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전쟁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신라가 이룩한 삼국통일의 위엄을 기리고, 나아가 대한민국남북통일에 의지와 염원을 밝히는 목적으로 1977년 건립된 통일전(統一殿)의 기념비. 순서대로 태종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기념비다.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는 장소여서 초·중등학생들의 통일이념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남산 칠불암과 전망대로 오르는 등산로도 설치되어 있다.

“과인의 시대는 운이 어지러울 시기에 속하고 때는 다투어 싸우던 때였다.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자들을 치고 협조하는 자들을 불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부자의 오랜 원한을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두루 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벼슬에 통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살게 하였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살펴주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이 풍족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언덕과 산처럼 쌓였고 감옥에는 풀이 무성하게 되니, 혼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스스로 여러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고 다시 심한 병이 되었다.

운명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갑자기 긴 밤으로 돌아가는 것에, 어찌 한스러움이 있겠는가?"


문무왕의 유언. 삼국사기 제7권 신라본기 제7 三國史記 卷第七 新羅本紀 第七.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가, 이제는 장하게도 한 집이 되었다."

최치원, 지증대사적조탑비문(智證大師寂照塔碑文)
중장기병 전투도 ─ 삼실총(三室塚), 5-6세기, 중국 길림성 집안현

한국 고대 삼국시대 말기, 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결과 그로 인한 신라의 삼국통일과정, 그리고 이 과정 속에 중국통일 제국들과 일본, 북방 유목민족, 넒게 보면 티베트에 이르기까지 얽힌 전쟁, 전투외교에 대한 총괄적인 항목.

목차

1 개요

한국사에서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끼친 사건 중의 하나.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한국사에 있어서 삼국시대의 삼국이라고 하면 위에 쓴 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를 말하지만, 사실 엄밀히 따지면 삼국만이 남아있던 시대는 562년 ~ 660년 뿐, 고작 100여 년이다. 그러나 이 수많은 국가들 중 율령제를 통해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세 나라뿐이므로 삼국시대라는 단어 자체는 타당성이 높은 편이다.[1]

그리고 바로 이 시기, 완성된 중앙집권국가인 삼국은 그 이전보다 훨씬 치열한 규모로 전쟁을 벌였고, 이는 결국 상대 나라의 멸망과 분열로 이어져 삼국시대의 종말, 그리고 통일신라 혹은 남북국시대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삼국통일전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삼국의 사회적 변화와 국가적 발전의 귀결인 동시에, 동아시아 국제전의 면모를 띠었던 전쟁이었다. 삼국 외에 탐라나 중국의 , 제국과 일본의 (倭)가 직접적으로 참여했으며, 돌궐, 철륵(鐵勒), (奚) 등 북아시아 유목종족이 당군의 일원 등으로 동원되어 참전하였다. 거란말갈의 일부는 고구려에, 일부는 당에 가담하여 전투하였다.

그리고 몽골 고원의 유목민 국가인 설연타(薛延陀)는 직접 개입하여 한반도 혹은 만주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지만, 고구려와 연결하여 당에 대항하는 정책을 취해, 오르도스(ordos) 방면에서 당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직접 군대를 파견하여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토번(吐蕃)의 발흥은 이 전쟁의 추이에 바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삼국통일전쟁은 가히 파미르 고원(Pamir Plat) 이동 지역 대다수의 나라와 종족들이 직·간접으로 관계된 국제전이라 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각국의 정세 변동은 직·간접적으로 크든 작든 삼국통일전쟁의 진행에 영향을 미쳤다. 임진왜란과 더불어 동아시아 대전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국제 전쟁.

이 삼국통일전쟁과정은 한국사에서 매우 많이 논의되었던 연구 주제이고, 세세한 부분에 대한 논의는 물론이고 심지어 기본적인 개념 설정에서부터 국내외 여러 학자들이 키배 논쟁을 벌이고 있다.

2 '삼국통일' 이란 개념이 성립하긴 하는가?

구체적으로 삼국통일전쟁에 관한 그간의 논의를 살펴보면 많은 경우 논지 전개의 기저에는 '민족'이라는 화두가 깔려 있고 그것을 둘러싸고 다양한 시각이 교차하고 있다. 그것은 '삼국통일' 개념이 성립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논란으로 집약되어 표출되고 있다. 비단 남한 학계 만이 아니라, 남북한 학계 간, 한국학자와 외국학자들 간의 상이한 역사 인식의 틀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외 학계에서는 삼국통일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널리 사용되지만, 동시에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 개념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퍼져 있다. 후자는 다시 그 안에 여러 갈래의 시각이 있다. 그 하나가 민족주의 사학의 일부 입장에서 신라의 통합을 삼국통일이라 볼 수 없다는 주장이라면, 다른 한 주장은 민족주의적 시각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삼국통일 개념은 그 전제와 사실 파악이 잘못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근래 중국 학계에선 중국 고구려사 시각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은 성립할 수 없는 그릇된 가정이라고 강변하고 있다(다만 '삼국통일' 부정론은 중국만의 주장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삼국통일을 둘러싼 이런 상이한 주장들은 전문적인 학자들간의 논의를 넘어, 한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는 역사인식의 차이를 반영하는 면이 있다.

2.1 '신라 통일론'의 전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는 주장을 처음 제기한 것은 신라인들이었다. 삼국을 통일하여 한 집안을 이루었다는 삼한일통의식이 그것이다. 이런 의식은 7세기 종반에 등장하였다.

신라 조정은 668년 평양성을 공략한 후 곧이어 고구려 유민들의 반당 부흥 운동을 지원하였고, 고구려 유민 집단을 금마저(오늘날의 전북 익산)에 안치하고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이 '고구려'는 684년에 해체되어 신라에 완전 흡수되었다. 그리고 백제의 주민과 지역은 669년부터 벌인 당과의 전쟁을 통해 완전히 병합되었다. 이는 신라 조정이 삼국을 통합하였다고 자부하는데 객관적 요소가 되었다.

신라 중대 왕실은 삼한일통을 그 정통성의 근저로 삼아 강조하였다. 신문왕 대에 당의 사신이 무열왕의 시호 태종당태종과 같다며 바꿀 것을 요구하자, 무열왕이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위업을 달성하였음을 들어 거부한 사건이나, 혜공왕대에 행한 5묘제에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한 대공을 세운 임금'이라며 태조 격의 불천지주(不遷之主)(영원히 제향을 받드는 임금)으로 종묘에 모신 것은 그런 면을 말해준다.

삼한일통의식은 주요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신라 조정은 전국을 9주로 나누었는데, 소백산맥 이남 지역을 신라 영역으로 설정해 3개 주를 설치하고, 옛 백제 지역에 3개 주, 한강 유역 등을 고구려 남계라고 하여 3개 주를 두었다. 그리고 왕 직속의 중앙 군단인 9서당(九誓幢)을 만들면서 고구려인으로 3개, 백제인으로 2개, 신라인으로 3개, 말갈인으로 1개 서당을 편성하였는데, 이 또한 같은 의식이 배경이 되어 행해진 조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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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신라인들의 일통삼한의식은 다름 아닌 발해의 등장으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였다. 발해는 건국 직후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이에 신라 조정은 대조영에게 대아찬(大阿飡) 관등을 수여하였다. 이 대아찬은 신라의 17등 관등에서 제5등에 해당하는 진골에 준하는 대우를 한 셈인데, 당시까지 신라는 발해의 실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을 것이다.

이런 신라의 대접에 발해에서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알 방법이 없으나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을리는 만무하고, 신라가 당나라의 요청으로 발해를 공격하여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2] 그런 가운데서도 양국은 시종일관 대결만 하지 않고 적잖은 교류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가운데 발해의 이러저러한 정보를 입수했을 것이다.

가령, 발해가 일본과의 교섭에서 자국을 고려라 자칭하였던 사실 등이 신라에게도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다는 것은 곧 신라 조정이 자부하던 삼국통일론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신라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야 기록의 부재로 알 방법이 없지만, 삼한일통의식이 신라 지배층에서 계속 견지되었음은 신라 하대의 금석문(金石文) 등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그 중 하나인 890년에 세워진 월광사(月光寺) 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에서는 "지난날 우리 태종 대왕께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무력과 예로서 삼한을 일통할 때에……" 운운하였다. 그리고 924년에 세워진 최치원(崔致遠)의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 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과연 여·제(麗濟)를 크게 무찔러서 재앙을 제거하도록 하며, 무기를 거두고 경사를 칭송하게 하니,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가 이제는 장하게도 한 집이 되었다.

어느 면에서는 발해가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여 신라의 일통삼한론에 도전하고, 당나라에서의 쟁장(爭長) 사건[3] 등으로 신라를 압박함에 따라, 신라 지배층에서는 신라 통일론을 더 강조하게 되었고, 아울러 발해를 말갈의 나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나타났을 수 있다.[4]

이후에도 12세기에 간행된 삼국사기는 신라의 삼국통합 사실을 긍정하고 있으며, 15세기 조선(朝鮮) 초기에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은 변화된 면을 보여주었다. 동국통감에서는 고조선에서 비롯하는 일원적인 역사체계를 정립하여 삼국유민의식 청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서의 구성에서 삼국기에 이어 신라기를 설정하여 삼국 병립기와 문무왕대 이후의 통일기를 명확히 구분하였다. 즉,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하고 그 의의를 뚜렷이 인식했던 것.

신라 통일론을 긍정하는 동국통감의 구성은 그 뒤 조선 시대의 각종 사서에 기본적으로 이어졌다. 18세기의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서인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도 '신라통일도'를 실어 신라통일론을 이어갔으며 발해사는 부록처럼 취급하였다. 통일 이후 신라를 정통으로 처리한 것은 조선 후기 강목체 사서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

신라 통일론은 20세기를 통해 비판이 많이 제기되었어도 꾸준히 견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한의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와 다수의 개설서에서도 신라의 삼국통일론을 취하고 있다. 그중에는 남북국시대론을 취하면서도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하는 서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통일론 비판은 역시 만만치 않으며 20세기 이후 민족주의 사학과 함께 이것이 심화되었다.

2.2 '신라 통일론'을 부정하는 여러 설

2.2.1 고려시대의 인식 - 고려의 진정한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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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金富軾)과 삼국사기(三國史記)

그런데, 신라 말 후삼국시대가 정립되고 이어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시대에 들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과는 다른 일통론이 제기되었다.

고려인들은 고구려와 신라 중 어느 나라가 정통인가, 바꾸어 말하면 고려 왕조가 어느 나라를 이었는가에 대해 두 가지 인식이 있었음은 많은 사람들이 논했던 부분이다. 고구려 정통론, 신라 정통론이 그것으로, 고려 왕조 개창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이들은 고려라는 국호가 말해주듯 고구려 정통론의 입장에 섰다. 그런데 실제에선 신라의 영역과 주민 및 문화가 고려의 주된 부분을 구성하였으므로, 자연히 신라 정통론이 제기되기 마련이었다. 두 정통론은 고려 중앙 정계에서 정치적 상황 전개에 따라 중요도가 높아졌다 낮아짐을 반복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왕조의 정통을 확립하는 방안이 앞 시대의 역사서를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고려 초기에 고려 이전의 역사를 정리한, 흔히 구삼국사(舊三國史)로 알려진 삼국사가 편찬되었고, 이어서 12세기에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재)편찬되었다. 두 사서 모두 삼국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고, 구삼국사의 내용은 윤곽이 전해지지 않지만,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신라 말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것으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는 역사인식이라면 삼국시대의 역사를 하나의 사서로 편찬하고, 통일 후에 신라의 역사를 따로 신라사라는 이름으로 편찬하여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삼국사(기)라는 책명으로, 삼국 초기부터 신라 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하였다. 이는 곧 진정한 삼국통일은 고려에 와서 이루어졌다는 인식의 반영 네놈들은 그냥 위대한 삼한일통의 대고려 앞에 있던 훼이크 보스일 뿐이지 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삼국 통합 사실을 전하고 있고, 견훤궁예를 반역 열전에 기술하여 신라 정통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책의 명칭과 구성에서, 고려 초 이래로 나려오던 '고려 통일론'의 틀을 전면전으로 거부하기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려 전기까지도 삼한일통의식이 가진 양면성이 청산되지 못함과도 관계가 있다.

즉 고려인들의 의식 기저에는 그때까지도 삼국의 주민을 아우른 차원의 통일체 의식과 함께 삼국별 분립적 역사계승의식인 삼국유민의식의 잔재가 남아 있었음을 의미한다.[5] 실제로도 무신정권기에 담양에서 이언년 형제의 백제 부흥 운동이, 서경에서 최광수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동경에서 이비·발좌 등의 신라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2.2.2 남북국시대론

첫번째 문제 제기는 신라의 삼국통일이 가져온 영토적 불완전성을 문제로 삼는 것이다.[6]

신라의 삼국통일론에 있어서 반대적인 시각으로 가장 먼저 지적된 것은, 영토의 불완전성 문제다. 조선 중기의 한백겸(韓百謙)이 대표적이며, 그의 글이 18세기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재인용되었다. 더욱이 같은 시기 발해고를 쓴 유득공은 남북국시대론을 최초로 주장하면서, 통일신라론을 정면적으로 부정하기에 이른다. 단재 신채호1908년독사신론에서도 신라의 통일은 반민족성과 비자주성에서 크게 비판받았으며, 이것이 민족주의적 입장에서의 "통일신라"개념 반대의 주류가 되었다.

영토의 불완전성 문제가 의외로 늦게 제시된 것은, 의외로 오랫동안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고구려의 강역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삼국사에 관한 논의를 보면 조선 초기에는 '고구려는 조선보다 작은 나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의 강역은 겨우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평안도, 황해도와 요동을 합친 정도'로밖에 파악하지 않았다.

이렇게 남북국시대를 깊이 추구하다 보면 결국 통일신라라는 명칭에 대해 거부감을 보일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7세기 말 이후의 신라국가의 명칭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남한 학계에서도 남북국론에 서서 후기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이 시기의 역사를 서술한 개설서 등이 출간되었다.[7] 자세한 내용은 남북국시대 참조.

이러한 견해 등에서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시각이 7세기 이전의 이른 시기에 한국 민족이 형성되어 있었고, 삼국이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식이다. 그런 인식에 의거하면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죄악의 행위이며, 그나마 온전히 통합하지 못하고 남은 일부가 따로 나라를 세웠으니, 이를 남북국시대로 규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2.2.3 후기 신라론

통일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던 공간과 집단들을 통합하거나, 원래 하나였다가 나누어진 여러 지역과 집단들을 다시 하나로 합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삼국인들이 주관적으로 서로를 외국인으로 간주하였고, 객관적으로도 서로 다른 존재양태를 지녀 하나의 동질적 족속이 형성되기 이전이었다면, 이 시기 역사상과 인물을 대상으로 '민족'을 기준으로 한 포펌이나 통일의 허실을 논하는 것은 민족주의 역사학의 자위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결국 '삼국통일'이라는 점도 후세인의 관념에 따라 만들어진 주장이므로, 삼국통일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식이다. 즉, 삼국 통일이 아니라 단순히 신라의 "정복"이라는 주장이다.

민족 근대형성설 입장에 선 논자들이 피력한 이런 개념은 삼국시대에 삼국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지 못하였고, 신라와 발해는 서로 이질적인 실체였다고 주장하면서, 7세기 후반의 신라를 통일 신라라는 말 대신 후기 신라로 명명하는 개념이다. 이는 남북국시대론에서의 후기 신라와 같은 표현이지만 뜻은 전혀 다르다.

8세기 이후 신라인들은 발해 지역을 이역(異域)으로 여겼고, 양자는 시종 대립적이었다고 보며, '말갈족의 발해'와 신라가 시종 대립적 관계였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견해에서 신라 삼국통일론은 부정되며, 더 나아가서 아예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일 자체가 거부되는 것이다. 남북국시대론도 이런 견해에선 설 자리가 없다.

북한 학계에서는 '후기 신라'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초기에는 신라가 당과 결전을 벌여 이를 몰아낸 사실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다가 1960년대 이후부터는 발해사를 강조하고 신라 통일론을 부정하였다. 나중에 가면 오히려 더 발해에 비중을 두는 식으로 전개가 되었다. 남한에서도 후기신라의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통일 이전의 신라는 '전기신라'라고 부르지 않느냐는 반박도 나오고 있다. (보통 후(後) 고(古)를 붙여 시대의 전후를 구분하지, 전기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는다.
예, 고구려-후고구려-고려)

2.2.4 '삼국' 불성립론

고구려사는 한국사에 속하지 않으므로, 삼국이라는 범주를 설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시각이다. 이 논리에선 한강 이남에 거주하였던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과 이들에 바탕을 둔 신라와 백제의 역사만이 한국사에 속한다는 것이다.[8]

중국 측의 주장은 전형적인 중국 고구려사론이다. 한강 이북 지역에 거주하던 예맥족(濊貊)과 관련된 고대 국가들은 모두 중국사 범위에 귀속시키며, 이들에 세운 부여나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사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에서는 자연히 삼국통일론을 부정하고, 한강 이북 지역을 중국의 역사영역으로 설정하는 식의 역사관을 내세웠다. 이 역시 신라 통일론을 부정하는 논리이다. 물론 남북국시대론도.

반면 서강대학교 사학과의 김한규는 다른 입장에서 '삼국'을 부정한다. 김한규는 기본적으로 현재의 만주 및 한반도 북부에 '요동'이라는 별개의 '역사 공동체'가 존재했다고 주장하며, 고구려가 이에 포함된다고 본다[9]. 따라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같은 소속감을 갖는 '삼국'으로 묶는 주장은 부당하며, 고구려는 발해라는 또 다른 '요동 국가'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한국 학계나 중국 학계 모두에서 큰 지지를 받지는 못하는 주장이다.

3 삼국통일전쟁은 언제부터 시작하였나?

삼국통일전쟁은 삼국의 성장에 따라 삼국 사이에 벌어진 장기간의 전쟁, 대립인 동시에 동아시아의 많은 나라와 종족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국제전이었기 때문에, 긴 기간에 걸쳐 전개된 만큼 어느 시기를 끊어 삼국통일전쟁기로 설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삼국통일전쟁 시기를 서술하려면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어느 시기를 정해 전쟁기로 특정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이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발표되었다.

3.1 4세기 후반설

4세기 전반 낙랑, 대방군(帶方郡)이 소멸된 뒤, 국경을 접하게 된 고구려와 백제가 옛 중국 군현 지역 지배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쟁을 벌인 데서부터 통일전쟁의 시작을 설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당시 양국은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체제의 구축을 지향하였으며,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와 주민을 중앙정부가 직접 장악하여 통치하려 했다. 이런 영역 국가체제로의 발전에 필연적으로 고구려와 백제 간에 더 많은 영토와 주민 획득을 위한 상쟁이 벌어졌고, 신라도 뒤이어 영역국가체제로 발전해 이 대열에 참가하게 되어 삼국 간의 혈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많을 때는 수만 명이 동원되던 대규모 전쟁은 막대한 인력과 물자의 징발을 요구했고, 이에 부응하기 위해 삼국은 조직력, 동원력 확충에 거의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 과정 속에 새로운 야철 기술 보급, 수리시설 확충 등의 생산력 정진에 성공하고, 관등제 정비, 중앙관서조직과 지방제도 확충이 이루어지는 등 중앙집권적 영역구가체제로의 진전이 있었고, 삼국통일은 4세기 중엽 이후 장장 3백여 년에 걸쳐 벌어진 움직임의 산물로 보아야 하며, 이 과정 속에 한국 고대사회가 중세 사회로 전환하였다고 보는 시각이다.

즉, 이러한 담론에서 삼국통일전쟁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고대에서 중세로 전환하는 진통이었다는 것이다.[10] 통일신라 시기를 중세로 볼 수 있느냐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이 점은 삼국통일전쟁의 근본적 동인을 삼국사회 내부의 변화와 발견에서 찾은 견해로서 거시적 관점에서 통일 전쟁의 역사적 성격을 조망하는 부분이다.

3.2 6세기 중엽설

삼국 간의 전쟁이 6세기 중엽, 그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어 통일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시각이다. 즉, 신라가 관산성 전투 등으로 한강 유역과 가야 지역을 영역화함에 따라 삼국의 역관계에서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고(대표적으로 나제동맹의 붕괴), 이는 6세기 중엽 이후 전쟁은 성숙된 집권국가들 간의 격렬한 쟁패전으로 이어졌으며, 일방의 군사적 승리는 즉각 상대국 내부의 질서를 위협하는 주요 동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역지배의 강화에 따른 삼국의 새로운 전쟁 양상이, 수·당 왕조의 출현 이후의 변화와 결부되어 국제적인 대전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식이다.[11]

이 설은 주요한 역사적 진전의 동인을 삼국 내부의 발전에서, 구체적으로는 영역국가체제로의 발전에서 찾은 견해로, 내재적 발전론 시각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는 첫번째 설과 동일하다. 실제 신라의 6세기 대약진은 삼국의 역관계에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항이었다. 그리고 신라가 뒤늦게 이 무렵에 영역구가체제를 구축함에 따라, 삼국 사이의 전쟁의 양상도 더 많은 영토와 인민의 쟁취를 위해 대규모화하고 빈번해지며, 전쟁의 결과가 한 국가나 집권세력의 안위와 직결되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이미 그 전부터 영역국가체제로의 진전을 계속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4세기나 5세기가 아닌 6세기 중엽설을 내세운다면 이는 통일전쟁의 승자인 신라의 처지에서 그렇다는 것이 된다.

이 시각의 또다른 하나는 신라사를 보는 범위에서, 신라의 국가적 기반을 확립한 것은 다름 아닌 진흥왕(眞興王) 시대였으므로, 통일의 기반도 이 시기(540 - 576)에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12]

이러한 시각에 따른다면, 통일전쟁사의 시작은 한강 유역과 낙동강 서안을 차지한 진흥왕대의 팽창이 그 시점이다.

3.3 중국 통일 제국의 등장에서 찾는 설

(隋) 제국

통일된 중국 제국의 힘은 그야말로 가공할 만하며, 그 제국들은 지구 역사를 통틀어서도 항상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보였다. 한국의 삼국시대가 펼쳐지던 시기, 중국은 대부분의 시기를 서진(西晉)의 멸망 후 온갖 이민족들이 난립하고 끝없는 내부 전쟁이 벌어지던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로 이어졌고, 직접적으로 고구려 등에 군사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던 화북의 국가들은 오호십육국 시대 등의 대혼란으로 상대적으로 군사적인 위협이 덜했다.[13]

하지만 화북을 통일한 국가인 북위(北魏)가 등장하자, 그것만으로도 고구려는 상당부분 국제적인 정책을 수정해야만 했다. 북위가 남조유연(柔然) 등을 상대하는게 더 먼저였음에도…… 하물며 남조까지 병합하며 결국 300여 년만에 중국 통일을 이뤄낸 통일 제국들의 등장은 중국의 주변 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날릴 수밖에 없는 초대형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3.4 642년설

642년 이후의 일련의 상황 전개가 삼국통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에 토대를 두는 주장이다.

