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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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
高句麗-隋 戰爭
Goguryeo–Sui War

1 개요

고구려중국 수(隋) 왕조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 그리고 한국사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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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영양왕때, 수나라문제양제와의 2대에 걸친 긴 싸움으로 각각 598년, 612년, 613년, 614년 등 4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특히 2차 원정은 양국 모두 국가의 모든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한 총력전의 양상을 띤 전쟁이며 살수대첩으로 유명하다. 삼국통일전쟁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2 고구려와 수의 전운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

수나라수문제는 598년, 남북조시대의 혼란을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완수하였다. 중국을 통일시키고 내치를 통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문제는 장성 이북에 있던 돌궐고구려를 장차 중국을 위협할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하였으며 이들을 주시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는 곧 양국간에 신경전으로 번지기 시작해서 고구려와 수, 양국은 서로에게 재차 사신을 보내어 지리지형을 살피고 동태를 파악하는 등 첩보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2.1 평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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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의 평복.[1]

수나라가 내부의 엄청한 힘을 외부로 돌리기 시작한다면 당장 개피를 보는것은 물론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평원왕(平原王) 시절부터 수나라에 계속해서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정보 탐색과 돌아가는 모양새도 어느정도 파악은 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581년부터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는데, 584년까지 비교적 짦은 시기동안 일곱 차례나 되는 조공을 바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던 와중, 마침내 남조의 진이 수나라에 멸망하여, 기어코 수나라가 중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는 소식이 고구려에 전해졌다.

三十二年王聞 陳 亡大懼理兵積穀爲拒守之䇿

32년(590)에 왕이 진 (陳)이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축적하는 것으로 막고 지켜낼 방책을 삼았다.


《삼국사기》권제19 고구려본기 제7 三國史記 卷第十九 髙句麗本紀 第七

수나라의 중국 통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평원왕은 크게 두려워했고, 서둘러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모으면서, 대처 방법을 생각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고구려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평원왕이 이 당시 쇠퇴일로를 걷던 고구려를 안정시키는데 큰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안원왕(安原王) 이래로 점점 쇠퇴하던 중이었다. 심지어 북제쪽 기록으로 양원왕이 북제 사신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았다는 기록까지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런 말이 나돈다는 자체가 어느정도 고구려의 위상이나 파워가 예전만 못하다는 식으로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 날라다니던 시절이면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도 못했을 테니…… 이러한 때 고구려 국왕으로 즉위하며, 스스로 검소한 모습을 보였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무리한 궁궐 수리를 중단하기도 했다.

여하간에 당시 수서(隋書)의 기록을 보면, 수문제 초기에는 고구려 사신들이 자주 왔는데, 수나라가 진나라를 평정한 후에는 고구려가 크게 두려워하며 곡식을 저축하고 방어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점이 당시 수문제에게 꽤나 거슬리게 보였는지, 수문제는 옥새를 찍은 조서인 새서(璽書)를 보내 평원왕을 질책했다.

隋 髙祖 賜王璽書責以雖稱藩附誠節未盡且曰彼之一方雖地狹人少今若黜王不可虚置終湏 更選官屬就彼安撫王若洒心易行率由憲章即是朕之良臣何勞别遣才彦王謂 遼水 之廣何如 長江 髙句麗之人多少 陳 國朕若不存含育責王前愆命一將軍何待多力殷勤曉未許王自新耳王得書惶恐將奉表陳謝而未果

수 고조 (高祖)가 왕에게 새서(璽書)를 주어 질책하기를 “ 비록 번부(藩附)라고는 하나 정성과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의 지방이 비록 땅이 좁고 사람이 적다고 할지라도 지금 만약 왕을 쫓아낸다면 비워둘 수 없으므로 마침내 관청의 아전과 하인을 다시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다스리게 해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새롭게 하고 행실을 고쳐 법을 따른다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수고롭게 별도로 재주있는 사람을 보내겠는가?"

'"왕이 요수(遼水)의 넓이를 말하나 어찌 장강(長江)만 하겠으며 고구려 인구의 많고 적음이 진(陳)만 하겠는가?[2].' 짐이 만일 포용하고 기르려함이 없고, 이전의 잘못을 질책하려 한다면 한 장군에게 명할 것이지 어찌 많은 힘을 필요하겠는가?[3] 하여 은근히 타이르고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할 뿐이다.” 왕이 글을 받고 황공해서 표(表)를 올려 사과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삼국사기》권제19 고구려본기 제7 三國史記 卷第十九 髙句麗本紀 第七

이렇게 대립의 불씨가 보이는 와중에, 평원왕은 사망하였다. 그 뒤를 이어,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하게 된다.

2.2 영양왕

590년에 즉위한 영양왕은 평원왕의 장자였고, 풍채와 정신이 뛰어나고 호쾌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고 한다.

한편 수나라가 강대해지고 수나라의 포섭이 이어지자, 일부 속말갈(속말말갈이라고도 한다.)의 무리가 고구려를 뒤로하고 수나라에 합류했다. 이때 추장인 돌지계(突地稽)의 아들이 나당전쟁때 나타나는 당나라 지휘관 이근행(李謹行)이다. 또한 거란의 한 부족인 출복부도 고구려를 배반하고 수나라에 내부(內附)해 버렸다. 또한 첩보를 통해 수나라가 고구려와 다른 나라들을 정벌할 군대를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구려는 계속 수나라의 팽창과 영향력을 좌시할 수 없었다. 앞의 위협적 국서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강이식이 "이런 오만한 국서는 붓이 아니라 칼로 대답할 일입니다."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어쨌든 중국 통일로 기세등등해진 수 문제는 돌궐과 토곡혼은 물론 베트남, 백제, 신라 등 주변국들로부터 동등한 위치가 아닌 왕과 신하의 관계로써 조공을 받는 등 주변국들은 스스로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수문제는 만족하지 못했다. 바로 동북아시아 북방의 맹주 고구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수나라는 주변국들로부터 황제국으로써 인정받는과 동시에 그 뜻으로 조공도 받아 일찌감치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받았지만, 오직 고구려만 이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조공도 거부하고 있었다.

이에 문제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수륙군 30만명을 은밀히 준비하는 한편 고구려에 사신과 함께 친필을 보냈는데 그 내용에는 고구려를 수나라의 신하국으로써 조공을 하라는 것과 고구려를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함은 물론 만약 조공을 거역할 시에 자신이 군사를 동원하여 황족 중 1명을 고구려 왕으로 앉히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또한 만약 고구려가 조공을 거부할 시 친필 내용대로 수륙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선제공격을 한건 영양왕의 고구려군이였다. 신채호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은 서곽잡록, 대동운해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고있다.

"이 친필을 받은 당시 고구려 왕인 영양왕은 이 무례한 내용에 대해 신하들과 의논하고 있었는데 당시 고구려 대장군이었던 강이식은 칼을 뽑으며 말하되 이 오만불손한 글은 글이 아닌 칼로 회답해야 한다며 적을 치자고 주장했다. 이에 영양왕은 기뻐하며 강이식에게 군사를 주어 임유관으로 향하게 했다."

