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두품

신라의 신분계급
왕족귀족평민
성골진골6두품5두품4두품3두품2두품1두품

1 개요

신라 골품제콩라인 약한 고리. 삼국시대의 노력충

진골 밑 계급 중에서 가장 유력 계층. 성골과 진골이 넓은 범위의 왕족들인 것을 감안하면 왕족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서열이 높은 계층이다. 은수저는 되는 계층이란 소리다 대체로 6두품에 해당되는 계층은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통합한 경주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던 중소국가들의 지배층들이었을 것이라고 보는게 일반적이다. 삼국통일전쟁 후 멸망한 옛 고구려계 귀족들은 6두품으로 편입되었다. 백제계를 5두품으로 제한한 것에 비하면 비교적 나은 대우이긴 하다.

수도 출신들만 상위계급이었던 고대국가의 특성상 대대로 왕경인 경주 출신으로 태어나면서부터 고위직이 보장된 진골들과는 달리 출세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1] 바둥바둥 노력하는 계층이었다. 하지만 득난(得難)[2]이라는 또다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이들도 엄연히 자부심 넘치는 지배계층이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신라 중대. 왕과 손을 잡는 다던가 유학자로서 학문을 갈고 닦는다던가 하였고 아무리 노력해도 대아찬 이상은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3] 혈통이 안 좋아도 실력이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당나라로 건너가 빈공과 과거에 합격해 당나라 관리로 재임하기도 했다. 최치원이 대표적인 케이스. 그나마 6두품이 가장 많이 빛을 발했던 때는 삼국통일전쟁기와 중대 왕실 때로 이 때의 6두품들은 유학을 배운 지식인들로 신라의 정계에서 활동했지만 중대에서 하대로 넘어가면서 중앙 진골끼리의 왕권 다툼이 격화되면서 골품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고 결국 지방 호족세력들과 연계하여 신라를 끝장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신라의 중대왕실을 이룬 태종 무열왕계 진골들과 김유신 가문의 진골들도 하대에 이르면 세력을 잃고 6두품으로 격하되었다.[4]

흔히들 진정한 주류에 끼지는 못하나, 그렇다고 비주류라고 하기도 뭐한 사람들이 자조적으로 자신을 6두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에 설명이 되어 있듯이 신라의 6두품 역시 신라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기득권층에 속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성씨 중 경주 최씨가 6두품의 후손에 해당된다. 한국사 강의로 유명한 최태성 강사도 경주 최씨. 실제로 강의 중간에 관련 얘기가 나오면 강조해주신다.

2 나무위키에 등재된 6두품 출신 인물

2.1 비유적으로 6두품이라 지칭되는 인물

  1. 6두품은 신라 17관등 중 6위인 아찬까지 올라가는게 한계였다.
  2. 얻기 힘들다는 뜻으로 그의 저서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文)'에 보이는 말이다.
  3. 그래서 아찬을 쪼개서 중아찬, 3중아찬, 4중아찬... 식으로 나누기도 했다. 6두품 아찬들 사이에서 높고 낮음을 구분하기 위해서였지만, 4중아찬이래도 결국 진골들의 대아찬보다는 낮았다.
  4. 물론 모든 무열왕계 진골들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진골 신분을 유지하면서 왕의 국구로 대단한 권세를 누린 김양 같은 케이스도 존재.
  5. 그와 함께 신라 불교의 쌍벽이라 할 만한 의상은 진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