642년 7월, 백제의 의자왕이 친히 신라의 낙동강 서쪽 40여 성을 공략하였고, 8월에는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대야성(大耶城)을 공략하였다. 이듬해인 643년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서해안 주요 항구인 당항성을 공격해 당과의 교통로를 차단하려 하자, 신라가 급히 당에 구원을 요청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어 신라와 당이 동맹으로 연결되어, 백제 멸망과 고구려 멸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한편 642년 이후 일련의 상황 전개는 562년 대가야를 멸망시킨 뒤 유지되던 신라의 가야 지역 지배권과 기존 삼국 관계를 뒤흔드는 것이며, 왜국에도 외교노선을 둘러싼 갈등을 표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아, 이 해를 특히 주목한 논고들이 발표되었다.

즉 당 제국의 출현에 따른 동아시아 국제관계 재편 파장 속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삼국 관계의 갈등과 연결되고, 또 왜국의 동향과 연결되는 계기로 642년에 주목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4 전쟁의 서막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작점을 설정하는 부분에서만도 수많은 주장과 논의들이 있다. 본 항목에서는 편의성과 집약성 등을 위해 고구려-수 전쟁 시점부터 이야기를 전개한다.

4.1 남북조시대의 종결과 수 제국의 탄생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

팔왕의 난과 그 뒤를 이어 밀려든 이민족으로 서진 제국이 붕괴되고, 화북에서 이민족 국가들이 끊임없이 서로 죽고 죽이며 헬게이트가 벌어진지 장장 300년만에 마침내 중국은 통일의 시기를 맞이했다.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지지만 않았다면 훨씬 빨라졌을 수도

북위는 강력한 힘으로 화북을 통일하면서 혼란이 어느정도 정리되고 남북조시대가 개막하였다. 하지만 북위는 남조를 정벌하는 데 실패하였으며, 동위/서위로 분열하였다가 다시 왕조가 교체되면서 북주와 북제가 건국되었고, 강성해진 북주가 무제(武帝) 시절에 북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무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망하고, 후계자인 선제가 몰락하면서 틈을 보던 양견이 제위를 얻어내고 마침내 수나라를 건국하였다. 수문제 양견은 남조의 마지막 왕조 (陳)을 멸망시키고 건강진숙보에게 항복을 받으면서 남북조시대를 끝냈다.

이제 수문제는 장장 300여 년만에 중국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것이었다. 게다가 검소한 절약가였던 그는 소위 개황의 치(開皇之治)라고 칭송받는 뛰어난 정치를 펼쳐,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져있고 지쳐있던 백성들에게 여유와 희망을 주었고 수나라의 재정의 부유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번영하게 되었다.

게다가, 수는 국제적인 행보에서도 성공 일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 영역을 모두 합치면 카스피해에서 바이칼호내몽골에 이르는 실로 광활하고 강력한 힘을 지녔던 돌궐을 두 개로 완전히 붕괴시켜버린 것도 수나라의 외교책이었다.[14]

당연하게도, 그 여파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삼국에게도 밀려들어왔다.

4.2 고구려의 반응

수나라가 내부의 엄청한 힘을 외부로 돌리기 시작한다면 당장 개피를 보는 것은 물론 고구려였다. 중흥군주였던 평원왕은 수나라가 진나라를 멸하자마자 방어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에 수문제는 노하여 ""왕이 요수(遼水)의 넓이를 말하나 어찌 장강(長江)만 하겠으며 고구려 인구의 많고 적음이 진(陳)만 하겠는가?"라고 '[15]표문을 보내는 등 고구려를 위협하였고, 이 와중에 평원왕이 사망했다.

새로 즉위한 영양왕은 속말갈이 수나라에 포섭되는 등에 더이상 사태를 좌시할 수 없었고, 이에 말갈거란등을 동원해 요서임유관을 선제 공격했으나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韋沖)에 의해 격퇴되었다. 문제는 이제 수나라의 반응이었다.

4.3 백제의 움직임

앞서 598년 무렵, 백제 위덕왕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고, 스스로 군도(軍道)가 되기를 요청하였다. 이건 고구려 좀 어떻게 해주라는 움직임에 가까운데, 당시 수문제는 이미 전투에서 성과라곤 없이 철수하고 난 상황. 그래서 이런 식으로 대답하였다.

"왕년에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신하로서의 예절을 갖추지 않았기에 장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였는데, 고원(高元)의 신하들이 겁을 내며 잘못을 시인하기에 내가 이미 용서하였으니 그들을 칠 수는 없다."

《삼국사기》벡제본기 三國史記 卷第二十七 百濟本紀 第五

이에 고구려가 그 사실을 알고 화가 나 백제의 변경을 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백제는 무왕 시대에도 자주 수나라와 연락하였고, 607년에는 좌평(佐平) 왕효린(王孝隣)을 보내 다시 한번 고구려 공격을 제안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또한 신라 변경에 대한 집요한 공격 등이 성과를 내었고, 혜왕법왕으로 이어지는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국제 무대에 뛰어든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4 신라의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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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역시 백제와 마찬가지로 수나라의 개입을 바라고 있었다. 진평왕(眞平王) 시절 신라에 대한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이 가중되었다. 602년에는 백제가 아막성(阿莫城)을, 불과 1년만인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605년 8월에는 역으로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보기도 했지만 608년 2월에는 백제가 고구려 변경을 침략하여 8천여 명을 잡아가 버렸다. 다시 2개월 뒤인 4월에는 고구려가 우명산성(牛鳴山城)을 공략해서 함락시켰다. 611년 음력 10월에는 백제 군대가 가잠성(椵岑城)을 100일간 포위한 끝에, 결사항 전을 한 찬덕(讚德)이 죽고 성이 함락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견딜 수가 없었던 신라는 611년, 수나라와 연락하여 군사를 청하였고, 수양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611년 2월, 마침내 수양제가 움직였다.

자세한 전황에 관해서는 고구려-수 전쟁 항목 참조. 간단하게 결과만 놓고 보자면 수나라의 망했음다. 특히 2차침공에서는 113만 3천 8백 명을 끌고왔는데도 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아 씨바 할말을 잃었습니다

4.5 전쟁의 결과

수나라는 수문제, 수양제의 2대에 걸쳐 고구려와 싸웠으나 결국 패하였다. 특히 30만 대군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살수대첩이 가장 뼈아팠다. 이미 수양제는 대운하 등의 토목공사로 민심을 잃었고, 각지에서는 군웅들이 들고일어났다. 결국 수양제 자신도 고구려 원정 당시 육군 대장 중 하나였던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에게 피살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한편 장안으로 입성해 수양제의 손자인 공제에게 양위받은 태원유수(당국공) 이연당나라을 세움으로써 수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수 제국이라는 대적을 물리쳤다. 그러나 고구려 역시 4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인하여 국력을 크게 소진하였고 무엇보다 통일된 중국 왕조의 엄청난 국력을 몸소 실감하게 되었다. 때문에 영양왕이 사망한 후에 그의 뒤를 이어 영류왕이 된 고건무는 당나라와 화친을 맺는 등 중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는 시작일 뿐이었다. 다음 상대는 수나라보다도 가공할 만한 적이었던 것이다.

5 또다른 서막

5.1 당 제국의 성립과 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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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

수양제의 폭정과 대운하 공사, 무리한 고구려 원정 실패 등으로 중국은 엉망이 되었고,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여 호시탐탐 천하를 노렸으나 이세민은 20대의 나이에 왕세충(王世充), 두건덕(竇建德) 등을 모두 격파하여 단숨에 중국을 통일시켰다. 그후 위징(魏徵), 방현령(房玄龄), 두여회(杜如晦) 같은 명신과 이정(李靖) 같은 명장의 도움을 얻어 순식간에 분위기를 일신했다.

비록 국력으로 따지면 당나라는 수나라 전성기에 비해 훨씬 동원력 등에서 뒤떨어졌으나[16] 그 지도부의 능력이나 판단력에 있어서만큼은 비교도 안되는 능력을 지녔던 것이다. 당나라의 시선이 동쪽으로 향하면서 다시 한번 전운이 감돌게 된다.

영류왕이 고구려의 국왕으로 즉위할 무렵, 당태종은 신강성 투루판에 위치한 고창국을 멸한 뒤, 위징(魏徵) 등의 반대를 뿌리치고 주현으로 편제하여 당 조정이 직접 지배하는 영역으로 삼았다. 고창국 멸망은 곧 당 제국의 북부와 서부에 있던 세력들이 모두 당에 복속되었음을 말한다. 이제 동으로 바다에 이르고, 서로는 언기(焉耆), 북으로는 사막, 남으로는 임읍(林邑)에 이르는 지역이 모두 당의 주현으로 편제되었다. 이제 당은 무릇 동서 9천5백10리, 남북 1만9백19리에 달하는 대제국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한편, 서남의 티베트 방면에 대해서도 당은 641년 공주를 하가(下嫁)하는 등 회유책을 써서 안정을 꾀하였다. 게다가, 당나라 명장 이정은 628년, 동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격파하고 동돌궐을 완전히 멸망시켰으며, 몽골고원을 제압하였다. 이에 당의 위세에 압도된 유목민 집단들은 630년, 당 태종을 유목 세계의 패자라는 뜻을 지닌 천가한(天可汗) 으로 추대하였고, 돌궐 패망과 함께 그간 돌궐의 세력에 예속되어 있던 거란, 해, 습(飁) 등 동부 내몽골의 홍안령 기슭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 민족들이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서북부 국경 일대가 당을 향해 정면으로 열린 셈이 되었다.

게다가 당나라는 티베트 고원 북편 경사면에 있던 토욕혼을 격파하였고, 고창국 격파와 더불어 서쪽으로 실크로드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제 당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당에 대적할 수 있는 정도의 나라는 오직 고구려만 남게 되었다.

(唐) 제국[17]

5.2 영류왕의 유화책

이렇듯 당태종이라는 걸물이 몰고 온 파장은 어마어마했고, 이에 고구려의 영류왕은 당태종에게 적극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영류왕은 태자를 직접 당으로 보내 지도를 헌상했으며, 당태종은 이러한 영류왕을 신하로 삼으며 이에 화답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침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때문에 당나라는 고구려에 사신 진대덕을 파견하여 영류왕과 소통하는 한편 은밀히 고구려의 지형지세를 살피며 첩보 작전도 벌였고 영류왕은 이를 알고도 넘어가면서 천리장성을 쌓으며 전쟁에 대비했다.

그 무렵, 반도 남부에서도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5.3 대야성의 참극

641년 3월, 백제의 무왕이 사망하고 의자왕이 즉위하였다. 의자왕은 궁정 내부의 문제를 정리한 뒤 곧바로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의자왕은 642년에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공략하였다. 단기간에 새로운 군주의 지도력을 과시하는 데는 전승 이상만한 것도 없으니……이후에도 의자왕은 계속해서 공세의 고삐를 조였다. 다음달 8월에는 신라의 대당 교통로인 당항성을 고구려와 협력하여 공략하려 하였으며, 장군 윤충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대야성은 신라의 낙동강 서쪽 지역을 전수하는 요충지였다. 백제는 무왕 대에 무산성과 속함성 등을 공략하여 소백산맥 이동으로 진출하였는데, 더 나아가 황강 유역의 대야성을 공략하려 하였다. 당시 대야성을 지키던 신라의 도독 김품석은 김춘추의 사위였다. 윤충이 이끈 백제병이 대야성을 포위하였는데, 대야성은 내부가 더 문제였다.

성주 김품석은 여색을 밝히는 색골이었고, 자신의 참모인 검일(黔日)의 부인이 예쁘다는 이야기를 듣자 NTR을 하였고, 이를 갈던 검일은 백제군이 성을 포위하자 창고에 불을 질러 호응하였다. 화염이 치솟고 민심이 흉흉하여 상황이 어려워졌는데, 죽죽(竹竹) 등은 끝까지 싸우자고 하였으나 김품석은 항복하여 목숨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도 여의치 않아서 처자식을 죽이고 자결하였다. 죽죽 등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대야성이 함락되자 신라 조정이 당혹스러워했다. 대야성 함락으로 백제군은 낙동강 본류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어, 신라의 본거지를 바로 위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울러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이 함락됨에 따라 낙동강 서안 옛 가야지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이 뿌리채 흔들릴 위기에 처해졌다. 그리고 김춘추는,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삼국사기》제5권 신라본기 제5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김춘추는 사위와 딸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몹시 곤궁해진 상황이 되었다. 대야성 성주 김품석의 입신에는 아무래도 장인인 김춘추의 영향력이 있었을텐데, 대야성 상실의 주요 원인이 김품석의 부도덕 행위이니 이것은 김춘추에게 큰 짐이 된다. 김춘추는 대안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번 사태는 일차적으로 백제의 공세로 벌어졌다. 즉, 해결하려면 백제를 압박해야 하는데, 당장 638년에도 고구려와 칠중성에서 격전을 벌인 바 있던 신라로서는 고구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바다 건너 왜는 신라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 해 10월, 마침 고구려에서 일대 파란이 일어났다. 연개소문의 정변이 발생한 것이다.

5.4 연개소문의 정변

冬十月 蓋蘇文 弑王

겨울 10월에 개소문이 왕을 시해하였다.


《삼국사기》제20권 고구려본기 제8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대신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가 대왕을 시해하고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 등 180여 인을 죽였다. 이어 왕의 어린 조카를 왕으로 옹립하였으며, 자기와 같은 성인 도수류금류(都須流金流)를 대신으로 삼았다.

일본서기》권20

642년 10월,[18] 평양에서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고위 귀족과 관인 180여 명을 살해하는 대규모 유혈 참극을 일으킨 것이다.

有蓋蘇文者, 或號蓋金, 姓泉氏, 自云生水中以惑衆. 性忍暴. 父爲東部 大人·大對盧, 死, 蓋蘇文當嗣, 國人惡之, 不得立, 頓首謝衆, 請攝職, 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嗣位. 殘凶不道, 諸大臣與建武議誅之, 蓋蘇文覺, 悉召諸部, 紿云大閱兵, 列饌具請大臣臨視, 賓至盡殺之, 凡百餘人, 馳入宮殺建武, 殘其尸投諸溝. 更立建武弟之子藏爲王, 自爲莫離支, 專國, 猶唐兵部尙書·中書令職云.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가 있는데, 혹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천씨이며, 자신이 물 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사람을 현혹시켰다. 성질이 잔인하고 난폭하다. 아비인 동부대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당연히 이어 받아야 했지만,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여서 이어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머리를 조아려 많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섭직을 청하면서 시켜보아 합당하지 않으면 그 때는 폐하여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뭇사람들이 불쌍히 여겨서 드디어 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 난폭하고 나쁜 짓을 하므로, 여러 대신(大臣)이 건무(建武)와 상의하여 죽이기로 하였다. 개소문이 이를 알아차리고 諸部의 兵을 불러 모아 거짓으로 크게 閱兵을 한다고 말하고, 잔치를 베풀어 大臣들의 臨席을 청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다 죽여버리니 무려 백여 명이나 되었다. 또 왕궁(王宮)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를 죽여서 시체를 찢어 도랑에 던져 버렸다. 이어 건무 아우의 아들인 장(藏)을 세워 왕으로 삼고, 자신은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막리지란 당(唐)의 병부상서 중서령(兵部尙書 中書令)에 해당하는 직위라고 한다.


신당서》권 220 동이열전 제 145 新唐書 卷 220 東夷列傳 第 145

신당서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동부대인이었고, 구당서 고려전에 따르면 서부대인으로 나온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의 동향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당나라 영주도독 장검(張儉)이 정변 발발 한 달 뒤인 11월에 보낸 보고문에서 '고려 동부대인 천개소문' 등등의 언급을 하고 있으므로 동부대인으로 보는게 더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를 보면 정변 전 연개소문의 위치는 동부대인으로 보인다.

노태돈은 동부대인이 '동부 소속의 대인' 이 아니라, '동부를 관장하는 장' 이라는 의미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대신들이 연개소문의 섭직을 거부한 것은 연씨 집안이 동부의 병권을 오랫동안 장악한데 대한 견제와 반발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결국 오랫동안 동부의 군병을 장악해온 연개소문 집안의 연고권과 위세를 부정할 수 없어, 그의 섭직에 동의하였다는 식이였다.

여하간에 이러한 귀족회의의 견제를 뚫어버리고 그 자리에 오른 연개소문의 세력은 오히려 더욱 강력해졌고, 그 기세에 위협을 느낀 귀족, 그리고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없애버리려고 했다. 또한 일본서기에서 연개소문은 '이리가수미'로 기록되고 있는데,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는 와중에 '이리거세사'를 죽였다는 언급에서 나오는 이리거세사는 같은 이리(伊梨) 씨로 보이며, 그렇다면 연씨 집안 내에서도 이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그해 초에 조정이 천리장성 축조의 감시역으로 연개소문을 임명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 시도는 연개소문을 지방으로 내려보내, 중앙 정계에서 격리시키거나 혹은 동부대신 직을 내놓게 하려는 등의 시도로 보이는데, 자신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자 연개소문은 열병식을 개최한다고 하면서 여러 대신과 고위 관인들을 초대하였다. 그러나 식이 열리자마자 정변이 시작되었고 왕궁까지 무자비하게 유린되었다.

수도에서는 정변과 함께 순식간에 반대파를 제압하고 보장왕을 옹립했지만, 지방 각지에 포진한 반대파들은 연개소문이 쉽사리 제거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물론 양만춘(楊萬春)으로 알려진[19] 안시성주였다. 그는 연개소문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다. 하지만 정국의 대세가 연개소문으로 기울자 연개소문은 현재 안시성주의 지위를 인정하고, 후자는 연개소문이 새로운 집권자임을 승복하는 선에서 절충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정세가 요동치는 와중에 남쪽에서 김춘추가 고구려를 찾아왔던 것이다.

5.5 연개소문과 김춘추

新羅謀伐百濟遣 金春秋 乞師不従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려고 김춘추를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삼국사기》제21권 고구려본기 제9 三國史記 卷第二十一 髙句麗本紀 第九
冬王將伐百濟以報 大耶 之役乃遣伊湌 金春秋 於高句麗以請師初 大耶 之敗也都督 品釋 之妻死焉是 春秋 之女也 春秋 聞之倚柱而立終日不瞬人物過前而不之省旣而言曰嗟乎大丈夫豈不能呑百濟乎便詣王曰臣願奉使高句麗請兵以報怨於百濟王許之高句麗王高臧素聞 春秋 之名嚴兵衛而後見之 春秋 進言曰今百濟無道爲長蛇封豕以侵軼我封疆寡君願得大國兵馬以洗其恥 乃使下臣致命於下執事麗王謂曰 竹嶺 本是我地分汝若還 竹嶺 西北之地兵可出焉 春秋 對曰臣奉君命乞師大王無意救患以善鄰伹 威劫行人以要歸 地臣有死而已不知其他 臧 怒其言之不遜囚 之別館 春秋 潛使人告本國王王命大將軍 金庾信 領死士一萬人赴之 庾信 行軍過 漢江 入高句麗南境麗王聞之放 春秋 以還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大耶)에서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이찬(伊湌)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서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에 대야가 패하였을 때 도독(都督)인 품석(品釋)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 곧 왕을 찾아 뵙고 말하기를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고구려의 왕인 고장(高臧)은 평소 춘추의 명성을 들었기 때문에 군사의 호위를 엄중히 한 다음에 >그를 만나 보았다. 춘추가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 백제는 무도하여 긴 과 큰 돼지가 되어 우리 강토를 침범하므로 저희 나라의 임금이 대국(大國)의 군사를 얻어서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그래서 신하인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왕이 말하기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의 땅이니, 그대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보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춘추가 대답하기를
“신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군대를 청하는데, 대왕께서는 어려운 처지를 구원하여 이웃과 친선을 하는 데에는 뜻이 없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신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고장이 그 말의 불손함에 화가 나서 그를 별관(別館)에 가두었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서 본국의 왕에게 알렸는데, 왕이 대장군(大將軍) 김유신 (金庾信)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유신이 행군하여 한강 (漢江)을 넘어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들어가자 고구려의 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놓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제5권 신라본기 제5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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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

이 당시 김춘추는 고구려 수뇌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양국이 그간의 항쟁을 중지하고, 나아가 고구려가 현재 백제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해있는 신라를 군사적으로 구원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보장왕이 죽령 이북의 땅을 원하자 김춘추는 거부했고, 이에 김춘추가 구금되자 신라 조정과 김유신은 분개하여 1만 명의 구원병을 이끌고 출격, 이에 보장왕은 김춘추를 석방시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보장왕의 태도는 연개소문의 태도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당시 김춘추의 의도에 대해서는, 정변이라는 유혈 내분을 겪고 현재도 불안정한 면이 있는데다, 당나라와의 긴장이 고조되는 고구려에 동맹을 청해, 주력을 당의 침공에 대비하게 만듦으로서 신라의 위협을 덜게 하려는 정도로 추측해볼 수 있다. 연개소문의 정변 사실이 신라에 알려지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며, 당나라와 고구려의 대립은 고구려의 십수 년이 넘는 천리장성 공사만으로도 파악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나라의 침입이 예상되는 이 상황에서 왜 고구려 조정은 제발로 찾아온 김춘추의 제안을 거부했을까?