이에 따라, "울 아버지께서 그러셨는데 남자는 싸우게 되면 일단 선빵 먼저 날려야 이길 확률이 높다고 하셨어" 란 가르침을 따라영향력을 보이는 동시에 수나라의 반응을 한번 보려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요서(遼西)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했다. 이때 영양왕은 말갈/거란의 기병 1만여 명을 동원했고, 정황상 대규모 침공이 아니라 치고 빠지는 형태의 싸움으로 보인다.(서영교, 고구려 전쟁의 나라) 당시 임유관에는 위충이란 장수가 지키고 있었는데 위충은 이 고구려의 침략선빵을 막아내었고 이후 문제에게 보고한다. 그리하여 문제는 무척 진노하였고 598년,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치기로 결심한다.[4]

3 1차 고구려-수 전쟁

문제는 다섯째 아들 한왕(漢王) 양량(諒)을 원수로 삼고, 장군 왕세적(王世積)에게 30만 대군을 통솔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육지와 바다 양면으로 진격하여 요동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수문제는 영양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당시가 음력 6월. 이제 슬슬 한여름에 접어들게 되는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수나라 육군은 장마 때문에 보급의 수송에 어려움을 느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발생했다. 또 수군을 이끌던 주라후(周羅睺)는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가다가 때마침 태풍이 불어 바닷길을 통해 요동으로 오던 수나라 군사들이 싸우기도 전에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수군은 어찌어찌 요수(遼水)에 도착했지만 이미 기진맥진했고, 육군의 열악함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음력 9월이 될 무렵 군사들을 이끌던 양량과 왕세적은 견디지 못하고 불가피하게 군사를 물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럴만도 한것이 기록으로 보면 당시 죽은 자가 10명 중 8~9명이었다. 게다가 영양왕이 그 무렵 스스로 자신을 요동 분토(糞土)의 신하, 직역하면 . 황무지, 깡촌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인데 이런 표문을 보내자, 수문제도 망한 원정이지만 체면은 그럭저럭 차릴 수 있어 퇴각하였다.

1차 원정 당시 고구려와 수나라 양국 사이의 어떤 전투가 오갔고 전투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중국측이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실수를 덮기 위해 고구려군에게 야전에서 대패한 사실을 감췄다는 음모론도 제기되지만, 실제로 기록대로 날씨 하나만으로도 수나라의 대군이 물러났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인류 역사상 날씨 하나때문에 군대가 진격을 못하고 퇴각한 사례가 수도 없이 많다.[5] 특히 랴오허강 일대는 우선 앞에 의무려산이 가로막고 있어 길도 좁고, 요택평야의 늪지대도 대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요인이 많다. 결정적인 패인은 바로 보급으로, 수나라는 이 1차 원정에서 많은 교훈을 얻어 2차 원정때는 보급부대 위주로 편성했다.

이 1차 전쟁 당시에 고구려의 장수 강이식이 활약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당시 이 "임유관 대첩"을 지휘한 장수가 바로 강이식이었다는 설이 있다. 다만 전투 자체도 실제로 그런게 있었는지도 알 수 없고, 더구나 강이식의 경우도, 삼국사기를 비롯한 '정사' 라 할 수 있는 사료에는 강이식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않으며, 신채호의 저서인 조선상고사에 올라와 있는 기록마저도 현재는 남아있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에 올라와 있는 기록을 참고했다고 하여 하여 실제에 의문이 있다. 다만 강씨 족보에는 있다고 한다.

4 2차 고구려-수 전쟁

4.1 수양제의 야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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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

문제는 패전에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이후로 고구려에 대한 원정 계획을 일체 중단시켰다. 전쟁 후에 문제는 고구려를 대하는 것을 전쟁 이전에 하듯이 했고, 《수서》의 기록에 다르면 영양왕도 해마다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다.[6]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604년, 수나라에 크나큰 변고가 일어나게 된다. 명군으로 이름난 수문제가 사망하고, 양광이 새로운 수나라의 군주로 등극하게 된 것. 그가 바로 수양제다. 양광이 아버지와 형(父兄)을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하는 패륜을 저질렀다라는 기록은 수서 자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갖은 위선과 모략으로 형의 자리를 뺏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아버지와는 달리 오만하고 잔인하면서도 패기와 야심이 남달랐던 수양제는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보수했고, 대운하를 다시 건설한다. 대운하는 사실 부황 문제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워낙 많은돈과 인력이 필요했기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이 심할까 염려한 수문제가 공사를 중단시켰지만 수양제는 백성이 공사로 힘들든말든 내가 알바아냐 식으로 공사를 재개해서 스케일이 커진거다.

또한 양제는 고구려를 치기전의 사전작업으로 친히 원정을 떠나 서방의 토욕혼과 북방의 돌궐을 토벌하고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진출하는 등 그 위세를 떨쳤다. 이렇게 정복사업에 성공한 양제가 선제였던 문제 때부터 눈엣가시같았던 고구려를 그냥 놔둘리 만무하였다. 수나라의 국력 자체는 대단히 막강하였다. 애초에 수양제가 그렇게 해먹을 수 있는 것도 워낙 나라의 저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실제로 훗날 당태종 시기, 심지어 당고종(唐高宗) 시대에 이르기까지 당나라는 수나라 최전성기 시절의 호구를 뛰어넘지 못했다.

이런 양광의 과시욕과 통일된 초강대국의 출현에 고구려는 극히 긴장하였다. 양광의 정복사업이 한창 성과를 보이던 어느 해, 고창국(高昌國)의 왕과 동돌궐의 계인가한(啓人可汗)이 모두 친히 입조해 공물을 바쳤다. 호사스럽고 허세를 좋아하는 수양제는 이때 영양왕에게도 입조(入朝)하라고 말했지만, 영양왕은 두려움을 느꼈고, 수서의 표현대로라면 '번국의 의무를 소홀히 했다.' 이는 입조를 거절한 것은 물론, 수나라가 보기에 불경스러운, 전쟁 대비 등의 작업에 착수했다는 의미로 추측될 수 있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선 동돌궐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607년, 한 고구려 사신은 동돌궐의 계민 가한을 만나고 있었는데… 하필 그때 수양제가 계민 가한을 직접 만나러 왔다! 앞서보듯 계민가한은 고창국과 함께 수나라 조정에 입조를 했던 적이 있었고, 수나라의 힘을 몹시 두려워했기에 차마 숨길 수가 없어 고구려 사신과 함께 수양제를 만날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수나라의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矩)가 수양제에게 이런 말을 간한다.

“고구려는 본래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은 땅으로, (漢)·(晉) 때에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고 따로 외국의 땅이 되었으므로 앞의 황제께서 정벌하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못나고 어리석어 군대가 출동했으나 공이 없었습니다. 폐하의 시대가 되어 어찌 멸망시키지 않음으로써 예의 바른 지역을 오랑캐의 고을로 만들겠습니까? 지금 그 사신은 계민(啓民)이 온 나라를 들어 모시고 따르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하여 사신을 위협해 입조하게 하십시오.”

《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이에 양제는 고구려 사신 우홍(牛弘)에게 자신의 뜻을 선포하게 하였다.

“짐은 계민이 성심으로 나라를 받든 까닭에 친히 그 장막에 왔소. 내년에는 마땅히 탁군(涿郡=베이징)으로 갈 것이오. 그대는 돌아가는 날에 그대의 왕에게 마땅히 빠른 시일 내에 들어와 조회하고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아뢰시오. 보존과 양육하는 예절은 마땅히 계민(啓民)과 같이 할 것이오. 만약 조회하지 않으면 장차 계민을 거느리고 가서 그대들의 땅을 돌아볼 것이오.알아서 먼저 내 앞에 엎드릴래,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갈까?

《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이것은 수나라가 고구려에 하는 최후통첩, 실질적인 선전포고나 다를 바 없었다.

4.2 유례 없는 준비

대업(大業) 7년. 611년 2월. 양제는 양주 땅에서 백관을 초대해 큰 연회를 베푼 다음, 원정을 위해 북상했다. 양제는 화려한 용주(龍舟)를 타고 양쯔강에서 운하를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 황하로 나간 다음, 영제거(永濟渠)라는 새로운 운하로 들어가 하북의 탁군에 도착하였다. 이때 선발된 사람 3천여 명이 걸어서 배를 따랐는데, 추위와 굶주림과 피로로 열에 한둘은 죽었다고 하였다. 수양제는 입조를 하지 않으면 탁군에 오겠다는 자신의 말을 지켰으며, 이는 고구려를 침공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수양제는 백성들을 징발하여 몇개월만에 수백척의 선박을 건조하였으며 군수물품을 긁어 모으고 차차 군비를 키워나가 전투병에 보급부대까지 하여 무려 113만이라는 공전절후, 전무후무의 대군을 만들어 내었다.

