보나 나간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는구나. 어찌된 일이냐?”

구진천이 대답하였다.
“목재가 좋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나무를 가져온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고종신라에 사신을 보내 신라산 목재를 달라고 했다. 곧바로 대나마 복한(福漢)을 보내 나무를 바쳤고, 다시 만들어 쏘아보니, 60보를 나갔다. 이번에도 고종이 그 까닭을 물으니 구진천이 대답하였다.

“저 역시도 그 원인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마도 바다를 건너는 동안 나무에 습기가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고종은 구진천이 일부러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무거운 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하였으나 구진천은 끝끝내 자기의 재주를 다 드러내지 않았다.

이후 구진천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지만 황제의 요구를 거절했고 이후에 딱히 당군이 사거리가 긴 노를 썼다는 기록도 없으며[1] 결국 나당전쟁이 신라의 선제공격으로 일어나서 당나라가 최종적으로 패배했으므로 구진천의 끝도 좋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목숨을 바쳐 적대국에 기술유출을 막은 애국자.
  1. 중국의 경우 기록상에 사거리가 1천보 가는 노에 대한 첫 기록은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인 송나라 시대의 상노(床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