642년까지 신라가 백제보다도 당나라와 '특별하게' 더 가깝다고 볼 근거는 없는데, 642년까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횟수는 되려 백제가 신라보다 더 많았다. 그런데 643년 신라가 고구려의 공격을 당에게 호소하며 구원을 요청해, 당이 상리현장(相里玄奬)이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수나라와 고구려와 싸우던 상황에서, 신라가 자신들의 뒤를 쳐서 땅 500리를 탈취했다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당시 신라가 딱히 고구려를 기습하여 확인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데, 연개소문이 말한 것은 광개토대왕시절 구원을 받고는 5세기의 나제동맹 성립과 동시에 고구려와 척을 진 것과 6세기에 고구려가 혼란에 쌓여있을 때 나제동맹이 한강유역까지 점령하고 일시적이지만 옥저-동예라인의 알짜배기인 함흥평야와 그 일대를 점령한 것을 가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여하간에 연개소문의 제안을 따른다면 신라 - 고구려 관계는 5세기 중반 이전의 형세로, 즉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신라와 협력하던 과거의 형세로 돌아가는 모양이 된다. 그리고 당나라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신라가 후방을 위협하는 문제는 백제와 왜를 이용해 신라를 충분히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삼국시대 말기,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두 거인의 회담은 이렇게 끝났고, 그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신라는 절망적인 고립 상태에 빠졌고, 결과적으로 자신들을 살려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 즉 당나라에 절대적으로 매달렸고, 이는 신라와 당의 군사적 동맹으로 이어졌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일단 고구려는 남과 북, 양쪽으로 적을 맞이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 당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신라는 의지할 곳이 없어져 당나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단순히 당나라와 고구려의, 백제와 신라의 전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동아시아 세계 모든 각국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끼치는 국제전의 성격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6 1차 고구려-당 전쟁

6.1 신라의 사신과 당나라의 전쟁준비

김춘추와 (실질적으로)연개소문의 회담이 결렬된 후, 고구려는 신라에 한층 압박을 가하였다. 또한 백제 역시 고구려와 연결하여 신라의 당항성을 공략하려고 하였다. 신라에 있어 당항성은 황해를 통해 당나라와 연결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고, 가뜩이나 고립된 상태에서 백제가 당항성을 차지하면 신라는 더욱 절망적인 늪으로 빠지게 된다.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신라는 당에 사신을 파견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당시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당나라 조정, 그리고 당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세 가지 방책을 제시하였다.

  • 첫째. 거란 말갈병을 동원,[20] 고구려의 서부 국경을 기습하는 안. 이 제안을 따르면 고구려가 방어에 주력할 터이고, 신라에 대한 공세가 중단될 것이며, 신라는 일년쯤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가 당나라의 주력이 공격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결국 안전해질 수 없을 터이다.
  • 둘째. 신라군에게 당나라군의 깃발 수천을 주어 성에 걸어놓게 하여, 백제와 고구려군을 놀라게 하는 계책. 훼이크 그야말로 단발성의 계책으로, 상식적으로 큰 효과가 일어날 것이라고 보긴 힘든 계책이다.
  • 셋째. 백제가 바다의 험함을 믿고 방어에 소홀할 것이니, 수백 척의 배를 동원해 바다를 건너 백제를 기습하게 한다. 그런데 신라의 왕이 현재 선덕여왕으로 여자가 왕이라 백제의 업신여김을 받고 있으니, 당 나라 종친 한 명을 보내 신라의 왕으로 삼고 당병으로 호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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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善德女王)

신라 사신은 이 세가지 제안 중 어떤 것이 좋냐, 하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당태종 입장에서 이 제안은 그 자리에서 막 나온 상당히 즉흥적인 제안인듯 하며, 실제로도 그저 한 차례 해프닝 정도로 끝나버렸다. 그런데 신라 입장에선 그렇지만도 않았는데, 특히 여자가 왕이라서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발언이 그것이다. 이는 나중에 벌어진 신라 내부의 난리와 어느정도 연관성을 찾을 수도 있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고 요청하면서 양국의 상황을 파악하고 명분을 쌓아올렸다. 전통적인 조공 책봉 관계로 보면, 제후국들이 서로 싸움을 벌이는데 천자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한다면, 천자가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셈이다. 연개소문은 이러한 당나라 사신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의자왕의 경우에는 겉으로는 일단 응하는 듯한 자세를 보였다. 고구려에 대해 당나라가 다시 한번 사신을 파견하여 압박하자 연개소문은 당 사신을 굴에 가두어버렸다.

이렇게 되자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당 태종은 드디어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근거로 고구려정벌을 천명했고, 연개소문이 정탐을 위해 보낸 관원들과 백금도 거부, 체포되었다. 모든 상황이 전쟁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당태종은 644년 7월 우선 영주도독 장검을 파견해 요동을 먼저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요하의 범람으로 요동의 정탐만 성공했다. 당태종은 가을동안 민심을 모으고, 11월 육군으로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기 6만과 난/하주의 유목민 항호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진군하게 하고, 수군으로 형부상서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4만3천의 군사와 500척의 함선으로 산동반도에서 출발해 바다를 건너 평양성을 공격하게 했다. 또한 자신이 친위대 6군을 거느려 친히 낙양에서 출격했다.

전황에 관한 더 자세한 사항은 고구려-당 전쟁 전쟁 항목 참조.

6.1.1 신라, 백제에 대한 당의 압박

또한 당태종은 644년 귀국하는 신라의 사신 김다수(金多遂)에게 국서를 보내어, 선덕여왕에게 신라군이 대고구려 전에 참전할 것을 요구하였다. 논란이 벌어졌는지 신라 조정에선 별다른 소식을 전하지 않았고, 당태종은 이듬해인 645년 2월 고구려 원정에 나서면서 다시 한번 조서를 보내어 당군이 4월 상순에는 고구려 경내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니, 신라군이 당의 수군대총관 장량의 절도를 받을 것이며, 장량의 주둔처에 신라 군관을 파견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편 백제 의자왕에게도 당나라의 조서가 도착하였다. 644년 말 무렵 백제 사신인 부여강신(扶餘康信)이 당나라에 파견되어 백제가 당나라의 명을 어기고 고구려와 협력하여 신라를 공격하지 않았다고 발뺌하고, 당나라 의원을 백제에 보내줄 것, 백제 학문승의 귀환 등을 요청하였다. 그에 대한 답신의 형태로서 당태종은 의자왕이 요청한 사항에 대해 조처하였음을 알리고, 대 고구려전에 백제가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동시에 신라에 파견하는 당의 사신이 안전하고 신속하게 신라에 도착하게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조서는 645년 초봄에 전해졌다.

그런데 이 조서에선 선덕여왕에게 보내진 앞의 조서와는 달리, 파병이 주요한 목적으로 다뤄지진 않고 여러 가지 사항을 포괄적으로 언급하였으며, 파병을 요청하면서도 당군이 언제 출병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여하간에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다. 그리고 첫머리에 백제가 고구려와 한편이 되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며 은연중에 백제를 위협하는 서술을 하였다.

이 조서는 오히려 신라가 대고구려전에 참전할 경우, 백제가 이를 공격하여 저지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백제를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6.2 설연타의 움직임

당군은 전역 초기에 엄청난 기세로 고구려군을 물리쳤으나 이내 안시성에서 발목이 잡히게 되었다. 그러한 때, 당나라에 있어 이변이 발생하였다. 그 당시 몽골 고원의 강자였던 설연타의 개입이 그것이었다.

설연타는 터키 계통의 유목민으로서 철륵(鐵勒)의 한 부족으로, 북방의 최강자였던 돌궐이 당나라의 힘에 의해 망해버린 뒤 강자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마침 고구려에 대해 당나라가 공격을 하게 됨으로서, 그 심장부인 관중 지대의 방어가 약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당태종 역시 그 사실을 알아 고구려 원정에 나서기 전에 설연타의 진주가한(進駐可汗)에게 사신을 보내 "내가 지금 고구려 작살내러 가는데, 그 사이에 쳐들어오고 싶으면 함 해봐."라는, 대단히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면서 돌궐 사람인 집실사력(執失思力)에게 병사를 주어 주둔하게 하여 설연타를 막아내게 하였다.

안시성 외곽에서 고구려 대군이 패배하여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해지자, 연개소문은 말갈 사람을 보내 설연타의 참전을 요청한다. 하지만 진주가한은 대단히 두려워했고, 당시 당태종이 천가한이라고 유목민에게 불릴 정도로 그 위망이 엄청났던 것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다. 그리고 진주가한이 곧 사망함으로서 고구려의 희망도 사라지는듯 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645년 9월, 진주가한이 사망하고 난 뒤, 발작(拔灼)이라는 인물이 다른 형제인 예망(曳莽)을 습격, 살해하고 새로운 가한, 다미가한(多彌可汗)으로 즉위하였다.

이러한 정황을 당군이 몰랐을 리가 없다. 새 가한의 동향은 의심이 대상이 될 만하고, 특히 고구려는 설연타와 동맹을 맺으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게다가 점점 겨울이 다가오면서 요동평야의 기온이 떨어졌고 풀이 시들고 서리가 내렸다. 주필산의 대패를 조금이라도 수습한 고구려가 보급로를 본격적으로 조여오면 더욱 답이 없어질 것이다. 결국 더 머뭇거리지 않고 당군은 전면적인 철수를 명령하였다. 아울러 공략한 요동성과 백암성·개모성 등 10개 성의 백성 7만 명을 함께 끌고 갔다.

설연타의 동향이 문제가 되는 만큼, 당군은 신속한 철군이 요구되었다. 당군은 추위 속에 요하 하류의 뻘밭을 통과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고, 고구려군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온갖 고생 끝에 당태종은 12월 14일 무렵 산서성 태원에 도착하였고, 그 사이에 설연타가 오르도스 지역으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에서 전인회(田仁會)가 급파되어 미리 파견되어 있던 집실사력과 힘을 합쳐 설연타 군대를 격파하였고, 퇴각하던 설연타 군은 재차 하주를 공격하였다. 이제 당군은 고구려 정벌이 문제가 아니라 설연타의 압박을 저지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 되었다.

이로서 1차 고구려-당 전쟁은 끝이 났다.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은 실패했다. 열흘만의 요동성 함락과 고구려 주력 15만을 무찌른 안시성 외곽 전투 등 수차례 승리에도 불구하고 안시성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함으로서, 당나라는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왔고 설연타와 싸워야만 했다.

당태종은 위징이 살아있었더라면 자신이 원정을 나서지 않게 하였을 것이라고 후회하였고, 조조곽가가지고 그런 드립을 쳤었지 이정은 강하왕 도종의 계획, 즉 오골성을 치고 평양성을 치는 계책을 써야 했다고 주장하였다. 여하간에 전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당태종은 패배를 설욕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다만 수양제와 같은 막무가내 원정을 계획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6.3 신라와 백제의 움직임

고구려군이 당군과 격돌하고 있었을 당시, 한반도의 남부 지역에서도 전쟁의 여파가 번졌다. 당태종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면서 신라에게 움직임을 요구했는데, 과거 수양제가 요구할 당시 신라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지금 신라에게 당나라 말고는 믿을 대상은 아무도 없었다. 당과의 협력 여부를 확실하게 표현하여야 하는 만큼, 신라 조정은 참전과 파병을 결정하였다. 신라는 이제 대외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반 고구려·친당의 선택을 내렸다.

645년 4월 당군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 침공을 감행할 때, 신라는 5월 무렵 신라는 북으로 임진강을 건너 수구성(水口城)을 공격하였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3만.

그런데 백제의 움직임이 문제가 되었다. 신라가 북진함에 따라 당연히 백제 방면의 수비는 약해졌고, 이에 백제군은 서부 국경선을 공격, 신라의 7성을 함락시켰다. 신라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카드인 김유신을 파견하여 대응하였고, 결국 북진하던 신라군은 더이상 작전수행이 불가능해져 백제군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주력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확실한 연합 작전을 벌였고, 백제는 당나라와 교전하진 않았지만 결과론으로 신라의 당에 대한 협조를 저지시켰으니 이는 당나라와 척을 지게 되는 셈이다. 이제 동아시아의 정세는 묘한 합종연횡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7 국제전(國際戰)

7.1 각자의 사정

645년, 당시 중앙아시아 - 동아시아에 가장 거대한 명성을 떨치던 인물인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을 실패하게 됨으로서 당나라의 위신은 크게 손상을 입었다. 하지만 패배에도 불구하고, 당나라가 아시아 국제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압도적인 강대국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대응책 마련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고, 당나라라는 차르 봄바핵폭탄의 여파는 백제와 심지어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자신들의 입장을 정할 것을 강요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가장 필사적으로 반응하였다.

7.1.1 당나라의 입장

1차 고구려 원정 실패 후, 당태종은 곧바로 설연타 정벌전에 착수했다. 토번의 세력이 절정으로 치닫기 이전에, 설연타야말로 당의 수도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는 점에서, 나중에 다시 고구려로 진격한다고 해도 설연타는 반드시 눌러놓을 필요가 있었다. 646년 6월, 당나라는 대규모 군단을 동원, 설연타를 대파하여 다시는 세를 떨치지 못할 지경까지 만들었다.

이어서 당태종은 고구려 원정 재개를 논의하였고, 일전의 대규모 군단으로 직접적으로 강대한 타격을 주는 전략에서, 소규모 부대를 이용, 해로나 육로로 고구려를 기습하고, 반격하면 치고 빠지는 형태로 소모전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647년 5월, 이세적은 3천의 병사와 영주도독부의 병력을 동원해 남소성 등 소하자 유역 일대에 기습적인 타격을 가했고, 성의 외곽에 불을 지른 뒤에 신속히 퇴각하였다. 7월에는 해군 1만여 명이 요동반도의 남쪽 해안지대로 침입하고, 고구려군은 물리친 후 석성을 공략하고, 적리성(積利城)을 공격하다가 퇴각하였다.

이듬해 648년 4월에는 당의 해군이 압록강 하구로 진입, 1백여 리를 거슬러 올라가 박작성(泊灼城)을 포위하였다. 고구려가 병사 3만을 보내어 강력하게 방어하려고 하자, 당군은 서둘러 철군하였다.

이러한 전황 속에, 당태종은 648년 8월 재차 고구려 원정 계획을 발표하였다. 30만 대군을 동원해 일거에 고구려를 무너뜨리겠다고 호언했고, 방현령이 이는 무익하며 시망인 일이라고 반대하였지만 무시당했다. 바로 그 무렵, 신라는 김춘추를 파견하였다.

7.1.2 고구려의 입장

전쟁이 끝난 후 고구려는 관계 회복을 위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당나라의 반응은 싸늘하였다. 그리고 647년 이후 실제로 당나라의 공격도 이어졌다. 대규모 침략에 앞서 고구려는 대제국 당나라에 맞설 우방을 구하는 것이 필요했다. 중국의 왕조를 견제할 최고의 파트너는 북방의 유목민족이었다.

문제는 그 유목 국가들이 없다 는 것이었다. 돌궐은 이미 진작에 박살이 났고[21], 설연타 역시 당에 깨진 후에 몽골고원의 여러 유목 민족들은 모두 당의 가공할 위력에 귀속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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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65년부터 3년간 이루어진, 사마르칸트(Samarkand) 시 교외에 있는 아프라시압 언덕의 궁전 유지 발굴에서 벽화가 발견되었다. 이 궁전 벽에는 소그드어로 와르흐만(Varkhman)이라는 왕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데, 벽화의 내용은 와르흐만 왕이 인근의 차가니안(Chaganian)국의 사절을 맞이하는 것이 주된 주제이고, 그 밖에 여러 외국 사절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벽화에 고구려인으로 여겨지는 두 명의 외국 사절이 있다.

이 사람들이 이곳에 왔던 시기의 정확한 연대 측정은 할 수 없다. 무슨 성과를 거두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최소한 7세기 후반으로 추정은 해볼 수 있고 고구려가 우군을 구하러 북아시아중앙아시아 방면까지 적극적으로 손을 뻗어보았다는 식으로는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650년대 전반부에 고구려는 당나라와 요서, 내몽골 지역의 거란족 사회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다투는 모습이 있는데, 당나라 쪽 기록에는 신문릉(辛文陵)이 이 지역의 고구려군을 제압하기 위해 이르렀다가 고구려군에 패배하고 위기에 처한 것을, 위대가(韋待價)와 설인귀가 이를 구출하였다. 655년에는 고구려 장수 안고(安固)가 거란 지역을 공격하였다가, 이굴가(李窟哥)에게 패배하기도 했다.

한편 고구려는 바다 건너 왜와의 연결을 공고히 하고,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에 대한 압박을 한층 가중하였다.

7.1.3 백제의 입장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선포하면서 백제에게 호응을 요구하자, 백제 조정은 당초에 이에 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645년 신라군 3만이 고구려 공격을 위해 북진하였을때, 되려 신라의 공백을 이용하여 서부 국경선을 공격하였고, 신라는 이를 막기 위해 황급히 퇴각하여 백제군에 대처하였다. 이는 백제가 고구려 편을 들어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백제가 배짱을 부린대로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고, 더욱더 판단에 확신이 들었는지 백제는 647년, 648년, 649년 연속으로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당나라의 공격은 고구려가 위에서 막아줄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혹은 고구려 측이 신라 견제를 위해 백제를 부추겼을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백제는 당나라와의 관계 파탄만은 피하려고 했는데, 651년에도 조공사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라에 대한 공세는 여전했고, 이런 형태 속에서는 결국 당나라와의 대결은 피할 수가 없었다.

7.1.4 왜국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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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쿠 덴노(孝德天皇)

고구려와 당나라의 싸움이 한창이던 645년 6월, 왜의 조정에서 정변이 벌어졌다. 그 당시 왜의 조정을 주도하던 세력은 소가씨(蘇我氏). 6세기 중엽 불교 수용 문제를 둘러싸고 왜 조정 내의 유력 귀족들 간에 갈등이 벌어졌는데, 이 불교 수용 문제에 반대하던 모노노베씨(物部氏)와 수용을 찬성하던 소가씨가 각각 양 편을 대표하는 집단으로서 대립하였다. 소가씨는 도래인(渡來人)[22][23] 세력을 휘하에 포섭하면서 확대를 거듭해 모노노베씨를 타도하였다.

이후 소가씨는 왜 조정의 대표적 귀족세력으로 대두하였고,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사후 세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소가씨의 전횡에 위협을 느끼고 불만을 품은 왕족과 다른 귀족들이 합세, 645년 나카노오에노오지(中大兄皇) 왕자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가 소가씨의 대표인 소가에미시(蘇我蝦夷)와 아들 이루카(蘇我入鹿)를 죽이고 소가씨를 몰아내었다. 이 정변으로 고교쿠 덴노(孝德天皇)가 퇴위하였고, 동모제인 고토쿠 덴노가 즉위하였다. 고토쿠 덴노는 나카노오에노오지를 태자로 삼았다. 그는 즉위 후 연호를 다이카(大化)라 하고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을 단행하였다.

복잡한 국제 정세의 흐름을 느끼면서, 개신정권은 653년, 654년에 제2차, 3차 견당사(遣唐使)를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와 교류하면서 신라와도 어느 정도 교섭관계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 어느 한쪽에 완전히 편을 드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으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654년 당고종은 덴노에게 출병하여 신라를 구원하라 요청하였으나, 왜 조정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만약 신라를 구원하러 간다면 백제와의 관계는 파탄될 것이다. 단 신라에 대해서도 드러내놓고 적대적인 태도는 취하지 않았다. 당나라의 직접적인 압박을 받지 않고, 삼국간의 상쟁에서도 한발 떨어져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왜 조정은 사태를 관망하면서 지켜보았고, 신라는 어떻게 해서는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 입장을 선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7.1.5 신라의 정변 - 비담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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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金庾信)

백제와 고구려, 왜 등의 압력에 찌부라져 있던 상황에서, 믿었던 당나라의 동진마저도 고구려에 저지당했고, 이 과정에서 백제의 옆치기까지 당한 신라는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별다른 수를 내지 못하자 국가의 안위에 대한 우려감은 고조되었고, 나아가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마침내 647년 초, 비담의 난과 같은 대규모 내분이 폭발하였다. 자세한 평가와 논란에 대해서는 비담의 난 참조.

난은 10여일만에 진압되었으나 선덕여왕이 와중에 병중으로 사망하고 진덕여왕이 계승하는 등 여러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김유신과 김춘추 같은 진골 출신의 세력의 부각이다. 김유신은 금관가야 출신의 지방 출신 진골이고, 김춘추는 귀족회의에 의해서 폐립된 진지왕(眞智王)의 손자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지방세력과 하위인사를 소집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았고, 나아가 이들을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규합하여 국가의 공적 질서에 포괄하기 위해 관료조직의 확충과 왕을 정점으로 하는 집권체제 확립을 지향하였다. 비담의 난도 그러한 과정에서 벌어진 대립과정일 가능성이 있다.

비담의 난이 진압되고 그 후 진덕여왕 재위 기간 중 신라에선 중앙관서조직이 크게 확충되었다. 진덕여왕 5년인 651년에는 재정 지출을 담당하는 창부(倉部)와 형률과 입법을 관장하는 좌리방부(左理方部)가 창설되었으며, 국가의 기무를 총괄하는 최고집행기구로서 집사부가 개설되었다. 집사부는 왕에 직속되어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왕권과 중앙 집권력을 뒷받침하는 기관이었다. 또한 뒤에 보듯 중국화가 훨씬 진전되었다.

7.2 김춘추의 움직임

진덕여왕 즉위와 함께 대내적 문제가 일단락 되자, 신라 조정의 최대과제는 국가적 위기의 원인인 대외관계의 혼돈을 수습하고, 대외정책의 방향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 과제를 풀기 위해 권력의 핵으로 부상한 김춘추 본인이 직접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7.2.1 김춘추의 왜국 방문

일본서기에 따르면, 646년 9월 왜의 조정이 도당 유학생 출신 다카무쿠노겐리(高向玄理)를 신라에 보내어 '질(質= 인질)'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신라가 응해 비담의 난이 진압된 뒤 647년 다카무쿠노겐리와 함께 김춘추가 왜국으로 건너갔다(일본서기 권 25). 물론 이는 진덕여왕의 명령에 의한 것이겠지만, 김춘추 자신의 판단과 의지가 주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인질이라고 표현했지만, 김춘추는 신라 최고 귀족이고 실제로 왜국을 방문한 후 곧바로 신라로 귀환하였다. 김춘추가 왜의 인질이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일본서기에 종종 나타나는 서술 태도다. 더 나아가서, 아예 일본서기의 이 기록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일단, 김춘추가 이찬의 관등을 지닌 고위 귀족[24]이고 신라 정계의 실력자였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전의 신라 사신들이 급찬이나 사찬이었던 것과 뚜렷이 다르다. 이는 신라 측으로서도, 고위 귀족의 방문을 요구한 왜국으로서도 이 방문을 통해 무엇인가를 추구하였음을 말한다.