"모두 1백 13만 3천 8백 명인데 2백만 명이라 하였으며, 군량을 수송하는 자는 그 배였다. (중략) 매일 1군씩을 보내어 서로 거리가 40리가 되게 하고 진영이 연이어 점차 나아가니, 40일만에야 출발이 완료되었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걸쳤다. 어영(御營) 안에는 12위(衛)·3대(臺)·5성(省)·9시(寺)를 합하고, 내외 전후 좌우(內外前後左右) 6군을 나누어 예속시키고 다음에 출발하게 하니 또한 80리를 뻗쳤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1월 기사. #

이때 고구려로 쳐들어온 수나라 군대의 규모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였으며,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작전은 베르됭 전투가 발발하기 전까지 세계 최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한 작전이라고 하니[7] 얼마나 큰 원정군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8]

근데 이렇게 대규모 보급부대만 가지고는 그때그때 일일히 다 보급하기엔 스케일이 커서 시간적인 부분도 오래 걸리는데다 보급부대만 가지고는 안심이 안되었는지 수나라는 식량 보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각의 병사들에게 군수물품과 군량미를 제공하여 군장으로 차고 다니게 했는데,(1인 1군장)군장싸!혁신적인 보급 방법이라기보다는 너무 숫자가 많아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보는 게 맞는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그런데 실전에서는 독이 되었다. 병사 한명에게 너무나 무거운 군장을 지운 탓에 병사들이 진군하다가 탈진하고 죽는 경우가 허다하였으며 심지어는 군수물품을 버리면서 진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우문술이 부장에게 '이것은 병사들을 학대하는 짓이다.'라고 했다는 야사까지 존재했을 정도니, 당시 군장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수나라 군대가 탁군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산동성 동래에 병선 300여 척을 건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원정에 늦지 않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강행했다. 일꾼들은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일하느라 전체의 3·4할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하에 명령이 떨어져 탁군으로 병력이 모였고, 7월에는 드디어 군량을 수송했다. 여양(黎陽)과 낙구(洛口)에 큰 식량창고군이 있어 그곳에서 배를 이용해 탁군으로 실어 날랐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배가 1천리 였다고 하니 실로 어마어마한 소동이었다. 육로로 가는 병대들은 마음 놓고 쉴 수도 없었다. 밤에도 걸어야 했기 때문에 피로로 쓰러지는 자가 속출했다.

이때의 상황을 사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죽은 자가 머리를 나란히 하고 누웠고, 썩은 내가 거리에 진동하여 천하가 소동했다.

군대만이 아니었다. 군수품을 나르는 인부와 차부가 60만 명이나 징용되었는데 길은 멀고 험했으며, 두 사람이 쌀 석 섬을 날랐는데 그것은 자기들 식량으로도 부족했다.[9] 정해진 분량을 나르지 못하면 처벌 받기 때문에 징용된 사람들은 도망칠 수 밖에 없었고, 도망치면 불법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천하에 쫓기는 자가 넘쳐났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떼를 지어 비적이 되었다. 심지어 민가에서는 "요동에 끌려가서 헛되이 죽지 마라"라는 노래가 유행했다고 한다. 611년 경 나온 것으로 자치통감에 기록된 당대의 반전가요, 제목은 무향요동낭사가(無向遼東浪死歌), "요동에 가서 떠돌다 죽지 말자라는 노래"이다. 산동지역 장백산에 은거하는 지세랑(知世郎)[10]을 자처하는 왕부(王薄)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한다.

長白山頭知世郎 純著紅羅錦背襠 장백산 아래에서 나(지세랑)는 비단옷 대신에 농부의 옷을 입었다.

橫槊侵天半,  輪刀耀日光。  긴 창이 하늘의 반을 가리우고, 전쟁무기를 실은 수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네.
上山吃獐鹿,  下山食牛羊。  산 위에서 노루와 사슴을 잡고, 들에서는 소와 양을 잡으며 평화롭게 지냈는데.
忽聞官軍至,  提劍向前蕩。  문득 들으니 관군이 도착하여 칼을 들고, 전쟁터로 사람들을 끌고 가고 있다 하네.
譬如遼東豕,  斬頭何所傷。  사람들이여, 요동에서 죽는 것을 깨달아라. 참혹하게 머리가 잘리며 부상당한 모습을.

이런 상황에서 612년 음력 1월, 수양제는 공식적으로 고구려 총공격을 명했다.

“고구려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 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漢)과 (魏)의 거듭된 토벌로 소굴이 잠시 기울었으나, 난리로 많이 막히자 종족이 또다시 모여들어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을 이루고 씨를 뿌린 것이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저 중화의 땅을 돌아보니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인 것이 가득하다.

하늘의 도는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니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이거 본인 사망 플래그 아닌가? 도리를 어지럽히고 덕을 그르침이 헤아릴 수 없고, 간사함을 가리고 품는 것이 오히려 날로 부족하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아직 직접 받은 적이 없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도망하고 배반한 자들을 유혹하고 거두어들임이 실마리의 끝을 알 수 없고, 변방을 채우고 개척하여 경비초소를 괴롭히니, 관문의 닦다기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고, 살아있는 사람이 이 때문에 폐업하게 되었다.

옛날에 정벌할 때 천자가 행하는 형벌에서 빠져 이미 앞에 사로잡힌 자는 죽음을 늦추어주고, 뒤에 항복한 자는 아직 죽음을 내리지 않았는데, 일찍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길러,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일을 익혀 요서를 침범하였다. 또 청구(靑丘)의 거죽이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물가가 같이 정삭을 받드는데, 드디어 다시 보물을 도둑질하고 왕래를 막고, 학대가 죄 없는 사람들에게 이르고 성실한 자가 화를 당한다. 사명을 받던 수레가 해동에 갔을 때 정절(旌節)이 행차가 번방의 경계를 지나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하의 예절이라고 하겠는가?

이를 참는다면 누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인가? 또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번거롭고 무거우며, 힘센 신하와 호족이 모두 권력을 쥐고 나라를 다스리고, 붕당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풍속을 이루고, 뇌물을 주는 것이 시장과 같고, 억울한 자는 말을 못한다. 게다가 여러 해 재난과 흉년으로 집집마다 기근이 닥치고, 전쟁이 그치지 않고 요역이 기한이 없고 힘은 운반하는 데 다 쓰이고 몸은 도랑과 구덩이에 굴러 백성들이 시름에 잠겨 고통스러우니 이에 누가 가서 따를 것인가?

경내(境內)가 슬프고 두려워 그 폐해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머리를 돌려 내면을 보면 각기 생명을 보존할 생각을 품고, 노인과 어린이도 모두 혹독함에 탄식을 일으킨다. 풍속을 살피고 유주(幽州), 삭주(朔州)에 이르렀으니 무고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죄를 묻기 위해 다시 올 필요는 없다.

이에 친히 6사(六師)를 지배하여 9벌(九伐)을 행하고, 저 위태함을 구제하며 하늘의 뜻에 따라 이 달아난 무리를 멸하여 능히 선대의 정책을 잇고자 한다. 지금 마땅히 규율을 시행하여 부대를 나누어서 길에 오르되 발해를 덮어 천둥같이 진동하고, 부여를 지나 번개같이 칠 것이다.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갑옷을 살피고, 군사들에게 경계하게 한 후에 행군하며, 거듭 훈시하여 필승을 기한 후에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長岑)·명해(溟海)·개마·건안(建安)·남소·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 등의 길, 우(右) 12군은 점제(黏蟬)·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屯)·후성(候城)·제해(提奚)·답돈(踏頓)·숙신·갈석(碣石)·동이(東▣)·대방·양평(襄平) 등의 길로, 연락을 끊지 않고 길을 이어 가서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


《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4.3 전쟁의 시작 - 요하 도하전투

연개소문(드라마) 37회의 장면.

