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권응수(權應銖) |
자(字) | 중평(仲平) |
호 | 백운재(白雲齋) |
시호 | 충의(忠毅) |
생몰 | 1546년 ~ 1608년 |
본관 | 안동(安東) |
출생지 | 경상북도 신녕현(新寧郡) |
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2 생애
1583년 별시무과에 급제, 수의부위권지(修義副尉權知) 자리를 거쳐 훈련원 부봉사(訓鍊院副奉事)로서 의주의 용만관[1]를 지켰다. 이후 경상좌수영을 지휘하던 박홍의 밑에서 일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홍의 병크로 경상좌수영은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별 수 없이, 권응수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에서 의병을 규합, 5월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7월에는 화공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이끄는 일본군 제5군이 점령하였던 영천성을 탈환하였다. 이 공으로 권응수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우후(虞侯)에 임명되었다.
8월에는 경주성 전투(1차)를 벌여 경주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계속하여 전공을 쌓아 경상도병마좌별장등의 자리에 올랐다. 1차 및 2차 울산성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전쟁 후에는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3 특기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활을 잘 쏘았고, 특히 편전(애기살)에 능했다고 한다.
4 기타 매체
임진왜란의 의병장을 논할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위인이나 아쉽게도 대중적인 인지도는 높지 않다.
김성한 작가의 소설 7년전쟁 제 3권에 등장하며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5 권응수 초상(權應銖 肖像)
대한민국의 보물 | ||||
667호 예천 한천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醴泉 寒天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 ← | 668-1호 권응수 장군 유물-권응수 초상 (權應銖 將軍 遺物-權應銖 肖像) | → | 668-2호 권응수 장군 유물-선무공신 교서 (權應銖 將軍 遺物-宣武功臣 敎書) |
권응수 초상(權應銖 肖像) |
전형적인 조선 중기 초상화로 측면을 보고 있다. 가슴에 배착된 흉배는 호랑이가 그려져 그가 무관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임진왜란이 종전 된지 6년 후인 1604년(선조 37)에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 책록되었는데, 선무공신에 녹훈될 당시 권응수에게 내려진 공신 화상(畵像)으로 추정된다. 권응수 장군의 여타 유물들과 함께 보물 668-1호로 지정되어 있다.
6 참고 항목
- 권응수 장군 유물 장검 - 보물 제 668-4호
- ↑ 龍灣館, 중국의 사신이 묵던 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