우선 김춘추가 왜국에 대백제전의 군사원조를 요청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물론 왜와 백제는 오랜 지원국이다. 하지만 모처럼 신라의 최고위급 인사가 왜국을 방문하였던 만큼 백제에 대한 왜국의 군사적 지원을 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는 없다. 고위급 회담으로 왜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려는 시도는 신라에게 주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의 조정은 어떤 배경에서 무슨 목적으로 다카무쿠노겐리를 신라에 파견하여 고위귀족 파견을 요청하였을까. 다카무쿠노겐리는 607년 승려 '민'과 함께 당으로 건너간 유학생 출신이며, 640년 귀국할 때 신라를 거쳐 왜국으로 돌아갔고, 다이카 개신 후 국박사(國博士)로서 승려 민과 함께 개신 정권의 주요 브레인 노릇을 했다. 승려 민도 632년 당에서 신라를 거쳐 귀국하였다. 그리고 개신정권은 친백제적인 소가씨 세력을 타도하고 집권하였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다카무쿠노겐리와 김춘추의 상대국 방문은 무엇인가를 둘러싼 양국 협상이 시도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할 수도 있다. 646년은 당의 동방 침공이 있은 다음 해이며, 그 전쟁에서 신라는 당의 편에 서서 참전하였고,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여 당의 반대편에 섰다. 다카무쿠노겐리는 당나라의 힘을 아주 잘 알고 있던 만큼 적어도 반당적인 인사는 아니었던 것 같고, 당에서 귀국할때 신라를 통한 적이 있어 오히려 당과 신라에 우호적인 입장을 지녔을 수도 있는 인물이다. 왜국이 신라에게 다카무쿠노겐리를 파견한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이런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유의되는 것은 왜가 648년 신라사에 부탁하여 당에 국서를 보내어 교섭을 시도하였다는 것이다. 이 해에 김춘추의 경우를 포함해 신라는 당에 세 차례 사신을 파견하였다. 김춘추가 왜의 국서를 당에 전달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어느 편에 왜의 국서가 전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국제정세에서 신라가 왜의 국서를 당에 전달하는 것은 신라나 왜국으로선 중대 사안이다. 이런 주요 문제를 고위 귀족인 김춘추가 왜에 갔을 때 논의는 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왜 조정이 신라에 '질' 요청을 하였을 때는 이 문제도 고려하였을 것이다.

당시 왜와 당은 632년 당의 사신 고표인(高表仁)의 왜국 방문 때 마찰이 있은 이후 국교가 두절된 상태였다. 이런 면을 파악하였기에 김춘추는 직접 왜로 건너가 왜의 개신정권 핵심인사와 협상하려 하였을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양자 간 협의된 내용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또 왜가 신라에게 그리고 신라를 통해 당에 전달하려는 메세지의 내용도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추정을 하자면 왜가 고구려와 백제 측에 일방적으로 기울지 않았다는 뜻을 전달하려 하였을 수는 있다.[25] 그런 의향을 표한 바 있었기에, 왜국은 오랜 국교 두절 이후인 653년 제2차 견당사로 240여 명에 달하는 유학생을 파견하였고, 이듬해 3차 견당사를 파견하였다.

그런데 646년 이후 왜의 대외관계를 볼 때 앞서 말했듯이 왜가 대외 정책을 두드러지게 변경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즉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였지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당과 신라라는 두 개의 대립 축에서 어느 한편에 일방적으로 기우는 선택을 하여 노선을 분명히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백제와의 우호관계를 중시하던 기존 대외 정책이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직접 일본까지 왔지만 별 성과를 보지 못한 김춘추는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였다.

7.2.2 김춘추의 당나라 방문

마침 신라에는 당나라와의 연호 사용 문제가 발생했다. 648년 3월, 당나라에 파견된 신라사신에게 당태종은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을 문제 제기했고, 이는 신라가 정변 이후 새로운 왕이 즉위한 것을 기회로 삼아 신경전을 벌이는것으로 보여진다. 그러자 일본에서 돌아온 김춘추가 당나라로 파견되었다.

당태종은 김춘추를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으로 하여금 교외에 나가 그를 영접하는 등, 매우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김춘추에게는 정2품인 특진의 관작을 주었고 춘추의 아들 김문왕(金文王)에게 정3품의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을 봉하였다.

당시 당 조정은 수년째 치고 빠지는 기습전으로 고구려를 괴롭히고 있었다. 소모전 결과 고구려가 피폐해졌다는 보고를 접한 당태종은 다음 단계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전면적 공격에 나서겠다고 다시 한번 선포하였다.

○ 二十二年, 又遣右武衛將軍薛萬徹等往靑丘道伐之, 萬徹渡海入鴨綠水, 進破其泊灼城, 俘獲甚衆. 太宗又命江南造大船, 遣陝州刺史孫伏伽召募勇敢之士, 萊州刺史李道裕運糧及器械, 貯於烏胡島, 將欲大擧以伐高麗. 未行而帝崩. 高宗嗣位, 又命兵部尙書任雅相·左武衛大將軍蘇定方·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等前後討之, 皆無大功而還.

○ 22년에 또 右武衛將軍 薜萬徹 등을 보내어 靑丘道로 가서 치게 하니, 萬徹은 바다를 건너 鴨綠水로 들어가서 泊灼城을 함락하고 많은 포로를 사로잡았다. 太宗은 또 江南에 命하여 큰 배를 건조하게 하는 한편, 陜州刺史 孫伏伽를 보내어 용감한 兵士를 모집시키고, 莢州刺史 李道裕를 보내어 軍糧 및 器械를 운반하여 烏胡島에 쌓아두게 하는 등 장차 군사를 크게 일으켜 高麗를 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 시행하지 못하고, 太宗은 죽었다. 高宗이 位를 이어받아서 또 兵部尙書 任雅相·左武衛大將軍 蘇定方·左驍衛大將軍 契苾何力 등에게 명하여 前後로 보내어 토벌케 하였으나, 모두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구당서》권 199 동이열전 제 149 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이런 방책과 함께 당태종이 645년 전쟁 이후로는, 대고구려전의 새로운 전략으로 주목하게 된 것이 고구려 서부 국경선 이외에 타방면에 제2전선을 구축, 고구려의 방어력을 분산시키고, 가장 중요한 군수품 보급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세력을 찾는 데 집중하였다. 따라서 앞으로의 고구려-당 전쟁의 향방에 있어서, 신라의 중요성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1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에 당나라가 백제, 신라에 군사 협조를 촉구하였지만, 실제로는 전쟁 자체에서 거의 한반도 남부 세력의 원조를 크게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전쟁 과정에서 이 문제로 말이 나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 차례 패배를 당한 상황에서는 또 이야기가 달라, 이런 과정에서 김춘추에 대한 환대가 더욱 커졌던 것이다.

김춘추는 당태종 이세민을 비롯한 당 조정의 중신들과 교류했고, 돌아오면서 아들 김문왕이 장안에 머물게 하였다. 이제 신라는 당과 교섭하는데 유리한 거점을 확보했고, 김춘추 개인으로서도 자신의 아들을 당 조정에 두어 당나라 유력자들과 교류하게 함으로서, 다른 진골귀족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김문왕이 귀국한 후에도 김춘추는 훗날 문무왕이 되는 아들 김법민(金法旼)을 650년 당나라에 파견하는 등 당나라와의 교섭을 주도하였다.

또, 이때 당태종과 김춘추 사이에서 주목되는 것이 문무왕이 671년 설인귀에게 보낸 서한이다. 이는 이해 7월에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신라가 신의를 등지고 당을 공격한 것을 힐난하는 서한을 보내온 데에 대한 답신 형태로 보낸 것이었다.

여기서 문무왕은 당나라의 배신을 언급하면서, 구체적으로 648년에 김춘추와 당태종 사이에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뒤, 대동강 이남 지역은 신라에 귀속시킨다는 약속이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선왕께서 정관(貞觀) 22년에 중국에 들어가 태종 문황제를 직접 뵙고서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끌림을 당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바로 잡으면 평양 (平壤)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하시고는 계책을 내려주시고 군사 행동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삼국사기》권제7 신라본기 제7 三國史記 卷第七 新羅本紀 第七

이 기록은 삼국사기 외에 보이지 않고, 어디까지나 당과의 개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신라가 일방적인 주장을 펼친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김춘추와 당태종 간의 대화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별도의 공식적 기록으로 남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당시 고구려 원정을 앞둔 당태종의 입장에선 그런 식으로 김춘추를 회유하려 할 수도 있다. 648년에 두 사람이 평양 이남 지역을 신라령으로 한다고 약속한다면, 이는 곧바로 바로 그때 당군이 백제 공략에 나설 것을 약속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향후에 벌어진 대백제전쟁 등의 군사동맹의 큰 틀은 바로 이때 김춘추가 당나라에 건너가서 확정지은 것이 된다. 물론 아직 그런 것들은 구체화되진 않았다.

당에서 귀국한 김춘추는 신라 조정에 건의하여 관복의 양식을 바꾸어 당과 같이 하였으며, 그간 행해왔던 신라 고유의 연호를 폐지하고 당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했다. 신라가 취한 조치는 신라가 당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에 귀속하겠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하쿠치(白雉)[26] 2년(652) 여름 6월 백제(百濟)·신라(新羅)가 사신을 보내 조(調)와 물건을 바쳤다.

이 해 신라(新羅)의 공조사 지만 사손(貢調使 知萬 沙飡) 등이 당나라의 옷을 입고 츠쿠시(筑紫)[27]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함부로 풍속을 바꾼 것을 싫어하여 꾸짖고 돌려 보냈다. 그 때 巨勢大臣이 “지금 신라를 정벌하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그 정벌하는 상황은 모든 힘을 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니와진(難波津)[28]으로부터 츠쿠시해(筑紫海)[29] 가운데까지 서로 이어지도록 배를 가득 띄우고 신라를 불러 그 죄를 묻는다면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청하였다.


일본서기》제이십 노덕기 券二十 孝德天皇

이때 신라가 650년부터 656년 사이 왜에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자, 왜는 신라 사신이 당 양식의 새로운 관복을 입고 왜를 방문한 것을 보고 극렬한 반응을 보이며 접견을 거부했다. 왜에 있어 신라의 당복 착용은 당과 연결한 신라가 노골적으로 왜국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다. 반면에 신라 입장에선 당나라와 자신들의 결속을 과시하며, 왜의 선택을 촉구하는 방향도 있을 것이다.

백제, 고구려 등의 압력에 시달리는 신라로서는 배후의 왜에 대해 항시 민감한 주의가 필요했다. 신라로선 당과의 동맹을 확실히 하고 백제와의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왜의 미온적인 태도는 불만인 동시에 위협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관복 시위도 하면서 해마다 사신을 보내었지만, 왜가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계속하자 신라 역시 왜와의 관계에 매달리기보다 대결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이에 따라 657년 왜의 조정이 사신과 유학생이 신라를 거쳐 당나라에 파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신라 조정은 이를 거부하고 그들을 왜국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신라와 왜 사이의 공식적 접촉은 단절되었다.

이제 동북아시아의 국제 관계의 구도는 점차 명확해졌다. 당나라와 신라를 연결하는 횡적인 연결과, 고구려와 백제, 왜가 연계하는 종적인 연결이 그것이었다. 합종연횡의 움직임 속에서 전쟁의 폭풍이 한반도를 휘감아 몰아치려 하였다.

8 백제 700년의 종말

신라는 원수를 물리치고 숙적을 꺾어버리기 위해, 당나라는 최종목표인 고구려를 물리치기에 앞서, 백제를 멸망시켜 고구려를 고립시키기 위해. 이제 양자의 이해관계가 동일해졌고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700년에 가까운 백제 사직은 풍전등화의 형세에 놓여지고 말았다.

8.1 백제 내부의 혼란

16년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成忠)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다.

삼국사기》권제이십팔 백제본기 제6 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삼천궁녀 이야기야 훨씬 후대에나 나온 야사이니 그렇다치더라도, 그 이전까지 해동증자라는 언급까지 나오며 좋은 면모만 보였던 의자왕이 갑자기 폭정을 저지르고 향락에 빠졌다, 라는 식의 언급이 나오는 것에 대해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는 식으로 신라의 의도적인 악마 만들기라고 보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의자왕이 신라를 마구 공격한 것은 신라인들에게 악마와도 같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언급은 삼국사기만의 내용이 아니다. 백제 사비성의 주요 사찰인 정림사(定林寺)의 그 유명한 오층탑에 새겨 넣은 대당평제비(大唐平濟碑)에서 기술된 백제 멸망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항차 밖으로 곧은 신하는 버리고 안으로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어, 형벌은 오직 충직스럽고 어진 자에게만 미치고 총애와 신임은 아첨하는 자에게 먼저 더해졌다.

『정림사 대당평제비』

결정적으로, 신라나 당나라의 입김이 미치지 않고, 친백제적인 일본의 일본서기에도 이러한 언급이 있다.

고려 사문 도현(道顯)의 일본세기(日本世記)[30]에 "7월에 운운, 춘추지(김춘추)가 대장군 소정방의 손을 빌려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고 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백제는 스스로 망하였다. 임금의 대부인이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서, 무도하여 마음대로 권력을 빼앗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불렀다. 삼가지 않을 수가 있는가, 삼가지 않을 수가 있는가." 라고 하였다.

일본서기》권 26

주목할 만한 것은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임금의 부인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표현이다. 정확히 누군가를 말하는지도 알 수 없고[31], 임금의 권한과 그 부인이 맞섰다는 것인지, 혹은 임금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렸다는 것인지 알 방법이 없다.[32] 여하간에 귀족들 간에 분열을 낳고 무력감을 느끼게 할 만한 국정운영의 난맥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모습이다. 일단 적어도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려는 이 상황에서, 긍정적인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백제에서 내전이나 격심한 권력다툼이 있었다면 정작 삼국사기에 이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에 기재된 의자왕대의 변고들이 권력투쟁이나 대숙청 혹은 내전을 암시한다고 보기도 한다. 여기서 말한 의자왕때의 변고란 의자왕 재임 시절 일어났던 괴이하고 미스터리한 사건들(가령 의자왕 시절인 659년 2월에 수도 사비성의 우물물과 강물이 갑자기 핏빛으로 변했다.->반란이나 권력투쟁 내전 숙청등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어 피가 강처럼 흘렀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일 수 있다. 또 서해의 물고기들이 갑자기 떼죽음을 당하는 변고가 일어났으며 그해 4월에는 사비성 백성들 중 일부가 아무런 이유없이 갑자기 놀라 도망다니다가 쓰러져 돌연사하는 자가 백명 가량 되었다.->이 경우도 위와 마찬가지로 숙청, 반란 등으로 인해 백성들이 피하려 도망다니다가 잡혀 죽었다 이런 식의 얘기를 돌려 말한 것일 수 있다. 또 귀신이 사비성 궁궐에 나타나 백제는 망한다는 드립을 몇차례 크게 외치고 사라졌고 의자왕이 귀신이 사라진 땅을 파보게 했더니 거북이 한마리가 나왔는데 거북이 등에 "백제는 보름달이고 신라는 초승달임ㅇㅇ" 이렇게 적혀 있어서 궁궐 내 무당을 불러 뜻을 풀이해보게 했는데 너무 솔직한 무당은 "보름달은 지금 가득하니 앞으로는 기울어질 날만 남았으며 초승달은 지금 미약하므로 앞으로는 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랬다가 열받은 의자왕이 죽였다는 등이다.)을 말한다.
어찌되었든 확실한 건 당시 백제 조정이 막장 드라마를 찍기 시작했다는 점이고 민심과 천심도 점차 등을 돌려간다 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라를 도와주고 있는 꼴

8.2 나당연합군의 진격

소정방(영화 황산벌)

당나라는 대백제전에 앞서 위협요소를 먼저 제거하였다. 당의 서부지역에서 서돌궐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 즉 사발라(沙鉢羅)가 노실필 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서부의 칸국을 부활시켰고, 곧바로 중국의 종주권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제거하거나 적어도 통제하지 않고는 한반도 방면의 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당나라는 이에 따라 소정방(蘇定方)을 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을 구성하여, 바람이 휘몰아치는 서북의 황야로 출정하였다.

소정방은 10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나갔다고 하는, 그야말로 전쟁을 위해서 태어난 인물이었다. 구당서에서는 그를 날쌔고 사납고 힘이 셈, 담력이 대단히 뛰어남, 등의 수식어로 묘사하고 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서 두 자 정도의 눈이 쌓여 있었고, 소정방은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개는 어디든지 어둡게 만든다. 바람은 얼음같이 사납다. 야만인들은 우리가 이런 계절에 원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신속히 진군하여 그들을 놀라게 해주자."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소정방은 준가리아의 에비 노르 근처에 있는 보로탈라 강에서 아사나하로와 조우하여 정말로 그들을 놀라게 하였고, 이어 그를 이식쿨의 서쪽에 있는 추 강가에서 대파하여 타슈켄트(Toshkent)로 달아나게 했다. 타슈켄트인들은 아사나하로를 잡아서 중국으로 보냈다. 659년에는 도만(都曼)이 소륵(疏勒[33])·주구파(朱俱波[34])·알반타(謁般陀[35]) 등 3국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소정방은 안무대사(按撫大使)에 임명되어 반란을 평정했다. 이제 당나라의 천하는 천산과 파미르를 넘어가고 있었다.

한편 당은 백제공략전에 앞서 658년과 659년 고구려 서부 국경에 공격전을 감행하였다. 658년에는 영주 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설인귀가 고구려의 적봉진(赤峰鎭)을 습격해 함락하였으며, 659년 11월에는 계필하력(契苾何力)과 설인귀가 요동 지역을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방어력을 서부 국경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당은 이로 인해 백제를 공략하려면서 고구려가 개입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양동작전을 구사했다.

중국의 서북면에서 소정방이 도만을 사로잡아, 낙양의 건양전에 바친 것이 현경 5년 정월. 그리고 곧바로 3월이 되자 소정방은 대총관(大摠管)에 임명되어 백제 전선에 파견되었다. 원정군의 숫자는 모두 13만의 대군. 이와 동시에 극동의 신라에서도 무열왕과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이 5월 26일 수도를 출발하여, 6월 18일에는 남천정(오늘날의 경기도 이천)에 이르렀다. 6월 21일 무열왕은 태자 김법민을 서해 덕물도로 파견하여 당군을 영접하게 하였다. 양측은 7월 10일, 백제의 수도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신라 최고의 명장 김유신이 이끄는 병력은 모두 5만. 당나라 부대의 절반 정도 되는 숫자였다. 김유신은 7월 9일, 황산벌로 나아갔고, 당군은 덕물도에서 10여 일 이상 항해의 피로를 풀고 휴식을 충분하게 취한 뒤, 백강구(白江口)를 바라보고 진격하였다.

서쪽과 동쪽에서 도합 20여만에 가까운 대군이 백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8.3 백제 조정의 대응

성충(成忠)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제 조정은 패닉에 빠졌고, 어떻게 대응할지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였다. 주요 방어책으로 백제 조정에 제기되었던 것이 백강, 즉 금강 입구를 막아 적의 해군이 백강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며, 육로는 탄현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전에 백제의 성충이 전에 같은 내용을 간언했고, 귀양을 가 있던 흥수(興首)에 자문을 구하자 이 계책을 또다시 개진하였는데 다른 귀족들이 반대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결과 적군은 이들 요충지를 큰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성충과 흥수의 주장은 적군이 요충지에 진입하는 것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에 비해 다른 귀족들은 적군을 요충지로 진입하게 한 뒤, 말이나 배가 나란히 횡대를 지어 나아갈 수 없는 좁은 진격로의 중간에서 적군을 요격하자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편이 더 나은 판단이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실제로는 논란이 벌어지는 동안 신라군은 탄현을 무난하게 지나갔고, 백제군 5천여 명은 황산벌로 나가 이를 막으려고 하였다. 사령관은 계백이었다.

8.4 황산벌 전투

계백(階伯)

전쟁에 나서기 앞서, 계백은 가족들이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한다며 자신의 일가를 몰살하고 비장한 각오로 전쟁에 나섰다.[36] 백제군은 황산벌의 세 개의 군영을 설치하여 서로 의지하며 방어 태세를 취하였다. 좌평 충상과 상영, 그리고 달솔이었던 계백이 각기 하나씩 군영을 지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37] 전투를 이끌던 중심은 계백이었다.

계백의 비장한 태도와 함께 백제군도 용맹하게 싸웠다.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신라군은 4차례나 백제군을 공격했으나 백제군은 4번 모두 신라의 공격을 패퇴시켰다. 이에 신라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당군과의 합류 날짜를 맞추기 어렵게 되자 신라군은 화랑 반굴관창을 백제군을 향해 필마단기로 돌격시킨다.

반굴은 처음 돌격 때 전사하고, 관창은 한 번 사로잡혔다가 풀려났으나, 다시 돌격하여 결국에는 사로잡히고, 계백도 이번엔 어쩔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돌려보낸다. 이에 분노한 신라군이 백제군을 향해 마지막 공세를 펼친다. 그 전까지 4차례의 전투로 크게 소모되어 있던 백제군은 마지막 5번째 공세에는 버텨내지 못하고 3영이 붕괴되었고 충상, 상영을 비롯한 20여 명만 사로잡히고 계백을 위시한 결사대 5천은 전멸한다.

백제군이 신라군의 진격을 저지한 것은 하루에 불과하다. 하지만 애초에 제대로 된 방어진지도 아닌 3개의 군영에서, 당군과의 합류를 위해 최대한 공격적으로 나왔을 신라군을 상대로 4차례나 승리한 것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고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더구나 신라의 지휘관이 지난 1세기 동안 신라를 지탱하던 희대의 명장 김유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8.5 사비성 함락과 백제의 멸망

그 사이 백강에서는 백제군이 강 입구를 막고 강변에 주둔하였는데, 당군이 강의 왼편 기슭으로 상륙하여 산 위로 올라가 진을 쳤고, 양군이 접전하여 백제군이 패배하였다. 만조때가 되자 당나라 해군은 일제히 강을 거슬러 진격하여 사비성 부근까지 나아갔고, 이곳에서 서진하는 신라군과 만났다. 그런데 양군이 합류하자마자 사단이 벌어졌다.

소정방은 신라군이 약속한 기일을 하루 넘긴 11일에 도착했다고 역정을 내며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潁)을 참수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김유신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대장군(大將軍)은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삼국사기》권제5 신라본기 제5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이 당시 삼국사기의 표현으로는 김유신이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섰는데,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뛰어나왔다.고 할 정도. 이런 기세를 보고 소정방의 우장(右將)이었던 동보량(董寶亮)이 슬쩍 소정방의 발을 밞고 "이러다 신라군이 변란을 일으키겠음.' 하고 주의를 주자 소정방은 김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일단 상황을 봉합한 뒤 7월 12일, 양군은 사비성을 포위하고 소부리 들판에 진을 쳤다. 13일에 의자왕과 그 아들 효는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났다. 웅진성이 산간에 위치한 만큼 방어에는 개활지는 사비성보다 유리할 수 있고, 사비성과 웅진성이 서로 의지하는 기각지세를 이루어 침공군에 대항하는 모양새를 취하려 했을 수도 있다.