이처럼 엄천난 병력을 동원한 건 대국의 위엄을 보이기도 함이지만 고구려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고구려의 성은 촘촘히 늘어져서 연결되서 하나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과거 여러 성의 집합이던 만리장성이나 훗날 고려에서 축조한 천리장성 등 성들의 집합인 일종의 마지노 선과 같은 방어선이었다. 한 군데를 뚫어도 주변의 성에서 응원이 와서 역포위를 하거나 후방을 교란해서 보급로를 차단하고 설사 성을 함락하더라도 주변의 방어선 자체는 건제하기 때문에 항상 주변의 성을 경계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백만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방어선에 투입하면 야전에서 일단 밀리니 함부로 전투도 못하고 다른 성들에서 응원군도 오기 힘들며, 설사 오더라도 역포위 위험도 적다. 거기다 그 많은 병력이 어디로 움직일 지 모르기 때문에 각 성은 자기 방어하는데 신경을 쓸 수 밖에 없고 예비대 투입도 곤란하기 때문에 고구려의 방어선은 일시적으로 마비된다.

수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로 하여금 육로로 요동을 공격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내호아에게는 수군 대장의 직책을 맡겼다. 그리하여 육군이 요동을 뚫고 고구려의 내지로 잠입할 때 내호아의 수군이 이와 합류하여 고구려의 도읍인 장안성이며 먼저 영양왕이 머물고있는 부수도인 평양성을 친다는 계획도 세웠다.

612년 음력 2월, 수양제가 이끄는 부대는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그리고 여러 군대가 다 모여 대단한 숫자를 이루었지만, 고구려 군은 우선 강을 막고 지켜서 수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수양제는 수나라의 공돌이였던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령하여 강을 건널 수 있는 부교를 만들게 하였다.

공병 작업은 차질을 빚는데, 첫 번째 시도 때는 부교를 세 개 만들었으나 강의 길이를 잘못 예측하여 부교갸 딱 어른 한 명 키 남짓하게(...) 모자랐고 이로인해 1차 도강에는 실패했다. 게다가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도강중인 수나라군을 고구려 군대가 화살세례를 퍼부으며 공격하자 큰 피해를 받았다. 수나라군은 맥철장(麥鐵杖) 등의 장수가 용감하게 부교로 뛰어올라와 싸워보려 했으나 전사웅(錢士雄)·맹차(孟叉)와 함께 전사하였다.

이에 수양제는 잠시 물러났다가 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령을 내려 다시 부교를 만들고, 하조는 이틀만에 이를 완성하여 다시 한번 공격해오자, 이번에는 고구려군이 대패하여 무려 만 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확실히 야전에서는 수나라 군대의 우위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형세가 되었다.

4.4 요동성 전투

수나라 병사의 복원도 : 1. 근위병 2. 보병 3. 무장해제한갑옷을 입지 않은 보병

수나라 군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요동성을 포위하고 이를 공격했지만…… 좀처럼 함락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기록을 보면 요동성 내의 군사들은 가끔씩 나가서 싸우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다시 불리해지면 들어와서 성문을 닫고 버티기로 나갔고, 수나라 군은 시간이 지나도 요동성 하나를 함락하지 못하며 본래부터 세웠던 전역의 그림이 모조리 엉망이 되어 버렸다.

도하에 성공한 양광은 요동성을 겹겹히 포위했고 100만이면 함락은 시간문제라고 판단했지만 요동성의 병력은 상당히 강한 저항을 했고 전쟁 내내 3개월간 수양제의 공격을 버텨냈다. 흔히들 요동성이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요동성은 평야에 지어졌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한다. 요동성은 지금의 심양 언저리에 있는데 한나라 때부터 상당히 크고 견고한 요새가 축성되어 있었다고. 성벽의 흔적이 남지 않아 정확한 성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요동성 무덤의 벽화를 보면 이중성이었음은 확인이 된다. 만약 요동성이 평야에 지어진 게 사실이고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다는 것 또한 사실이라면[11] 요동성주와 요동성 장병들은 더더욱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인데, 평지성은 아무래도 방어가 힘들 뿐더러 성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성벽의 길이가 길면 길수록.) 방어 측에게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당장 고구려만 해도 이런 이유로 평지의 평시 수도와 산지의 전시 수도로 이루어진 이중 수도를 두었던 역사가 있으며, 여요전쟁여몽전쟁 당시의 고려, 임진왜란병자호란 당시의 조선 등이 적군의 침략 앞에서 수도를 버리고 나주강화도, 의주남한산성 등으로 가서 맞설 수밖에 없었던 큰 이유 또한 바로 이것이다. 근데 이 요동성은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아무리 양제가 덜떨어지게 굴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고려, 조선 시대와는 비교조차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물량 공세에 시달리는 와중이었음에도 끝끝내 양제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시간을 끌었던 것이다. 이들 덕분에 이후 여수전쟁의 승패가 갈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12]

수나라 군대 110만 정도면 당시 중국 인구의 5~7.7%에 해당한다고 한다. 정확한 규모는 추산하기 어렵지만 전투병이 113만이고 보급대는 그 배라고 했다. 그러나 보급대는 상시 전투병과 함께하진 않으므로 저 두 배라는 보급대를 연인원으로 보면 지속적인 원정 인원은 200만 정도로 잡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생산에 종사해야 하는 청년층의 남자라는 것이다. 그들만으로 전 인구의 5~7.7%를 동원했으니 전쟁을 오래 지속할 수 없음은 뻔한 일이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후에 그 유명한 우중문 별동대가 구성되는 것이다. 요동성이 끈질기게 버텨준 덕분에 다급해진 수양제는 평양 직공을 위해 우중문과 우문술을 위시한 35만의 별동대를 구성할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고구려가 방비도 철저했던 것도 있지만, 처음부터 고구려의 계략이 제대로 먹혀 들었던 전투가 바로 요동성 공방전이다. 고구려군은 농성하는 도중 상황이 불리해지면 바로 수나라 군에게 항복의사를 타진했는데, 최고통수권자인 수나라 황제였던 양제가 친정을 와있는 상황이란 것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당연히 일선 부대 지휘관에서 황제까지 보고가 올라가는데는 시간이 소요, 또 황제가 신료들과 의논하는데 시간 소요, 항복을 받아들인다고 하든지, 아님 무시하고 계속 공격을 하든지 등의 결정이 내려져서 다시 일선 부대 지휘관까지 명령이 전달되는데 병사는 또 오죽이나 많나 시간이 소요되는 등 매번 시간이 깨지는 상황이었다. 대제국도 관료제의 폐해 당연히 이 기간 동안은 휴전이 불가피했고, 고구려 군은 그 시간 동안 요동성 방어를 철저히 하는 효율적인 선택을 했다.

이 원인 제공자는 다름 아닌 수양제. 그는 장수들에게 “일체 전쟁은 진격하고 정지함을 모두 반드시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고, 덕분에 수나라 장수들은 급하게 싸워야 할때 감히 멋대로 나서지 못하고 황제의 명을 받느라 기회를 놓쳐버렸다. 급기야 요동성이 함락될 수도 있는 급박한 위기가 올 때는, 성 내에서 항복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면 장수들은 감히 싸우지 못하고 항복한다는 요동성의 의견을 성 내에 알렸고, 황제의 말을 듣고 다시 나서려 할때면 이미 요동성은 다시 수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두고 있는 상태였다.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짓을 세번 연속으로 했다. 이젠 역사로도 콩을 깔수 있다 수나라 군대가 병신집단이 아닌 이상 고구려군이 장난질 하는 게 뻔히 보이는 상황인데도 "저항을 중지하고 항복하는 적군은 대국의 아량으로 받아 줘야 한다"는 대국다운(?) 논리로 이 장난질을 받아줬던 것이다. 물론 그 허세질의 대가는 고스란히 자기들이 뒤집어 썼다.

이쯤 되면 관대한 황제부심이 넘치는 양제 입장에서도 빡칠 수 밖에 없었다. 그간의 정복사업이 쉬웠던 탓도 있다. 이동식 궁궐을 짓는다든지 하는 위엄찬 방식으로 여러 국가들의 항복을 받아왔던 것. 그에 비하면 고구려 정벌은 애초에 목적 자체가 고구려의 완전한 멸망인지, 국왕의 입조인지, 아니면 단순한 복종인지도 불분명했다. 6월 무렵이 되어도 여전히 수나라 백만대군은 요동성 앞에 모여있기만 할 뿐이었고, 단 한명의 군사도 넘어가지 못했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수양제는 장수들을 불러 질책하였다.

6월 기미(己未)에 수 황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행차하여 성과 못의 형세를 보고 여러 장수를 불러 잘못을 따져 꾸짖어 말하기를 “공(公)들은 자신이 관직의 높음을 가지고 또 집안의 지체를 믿고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으로 나를 대우하려 하느냐? 서울에 있을 때 공들이 모두 내가 오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은 병패(病敗)를 당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공들이 하는 바를 보아 공들의 목을 베려함이다. 공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 내지 않으니 내가 공들을 죽일 수 없을 것이라 여기느냐?” 하였다.

《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서 얼굴 빛이 잃었다고 한다. 사실 너님이 제일 문제인데 그렇게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수양제의 병크와 고구려군의 분전이 이어지며 수나라 대군은 요동성 근처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도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자 답답했던 양제는 요동성과 방어선을 구축한 인근의 다른 성들을 건드려보지만 요동성과 같은 전술을 썼는지 어쨌는지 효과가 신통치 않아서 한 개의 성도 점령하지 못했다. 그러자 양제는 가공할 양의 물량으로 도박을 걸게 되는데...

4.5 아아, 평양성

러시아 원정 프로토타입
수양제는 요동 일대의 고구려 요새들의 격렬한 저항에 의해 본래의 작전에 큰 차질이 생겼음을 알고 육군 대장 좌우익대장군인 우문술(宇文述), 우중문(于仲文)으로 하여금 9개 군 35만 병력을 차출해 평양 직공을 명령한다. 각지의 방어선을 우회하고 평양 일대에서 수군과 합류해 평양성을 공략하여 일격에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는 고구려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였으나, 이미 요동에서의 장기간의 공방전으로 인해 요동성 앞에 단순히 모여있었다고 하더라도 수나라 육군 역시 어느정도 피로한 상태였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진군이 문제였다.

수양제는 방패, 갑옷, 창과 옷감, 무기, 화막(火幕) 등을 지급하여 별동대를 꾸렸다. 문제는 앞서말한 보급체계 때문에 유사시를 대비한 백일분의 추가 식량을 병사 개개인이 짊어지게 함으로써 병사들의 피로가 더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추가 식량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길을 가다가 이를 버리는 병사들이 다수 존재했다. 문제를 알아차린 지휘부가 버리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자 이번에는 을 파고 그곳에 보급품들을 묻어버렸다. 짬밥 좋은 수나라군 하지만 버리면 또 굶게 되니, 별동대는 길의 절반 정도 온 상태에서 식량이 떨어질 판이 되어 대강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지쳐 죽기 vs 굶어 죽기 방패, 갑옷, 창, 옷감, 무기, 화막을 모조리 챙길 정도면 완전군장 수준이다. 그정도 먼거리를 원정을 떠난다면 오래 주둔해야 하니 당연하긴 하지만. 문제는 무게다. 현대 국군에서 군장을 쌀 때, FM대로 꾸릴 경우 20Kg에 육박하는 무게때문에 엄청나게 힘들어진다. 여기에 쌀 10Kg정도에 인간 1명이 한달 좀 넘게 버티니 30Kg 짊어진다고 가정하고, 50Kg이나 되는 짐을 짊어지고 요동성부터 평양성까지 수백킬로를 어택땅한다고 가정해보자.차라리 죽여라 죽여 와중에 고구려군이 게릴라전을 펼치게 되면 행군의 난이도는 안드로메다로.

이때 고구려의 재상인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대와 맞서게 되었다. 을지문덕은 일부러 성중의 곡식을 감추고 우물을 메워서 수나라 군대의 기갈과 굶주림을 부추겨 사기를 떨어뜨리는 청야전술을 구사했다. 영양왕은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을 하게 하고, 을지문덕은 적중에 들어가 직접 염탐을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나라의 재상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정탐이나 하러 적진으로 들어갔던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서로 의사가 타진되었던 상태로 보인다. 수양제가 을지문덕이나 영양왕 둘 중 하나라도 오면 무조건 잡아두라고 한 것을 보면 둘 중의 한 명이 수의 진영으로 찾아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요동성에서 하도 속다보니 진짜 항복할 생각이 있으면 왕이나 재상 을지문덕이 직접 찾아오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을지문덕이 찾아간 것은 정탐이라기보다는 시간끌기 용도로 보는 것이 더 알맞을 것이고, 정탐이라는 것은 중국측의 변명에 가까운 것일 가능성이 높다. 우중문은 명령대로 을지문덕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상서우승 유사룡이 사신을 잡아두는 법은 없다며 반대했다. 유사룡은 이 일로 전쟁 후에 처형된다.

을지문덕이 항복 의사를 밝히고 돌아간 후에 전혀 소식을 전해오지 않자중문아 또속냐 우중문은 그제서야 속은 것을 눈치채고 평양을 향해 진격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반면 우문술은 이미 병사들의 사기가 꺾였고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을 염탐하고 돌아갔으니 싸워도 이기기 힘들것이라 반대하며 급기야 철군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중문은 정예병력으로 공격하면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문술이 그래도 신중론을 펴며 반대하자, 우중문은 벌컥 화를 내며 우문술을 꾸짖었다. 이때 우문술은 우중문의 지휘를 받는 처지라 별 수 없이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결국 시망이 보이는 추격이 벌어졌다. 배고프고 지친 수나라 군대는 정처없이 을지문덕을 추격하였고, 적군의 지친 기색을 눈치챈 을지문덕은 이들을 피곤하게 만드려고 싸울 때마다 거짓 패하여 달아났다.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일곱 번을 모두 지는 일도 있었다. 여기서 지휘한 것은 우문술로 보이는데, 퇴각을 주장하던 그도 계속되는 승리에 생각이 적잖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우문술도 지금은 보급문제니 뭐니 문제가 많지만 어떻게든 평양성에 도착하면 보급물자를 충분하게 가진 수군과 합류할 수 있을거고, 그럼 이 문제들도 다 해결될 거라고 믿게 된 모양이다. 문제는 이 지연전술의 효과다. 이 지연전술 끝에 먼저 평양 인근에 도착한 수의 수군이 조급해진 것이다. 30만의 육군이 도착하지 않자 5만의 전투병력을 가진 수군이 독자적으로 평양성 공략에 나섰다.스물스물 올라오는 각개격파의 냄새

수의 수군은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상륙했다. 물론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영양왕의 아우 고건무가 지휘하는 병력이 대기중이었지만 수군은 여기서 건무의 저항을 격파하고 상륙에 성공했다. 건무의 저항을 격파하자 흥분한 내호아는 육군의 합류를 기다려야 한다는 부장 주법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4만의 병력으로 평양성 직공에 나섰고 이제 고구려군의 낚시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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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은 외성-중성-내성-북성의 4중 구조인데 일부러 패하는 척하며 적을 외성 안으로 유인했다. 기록에 따르면 외성의 빈 절 안에 병력을 매복시켜뒀다고 한다. 내호아는 공성전도 치르지 않고 성으로 들어서자 이성을 상실했는지 어쨌는지 전투가 종결되지 않았음에도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용했다. 당연히 병사들은 이리저리 흩어졌고 그 때부터 고구려군이 미끼를 문 수나라군을 낚아올리기 시작했다. 이 타이밍을 노려 절에 매복했던 고구려군이 등장했고 왕제 건무는 500기의 결사대로 적진을 휩쓸었다. 중국측의 표현에 따르면 "그의 효용이 절륜하여 500명의 결사대로 내호아군을 패퇴시켰다."고 한다. 다만 삼국사기등에서 영류왕이 이를 무찔렀는지에 대한 여부는 아무리 찾아봐야 찾을 수 없다. 영류왕이 언급되는것은 수서 열전의 내호아 편.