왕이 사비성을 떠나자 왕자 부여융(扶餘隆)과 대좌평 사택천복(沙宅千福) 등이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사비성에 남아 있던 왕자 태가 즉위하였으나, 태자 부여효의 아들들이 불안을 느껴 항복하였고, 이제 더는 견디기 어려워진 부여태도 항복하였다. 그리고, 웅진성의 의자왕과 부여효도 항복하였다. 웅진성에 들어간지 단 5일만이었다. 이 때 예식진(禰寔進)이라는 인물이 사실상 왕과 태자를 사로잡아 항복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38] 이 날은 당군이 기벌포에 상륙한 7월 9일부터 겨우 10여 일만인 18일이었다.

수백 년을 이어오며 한국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백제는 이로서 멸망하였다.

9 백제 부흥운동

9.1 백제 부흥운동의 시작

한 나라가 망하면 승전국은 온갖 정복의 과실을 가지지만, 패전국은 비참한 처지로 떨어지게 되기 마련이다. 백제 땅은 여러 곳이 약탈당했다.[39][40] 또한 의자왕이나 부여융 등 또한 온갖 굴욕을 당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만 한 것이, 김춘추는 대야성 함락때 자신의 딸을 백제군 때문에 잃었던 것이다.

8월 2일 현장에 도착한 무열왕은 소정방과 함께 상석에 앉고, 의자왕 등을 마루 아래 앉혀서 자신의 술을 따르게 하였다. 백제 신하 중에 이 모습을 보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 김법민은 부여융을 자신의 아래 꿇게 해놓고 얼굴에 을 뱉으면서,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죽였다."고 비난했다. 부여융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땅에 엎드리기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의자왕이 완전히 굴복했지만, 실제 전쟁은 아직 종식되었다고 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신라군과 당군이 점령한 것은 사비성과 웅진성 등, 백제의 중심지 지역 뿐이었다. 이 지역을 제외한 백제의 군사적 역량은 아직 온전하게 남아 있었고, 당나라 군사들의 노략질이 겹쳐지면서[41] 백제인들은 계속해서 봉기했다.

두시원악(豆尸原嶽)에서는 좌평 정무(正武)가,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에선 달솔 여자긴(餘自進)이, 그리고 임존성에서는 복신(福信)·도침(道琛)·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봉기하였다. 소정방은 8월 26일 임존성을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하는 등 부흥군의 기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멸망 당하기 이전에 좀 이러지 그랬어

하지만 나당연합군은 우선은 철수하기로 하였다. 이미 백제의 중심부는 공략당했고, 대규모 봉기를 주도할 만한 왕과 핵심인사들은 이미 사로잡았다. 정통성을 한군데로 모으기 힘든 한, 따라서 나머지는 힘을 합치기 어려운 잔병에 가까울테고, 좁은 백제의 수도권에 당나라와 신라의 대규모 부대가 모여있는 것 또한 유지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당나라의 최대 목표는 고구려. 백제는 고구려를 치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었다.

신라로서도, 661년 초 전염병이 창궐하여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기 위한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 전염병은 당나라 원정군이 중국에서 가져온 전염병일 가능성이 있다.[42]

9.2 노도처럼 번지는 부흥군의 기세

나당연합군은 유인원(劉仁願)을 지휘관으로 한 당나라 군사 1만 명과 무열왕의 서자인 김인태(金仁泰)가 이끈 신라군 7천을 주둔군으로 남겨놓고 전면 철수를 시작하였다. 소정방은 귀국에 앞서 정림사 5층 석탑에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는 글을 쓰고 의자왕 이하 왕족과 귀족 93인, 백성 1만 2천여 명의 포로를 끌고 9월 3일 귀국하였다. 의자왕은 낙양에서 당고종이 승자의 아량을 보여주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일단 나당연합군이 대부분 철수하자 백제 유민은 기세를 탔다. 각지에서 일어난 봉기 가운데, 9월 23일 백제 부흥군이 사비 도성까지 진격, 나당연합군과 격전을 벌였다. 부흥군은 패퇴하였지만 사비성 남쪽 산에 버티면서 여전히 사비를 위협하였다. 10월 9일에는 무열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제 부흥군을 공격하여 18일에는 이례성(尒禮城)을 점령했고, 이를 따라 백제 20여 성이 한번에 항복하였다. 또 30일에는 사비 도성에 있는 부흥군을 격파하여 우선 사비 주둔군에 대한 포위는 풀어 내었다.[43]

하지만 신라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음에도 백제 부흥군의 활동은 되려 더 거세졌다. 그 당시까지 부흥군의 움직임은 조직적인 면이 없었으나, 점차 임존성의 복신이 부흥 운동의 중심으로 떠올라 승려 도침과 함께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는 소정방이 당나라에 개선하기 직전, 그를 막아내는 기염을 보이기도 했다.

그 뒤 복신은 660년 10월, 왜 조정에 좌평 귀지(貴智) 등을 보내 당나라 포로 100여 명을 바치고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44]의 귀환을 요청하였다. 왜 조정은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12월에는 일본의 사이메이 덴노(齊明天皇)가 거처를 나니와(浪速)로 옮기고 무기와 군사 등을 점검하였으며, 이어 북큐슈의 쓰쿠시로 가서 백제 구원군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당나라가 대고구려 전쟁의 준비에 열중하던 사이, 661년 2월 복신과 도침은 사비성을 재차 포위하였다. 아울러 웅진강구를 봉쇄하여 당의 보급로를 차단하려고 하였고, 이에 당나라 사령관인 유인원은 지난해 9월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어 왔다가 갑자기 죽은 왕문도(王文度)의 병사를 다른 지휘관인 유인궤(劉仁軌)에게 맡기고, 그와 함께 방어에 나서는 한편,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군은 웅진강구의 양편에 구축한 백제 부흥군의 목책을 격파하여 부흥군을 압박했고, 부흥군은 포위를 풀고 도침 등은 임존성으로 물러갔다. 한편 신라군은 이해 3월 두량윤성(豆良伊城)을 공략하려 했으나 백제 부흥군의 저항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어 주류성을 포위하였으나 백제 부흥군의 반격에 타격을 입고 퇴각하였고, 되려 이 패배의 여파로 백제 남방 여러 성들이 반기를 들어 복신에 귀속하였다. 복신은 주류성에 머물었고, 이 무렵을 전후로 주류성은 부흥군의 주요 거점으로 부각되었다. 사비 공략이 실패로 끝났지만 백제 부흥군은 오히려 더 세력을 떨쳤다.

하지만 신라군, 그리고 무엇보다 백제 주둔 당나라 군은 부흥군보다도 고구려가 더 큰 목적이었다. 따라서 계속해서 병력을 투입, 전투를 지속할 형편은 못 되었다. 신라군은 백제를 무너뜨리는게 가장 큰 목표였지만, 평양성 공략에 나서는 당군의 식량을 보급하고 또 백제 주둔 당군에도 보급해야 했기 때문에 여력이 부족했다. 따라서 나당연합군은 일단 대고구려전 이후로 모든 것을 미루고, 백제 지역에서 현상유지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당군은 사비성에서 방어에 유리한 웅진성으로 사령부를 옮겼고, 신라와의 수송로 확보에 주력하였다. 이 사이에 부흥군은 661년 9월, 왜국으로부터 부여풍이 돌아오자 그를 왕으로 옹립하였고, 백제의 서부와 북부 지역, 남부 지역등이 복신에 호응하였으며, 왜국의 원병 5천여 명까지 도착하여 기세가 대단해졌다.

9.3 2차 고구려-당 전쟁과 유인궤의 전략

당나라에게 있어서, 실질적으로 백제와의 전쟁 따위는 어디까지나 고구려를 집어삼키기 위한 준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당나라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고구려를 꺾어버리는 것이었고, 백제 원정 역시 고구려를 꺾어버리기 위한 필요성에서 시작하였다.

백제 공략전에서 해로를 통한 작전이 성공하였고, 병력 손실도 경미한데다, 병사들의 사기가 한껏 달아오르자 당고종은 660년 12월 15일 고구려 원정 계획을 발표하였다.

용삭(龍朔) 원년(元年), 大募兵, 拜置諸將, 天子欲自行, 蔚州刺史李君球建言: 「高麗小醜, 何至傾中國事之? 有如高麗旣滅, 必發兵以守, 少發則威不振, 多發人不安, 是天下疲於轉戍. 臣謂征之未如勿征, 滅之未如勿滅.」 亦會武后苦邀, 帝乃止. 八月, 定方破虜兵於浿江, 奪馬邑山, 遂圍平壤. 明年, 龐孝泰以嶺南兵壁蛇水, 蓋蘇文攻之, 擧軍沒, 定方解而歸.

신당서

현경顯慶 3년, 고구려 보장왕때 다시 명진名振을 보내어 설인귀薜仁貴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2년 뒤에 천자가 백제를 평정하였다. 이에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좌효위대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에게 명하여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패강浿江·요동遼東·평양도平壤道로 각각 진군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신당서》권 220 동이열전 제 145 新唐書 卷 220 東夷列傳 第 145

이어서 661년 정월 하남, 하북 등지에서 모병한 4만 4천여 명을 평양 루방(鏤方) 방면으로 진발하게 하고, 같은 달에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행군총관(扶餘道行軍摠管)으로 삼아 회흘(回紇)(위구르 제국) 등 여러 유목민 집단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4월에 당고종은 철륵 출신의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을 평양도행군대총관, 임아상을 패강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총 35도(道)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아주 밞아 버리려고 하였다.

아울러 6월, 당에서 숙위하던 김인문을 귀국시켜 신라의 문무왕에게 군사작전 날짜를 알리고 출병을 요구하였다. 이 달에 부왕인 무열왕이 병사함에 따라 바로 즉위한 직후였지만, 문무왕은 빠르게 응해 7월 17일, 신라의 영웅인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한 북벌군을 편성하였다. 이어 8월에는 스스로 제장을 거느리고 남천주로 나아갔고, 그 와중에 저항하던 옹산성과 우술성 일대의 백제 유민군을 진압하였다. 이 때, 웅진성에 머물고 있던 당나라의 유인원도 일부 당군을 끌고 해로를 통해 혜포(鞋浦)로 와서 그곳에서 남천주로 나아가 신라군과 화합하였다.

당나라 군의 행로나 전쟁 양상은 기록이 적어 확인하기 힘들다. 소정방이 661년 8월, 패수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마읍산을 점령하고, 평양을 점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보다 뒤인 9월, 계필하력이 압록강에서 연남생(淵男生)이 이끄는 고구려군을 돌파하기 위한 전투의 기록이 보인다. 그렇다면 소정방은 당 본토에서 요동으로 진군하여 압록강을 돌파하여 간 것이 아니라, 해로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으로 진격하였다는 식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견해라면 계필하력의 움직임은 소정방의 움직임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고구려 방어군을 끌어내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갑자기 서부 몽골 방면에 있던 철륵이 당나라에 대항하여 일어났고, 철륵 출신인 계필하력이 급히 철군하여 싸우러 나갔다. 소정방은 갑자기 오도가도 못하고 고립되어 버렸고, 그 상태에서 평양성 포위를 지속하였다.

평양성은 쉽게 함락되지도 않았고 싸움은 장기화되었다. 게다가 날씨도 점점 추워지고 식량 공급이 매우 빈곤해졌다. 이에 당고종의 사신에게 칙서를 받은 문무왕이 김유신을 보내어 쌀 4천 석, 조 2만 2천 석을 평양으로 보내게 하였다. 김유신은 최고 권력자이자 이제 완연한 노장이었지만 강건하게 직접 현장으로 출동했고, 또한 웅진성의 당군이 식량이 바닥나자 신라는 전력을 기울여 군대와 보급품을 보냈다.

신라가 보급을 위해 필사적일 무렵, 평양의 당군은 고립상태에 빠졌고, 고구려군이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패수로 흘러가는 지류인 사수(蛇水)에서,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옥저도행군총관 방효태(龐孝泰)를 전사시켰고 그의 아들 13명도 죽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2월의 혹한으로 대동강이 얼어붙은 것을 이용한 평양성으로의 총공세도 결국 실패로 끝났고, 소정방군은 위기에 처한다.

고려[45]인이 말하기를 '12월에 고려국에서는 추위가 매우 심해 패수가 얼어붙었다. 그러므로 당군이 북과 징을 요란하게 치며 운거와 충팽을 동원해 공격해왔다. 고려의 사졸들이 용감하고 씩씩하였으므로 다시 당의 진지 2개를 빼앗았다. 단지 2개의 요새만이 남았으므로 다시 밤에 빼앗을 계책을 마련하였다. 당의 군사들이 무릎을 끌어안고 곡을 하였다. (그러나)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 힘이 다하여 (당의 진지를) 빼앗을 수가 없었으니,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라 하였다.

일본서기》권 27

위기에 빠진 당나라 부대에게 신라의 지원은 너무나 절실하였고, 간신히 퇴로를 확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소정방은 계속 사람을 보내어 신라의 지원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북상하던 신라군은 눈으로 큰 곤경에 처했고, 고구려군이 출몰하여 행군이 더뎌졌던 상황이었다. 당의 요청에 신라군은 많은 희생을 내면서도 강행군하여 661년 2월 6일 당군 진영에 양곡을 운송했다. 신라군의 식량 공급을 받은 당군은 퇴로를 확보하여 바닷길로 철군하였고, 신라군도 압록강 이남에서 철병하였다.

이 전쟁의 양상을 보면 신라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당나라 부대는 이견의 여지가 없이 전멸했다. 하지만 신라의 도움으로, 비록 당은 군사적 목표를 이루진 못했지만 전멸을 피하고 돌아갈 수 있었다. 이는 전쟁의 양상이 크게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전이라면 배후가 막힐 것을 두려워 할 수도 없었던 평양성에 대한 직공도 가능해졌다. 고구려가 쓸 수 있는 전략적 패는 점점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고구려 공략전을 당나라가 실패했고, 피해가 누적되어가는 고구려 역시 마냥 기뻐할 형편은 아니었는데, 기세가 살아오른 것은 바로 백제 부흥군이었다. 부흥군이 기세가 오르자 웅진성의 당나라 군대는 고립되었고, 본국인 중국 본토와의 연락, 군량미를 비롯한 군수품 보급의 어려움에 시달렸다. 믿을 것은 우방인 신라의 현지 보급이었는데, 신라와의 교통로마저 백제 부흥군에게 자주 차단당하는 형편이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런 기세를 부흥군은 한껏 드러내었고, 부여풍과 복신은 웅진성의 유인원에게 "언제 당나라로 돌아갈 것이냐, 마땅히 환송하겠다."면서 조롱하는 태도를 보였다. 실질적으로는 희롱하는 동시에 역으로 평화적 귀국을 보장하겠으니, 철병하라는 제의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46]

아무튼 당나라는 고립된 당군을 구원하고, 확대된 백제인의 저항을 어떻게 진압할지가 문제였다. 당고종은 웅진성에 틀어박혀 있는 유인원에게 칙서를 보내, 평양의 당군이 회군하는데 웅진성만 홀로 버티기는 어려우니 신라로 철수하고, 다시 신라와 상의하여 (당나라 본토로) 귀환하여도 좋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당연히 대다수 장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좋아라 했다.

만약 이때 당군이 철수했다면 전개가 묘하게 돌아갔을텐데,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 유인궤가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철수하면 순식간에 백제는 다시 일어날 테고, 고구려를 무너뜨릴 기회는 영영 다시 오지 않게 되어, 결국 당나라의 대 동방 전략은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만일 고구려를 병탄하길 원한다면 먼저 백제를 멸해야 한다. 그리고 군대를 주둔시켜 배와 가슴을 눌러야, 즉 고구려의 뒤뜰을 압박하여야 한다. 신라로 들어가면 당군은 한갓 빌붙어 지내는 식객 따위에 지나지 않게된다. 백제 지역은 능히 제압할 수 있다. 병력을 증파해달라.

유인궤.

662년 7월, 유인궤는 신라군과 연계하여 진현성(眞峴城)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백제 부흥군의 포위망을 뚫고 신라에서 웅진성에 이르는 수송로를 재차 확보하였다는 것이다. 신라의 보급품이 조달되자 웅진성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곧바로 당나라 조정은 손인사(孫仁師)를 장수로 하여 7천의 지원병을 증파하였다.

유인궤의 제안과 활약으로 당나라의 백제 주둔은 여전히 이어지게 되었다.

9.3.1 왜군이 고구려를 도우려 했다?

2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 왜군이 고구려를 지원하려고 했다는 전승이 전해지기도 한다.

661년에 왜국에서 고구려를 구하러 간 군의 장수들이 백제 가파리(加巴利)의 해안에 배를 대고 불을 피웠다. 재가 변해 구멍이 되어 작은 소리가 났는데 화살이 날며 우는 소리와 같았다. 어떤 사람이 고구려와 백제가 끝내 망할 징조인가라고 했다.

일본서기》권 27

그렇다면 과연 왜군이 실제로 고구려에 파견되었을까? 일본서기가 전하는 왜의 고구려 구원 움직임에 관한 기사가 있다.

이 달에 당과 신라인들이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므로 장군과 군사들을 보내어 소류성(梳留城)에 웅거하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당나라가 그 남쪽 경계를 침략할 수 없었으므로, 신라가 서쪽 진지를 떨어뜨릴 수 없었다.

일본서기》권 27

즉 당시 왜 조정은 고구려를 구원하기 위해 왜군을 백제 부흥군 본거지인 주류성에 주둔시켰고, 그것이 실효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은 야마토 왜와 고구려의 군사동맹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런데 이로 말미암아 당나라가 그 남쪽 경계를 침략할 수 없었으므로, 신라가 서쪽 진지를 떨어뜨릴 수 없었다. 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다른 기사 등에서 말하는 당시 상황과 맞물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기사의 '고려'가 백제를 착오로 적은것이라는 주장이 있다.[47] 곧 백제를 지원하려고 주류성에 왜군이 주둔함에 따라, 당군이 웅진성 이남의 구백제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지 못하였고 신라군 또한 서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기사가 전하는 왜의 고구려 지원은 없었던 것이 된다.

혹은 백제 부흥운동에 왜가 개입하여 주류성에 주둔, 당과 신라를 측면에서 견제하여 고구려를 지원한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보기도 한다. 백제에 주둔하던 왜의 장수가 고구려에 가서 군사 사항을 협의하고 백제 부흥군으로 돌아와 규해(糾解)에게 보고하였던 일도 있었다. 왜 조정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는 것이 고구려를 지원하는 방략이 될 수 있다고 여겼을 수 있고, 결과적으로 어느정도 지원하는 면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때는 일본서기가 만들어질 시점 편찬차의 해석과 의미 부여라는 시각이 강하다. 왜국의 당면 과제는 눈앞에 전개되는 백제 부흥군 지원이었다.

9.4 백제 부흥군, 패배하다

9.4.1 복신의 사정

해가 지날수록 강해지는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은 바로 복신이었다. 백제 부흥운동을 이해하려면 복신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복신의 단편적인 기록들은 또 차이가 있다.

8월에 왕이 조카 복신(福信)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태종 이 백제와 신라가 대대로 원수를 맺어 서로 자주 침공한다고 하면서 왕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

삼국사기》권제27 백제본기 제5 三國史記 卷第二十七 百濟本紀 第五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때 중 도침(道琛)을 데리고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있던 부여풍 (扶餘風)을 맞아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삼국사기》권제28 백제본기 제6 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백제 본기에서 복신은 무왕의 조카로 기술되었다. 그런데, 앞서 전자의 기사인 무왕 시대의 기사는 기본적으로 백제 사신에게 준 당태종의 새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구당서는 그 당사자의 이름이 복신이 아니라 신복(信福)으로 되어 있다.

"매번 듣건대 군사를 보내어 쉬지 않고 행토(征討)하며, 무력만 믿어 잔인한 행위를 예사로 한다 하니 너무나도 기대에 어긋나오. 짐은 이미 왕의 조카 신복信福 및 고려, 신라의 사신을 대하여 함께 통화(通和)할 것을 명(命)하고, 함께 화목할 것을 허락하였오. 왕은 아무쪼록 그들과의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짐의 본 뜻을 알아서 함께 인정(鄰情)을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멈추기 바라오."

구당서》권 199 동이열전 제 149 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후자의 경우는 신당서의 백제전 기사를 전제한 것인데, 신당서 백제전의 기록은 앞부분 조금을 제외하면 구당서 백제전 기사와 동일하다. 그래서 후자인 의자왕 시대의 삼국사기 기록은 구당서 백제전이 전하는 왕의 조카 복신의 기록과 부흥운동에 관한 기사를 조합하여, 전자의 신복과 후자의 복신이 다른 사람인데 동일인으로 간주하여 후자의 복신을 왕의 조카로 기술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 660년 8월 거병하였을때 귀실복신(鬼室福信)의 관등에 대해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에서는 5위인 한솔이라고 하였고, 일본서기는 3위인 은솔이라고 하여다. 복신이 이미 무왕 28년인 627년부터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등 이른 시기부터 활약하였고, 장수로 복무한데다, 심지어 무왕의 조카이기도 하다면 만년에 해당하는 660년에 여전히 한솔, 혹은 은솔이었음은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성씨가 부여가 아니라 귀실이라는 점도 이러한 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흑치상지의 흑치처럼 부여씨에서 분기되어 그 봉지에 따라 성을 취하였듯이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년의 낮은 관등은 여전히 이해하기엔 어렵다.

만약 복신을 무왕의 조카로 여기기 어렵다면, 되려 복신에 대한 평가는 더욱 올라가야 한다. 달리 말하면 복신이 부흥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출신 가계보다는 그의 군사적·정치적 역량에서 비롯된 면이 더 크다는 것이다.

복신은 사비성 함락 직후 거병하여 임존성을 중심으로 점령군에 저항하였고, 그 명성이 자자한 명장 소정방 휘하 당군의 공격을 격퇴하여 부흥군의 기세를 크게 세웠다. "오직 복신만이 신기하고 용감한 꾀를 내어 이미 망한 나라를 부흥시켰다."는 이 일본서기 권 26에 남아있을 정도. 또한 복신은 정치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여 왜에 사신을 보내 왕자 부여풍의 환국과 왜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부흥운동이 산발적으로 각지에서 일어나던 상황에서, 정통성을 지닌 의자왕의 적자인 부여풍을 영입하여 옹립하고 덤으로 왜국의 지원까지 확보함으로서 부흥운동의 구심력을 만들어내었다. 그에 따라 각지의 부흥군이 복신과 연계하게 되었다. 흑치상지와 사타상여가 거병하여 복신과 연계 호응한 것이 그 증거이다.