이 때 건무의 500명이 4만을 격파했다는 기사를 두고 일각에서는 다소 과장도 좀 섞였을 것이라는 평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저 숫자만 보고 아마 과장일 거라고 짐작하는 것 또한 무리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애초에 저게 과장일 거라는 주장에는 정말로 마땅한 증거가 없고, 그렇게 따지자면 사실 이 전쟁 당시 고구려는 그냥 망했어야 했다.(...)[13] 더군다나 해당 기록은 고구려나 한국 측 사료도 아니고 다름 아닌 당대 중국 측 사료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무시하기가 힘들다. 그냥 여수전쟁 판 용인 전투쌍령 전투 정도로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 두 전투에선 고구려계인 조선이 발려버렸지만. 대군이 약탈이나 식사 등 다른 일 하던 중에 소수의 갑작스러운 기습을 받고 무너진 예라는 건 확실히 내호아는 좀 심하게 털리긴 했지만 의외로 역사 속에서 좀 보이는 편이다. 당장 용인 전투도 그렇다. 여하튼 내호아는 겨우 탈출하였고 4만의 병력이 거의 전멸했다. 내호아는 바로 대동강 하구로 후퇴했고 이후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오지 않았다.

수군의 패퇴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상기했듯 30만 육군은 이제 수군이 가진 보급물자와 병력 보충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육군은 끝까지 수군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지만 물자보충이 되지 않는 한 육군의 피로와 물자부족은 해결할 수 없었다. 만약 수군이 30만 육군 별동대와 평양성 근교에서 합류, 보급 문제를 덜어주게 된다면 수나라와는 달리 전력의 제한이 있는 고구려로서는 망했어요를 외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고구려가 이 내호아의 수군을 격파한 전투는 살수 대첩과 비교하면 그 규모는 작았으나 그야말로 전쟁의 국면을 바꾼 전투였다.

한편 우중문의 별동대는 평양성까지는 어떻게든 도착했다. 우중문은 곧 적국의 도읍까지 손에 넣게 된다며 기고만장했지만 막상 평양성 근교에 도착하자 만나기로 했던 수군은 코빼기도 안 비치고 이 지친 병사들로는 무엇을 할 도리가 방법이 없었다. 주지하듯이 수나라 군대는 이미 굶주림과 쉴 틈도 없이 계속된 전투와 강행군으로 인하여 지쳐 있어서 더이상 싸울 형편이 되지 못한것이다. 보급은 그야말로 바닥이 나고, 이미 고건무에게 대파되어 있던 수군과의 합류는 물건너 갔으니, 우중문의 군대는 적의 도읍을 코앞에 두고서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였다. 우중문과 내호아가 서로 연락하려고 하긴 했겠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서로 연락이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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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장수의 갑옷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여있던 우문술에게 을지문덕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군사를 보내면 왕과 함께 항복하겠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때 을지문덕은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를 보낸다. 언뜻 글만 보면 적을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글로 보이지만 전황을 파악못하는 바보가 아닌 이상 글에 담긴 뜻은 명백했다. 진정한 의미의 "마이무따 아이가, 고마해라ㅉㅉ" 어쨌든 "우리가 이렇게 명분까지 줬으니까 물러가시오" 하고 에둘러 말하니 우문술도 우중문도 여기서 더는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 퇴각을 명령했다.

수군은 후퇴하면서 행군대형으로 바꾸지도 못하고 방진을 치면서 이동했는데, 이는 고구려의 공격을 염려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4.6 살수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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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를 그냥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말 그대로 살벌한 낙장불입

7월, 수나라 군대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는데, 군대가 강을 반쯤 건넜을 무렵 갑자기 고구려 군대가 뒤에서 공격해오자 후위를 맡은 신세웅의 부대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하며 전 부대가 모랄빵이 나기 시작했다. 전투고 뭐고 없는 상태에서 살아남은 수나라 군대는 하루에 450여 리를 달아났으며, 수나라 지휘관 왕인공 (王仁恭), 설세웅만이 최후의 부대로 남아 고구려군을 물리쳐 다른 부대가 달아날 수 있게 하였다. 35만에 육박하던(처음 요하에 이르렀을 때는 30만 5천명이라는 말도 있다) 별동대 9군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겨우 2천7백 명이었고 수만을 헤아렸던 군수와 기계는 모두 잃어버려 없어졌다. 이것이 바로 살수대첩이다. (항목참조). 한국사에서 야전으로 거둔 가장 큰 승리라고 볼 수 있다.[14]

4.7 수나라 군대의 철군

살수대첩의 참변을 접하여 크게 진노한 수양제는 패전하여 돌아온 우문술, 우중문, 내호아 등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이들을 모조리 삭탈관직한 후에 우문술을 쇠사슬로 묶어 죄수 취급을 하며 수나라로 압송하였다. 이때 내호아와 우문술은 서민으로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었으나 당시 수나라 군대의 주요 장수들이었다. 때문에 훗날 고구려와의 전쟁이 재발하였을때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다.

특히, 수나라 진영에 거짓 항복을 한 후에 염탐을 하고 돌아간 을지문덕을 그냥 놔주게 만든 주범인 유사룡은 극형을 면치 못하였으며 결국 참수당하였다. 다만 우문술의 부장이었던 설세웅 만큼은 살수대첩 후에 뒤를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맞아 싸워 이긴 공으로 패전의 책임을 물지 않고 오히려 승진하였다.

이렇게 수양제는 고구려에 원정을 온지 8개월만에 참혹한 패배를 당한 후에 고국 수나라로 귀환하니 2차 전쟁 역시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 수나라 군대는 요수 서쪽에서 무려라(武厲邏)를 함락시키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였을뿐, 그 외에 성 하나도 제대로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그야말로 대패였고,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승리였던 것이다.

5 3차 전쟁

613년 3월, 수양제는 2차 전쟁 당시에 겪었던 패전의 울분과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번 3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다. 4개월만이었다. 2차 침략을 교훈삼은 수양제는 3차 침공때부터는 장수들에게 자유재량권을 부여하여 고구려를 효율적으로 몰아붙였고, 더 적은 병력으로 원정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은 오히려 더 큰 위기를 맞이해 함락 직전까지 갔다. 훗날 당태종은 여기에 더해 기동력을 활용한 기만작전을 수행하여 방위력을 약화시켜 요동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살수에서의 패배 당시 나름 활약하여 주목받은 신예 장수였던 왕안공이 이끌었던 선봉대는 우선 신성을 가격하였으며 이후 요격에 나선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신성에서 타 지역 지원에 나서는 것을 봉쇄하였다. 그 다음에 본대가 요하에 도하하여 요동성을 재차 공략하면서 20여 일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초반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자 포대 1백여만 장을 쌓아 요동성을 내려다보며 공세를 펼첬고, 이동식 망루를 통해서 공세를 펼치기도 하였다. 2차 전쟁때와 마찬가지로 별동대를 차출, 압록강 인근까지 접근시킨다. 113만이란 물량으로 밀어붙인 2차때보단 덜하지만 이때 역시 고구려의 위기였다.

그러나 이때, 수양제의 휘하에서 보급 임무를 담당하던 예부상서 양현감이 과거의 원한과 수양제의 폭정에 불만을 품어 친구인 이밀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면서 수양제는 철군을 결정한다. 그러나 이때 양제의 측근 참모였던 곡사정이 고구려로 망명하는 바람에 이것이 발각되고 만다. 이때 곡사정이 양현감과 내통을 하던 중에 수양제에게 들킬 위험에 처하자 고구려로 망명했다는 설도 있다.

곡사정의 투항으로 수나라 군대에 대한 기밀, 특히 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고구려는 이 기밀과 정보를 활용하여 늦게나마 수나라 군대의 후미를 가격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크게 승리하였으며 이때 수천여명의 적군을 패사시키는 전공을 올렸다. 2차 전쟁 때보다도 더한 위기였을 수도 있으나 결국 수나라는 요동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아!!ㅠㅠㅜㅠㅠ

6 4차 전쟁

수양제는 수나라로 귀국한 이후에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하여 일단 발등의 불은 껐으나 그의 친구였던 이밀은 독자적인 세력을 거느리고 군웅의 행세를 하며 위세를 떨쳤다. 또한 양현감의 반란을 계기로 하여 각지의 세력가들과 농민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러한 와중에도 수양제는 고구려에 대한 깊은 원한과 집착으로 인하여 수군 대장 내호아로 하여금 비사성을 공격하게 하였고 이때 비사성이 함락되면서 여수전쟁에서 최초의 성 함락이란 소득을 얻었다.[15] 그러나 반란이 갈수록 거세져 육군은 움직이지도 못했고 내호아가 지휘하는 수군만으로 고구려를 침공하는 것도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고구려도 무척 지쳐 있었으므로 영양왕은 고구려로 망명했던 곡사정을 귀국시켰다. 당연하지만 귀국한 곡사정은 처형당했다. 문 밖 기둥에 묶여서 수십 발의 화살을 맞은 후 살을 발라내어 먹고 삶아서 남은 는 가루를 내어 뿌렸다고 한다. 형식상 귀부하는 형태로 수나라에 화친을 제의하니[16] 수양제는 이를 받아들였으며 내호아에게 귀국 명령을 내린다. 이때 내호아는 고구려도 힘을 많이 소진하여 이제 치면 쉽게 이길 수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근데 고구려는 이때도 최소한 내홍을 겪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나라가 망한 건 수십 년이나 더 뒤의 일이며, 그것도 당나라가 희대의 명군 당태종 그리고 그 아들까지 무려 2대에 걸쳐 고구려를 끊임없이 두들겨 댄 끝에 + 연개소문 사후 형제들의 내분까지 쓰리콤보 이상이 겹쳐서 겨우 망한 것이다.[17] 이러니 수나라가 한두 번 더 쳐들어왔다 해도 어쩌면 성 몇 개 따먹을 수는 있었겠지만 과연 고구려라는 나라가 망해버렸을지는 아주 의문스럽고, 역시나 역사에서 드러나듯이 당시 수나라는 한 번 더 쳐들어가는 일은 고사하고 당장 쳐들어가던 일조차도 멈춰야 하는 개막장이 되어 있었다.그래서 해당 항목에도 이미 당당하게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오랜 시간동안 그 많은 병력을 꼬라박았는데, 아무리 수나라가 트롤짓을 해댔기로서니 고구려가 입은 타격이 어찌 경미한 수준이었겠냐만, 그것이 과연 '한계점'을 논할 정도의 것이었는지가 대단히 의문스럽다. 역사가 이러하니, 내호아 등이 한 말이라는 게 정말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한 뒤에 한 말인지, 아니면 다름 아닌 수양제가 그러했듯이 그저 열통 터져서 상황 파악 못하고 빼애액거리면서 "한 판만 더 하면 된다니까!!!" 라며 원통함에 사자후를 시전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18] 백만 대군을 데리고 그때까지 해온 트롤짓을 봐서는 아마 그냥 이거 맞는 거 같은데...

어쨌든 이렇게 하여 고구려수나라 간의 전쟁은 수나라의 멸망으로 완전히 끝이 났다. 폭발 엔딩

7 결과

수나라는 수문제, 수양제의 2대에 걸쳐 고구려와 싸웠으나 결국 패하였다. 특히 수양제가 고구려와 벌였던 2차 전쟁의 경우에는 살수대첩으로 인하여 순식간에 30만의 대군이 궤멸당하는 엄청난 대패를 겪고 말았다. 그에 따라 피해도 막심하여 엄청난 군량미와 군수물자가 소진되었으며 수나라 조정의 재정도 상당히 소모되었다.

또한 이미 수양제는 대운하 건설과 대규모 황궁 건설 등의 잦은 토목공사로 인하여 민심을 잃었고 부황과 형제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했던 만큼 성격도 잔혹하여 점차 신하와 장군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결국 수나라는 내분에 휩싸여 멸망하였고, 당국공 이연(당고조)이 을 세움으로써 수왕조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최후에 수양제 자신도 고구려 원정 당시 육군 대장 중 하나였던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에게 피살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고구려 역시 4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인하여 국력을 크게 소진하였고 무엇보다 통일된 중국 왕조의 엄청난 국력을 몸소 실감하게 되었다. 때문에 영양왕이 사망한 후에 그의 뒤를 이어 영류왕이 된 고건무는 그 자신이 평양성에서 수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렀음에도 불구하고 수나라의 뒤를 이어 중원을 재패한 당나라와 화친을 맺는 등 중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훗날 고구려 내 정국 균형문제로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역으로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수백명의 신료들과 영류왕을 살해한 후에 그의 조카를 왕위에 앉혀 실권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결국 당나라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던 영류왕이 살해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당나라 황제 당태종은 고구려의 역적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여 고구려-당 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사실 연개소문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당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했을게 뻔하기 때문에 구색잡기에 불과하다고 보면 된다. 엔드리스 워

8 명칭에 대한 문제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고문서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약자를 각각 여, 제, 나로 칭하고 있다. 그래서 7세기 경 형성된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을 여제동맹, 신라와 고려의 왕조교체기를 나말여초라고 칭하는 것이다. 당장 여제동맹은 고제동맹이라고 하지 않는다. 구글로 검색해도 단 7건이 나올 뿐이다. 역시 동 시기의 신라와 당의 연합군도 신당연합군이 아니다.

특히 고구려에서 국명을 의미하는 부분은 '여'에 해당하며, 앞의 '고'의 경우 뒤의 '려'를 수식하는 용어로 볼 수 있다. 고구려라고 할 때의 '구려' 가 '마을' 을 뜻하는 옛말인 '구리' 나 '고리' 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즉 '고구려' 는 '높은 마을' 정도 된다는 것. 물론 높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높다는 게 아니다 . 왕망의 에 고구려현[19]이 복속하지 않자 고구려현을 하구려현으로 부르게 했다는 기록은 그런 관념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당전쟁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한국의 현재 정식 국호가 대한민국이라는 점을 들어 한일전, 한중전을 대일전, 대중전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이 정의에 따르면 고구려-수 전쟁은 여수전쟁이 되어야 하지만절대 전남 여수와는 관계없다 정작 여수전쟁이라는 명칭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뭐 여수전쟁이라고 하면 국내 지명인 여수시에서 일어난 전쟁인가? 이렇게 헷갈릴 우려가 있긴 하지만... 사실 공식적으론 합의된 명칭이 없다. 현 한국 사학계에서는 고구려의 대수/대당전쟁, 혹은 고구려-수 전쟁으로 칭하는 경향이 많은것이 현실이다. 고수전쟁, 고당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논문이 없는 것은 아니나 고수/고당전쟁이라는 말은 역사적 어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용어인 만큼 사용을 자제할 필요성이 있으며, 무엇보다 사학계의 빠른 합의가 필요하다.
수려전쟁이라고 하면 간단할거 같지만, 이러면 이게 걸린다.