특히 그는 군사적으로 나당연합군과의 전투를 통해 군사적 역량을 확대함과 동시에 자신의 세력 기반을 구축하였고, 뒤이어서 부흥군 동료 장수인 승려 도침을 죽여 막강한 지위를 차지하는듯 했다. 하지만 이런 복신의 지나친 영향력은 결국 부여풍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9.4.2 부여풍의 사정

부여풍은 부여풍장이라고도 하고,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는 631년 백제에서 왜국으로 건너갔으며, 의자왕의 아들이었다. 다만 631년은 백제 무왕 32년으로 의자왕 즉위 전이다. 그 때문에 실제로 건너간 시점에 대해 631년 설과 641년 설이 있다. 어느쪽이건 간에 부여풍은 왜국에서 십수년을 보내며 긴 시간을 지나다가, 660년 10월 복신이 왜 조정에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하자 되돌아왔다. 귀환 시기도 661년 9월과 662년 5월로 기록이 제각각이다.[48]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는 부여풍이 입국하자, 복신이 영접하여 맞이하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나라의 정사를 모두 맡겼다, 고 한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부흥군의 모든 국정이 왕족인[49] 부여풍의 휘하에 귀속되었다. 그런데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 과연 정말로 부여풍이 실권자일까?

부여풍은 일본에서 최소 20년 이상을 보냈고, 백제 땅은 최근에야 발을 디뎠으며, 당연히 내부 세력 기반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복신은 반대로 소정방 등을 물리치며 자신의 능력으로 부흥군을 이끌었다. 부여풍이 귀환한 직후인 662년 정월, 왜국은 복신에게 화살 10만개, 실 500근, 포 1천단, 쌀종자 3천곡을 보냈으며, 3월에 부여풍에게 포 300단을 주었다. 이것이 단순히 부흥군에 대한 지원이라면 별 문제는 없다. 그런데 '복신'과 '부여풍' 으로 구분을 짓고 복신에게 주요 군수 물자를 직접적으로 하사한 것은, 그가 부흥군의 중심임을 현실적으로 왜국에서 인정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부여풍의 기반도 무시할 수 없다. 부여풍의 기반은 왜군으로, 그를 호송한 세력이기도 하다. 백제 부흥군에게 왜군과 백제 주둔 왜군은 가장 중요한 지원세력이었다.

한편, 662년 12월, 백제 부흥군의 중심지는 주류성에서 피성(避城)으로 이동하였다. 피성은 김제로 비정된다. (이케우치 히로시의 학설.)

겨울 12월 병술 그믐에 백제왕 풍장은 그 신하 좌평 복신 등과 사이노 무라치(狹井連), 에치노 다쿠쓰(朴市田來津)[50]과 의논해 말하기를

“이곳 주유라는 곳은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도 메말라서 농사지을 땅이 아니고 막아 싸우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백성들은 굶주릴 것이니 피성으로 천도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피성은 서북으로는 옛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강물이 띠를 두르듯 흐르고 있고 동남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제방의 방벽에 의거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논으로 둘려져 있고 물꼬를 터 놓은 도랑에는 비가 잘 내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 삼한에서 가장 비옥하다. 의복과 식량의 근원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감추어진 곳이다. 비록 지대는 낮으나 어찌 천도하지 않으리오.”하였다.

이에 에치노 다쿠쓰(朴市田來津)가 혼자 나아가 간하며 말하기를,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치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하여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무릇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못하는 것은 주류(州柔)가 산이 험한 곳에 설치되어 있어 방어력을 모두 갖추고 있고,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에는 쉽고 공격하기에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곳에 거처한다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드디어 간청을 듣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일본서기》권 27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농산물이 풍부한 피성으로 천도하자는 말이고, 반대하는 측에서는 방어의 문제점을 말한 것이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었는데, 천도 후 663년 2월, 신라군이 백제 남부의 4개 주를 불태우고 안덕(安德)(오늘날의 충남 논산) 등을 점령하였고, 이곳이 신라군 수중에 들어가자 인접한 피성 지역은 바로 위협을 받게 되어 결국 주류성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이 사태 자체만 보면 병크 혹은 해프닝에 가까우나, 해석에 따라 백제 부흥군 내부의 권력 다툼과 연결 시킬 수도 있다. 인용문에서는 피성 천도를 주장한 사람이 부여풍이다. 그런데 도침이 제거된 이후로 복신의 권한은 대단히 막강하여, 부여풍은 심지어 단지 제사를 주재할 뿐 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 일은 적어도 복신이 동의는 했다는 것이다. 복신이 동의한 일에 대해서 왜군의 장수가 반대하였다.

에치노 다쿠쓰 등은 5천여 명의 병력으로 부여풍을 호송했고, 주류성에 주둔하였다. 왜군은 지원군의 본진이 도착할때까지 나당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버티는 것이 중요한 목표일 테고, 그들에게 있어 이 전쟁은 전쟁의 차원에서 끝나는 단기적인 일이다. 즉 그들은 군사적 판단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하지만 토착 기반을 지닌 복신 등은 장기적 측면에서 백성을 결집할 정책을 추구하여야만 한다. 그에 따라 복신과 왜장들 사이에서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그 경우 부여풍은 자신의 기반인 왜군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갈등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는, 비록 모든 근거가 추정에 불과할 뿐이지만 한번 해봄직한 가정이다.

혹은 진짜로 이 일은 부여풍이 주도하였을 수도 있다. 주류성 인근 지역은 부흥운동 초기부터 이를 주도하던 복신의 세력 근거지였으므로, 왜국에서 온 부여풍은 아무래도 거북하여 금강 남쪽의 평원인 김제 지역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구축하려고 했을 수 있는 것이다[51] 그리고 복신으로서도 한 방책이라고 여겨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말이다.

물론 이 모든건 추정에 불과할 뿐이며 어느정도 확실해 보이는건 피성 천도가 실패한 뒤 복신과 부여풍의 갈등이 좀 더 노골화 되었다는 정도다.

신라군의 압박이 한층 강화되자 백제 부흥군은 왜국에 달솔 금수(金受)를 보내 구운을 요청하였다. 이에 왜국은 663년 3월 가미쓰케누노기미와카코(上毛野君稚)라는 장수에게 2만 7천의 병사를 이끌고 신라를 치게 하였다. 이해 5월에는 이누가미노기미라는 인물이 고구려로 가서 군사관계 일을 고하였다. 아마도 3월에 있었던 왜 지원군 본진 출병에 관한 사항을 알리고, 왜와 고구려가 남북으로 협동하여 나당연합군에 대응할 전략적 문제를 상의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이나, 고구려는 당시 평양성 침공을 막 저지한 후였기 때문에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여력이 없었다.

여하간에 그는 이후 돌아와서 석성으로 가 규해(糺解)를 만났는데, 규해는 복신의 죄를 거듭해서 말하였다. 규해는 다름아닌 부여풍의 다른 이름으로 여겨진다. 부여풍이 왜군에게 복신의 죄를 계속해서 말하였다, 라는 것은 그가 복신 처리 문제에서 왜군의 지지를 요청했다고 볼 수 있다. 왜군 입장에서도 토착 기반세력을 지닌 복신보다 부여풍 쪽이 좀 더 기호에 맞을 것이다. 당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양자 간의 불신이 심해지자 복신이 부여풍을 제거하려고 병을 칭하였고, 부여풍이 문병하러 오면 죽이려 하였다. 음모를 눈치챈 부여풍이 측근을 규합하여 기습, 복신을 제거하였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복신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였다.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그런 뒤에 이를 어떻게 처결하여야 할지 몰라 여러 신하들에게 '복신의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는 것이 좋겠는가, 아닌가?' 라고 물었다. 이에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이 악한 반역 죄인은 풀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복신이 덕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 이라고 하였다.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일본서기》천자기 2년 6월||

풍운아 복신은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백제부흥운동에 있어 복신의 절대적인 비중을 생각하면 이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일이었다. 복신의 목을 소금에 절이는 매우 강경한 처벌은 복신의 추종세력에 대한 경고의 차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백제부흥군의 상호 신뢰와 헌신은 큰 타격을 입었고, 내분의 틈을 타 신라군과 당군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부여풍이 믿을 것이라곤 왜과 고구려의 지원 밖에 없었다.

9.5 주류성 공략전과 백강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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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웅진성에 버티고 있던 당군은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었으나, 유인궤의 제안 이후 당나라 본토에서 손인사의 7천여 구원병이 도착하자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 7천의 병사는 산동 해안지역에서 선발되었다. 여기에 문무왕의 김흠순·김인문 등 장군 28명과 대병을 동원하여 합세, 웅진성으로 향하였다.

나당연합군은 웅진성에서 합동회의를 열어 최종 작전을 마무리 지었다. 육군은 문무왕이 이끄는 신라군과 손인사·유인원의 당군이 주류성으로 진격하고, 유인궤와 두상(杜爽), 그리고 부여융[53]이 지휘하는 해군과 식량 보급선단은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 육군과 합류하여 주류성으로 진군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백강(白江)이 어느 강인가, 의 문제는 금강 하류설, 그리고 동진강(東津江) 설이 대립하고 있고, 이는 주류성의 위치 비정 문제와도 연결된다.

일단 나당연합군의 이 당시 주력은 분명히 육군이었다. 당장 참가하는 인원들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문무왕과 손인사, 유인원이 이끌었고, 이에 반해 해군은 유인궤와 두상, 부여융 등이 이끌었다. 물론 유인궤는 나중에 가면 열전이 남을 정도로 유명해지지만, 이 당시는 유인원이 웅진도독부의 책임자였고 유인궤나 두상은 참모, 별장 급 인물들이었다.[54] 병력도 문무왕이 28명의 장수들을 동원한 만큼 숫자는 수만이 넘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부대 중 웅진성에 주둔하던 유인원의 1만 명은 이미 오랜 전투로 피폐해졌을 것이고, 새로 투입된 병력도 손인사의 7천 정도라는 점을 보면 이 당시 육군의 핵심은 절대적으로 신라군이었다.

나당연합군은 진격로에 대해 논의했고, 여기서 결정된 것은 부흥군의 세력 아래 있는 성으로서 지금의 서천군 임천면의 성흥산성(聖興山城)으로 비정되는 가림성(加林城)은 사비성에 근접해 있지만 성이 가파르고 험준한만큼 공략하려면 병력 손실이 많고 기일이 걸릴 것이므로 건너 뛰어버리고, 주류성을 직공하자는 계책이었다.

이 움직임은 부흥군 진영에도 알려졌다. 동시에 이호하라노기미오미(廬原君臣)가 이끄는 왜군 지원병 1만여명이 온다는 소식이 있자, 8월 13일 부여풍은 이를 맞이하러 백강구로 나섰다. 이 부대가 앞서 말한 신라를 친다는 2만 7천여 병력의 일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당시 파견된 부대는 사비기노강(沙鼻岐奴江) 등 두개의 성을 빼앗았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상대적으로 신라 군이 백제에 집중되어 정작 본토가 약할테니 이를 공격하여 백제 지역에서 신라군의 공세를 풀어보려 했다는 시각이 있다.

그런데 그 부대 일부가 부여풍이 긴급하게 구원을 요청하자 진로를 급하게 바꿔 백강구로 달려갔는지, 혹은 또 다른 파견군이 도착했는지 기록 부재로 알기가 어렵다.

8월 17일 무렵, 나당연합군은 주류성을 포위했고, 170여척의 당나라 수군은 백강구에 이르러 육군에 공급할 군량을 하역한 후, 진을 치고 바다로부터 주류성을 구원하러 진입하려는 왜병을 대비하였다. 27일 왜 수군이 백강구에 도달하여 주류성에 온 일부 왜군 및 부흥군과 합세하였고, 백제의 기병이 강어귀 언덕에 포진하여 왜선을 엄호하였다.[55]곧이어 왜 선단이 당 수군에게 선공하였으나 불리해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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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총요(武经总要)의 몽충(艨衝) 그림

당나라 수군은 그런 왜 선단을 추격하지 않았다. 이 당시 양측의 전력을 보면, 당나라 병선은 170여척. 왜선은 400여척이었다.[56] 접전은 다음날부터 벌어졌다.

먼저 신라의 기병이 백제의 기병을 공격했고, 왜의 해군이 당나라 해군에 돌격하였다.

일본 장수들과 백제왕은 기상을 살피지 않고 서로 일러 말하기를,

"우리들이 앞다투어 싸우면 저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대오가 어지롭게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당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일본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많고 배가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에치노다쿠쓰가 하늘을 우러러보고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왕 풍장이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일본서기》천지기 2년 8월

간단하게 결과만 말하자면 왜군의 대패. 그야말로 처참할 정도의 패배였다.

원인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견해들이 있다. 우선, 당나라 군대가 백강구에 도착한건 8월 17일로 충분히 여유가 있었고 주변 환경이나 전술 준비에 유리한데 비하여, 왜 수군은 뒤늦게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앞의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기상도 살피지 않고 바로 전투에 들어간 전술적 실책이다. 구당서의 기록으로 이 전투에 대한 묘사를 보면 연기와 화염 혹은 바닷물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 같은 언급들이 보이는데 왜군의 선단들이 화공에 당해버렸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화공에서 제일 중요한건 기상을 살피는 일이다.[57]

또 관련 기록을 보면 당나라 군대는 진을 형성하여 일정한 전술에 따라 절도 있는 움직임을 보여준것이 나타난다. 이에 비해 왜군은 그런 모습이 부족했는데, 왕조 국가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데는 세계에서 최고로 이골이 난 중국이나, 여하간에 국가가 징발 편성하여 훈련시킨 신라군에 비해 왜군은 여러 지방 세력가들의 군대를 연합한 상태라 일원론적 지휘체계에 따른 군령들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대오가 어지롭게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라는 기록에서 보이듯, 왜군은 개별적인 전투에선 개인적으로 용맹하게 돌진하는 식으로 싸우려 했으나 이에 비해 중국은 집단 전술에 관해서는 일본이 신석기 시대였던 조몬시대 무렵에는 이미 역량이 쌓일대로 쌓인 나라다. 왜군의 개별적인 용약 돌진은 당군의 두꺼운 진형을 뚫지 못하였고, 당의 전선이 정연하게 대오를 갖추어 좌우로 전개하여 왜선을 포위하자, 왜선들이 우왕좌왕 하며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채 화공을 당하여 대패하였다.

무경총요(武经总要)의 해골선 그림

아예 이런 점을 토대로 백강 전투뿐만이 아니라 백제 부흥 운동에 파견된 왜군 전체의 성격을 보려는 경우도 있다. 662년 5월의 1차 파견군이나 663년 2월의 2차 파견군은 전·중·후 장군이 이끈 것으로(1차에선 중군은 생략) 되어 있고, 백강구 전투에서도 중군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런데 이게 상호간의 상하 통속관계를 나타내는것이 아니라 징병 지역에 따른 편제나 혹은 출병 시간에 따라 구분된 것으로 여기면서, 각 장수는 죄다 상호 병렬적 관계이며 3군 또는 2군 전체를 통솔하는 수직적 지휘계통 결여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면에서 볼 경우, 백강구 전투의 승패는 단순히 싸우고 잘 싸우고를 못 떠나서 양측 국가 체제의 상이함에서 비롯하는 군대의 편성원리와 성격 차이, 율령(律令) 제도에 기저를 둔 국가와 군대 운영 여부에 따른 차이에서 근본 원인을 찾는것이 되어버린다.

이에 대해서 출전한 장수와 사병의 출신지역이 매우 광범위함을 지적하기도 한다. 즉 당시 참전한 사병과 장수의 출신지가 일치하지 않음으로, 이를 중시하여 병사가 장수에 사적으로 속한 병력이 아니라 국가가 각지에서 징발한 병력이고, 장수는 조정 관원 중에서 파견하였음을 말한다고 해석하여, 이들 군대가 각지 호족의 무장력을 임시적으로 규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중·후 표현 역시 보편적인 군대 편제이고, 출정군에 '대장군'의 존재를 전하는 기록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입각할 경우, 당시 왜군 부대의 성격을 지방 유력자 휘하 부대들의 임시적 연합이라고 보는 그간의 설은 백강구 전투에 관한 구체적 기사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그 무렵까지 왜국의 군대 동원 형태와 성격 이해를 토대로 설명한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논리적 비약이라는 것이다.

  • 일단 당시 왜국이 율령제를 정착시키기 전이기는 하다. 그것만으로 전투 패배에 대한 설명이 다 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 그렇지 못하게 된 부분 정도는 있을 것이다.
  • 복신의 처형에 따른 부흥군 내부의 분열과 갈등 문제다. 왜군과 부흥군 사이의 갈등과 불협화도 상정 할 수 있다. 어느정도 전투력 저하의 요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함선의 차이에 대한 고려다. 당나라의 여러 주력함들은 견고한 대형 군선이고, 몽충은 높고 커서 접근전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배끼리 부딫혀 상대방 배를 부수는 방법에서도 우위를 가지고 있고, 해골선은 적선을 쳐서 격파하는 부분을 장치하여 접근전에서 유리하게 고안된 군선이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군의 함선들은 소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강구 전투에 대해 생각해볼 것은 이 전투의 비중을 어느 정도로 볼 것이냐는 문제이다. 이 전투를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회전이라고 까지 보는 경우도 있지만, 이 전투의 주력이 당군과 왜군이었음을 매우 강하게 의식하여, 마침 임진왜란이나 청일전쟁처럼 고대 중국세력과 일본 세력이 한반도에서 양자간에 자웅을 겨룬 전투인 것처럼 인식하려는 의도가 어느정도 있다.[58]

물론 이 전투를 고비로 왜 세력이 고대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니, 이는 한일관계사에서는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전투 후에 일본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인 율령제를 형성하였던 만큼, 일본사 전개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당나라에게는 이 전투는 별로 비중이랄게 없는 전투였다.[59] 이는 신라에게도 주된 전장은 아니었고, 전투 규모도 양측 모두 실제 동원한 병력이 만 수천여명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백강구 전투에 관한 과도한 강조는 신라군의 존재를 홀시하게 하고, 신라는 피동적 존재로 파악하는 부작용이 있다.

백강구 전투가 벌어지기 전인 8월 13일, 신라군이 주축인 육군은 주류성 지역에 도착했고, 8월 17일부터 성을 에워싸고 공략전을 펼쳤다. 일본군이 백강구에 도착한것은 이때부터 10일 후였다. 또 부여풍은 신라군이 도착한 13일 휘하의 일부 왜군과 성에서 빠져나가 왜군을 맞이하러 떠났다. 성이 포위되기 전에 나가서 왜의 지원군과 연결, 성 안팎에서 협공하려 하거나, 최소한의 퇴로를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 백강구 전투에서 부여풍은 대패했고, 주류성은 며칠 더 버텨보았지만 부여풍이 고구려로 달아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침내 9월 7일 농성하던 백제 부흥군과 왜군이 항복하였다. 주류성의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인근 백제의 여러 성도 잇따라 투항해버렸고, 좌평(佐平) 여자신(余自信), 달솔(達率) 곡나진수(谷那晉水) 및 억례복류(憶禮福留)와 목소귀자(木素貴子) 등이 많은 백제인과 함께 퇴각하는 왜군을 따라 일본 열도로 망명하였다.

그런데 이례적인 기록이 있는데, 이 백강구 전투 당시 탐라 국사가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다(구당서 유인궤전). 이 말은 탐라인이 어떤 형식으로든 전투에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탐라가 동성왕 시기에 백제에 귀복하였고, 백제 멸망 후인 661년 5월에는 왜국에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을 보냈다고 한다. 그 해 8워에는 당나라에 조공사를 보냈고, 문무왕 2년에는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백제 멸망 이후 급변하는 주변 정세를 탐라국 나름으로 탐색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백강구 전투 현장에 탐라인이 있었음은 탐라인이 백제와 왜 측에 가담하였던것으로 보이는데, 탐라국사가 잡혔다는 이야기로 보아 군사적인 참여는 아닌것으로 보이고, 백제 부흥군에 보낸 사절로 보인다.

부흥 운동의 핵심이었던 복신이 비참하게 죽었고, 왜군의 지원군마저 모조리 박살나고 주류성이 함락된 시점에서 백제의 부흥운동은 사실상 실패가 결정되었다고 불 수 있다. 하지만 임존성에서는 지수신(遲受信)이 끝까지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당군이 한때 백제 부흥군의 장수였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를 전면에 내세워 압박하자, 마침내 연말에 임존성이 함락되었고 지수신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로 만 3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백제 부흥 운동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9.6 에필로그

백제는 멸망했고, 부흥 운동도 실패하여 역사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치열하게 저항하던 백제인들 중 일부가 왜로 망명하였다. 지배층이 아닌 일반 민중 중에서도 바다를 건너간 사람들이 있어, 지금의 도쿄 일대의 관동지역인 동국에 거주하던 백제인 2천여명에게 663년부터 3년간 식량을 왜의 조정에서 공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백제인들에게 조국이던 백제는 완전히 사라졌고, 이제 다시 일어날 방법도 없었다. 왜로 떠나간 백제인들은 이제 돌아올 곳이 없었고, 일본 땅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백제인에서 일본인으로 동화되었다.

왜로 망명한 백제인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들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여 왜 조정에 등용되었다. 665년, 달솔 답발춘초(答鉢春初)는 장문성을, 달솔 억례복류와 사비복부(四比福夫)는 다자이후의 방어를 위해 쌓은 오오노성과 연성의 축초 책임을 맡았다. 671년에 목소귀자·곡나진수·억례복류·답발춘초 등은 병법에 밝다는 점을 평가해 대산하(大山下)의 관위가 주어졌다. 좌평 여자신과 사택소명(沙宅紹明)은 법관대보(法官大輔)에 임명되었다. 그 이에 몇몇은 의약, 오경, 음양 등에 밝다는 재능을 인정받아 관위를 받았다. 이처럼 백강구 전투 이후 망명한 그들은 일본에서 전문인으로 능력에 대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일본 조정의 배려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었고, 여기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백제 부흥과 고국 복귀를 바라더라도, 자력으로는 이를 구체화할 역량 같은건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져갔다.

나머지 백제의 지배층은 신라의 지배층으로 포섭되거나, 부흥 운동에서 죽어나갔고 일반 민중들은 신라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로의 동화는 결국 실패했고, 백제는 약 250년 만에 다름아닌 신라 군인이었던 견훤의 손으로 부흥하게 된다.
신라는 바로 이런 일을 막기 위해 부여-공주 일대에 진골 귀족을 직접 심고 전북 지역엔 고구려 유민을 대거 사민했지만, 왕경인이 아니면 권력층에 진입할 수 없었던 체제를 극복하지 못했던 탓에 지역에 이식된 귀족층은 신분 하락과 푸대접에 분노해서 신라를 버리고, 여전히 백제 유민 의식이 잔존했던 지역 분위기에서 실력을 획득해 성장한 호족들이 이에 편승하면서 이런 안전 장치들은 의미를 잃게 된다.

후백제가 망했어도 유민 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어서 한참 후 고려 시대인 1237년에 나주에서 이연년이 백제 부흥을 기치로 민란을 일으키지만 김경손에게 패해 진압당하고, 이후 항몽 투쟁 과정 중에 소멸된다.

10 고구려, 무너지다

10.1 연개소문의 사망과 후계자 구도

백제의 멸망은 고구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당나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력해졌고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중국 서북과 북방의 이민족들도 모조리 당군의 발길 아래 무릎을 꿇었다. 왜군은 백강구 전투에서 괴멸당했고, 이제 동아시아에 고구려를 도와줄 수 있는 세력이라고는 단 하나도 남지 못했다. 이미 고구려는 수나라 시기부터 이어진 끝없는 전쟁, 전쟁, 전쟁으로 이미 나라는 피폐해져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외부적 요인이 끝을 모르고 악화되는데 내부에서도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은 막리지, 대모달로서 군사권을 장악하여 국정을 주도하였다. 과도기를 거친 후엔 대대로가 되어 귀족회의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는 방식을 부활시켰는데, 공고해진 자신의 권력을 귀족회의라는 공식적인 기구를 통해 행사함으로서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연개소문은 뒤이어 아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넘겨주기 위한 조처를 취하였다.

장남인 연남생은 묘지명에 따르면 이미 15살에 중리소형(中裏小兄)을, 18살엔 중리대형(中裏大兄), 23살엔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이 되었으며 이듬해 장군직을 받았고, 28세에는 막리지 삼군대장군이 되었으며 32세에 태막리지가 되어 군국을 총괄하였다. 이는 연남산도 비슷하며, 연개소문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뒤이어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연남생이 태막리지가 될 무렵 연개소문이 사망하였다. 연개소문은 세 아들 중 누구 한명을 골라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았고, 세 아들 모두 군국의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그가 죽은 후에 권력 투쟁을 야기할 수도 있는 조치였다. 물론 세 아들이 협력을 하며 외적을 물리친다면야 죽은 연개소문이나 고구려 입장에선 아주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것이 어떻게 사람 마음대로 되겠는가. 특히나 자식 일이란 마음대로 안되는게 세상 이치다.

이 달에 고려 대신 개금이 죽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유언하기를 '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합하여 작위를 둘러싸고 다투지 마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라 하였다.

일본서기》권 27

실로 그렇게 되었다. 그저 웃음거리가 되는것보다는 더 심각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10.2 남생의 반란

연씨 집안의 장남 연남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최고 집권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666년 초,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하러 나가면서 수도의 일을 두 동생에게 일임하였다.

그런데 수도를 비운 사이 두 동생에게 어떤 사람이 형인 남생이 그들을 미워하니 먼저 도모하는 것이 옳다고 이간질하였고, 남생에게는 두 동생이 형이 수도로 돌아오면 권력을 빼앗을 것을 두려워하여, 형을 몰아내려 한다고 참소하였다. 남생은 그런 말을 듣자 불안함을 느껴 평양으로 사람을 몰래 보내 두 동생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남산과 남건에게 사로잡혔다. 두 동생에게 있어서는, 형이 자신들을 의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남산과 남건은 즉시 평양으로 돌아오는 남생을 가로막아 오지 못하고 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졸지에 권력에서 밀려난 남생은 급히 부수도였던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곳에 자리를 잡고 동생들과 대결하였다. 하지만 국내성 세력만으로는 수도 탈환이 어려웠고,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처지에 초조해하다가, 결국 당나라에 나라를 들어 항복하는 길을 택하였다.

남생은 대형 불덕(弗德)을 당나라에 파견하였고, 오골성을 공격하였다. 오골성 공격은 쉽지 않았고, 당나라는 고구려의 최고 집권자가 느닷없이 투항하겠다고 하자, 전혀 예상외라 쉽게 믿어주지 않았다. 다급해진 남생은 다시 서북쪽으로 소자하 유역을 거쳐 혼하 방면으로 나가 대형 염유(冉有)를 재차 보내 투항의 의지를 밝혔고, 여름에는 아들인 연헌성(淵獻誠)을 보내 당에 거듭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제 당나라가 보기에도 남생의 투항은 분명해졌다. 일단 확신이 생기자 당은 적극적으로 나섰고, 계필하력을 파견하여 남생을 구원하였다. 666년 9월, 요하를 건너 침공해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남생군과 조우하였고, 남생은 가물(可勿)·남소(南蘇)·창암(倉巖) 등의 성을 들어서 당나라에 바치고 투항하였다.

남생은 또 국내성 등 6개 성을 바쳤는데, 이렇게 되자 고구려 서북부 지역 깊숙이 당의 세력권이 뻗쳐서 들어온 형상이 되었다. 고구려 중앙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남생을 공격하려 했지만, 고구려의 옛 수도인 국내성은 압록강 중류 지역의 요새로 외부에서 공략하기에 힘들었으며, 무엇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고구려 최고 집권자였던 남생이 적이다 보니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667년 남생은 직접 당나라에 입조하였다.

연남생은 고구려의 최고 집권자였고, 연개소문 생전부터 단계를 밞아 올라가면서 이 자리에 오른 만큼, 고구려 내부의 각종 기밀이나 정보에 대해서는 빠삭했다. 더구나 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한것도 형제간의 원한인 만큼 어떤 가치나 이념보다도 강한, 복수심이라는 요소 때문에 그는 당나라에 적극 협력하였다.

이미 고구려가 피폐해진 것은 몇십년도 훨씬 지난 일이다. 전쟁은 끊어질 날이 없었고, 당나라의 압력은 가공할만 했으며, 백제마저 절망적으로 사라졌고, 백제 부흥군도 말라버렸다. 왜군은 또한 한반도에서 모조리 철수했다. 몽골 고원에는 고구려를 도와줄 세력이 단 한 세력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층의 분열이 벌어지자, 누가 보아도 고구려의 패망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 기미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것은 고구려인들 본인들이었다.

666년 12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자신의 관할 지역인 12성을 들어 신라로 투항하였다. 이 12성은 지금의 강원도 북부와 함경남도 남부 일대였다.

기록의 부재로 이 형제들의 다툼이 벌어지며 분열되는 과정에서 어느 편이 먼저 대립을 촉발시켰는지, 그 중간에서 부추긴 주체들이 과연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형제들이 분열하고 그 과정에서 당이나 신라의 공작이 있었을 수는 있다. 이미 20년 동안의 연개소문 집권기를 거친 고구려의 정치기구는 이 분열의 대립에서 별다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왕이나 귀족회의 등 어떠한 권력 장치도 이 과정에서 작용하지 못했고, 갈등을 조정한다던가 혹은 어느 한 편으로 힘을 몰아주어 권력의 혼돈 상태가 빨리 종결되게 하는 일에도 실패하였다.

10.3 평양성은 불타오르고

연남생의 투항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이용, 당나라는 666년 12월, 이세적을 사령관으로 한 대규모 원정군을 투입하였다. 667년 2월 이세적이 이끈 대군은 요하를 건너 신성을 포위하였다. 신성의 고구려군은 치열하게 항전했지만, 마침내 9월에 성내에 투항자가 있어 성주를 묶고 항복하여 함락되었다.

[1]

함락시킨 신성에 고간(高侃) 등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이세적은 주력군을 이끌고 요동성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대응해 남건은 고구려군과 말갈군을 파견하여 신성 탈환을 시도하며, 한편으로는 소자하 유역의 목저성·창암성·남소성 등을 공격하여 재차 고구려 중앙 정부에 귀속시켰다. 그렇게 되자 신성의 당군과 연결이 차단된 국내성 지역의 남생군은 고립되었다.

만일 이 작전이 유효하게 전개되었다면 고구려는 국내성 지역을 회복하고 신성을 타환, 이세적의 군대를 북쪽에서부터 압박하고 보급선을 위협하면서 지구전을 펼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희망사항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신성을 공격하던 고구려군은 당군에게 격파 당했고, 나아가 계필하력설인귀는 당군을 이끌고 소자하 유역에 진출, 고구려군을 박살내고 남생군과 다시 조우하였다. 이에 당군은 신성을 중심으로 동으로는 국내성에 이르는 넒은 지역을 확보하고,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영역을 남북으로 양단하는 형세를 구축하였다. 당군은 이 축을 중심으로 점령지의 폭을 확대하면서 고구려의 숨통을 조였다.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본대는 신성을 떠나 16개 성을 한번에 쓸어버린 후, 압록강 하구에 있는것으로 알려진 대행성(大行城)으로 나아갔다. 이 진역에 국내성 방면으로 진격하던 계필하력의 당군도 오골성을 지나 대행성으로 나아가 이세적의 군단과 결합하였다.

이미 여기까지만 해도 고구려는 시망에 가까운데, 신라군마저 북진을 개시하였다. 667년 이세적의 당군이 요동을 공격할때 신라는 파진찬 지경(智鏡)과 대아찬 개원(愷元)을 요동 전선에 파견하였고, 당으로부터 평양성 공략전에 신라군이 합류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이에 따라 문무왕은 8월 김유신 등 장군 30여명을 거느리고 수도를 떠나 9월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하여 당군이 평양으로 오기를 기다렸다. 같은 시기 당나라 장군 유인원과 신라 장수 김인태는 각각 백제 지역에 주둔하던 당군과 신라군을 거느리고 비열도(卑列島)를 따라 북진하였다.

10월 2일, 이세적은 평양성 북 2백여리 지점까지 도달하였다. 그리고 촌주 대나마 강심을 거란병 80여기와 함께 한성에 파견, 신라군의 진격을 촉구하였고, 이에 응한 문무왕은 북진하여 11월 11일, 장새에 이르렀다. 그런데 11월 이세적의 군대가 회군하였다는 소식을 들어 별 소득도 없이 철수하였다.

평양성 일대에서 당군이 철수하였지만, 당나라 군이 본토로 철수한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듬해 668년의 작전은 다시 요동에서부터 진군해야 한다. 하지만 668년 2월 설인귀는 당군을 끌고 북으로 진격하여 지금의 장춘 농안 지역에 있었던 북부여성을 공략하고 부여천 일대의 30, 40여성을 점령하였다. 당은 이 작전으로 요서의 연군 ─ 통정진 ─ 신성으로 이어지는 당군의 주된 보급선을 북에서 위협할 수 있는 고구려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는 설인귀의 당군이 신성 상변에 주둔하던 당군 본영에서 출발하여 북으로 진군했음을 말한다. 당군은 667년 11월 이후 당 본토와 연략이 용이한 요동의 신성과 요동성 일대로 전선을 축소하고, 국내성 일대의 남생군과 연결하여 방어에 임하면서 겨울을 버텨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영역에서 당군이 월동할 수 있음은 고구려의 저항력이 바닥에 바닥까지 약화되었음을 말한다.

충분히 휴식하고 보급을 받아 전력을 재정비한 당군은 668년 여름, 재차 평양성 공략에 나섰다. 신라군도 6월 21일 평양성을 향해 수도를 떠나 진발하였다. 이번에는 김유신은 고령에다 풍병에 시달리고 있어 수도에 머물면서 후방의 주요 문제를 총괄하게 하였다.[60]

6월 25일에는 고구려의 대곡성과 황해도 신원군에 있는 한성 등 2군 12성이 웅진도독부에 항복하였다. 이제 한강 하류에서 대동강까지는 문이 훤하게 열려졌다. 7월 16일 문무왕은 한성주로 행차하여 독전하였다. 마침내 9월 21일, 신라군과 당군이 회합하여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고구려는 이미 물리적으로는 역량이 바닥난지 오래고, 정신적인 저향력도 지배층끼리의 내분과 투항 등으로 고갈된지 오래였다. 평양성 방어 임무를 총괄하는 승려 신성(信誠)이 당군에 내응하여 성의 문루에 불을 지르고 투항함에 따라 마지막 방어벽도 무너졌다. 연남건은 칼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포로가 되었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한 영역을 차지하고, 기나긴 세월동안 동아시아 세력권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고구려는 이렇게 멸망했다. 당나라 부대는 성에 올라 북을 쳤고, 성에 불을 질렀다. 둥둥 북치는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고구려는 무너져내렸다.[61]

10.4 고구려 유민들의 에필로그

고구려 멸먕 후 졸지에 '유민' 이 되어버린 고구려들의 행보는 몇 갈래로 나뉘어졌다. 평양성 함락 이후 이세적은 보장왕 이하 고구려 지배층을 포로로 잡아 회군하였다. 보장왕 등은 당군의 전승 기념 의식으로 당태종의 무덤에 포로로 바쳐졌으며, 당고종에게 사죄하는 의례를 올려야 했다. 당고종은 보장왕에게 벼슬을 주었다.

연씨 삼형제 중 남생은 고구려 공략에 힘쓴 군공을 인정받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벼슬을 받았고 남생의 아들 헌서도 관직을 얻었다. 평양성에서 일찍 항복한 남산은 사재소경(司宰小卿)에 임명되었다. 끝까지 저항한 연남건은 머나먼 중국 남부에 유배되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은 평양성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설인귀에게 2만의 병사를 주어 주둔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 5부 176성 69만 호의 옛 고구려를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재편하고 고구려인 가운데 투항하였거나 협력한 자들을 도독·자사·현령으로 임명하여 표면에 내세우고, 당나라인 관리가 실제적으로 통치하게 조처하고 안동도호가 이들을 총괄하게 하였다. 새로이 행정단위를 구획하는 등의 일에는 장안에 머물던 연남생이 깊이 간여하였다.

안동도호부는 고구려인의 반발을 원천적으로 약화시켜 당의 지배를 원할히 하기 위한 방책으로, 부유하고 힘 있는 고구려인을 당의 내지로 대거 강제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감행하였다. 고구려 중심부 지역에 거주하던 유력한 민호 2만 8천 200백여 호가 강제 이주당했고, 이는 고구려인 사회를 뿌리채 흔들어버리는 일이었다.

이에 고구려 유민 중 일부는 당의 지배에 적극적으로 무력 저항하였다. 또 다른 방책으로는 당의 지배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전자의 경우는 검모잠의 봉기가 그 예에 해당한다. 요동지역에서도 고구려 유민의 봉기가 잇따랐다. 당태종의 침공을 저지했던 안시성이 주요 근거지로, 다만 유민들의 무력 봉기는 서로간의 조직력 부족과 당군의 대처때문에 673년 무렵까지는 거의 진압되었다.

이러한 반당 저항 운동 과정에서 다수의 고구려 유민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나갔다.

  • 첫째는 신라로 합류한 이들로, 원주지가 신라에 병합됨에 따라 귀속된 사람들과 연정토 등처럼 집단적으로 신라에 내투해온 이들이 있었다. 물론 전쟁 포로로 잡혀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부흥운동 과정에서 활약하던 사람들은 전황이 좋지 않아 대부분 신라군으로 합류하였다.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둘째는 발해가 건국이 되면서 발해인이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고구려 멸망 후에도 계속 만주지역에 거주하던 집단과, 대조영 집단처럼 요서 지역의 영주 방면에 옮겨져 있다가 동으로 탈주한 집단, 그리고 요동 방면에서 동부 만주 지역으로 옮겨온 사람들이 있었다.
  • 세번째로, 일본 열도로 이주해간 집단도 있었다. 일본세기의 저자인 승려 도현처럼 668년 이전에 일본에 갔다가 고구려가 망해버려 아예 그곳에 머문 사람들도 있고, 대부분은 고구려 멸망 이후 일본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다.
  • 네번째는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된 사람들이다. 세분하면 요서의 영주 지역에 정주하게 된 이, 농우도(隴右道) 방면 등 변경지대로 옮겨진 이, 회하 유역 등 강회 방면에 배정된 이들로 나뉘어지는데 농우도 방면을 보면 지금의 섬서성 서부, 감숙성 지역 등으로 많이 옮겨졌다. 이 지역은 티베트와 몽골고원의 유목민 세력의 연결을 차단한 긴 회랑지대로서, 당은 고구려인들의 군사력을 활용하기 위해 이 지역에 정착시키고 단결병(團結兵)으로 편성하였다. 단결병은 이 지역의 자위를 위한 일종의 지방병이었다. 이 사람들의 후예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고선지(高仙芝)이다.
  • 다섯번째로, 몽골고원의 유목민 사회로 이주한 사람들로, 당의 지배를 피해 집단적으로 옮겨갔는데 게중에는 고문간(高文簡)처럼 묵철(默啜)의 사위가 되어 '고려왕 막리지'라 칭한 이도 있었다. 이들 중 고문간, 고공의(高拱毅), 고정부(高定傅) 등이 각각 이끄는 집단은 돌궐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몽골고원을 떠나 당으로 내투하여 내몽골 지역에 정주하였다.
  • 여섯째, 요동 지역에 그대로 머문 이들이다. 이 부류는 668년 이후 당의 안동도호부 통치를 받았는데, 여러 차례 저항과 당 내지로의 강제 이주를 겪였고, 많은 수는 동부만주나 몽골고원 및 신라로 이주해 안동도호부에는 약하고 가난한 소수만 남게 되었다.

676년 당은 한반도에서 철수한 뒤 요동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재건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 그 일환으로 보장왕이 677년 고구려 유민과 함께 요동으로 귀환하여 고구려 유민들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겼는데, 이 보장왕이 귀환한 후 얼마 안되어 속말말갈 등과 연결하여 당에 반대하는 거사를 도모하려 하였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당 내지로 유배되었고, 귀환 조치했던 고구려 유민은 다시 당 내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10.5 말갈 인들의 행보

다수의 말갈족은 오랫동안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고, 상당수는 이런저런 경로로 고구려화 되었다. 당사자들이야 별 문제는 없겠지만 당나라와 같은 제삼자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화 된 말갈인과 말갈족과 인접해서 살던 변경의 고구려인 등을 제대로 구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를테면 대조영에 대한 당나라 사서의 언급이 그렇다.

이렇게 관련이 깊다보니 말갈족은 고구려 지배 아래 고구려군에 많이 동원되었다. 당연히 고구려 멸망은 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수나라 대의 말갈 7부 중에 백산(白山), 백돌, 안거골(安車骨), 호실(號室) 부 등은 분산되어 미약해졌다. 그 밖에 속말부는 속말수 유역이 거주하던 돌지계 집단 등 일부는 이미 그 이전에 수나라에 투항하여 당군에 종군하였다. 돌지계의 아들이자 나당전쟁에서 활약한 이근행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이다. 속말부의 다른 다수는 고구려에 복속하여 대당전에 참여하였다. 걸사비우(乞四比羽)가 대표적이다.

668년 이후 말갈족의 기존 질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고구려에 충성하던 유력 말갈족들 촌락들은 전란의 피해를 입어 약화되었고, 하위 촌락들이 이탈과 저항을 하였다. 668년 이후 월희부(越喜部), 철리부(鐵利部) 등 새로운 집단이 출현하였고, 고구려 세력권 밖에 있던 흑수부가 강성해졌다.[62]

나당전쟁이 한반도 남부에서 펼쳐지고 신라가 당나라의 공격을 멋지게 격파함으로서, 중·동부 만주지역은 당과 신라, 돌궐 등 어느 국가도 세력을 뻗치지 못하는 국제적인 힘의 공백지대가 되었다. 대내적으로도 고구려인과 말갈족의 여러 집단이 소규모 단위로 흩어져 자치를 영위하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들 집단을 규합하는 새로운 정치적 구심력 형성은 7세기 말 요서지역에서 탈주해온 대조영 집단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구려가 버티고 있는 동안은 신라는 당나라의 직접적인 야욕에서 한발자국 물러나서 버티고 있을 수 있었다. 당나라의 목표가 고구려의 소멸인 만큼,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는데 신라를 건드릴 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고구려의 패망이 눈 앞에 보이자, 전쟁의 징조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에, 668년 9월 12일, 신라 사신 김동암(金東嚴)이 왜를 방문하였다. 신라와 왜의 국교가 단절된지 11년 만이었다. 자세한 목적은 전해지지 않으나, 김동암이 왜국을 찾은 시점이 고구려 멸망 직전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11월 5일 김동암은 귀국했고, 그 뒤 나당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따라 김동암이 당시에 반당적인 주장을 했고, 이를 전제로 해서 양국의 화평과 국교 회복 제의가 있었으며, 왜가 동의했다는[63] 시각이 있다.

하지만 당시 당 제국의 위세가 절정에 달했고,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며, 무엇보다 신라가 국운을 거는 사업임에 분명한, 당나라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 의사를 표명하기에는 더욱 큰 국제적 계기가 필요했다는 시각 때문에 이에 대한 반발도 있다.

11 나당전쟁

해당항목 참조.

12 삼국통일전쟁 연표

<고구려-수 전쟁>

577 CE북주 무제, 북제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화북을 통일하다.
578 CE신라가 백제의 알아샨성(閼也山城)을 공격하다.
579 CE북주 무제, 사망하고 선제가 뒤를 잇다. 신라, 진평왕이 즉위하다.
580 CE북주 선제, 사망하고 정제가 뒤를 잇다.
581 CE북주 정제, 양견에게 제위를 양위하고 살해당하다.
양견, 수문제로 즉위하여 수나라를 건국하다.
고구려, 수나라에 조공하고, 수문제, 평원왕을 대장군 요동군공으로 임명하다.
582
~584 CE
고구려, 평원왕이 수나라에 수차례 조공하여 상황을 탐색하다.
589 CE수문제, 50여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진을 멸망, 중국을 통일하다.
590 CE고구려에 중국 통일 소식이 알려지다.
평원왕, 크게 놀라며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모으며 전쟁 대비를 하다.
수문제가 표문을 보내 질책하다.
10월에 평원왕이 사망하다. 영양왕이 즉위하다.
수문제가 영양왕을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에 요동군공으로 삼다.
591 CE고구려가 정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3월에 수문제가 영양왕을 고구려왕으로 봉하다.
592 CE고구려가 수나라에 조공을 보내다.
597 CE5월, 고구려가 수나라에 조공을 보내다.
598 CE2월, 영양왕이 수나라를 공격하나 영주총관 위충이 이를 막아내다.
수문제, 격노하여 대군을 진군시키나 이기지 못하고 9월, 수나라 군이 철수하다.
백제 위덕왕이 수나라가 움직일것을 청하다. 고구려가 이에 백제를 공격하다.