2013년 6월 21일 구글의 검색 용어로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 고수전쟁: 56,400건
  • 여수전쟁: 10,100건
  • 고구려-수 전쟁: 64,500건
  • 고당전쟁 : 15,600건
  • 여당전쟁 : 82,900건
  • 고구려-당 전쟁 : 100,100건

네이버 백과사전은 고구려-수 전쟁에 대한 항목이 없으며, 여당전쟁 항목은 있다. 위키백과는 고수전쟁, 고당전쟁으로 잠시 바뀌었다가 현재는 고구려-수.당전쟁으로 등록되어 있고 고수전쟁, 고당전쟁이라는 리다이렉트를 허용한다. 단 항목 내에서는 철저히 여수전쟁, 여당전쟁이라는 약칭을 사용한다.

  1. 왕은 상의, 바지, 외투, 머리띠와 흰 비단 모자, 비단 장식 띠, 금장 버클이 달린 가죽 벨트, 노란 가죽 구두를 했으며, 상의의 소매, 옷단, 목 깃, 끝 부분은 넓은 금 천으로 장식하였다.
  2. 근데 진의 집계인구는 당시 50만 가구 정도로 70년간 전쟁을 하고도 멸망 당시 70만 가구를 찍은 고구려가 실제로 더 많았다. 인구로 보나 보여준 군사력으로 보나 국서를 읽은 평원왕은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3. 미래에 펼쳐지는 전개로 보나 과거 전적으로 보나 명백한 허세다. 수나라의 전신인 북주가 불과 몇 년 전 고구려에 친정 갔다가 회전에서 패배한 전적이 있는데 당시 현장을 직접 지휘했던 평원왕으로서는 입이 근질근질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북주 무제와 수문제는 사돈 사이고 나란히 화북과 강남을 통일한 기세를 몰아 고구려에 싸움을 걸다가 패배한 점도 비슷하다는거...
  4. 수나라에는 정예보병이 50만이 있었는데, 이중에서 임유관 근처에 있던 정예보병 10만명 중 8만명이 착출되어 원정군에 편성되었다.
  5. 무왕시기 발해-당나라 전쟁에서 당의 부탁을 받은 신라의 대군이 동장군에 별 소득도 없이 퇴각한 사례도 있고, 독소전때 소련군 주력을 대부분 섬멸하고 모스크바를 코앞에 둔 독일군이 라스푸티차에 발목이 잡혀 러시아에서 혹한을 맞은 사례도 있다.
  6. 《삼국사기》에서는 600년 1월 한 해 밖에 확인이 되지 않는다.
  7. 명나라와 베트남의 전쟁에서 베트남이 700만 대군을 동원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건 반박 증거도 충분한 명백한 뻥튀기다.
  8. 참고로 소수 학자들은 113만이라는 규모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는 제대로 논의조차 안된 완벽한 소수설이다. 당장 링크를 봐도 1군=2만명을 가정하고 있지만 살수대첩 당시 수나라 9군이 30만명이라는 반례가 존재하는 등 허점이 많다.
  9. 장거리 원정의 최대 약점이 바로 이것이다. 수송부대도 이동하면서 보급품(식량, 사료, 석유 등)을 소모하기 때문에 실제 최전선의 전투부대가 요구하는 분량의 몇배를 실어날라야 한다. 실제 2차대전때도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군은 초반에는 쾌속진격을 했지만, 나중에는 석유보급트럭이 최전선까지 가는 동안 적재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석유를 사용하는 코메디가 벌어졌다. 노르망디 항구에는 본국에서 가져온 석유가 산처럼 쌓여있는데, 최전선에선 석유가 없어서 진격이 정지되버렸다.
  10.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
  11. 아무래도 이건 사실로 보이는 것이, 얼마 후에 벌어지는 여당전쟁 중에 요동성이 함락되었을 당시 당군한테 맞서 싸우다가 죽은 사람이 만여 명, 체포된 병사가 만여 명, 그밖에 주민이 남녀 4만 명(신당서에 의하면 4만가구), 성 안의 양곡이 50만 석이었다. 당장 여기 나오는 숫자만 합쳐도 최소 6만, 최대 3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성 안에 있었다는 뜻이니 어느 쪽이든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의 대도시였던 셈.
  12. 그러나 후에 벌어지는 여당전쟁 당시에는 당태종이 침착하게 두들겨대는 통에 무너지는데 여기서 수당 지휘부의 삽질 여부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13.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모든 전쟁 내내 압도적인 숫적 열세 속에서 수나라 군대와 싸워가며 아득바득 이겨 나갔다. 이러한데, 멀쩡한 사료까지 있는데도 고작 숫자만 보고 과장 운운하는 게 정말 타당할까?
  14. 한국사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냉병기시대에 야전에서 이렇게 많은 군대가 섬멸당한 사례가 많지 않다. 심지어 전투인원의 30%만 손실을 봐도 군사학적으로는 전멸에 가까운 패배라고 하는데, 수나라 군대는 99.9%의 손실을 보였다. 물론 다죽진 않고 아마 수십만명이 포로로 잡혔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전투 하나로 통일 제국 하나가 무너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장 요나라귀주에서 정예 전투병 10만이 몰살당하자 대륙에서 패권을 상실하고 만다.
  15. 그나마도 다시 고구려가 수복했는지 나중에 당태종의 수군이 함락한 성 또한 비사성이다.
  16. 여담으로 삼국유사에는 이때 사신의 행렬에 섞여 온 사람 하나가 쇠뇌를 수양제의 가슴에 쏘고 달아났다는 내용이 있다.
  17. 곡사정을 돌려보내는 식으로 저자세를 보이는 정도는 이제 그리 신선하지도 않은 퍼포먼스였다. 선대인 수문제가 쳐들어왔을 때부터 고구려가 줄기차게 해대던 것이었고 수나라도 붕어가 아닌지라정말? 이걸 모르지는 않았기에, 일단은 힘에 부쳐 돌아가다가도 기회만 나면 또 쳐들어오기를 반복했다. 이러니 이것을 두고 정말로 '고구려의 한계점'까지 논하기는 좀 부족하다. 게다가 고구려 입장에서는 고구려왕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대륙을 먹어보자는 마음을 품은 야심가가 아닌 이상, 굳이 대국인 수나라와 계속해서 전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
  18. 뭐를 좀 이루고 나서나 말을 했더라면 그럴싸한데 그 오랜 시간 동안 그 많은 병력을 들이 부어가면서 얻어낸 게 비사성 하나 잠깐 먹은 거 뿐이다. 그거 빼고 고구려는 좋은 의미로 달라지지 않았고 수나라는 나쁜 의미로 달라졌어요(...). 더군다나 이 내호아라는 장수는 이미 고건무를 상대로 500 대 40000이라는 압도적인 숫적 우세를 점하고도 쳐발려버린 전적이 있다. 아무리 기습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일단 사료 상에 드러나는 바에 따르면 심히 병맛 나는 능력치를 가진 장수고, 빈말로도 결코 좋은 말은 해줄 수가 없는 그런 인간이다.
  19. 이전 사학계에서는 고구려와 고구려현이 동일한 국가명으로 취급했었으나, 현대에서는 다른 개념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