추가바람
<고구려-당 전쟁>

640 CE고구려가 2월에 태자를 당에 파견하다.
9월에 당나라의 후군집이 고창을 멸망시키고, 군현을 설치하다.
641 CE당이 직박랑중 진대덕을 고구려에 파견하다.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 의지를 표방하다.
백제 무왕의 뒤를 이어 의자왕이 즉위하다.
642 CE백제가 대야성을 위시한 신라의 40여 성을 공략하다.
고구려에 정변이 일어나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다.
김춘추가 평양으로 가 회담하지만 제의가 거부당한다.
643 CE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에 몰린 신라가 당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다.
644 CE당이 고구려 침공을 위한 동원을 시작하다. 백제와 신라에 참전을 요구하다.
645 CE4월에 당군이 고구려를 공격하다. 요동성과 백암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다.
5월에 신라군 3만이 당을 돕기 위해 북진하다.
백제군이 신라 서부지역을 공격하자 북진하던 신라군은 퇴각.
6월에 안시성 공방전이 전개된다.
왜 조정에서 정변이 벌어지고 신정권이 다이카개신을 단행하다.
9월에 당군이 안시성 공략의 실패와 설연타의 동향으로 인해 전면 퇴각.
646 CE당이 6월에 설연타를 무너뜨리다.
왜가 9월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위 귀족의 파견을 요청하다.
647 CE1월, 신라에 비담의 난이 일어나다. 선덕여왕이 사망하고 진덕여왕이 즉위하다.
김춘추가 왜국에 파견되다.
당이 고구려에 대한 장기 소모전을 개시하다.
648 CE당이 내년, 고구려 정벌을 위한 계획을 발표하다.
11월, 김춘추가 당으로 가 당태종과 회담하다. 신라와 당의 군사동맹 타결.
649 CE신라가 고유한 연호를 폐지하고 당의 연호와 관복을 따르기로 하다.
당태종이 사망하고 4월에 당고종이 즉위하다. 고구려 원정 계획이 중단되다.
650 CE신라가 김법민을 당에 파견하다.
651 CE백제가 당에 사신을 파견하다. 당고종이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는 일에 대해 경고하다.
신라 사절이 당복을 착용하고, 왜국을 압박하다. 왜국이 이에 거세게 반발.
652 CE백제가 당에 마지막 사신을 파견하다. 이후 당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백제와 왜의 관계가 강화되다.
653 CE왜가 2차 견당사를 당나라에 파견하다.

<백제의 멸망>

654 CE3월, 신라의 진덕여왕이 사망하고 김춘추가 즉위하다(태종 무열왕).
5월, 율령에 따른 60여 조가 반포되다.
왜가 3차 견당사를 당나라에 파견하다.
655 CE고구려가 3월에 신라를 공격하다.
당이 5월에 고구려를 공격하다.
백제가 7월, 왜국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다.
656 CE고구려가 8월, 왜국에 사절을 파견하다.
657 CE신라가 왜국의 사절이 신라를 거쳐 당으로 가는 견당사 루트를 막고 거부하다.
왜와 신라의 국교가 단절되다.
659 CE7월, 왜가 4차 견당사를 당나라에 파견하다. 연말에 귀국하려는 것을 당측이 억류하다.
당이 서돌궐을 반란을 진압하려 당군을 투입하다.
11월에 고구려 서부 지역을 공격하다.
백제가 4월에 신라의 독산성과 동잠성을 곡격하다.
660 CE정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서돌궐을 진압하다.
3월, 백제를 향해 소정방이 이끈 13만 대군이 출병하다.
7월 9일, 기벌포에 상륙하다.
신라군 5만이 9일, 황산벌에서 백제군을 격파하다.
7월 18일,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하다.
9월 3일, 나당연합군 주력이 철수하다.
9월 23일, 백제 부흥군이 사비성을 포위하다 실패하다.
10월, 복신이 왜국에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하다.
12월 15일, 당고종이 고구려 원정을 발표하다.

<백제 부흥운동>

661 CE백제 부흥군이 4월, 두량윤성에서 신라군과 교전하다.
5월, 고구려가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다. 남생이 막리지 대장군이 취임하다.
8월, 소정방이 이끈 당군이 평양성을 포위하다.
7월, 신라군이 평양성을 향해 군대를 진발하다. 백제부흥군과 교전하다.
8월, 왜국이 부흥군에 병장기와 곡식을 지원하다.
9월, 부여풍과 병력 5천이 백제에 도착하다.
10월, 철륵이 당에 반란, 계필하력의 군대가 회군하다.
662 CE정월, 사수에서 연개소문이 방효태의 군대를 격파하다.
왜가 백제부흥군에 화살 10만 개 등 군수 물자를 지원하다.
2월에 신라군이 소정방의 군단에 식량을 공급하다. 3월에 소정방의 군대가 퇴각하다.
12월, 백제부흥군이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중심지를 옮기다.
663 CE신라가 백제 남부의 4개 주와 덕안을 점령, 피성을 압박하다.
백제 부흥군이 피성에서 주류성으로 돌아가다.
4월, 당이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방하다.
손인사에게 7천여 명을 주어 웅진도독부에 병력을 보강하다.
6월,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다. 왜가 2만 7천명의 병력을 파견하다.
문무왕이 김유신 등을 이끌고 주류성으로 진격하다. 8월 17일, 나당연합군이 주류성을 포위하다.
27일, 왜군 1만명이 백강구에 도착하다. 8월 28일, 백강구 전투에서 왜군이 대패하다.
9월 7일, 주류성이 함락되다.

<고구려의 멸망>

664 CE2월, 당나라가 부여융과 김인문, 천존이 웅령에서 회맹케 하다.
5월, 웅진도독부가 곽무종을 왜국에 파견하다.
10월, 부여융이 웅진도독으로 봉해지다. 왜가 일본열도 서부 지역에 조선식 산성을 쌓기 시작하다.
곽무종의 접견을 거부하다.
665 CE8월, 웅진 취리산에서 웅진도독 부여융과 계림주대도독 문무왕이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주재하에 회맹하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연남생이 태막리지가 되다.
9월, 당이 유덕고를 왜국에 파견하다.
666 CE연남생이 동생들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 국내성으로 달아나 당에 투항하다.
10월, 당군이 신성을 공략한 후 남생군과 합류하다.
12월, 대규모 고구려 원정군이 투입되다. 연정토가 12성을 들어 신라에 투항하다.
667 CE당나라와 고구려가 각지에서 교전하다.
왜가 근강으로 천도, 고안성을 등을 축조.
신라가 고구려 원정군을 진격시키다.
668 CE2월, 당이 부여성을 공략하다.
6월, 신라군이 북상하다. 고구려의 한성과 대곡성 등이 웅진도독부에 투항하다.
7월, 왜에 사신을 파견하다. 9월 12일, 신라 사신 김동암이 왜국을 방문하고, 후대를 받다.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되다. 11월에 김동암이 귀국하다.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

669 CE고구류 유민이 각지에서 부흥 운동을 전개하다.
4월, 당이 고구려 유민 2만 8천 호를 강제로 이주시키다. 안동도호부가 신성으로 이치되다.
신라가 당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다. 5월, 당이 신라에 사죄사를 파견하다.
670 CE연초에 검모잠이 봉기하고 신라와 연락하다.
2월, 왜가 경오년적 작성 시작.
3월,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군이 압록강 서쪽의 오골성 지역으로 원정하다.
4월, 토번이 당을 공격하다. 설인귀가 토번전에 투입되다.
고간과 이근행의 4만 군대가 요동지역에 파견된다.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의 대치, 신라가 안승을 옹립하다.
7월,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남하, 금마저에 안치하다.
신라가 당군을 격파하고 백제 지역 82개 성을 점령하다.
7월, 설인귀가 대비천에서 가르친링에게 패배하다.
8월, 안승이 고구려왕으로 봉해진다.
9월, 왜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다. 이해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개정하다.
671 CE정월, 안승의 소고구려국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당이 정월에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2월, 당이 백제인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다.
6월,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신라군이 석성과 가림성에서 당군을 대파하다.
7월, 고구려 유민군의 안시성이 당군에 함락되다.
10월, 당의 함선이 70여척 격파되다.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또 파견하다.
11월, 곽무종과 사택손등 등 2천여명이 일본에 도착하다.
672 CE신라가 소부리주를 설치하다. 백제인들로 백금서당을 편성하다.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5월, 곽무종 일행이 군수물자를 받고 떠나다.
6월, 덴지의 동생 덴무가 거병, 임신의 난을 일으키다.
7월 고간과 이근행이 당군 4만명을 이끌고 평양이 진주하다.
8월, 당군과 신라군이 평양지역과 황해도 일대에서 전투,
한시성과 마읍성, 백수성에서 당군을 격파하나 석문 전투에서 대패하다.
9월, 신라가 당에 사죄사를 파견하고 일본에서 덴무가 집권하다.
12월, 일본에서 신라가 김압실에게 배 1척을 사여하다.
673 CE신라가 백제 관인에게 경위 사여 기준을 마련하다. 외사정 2인을 각 주에 파견하다.
7월 친당귀족 대토 등을 숙청하다.
9월, 호로하와 왕봉하 등 임진강과 한강 유역 지역에서 당군과 격전하다.
674 CE정월, 당이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봉하고 2월에 유인궤를 계림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하다.
6월, 신라가 일본에 덴무 즉위 축하사절을 파견하다.
9월, 안승이 보덕왕으로 임명되다.
675 CE2월, 신라가 당에 사죄사를 파견하고 일본에 왕자 충원 등을 파견하다.
당이 신라의 칠중성을 공략하다.
3월,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보덕국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7월, 일본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다.
9월, 당이 천성을 공격하고 김인문의 신라왕 임명을 취소하다.
9월, 매소성에서 신라군이 당군을 격파하다.
676 CE2월, 당이 웅진도독부를 요동의 건안성에 교치하다.
7월에 도림성을 공략하다. 안동도호부를 요동고성에 옮기다.
10월, 일본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다.
11월, 신라가 기벌포에서 당나라 수군을 대파하다.
보덕국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677 CE2월, 당이 부여융을 웅진도독 대방군왕으로,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군왕으로 임명하다.
고구려 유민을 요동으로 귀환 조처하다. 연남생이 안동도호부 관리로 파견되다.
안동도호부가 신성으로 다시 이치되다.
10월, 일본이 신라에 사신 파견.
11월, 신라와 보덕국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다.
678 CE당이 신라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추진하려다, 토번과의 전쟁을 이유로 한 반대에 폐기되다.

<전쟁 이후>

679 ~ 680 CE당이 보장왕의 반당 동기 계획을 발각하고, 유배 보내다. 유민들이 재차 강제 이주 당하다.
681 CE8월, 신라가 김흠돌 등 고위 귀족을 숙청하다. 당의 사신이 무열왕의 시호 '태종'을 시비 걸다.
684 CE신라가 대문이 주도한 반란을 계기로 보덕국을 해체하다. 군현으로 편제되다.
685 CE신라가 9주 5소경을 완비하다.
686 CE신라가 예작부를 설치하다. 중앙관서가 완비되다. 2월, 당에 사신을 파견하다. 당이 고보원을 고려조선군왕으로, 부여경을 백제대방군왕으로 봉하여 수도에 머물게 하다.
687 CE신라가 백제 유민으로 청금서당을 편성하다. 9서당이 완비되다. 5묘제가 시행되다. 관료전을 지급하다.
689 CE신라가 녹읍을 파하다.
698 CE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다.
699 CE당이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임명하다.
701 CE일본이 양노율령을 완성하다.
702 CE일본이 견당사를 파견하고 당과 국교를 재개하다.
703 CE신라가 당에 사신을 파견하고, 이후 매년 사신을 보내면서 당나라와의 갈등이 해소되다.

13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들

워낙 역동적인 시대였고 한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시기였으며 뛰어난 인물들도 많았던 만큼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에서 자주 배경으로 차용되는 시기이다. 한국 사극 소재로도 여말선초, 임진왜란과 함께 가장 자주 회자되는 배경 소재이며, 특히 조선시대를 제외한 고대중세사 사극에서는 압도적인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2000년대~2010년대 초반에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다만 시대상황상 대규모 전쟁을 많이 연출해야 하므로 자연히 제대로 만들려면 제작비가 하늘로 치솟기 때문에 2010년대 중반 들어서는 한국 사극계가 전반적으로 저예산 트렌디화되는 추세라 창작물로 많이 제작되지 못하고 있다.

13.1 영상 매체(사극, 영화)

  • 삼국기 : 1992년 작품. 고구려-당 전쟁(640년대)무렵부터 김유신의 죽음(670년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 황산벌 : 2003년 작품. 황산벌 전투를 소재로 하지만 블랙 유머도 많이 가미되어 있다.
  • 서동요(드라마) : 2005년 작품. 백제의 30대 왕인 무왕이 주인공이다. 다만 무왕의 즉위과정이 중심.
  • 연개소문(드라마) : 2006년 작품.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삼국시대 말기와 수당 교체기를 다룬다. 합판소문
  • 대조영(드라마) : 2006년 작품. 발해의 시조 대조영이 주역이지만 초반에 고구려-당 전쟁과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 부흥운동이 다뤄진다.
  • 선덕여왕(드라마) : 2009년 작품. 선덕여왕과 미실이 주역. 다만 삼국통일전쟁은 극의 중심 주제는 아니다.
  • 평양성 : 2011년 작품. 황산벌의 속편격.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공격이 소재다.
  • 계백(드라마) : 2011년 작품. 백제의 마지막 영웅 계백을 주인공으로 했다.
  • 대왕의 꿈 : 2012년 작품.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인 무열왕과 김유신이 주인공.

13.2 만화, 게임

  • 삼국통일 대륙을 꿈꾸며 : 연개소문, 계백, 김유신 등이 등장하는 삼국시대 말엽이 미션의 배경이다.
  • 천랑열전 : 무협 만화이긴 하지만 일단 시대적 배경은 고구려 말엽.
  • 천년의 신화 : 특히 신라 미션이 이 시기를 다루고 있으며, 2편은 고구려, 백제, 신라 미션 모두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다만 2편은 망했어요

13.3 소설

  1. 물론 가야 등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삼국시대 항목 참조.
  2. 다만 혹한으로 인해 상당수 병사들이 얼어죽는 등 피해가 심해서 회군함.
  3. 발해 왕자 대봉예가 발해 사신의 서열이 신라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건. 동사강목에서는 이 일에 대해 "발해가 강대국을 자처했다.(時渤海國 自謂國大兵强)" 고 말했다. 일 자체는 당나라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4. 『三國史記』의 靺鞨 認識 -통일기 신라인의 인식을 매개로- 이강래(李康來)
  5. 노태돈, 『삼한에 대한 인식의 변천』『한국사 연구』38, 1982, 『한국사를 통해본 우리와 세계에 대한 인식』
  6. 여기에 대해 박노자는 만주 상실을 전제로 한 통일이 불완전했다는 시각에 대해, 고려 말기와 조선 전기에 한반도 남부와 중부에서 그 종족적 틀이 공고화된 ‘조선인’ ‘한인’(韓人)이라는 종족 집단은 만주를 ‘상실’했을 리가 만무하다고 말했다. 그 집단은 만주를 차지한 일이 애당초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 더 나아가면 통일과정에 내포된 '비자주성'을 문제로 삼는 시각이다.
  7. 한명우「다시 찾는 우리 역사」,1997, 제3장 발해와 그 문화, 제4장 후기신라의 사회와 문화
  8. 이 주장의 맹점으로 백제가 고구려에서 왔기에 이 이론은 경상도 신라역사만 우리의 시초로써 박혁거세만이 유일한 초기역사가 된다는 점이 지적된다.
  9. 다만 고구려는 한강 장악 이후 삼한계 국가들의 구성원들과 활발히 영향을 주고 받은 '통합 국가'임을 주장한다
  10. 김기흥,『삼국 및 통일신라 체제의 연구』
  11. 이강래,『삼국의 성립과 영역확장』 『한국사』3 pp.228-30, 1994
  12. 이호영, 『삼국통일』『신편 한국사』9 p.16,1998
  13. 상대적이라는 수식어를 왜 썼는지 궁금하다면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이 고국원왕(故國原王)을 털어버린 것을 생각해보자.
  14. 동쪽으로 중국이나 고구려가 동돌궐을 보고 있을때, 서돌궐은 저 멀리서 동로마 제국과 외교하고 사산조 페르시아와 전쟁하고 있었다. 이렇게 멀었던지라 서돌궐동돌궐은 나누어지긴 했어도 그 이전에는 동돌궐이 우위를 확보한 채 서돌궐은 2인자의 칭호에 만족하면서 지냈는데, 결국 대립이 일어나 서로 전투를 하게 된다. 이 때 수나라는 이 뒤에서 한쪽을 지원하거나, 갑자기 편을 바꾸거나, 일부러 도망친 사람을 보호하거나, 비밀리에 또다른 쪽을 지원하는 등,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도 않고 단지 '오랑캐를 다루는' 상투적인 이이제이 전략만으로 돌궐의 힘을 대단히 약화시켰다.
  15. 근데 진의 집계인구는 당시 50만 가구 정도로 앞으로 70년간 전쟁을 하고도 멸망 당시 70만 가구를 찍은 고구려가 실제로 더 많았다. 인구로 보나 보여준 군사력으로 보나 국서를 받은 쪽에서는 코웃음을 쳤을 듯...
  16. 당고종 시기까지도 수나라 최전성기의 호구를 넘지 못했다.
  17. 바로 위에 고구려가 남았다는 서술이 본문에 있기 때문에 붙이는 부가설명이지만, 해당 지도에 표기된 영역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의 영역이다.
  18.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는 642년 10월. 일본서기의 기록은 9월.
  19. 정사에 나오는 이름이 아니다. 야사에서도 훨씬 후세에나 등장하는 이름이다.
  20. 그런데 이 당시만 해도 말갈의 대부분과 거란은 당보다는 고구려에 가까웠다.
  21. 돌궐2제국이 나중에 부활하긴 하지만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
  22. 주로 5세기에서 6세기 중기에 이르는 기간에 중국대륙 혹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을 말한다.
  23. 애초에 소가 가문 자체도 백제계 도래인 출신이라는 학설이 있다.
  24. 당시 삼국사의 기록에 따르면 김춘추는 이찬이었다. 하지만 이 방문 기록을 담은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김춘추는 대아찬으로 나온다. 설사 대아찬이었다 한들 이전의 신라 사신들에 비해 고위 관등이었음은 분명하다.
  25.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26. 고토쿠 덴노가 650 년 3월 22일부터 654 년 11월 24일까지 사용한 연호.
  27. 현재의 후쿠오카
  28. 현재의 오사카시 난바(難波) 일대를 말한다.
  29. 현재의 후쿠오카시 인근 바다
  30. 일본서기가 아니다. 즉 해당 기록은 일본서기가 이 일본세기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31. 일본서기에 기록된 의자왕의 처 은고로 추정하기도 한다.
  32. 심지어 신라가 미인계 쓴 거 아니냐는 사람도 있다.
  33. 카슈가르
  34. 카르가리크
  35. 타슈쿠르간
  36. 권근이 계백의 이 행동을 비난했고, 안정복은 권근이 또 병법을 모른다면서 역으로 비난했다.
  37. 이문기, 『사비시대의 백제의 군사조직과 그 운용』
  38. 노중국,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부흥전쟁연구』
  39. 부여나 공주 교외에 있는 천장 모서리에 있는 큰 구멍이 난 석실봉토분들은 거의 이때 도굴된 것으로 여겨진다.
  40. 1993년 부여의 능산리 고분군에 인접한 백제의 옛 절터에서 발견되어 수습된 금동용봉향로 또한 이때 승려가 침략군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파묻어둔 것이 기적적으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41. 노략질을 떠나서 신라, 당나라 합쳐 20만에 가까운 부대가 한군데에서 어슬렁거리는 것만 해도 주변 지역에는 엄청난 피해다.
  42. 이현숙,『7세기 통일전쟁과 전염병』,『역사와 현실』47,2003.
  43. 이 과정속에 무열왕은 항복한 백제 귀족들을 등용해서 썼다.
  44. 부여풍장(扶餘豊璋)이라고도 한다.
  45. 고구려.
  46. 노중국,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부흥전쟁연구』
  47. 다름 아닌 일본인인 이케우치 히로시(池內 宏)의 주장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이것을 왜의 백제 부흥운동군 지원에 관한 내용으로 보았다.
  48. 노태돈의 말로는 전자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한다.
  49.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복신이 무왕의 조카가 아니라면 더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50. 일본서기에는 하타노미야쓰코(秦造)라고도 되어 있다.
  51. 노중국,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부흥전쟁연구』.
  52. 이는 서울대 교수 노태돈의 견해다. 다른 학자들은 비정에 관해 생각이 다를 수 있다.
  53. 백제 왕자였던 그 사람 맞다. 자세한 상황은 아래에서 기술.
  54. 부여군에 유인원기공비가 남아있는데, 이게 유인궤 기공비가 아닌 이유는 그 때문이다.
  55. 이 당시 전황에 대해서는 한참 뒤에 671년, 신라와 당나라가 신경전을 벌일 무렵 설인귀의 편지에 문무왕이 대답한 내용에 실려있다. 백강전투가 일어나던 660년 무렵의 기록을 삼국사기에서 찾는다면 관련 내용이 보이지 않아 의아할 수가 있다.
  56. 400여척은 구당서의 기록. 앞의 주석에 있는 문무왕의 말에서는 이때 왜선이 1000여척이라고 하였는데 아무래도 문무왕이 과장하는 듯 하다.
  57. 변인석, 『백강구 전쟁과 백제·왜 관계』pp.171-75,1994
  58. 일본 쪽에서 임진왜란을 언급할때, 정작 전쟁터이자 그 역할도 적지 않았던 조선을 배제하고, 마치 일본과 명나라와의 양자 대결처럼 보려는 시각을 생각해보자.
  59. 애시당초 중세 중국세력의 끝을 모르는 미칠듯한 서방 진출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저지되어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받는 탈라스 전투 마저도 막상 그 당시 당나라 입장에선 별 비중도 없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지휘관인 고선지는 처벌도 안 받았다. 하물며 이 보다 더 적은 규모의 군대가 동원된 백강구 전투가 당나라 입장에서 지나치게 큰 의미가 있진 않을 것이다.
  60. 하지만 신라에서 김유신의 이름이 너무나 거대한 탓에, 이때 떠나는 신라 장수들은 아픈 김유신 보고 제발 같이 가자고 징징했다. 물론 삼국사기에서 김유신 항목은 김유신 후손이 남긴 행장에서 가져온 것이라 신뢰도가 그리 높지는 않다.
  61. 이때 이세적이 소국 주제에 책이 많다면서 고구려의 책을 일일이 불태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그냥 북을 치면서 불을 질렀다는 식으로만 짦게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해당 이야기가 언급되는것은 엄청나게 훨씬 후대인 구한말의 황현이 저술한 매천야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62. 다만 강성해졌다는 흑수부도 대추장이 없고 열여섯 부족으로 나뉘어 자치를 영위하였다.
  63. 왜 조정은 김동암에게 비단, 풀솜, 가죽 등을 듬뿍 주는등 상당한 환대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