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gor Johann Mendel
그레고어 요한 멘델
1822년 7월 22일 ~ 1884년 1월 6일
1 생애
파일:Attachment/Mendel.png |
체코[1]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수도사제이자, 유전학의 아버지. 1868년에 멘델의 유전 법칙을 근성으로 발견한 사람이다. 본명은 '요한 멘델'이고, '그레고어(그레고리오)'는 수도명이다.
최초로 유전의 법칙을 밝혀낸 위대한 생명과학자로써 엄청난 업적을 남겼으며, 고등학교에서 생명과학을 택한 이과생들을 괴롭히고 있는 인물이다(..) 생명과학에서 가장 어려운 유전 단원은 멘델의 유전 3법칙으로 시작해 멘델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유전공부하다 짜증나서 이 항목 검색한 사람도 있을 듯
그러나 정작 자신은 죽을 때까지 한번도 업적을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과학자.
멘델은 1822년 7월 22일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메렌 지방(현재의 체코)의 작은 읍인 하인젠도르프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으나, 어릴 적부터 농사와 원예 일을 도우며 멘델은 자연스레 자연과학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본래 자연과학 공부를 꿈꾸었지만, 17세때 아버지가 일을 하던 중 크게 다치며 가세가 기울어 공부에 매진하지 못하게 된다. 대학에 진학을 포기했으나 여동생이 모은 돈을 멘델에게 주었고 전문대에 입학한다.
그러나 학비로 계속해 고생했고, 수도원에 들어가면 금전적인 걱정 없이 공부할수 있다는 생각으로 수도회에 입회하여 사제 서품을 받고 수사신부가 되었다. 후에도 교원에 미련을 못 버리고 몇 번 도전했으나 번번히 낙방. 위대한 생물학자 멘델이 생물과목 점수를 얻지 못해 시험에 떨어진 것이다. 학문에 관심과 열정은 있었기에 대학에서 청강하며 공부를 하였다.
대학시절 다윈의 진화론을 알게되었는데, 교사 시험에서 또다시 떨어진 멘델은 차라리 수도원에서 진화론을 증명할 실험을 하자고 생각하게 된다. 수도원 안뜰 작은 정원에 완두를 심었는데, 이는 멘델에게 행운이었다. 완두는 우성과 열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식물이기 때문. 처음엔 쥐로 연구하려 했으나, 쥐로 유전의 법칙을 따지려면, 염색체의 교차 때문에 일정한 법칙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연구에 완두콩은 너무나도 적합했다. 갓두콩 이후, 무려 8년동안이나 완두콩을 심고 관리한다! 인내와 끈기가 없었다면 결코 해낼 수 없었을 실험 끝에 '식물잡종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알렸다. 그러나 세상은 뒤집어지기는 커녕 무반응.. 안타깝게도 무시당했다. 그렇지 않아도 종교인 신분이라는 편견에데다가 학벌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 논문 결과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은 것이다.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에게도 편지를 보냈으나, 읽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과학자라기보다는 평범한 수도자에 가까웠고 토마스 아퀴나스 수준으로 매우 뚱뚱했기 때문에[2], 주변사람들은 모두 그를 인심 후덕한 신부님으로 대했다. 교회 입장에서도, 학위도 없고 연구 실적도 인정받지 못한 그의 완두콩 연구는 그냥 수도자의 원예 취미 정도로만 여겨졌다.
수도원장으로 뽑히며, 이 때부터는 실험할 시간이 줄어들고 말았고, 수도원장이 된 멘델은 오스트리아 정부의 수도원 세금 징수 법안에 대해 철회를 요구했고 죽을 때까지 투쟁에 힘을 쏟았다. 평소 몸이 약했던 그는 만성 신장염으로 사망했다.
멘델은 말년을 과학자가 아닌 성직자로 보내야 했으며, 유전의 법칙을 밝혔다는 위대한 업적을 생전에 알아챈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한번도 과학자로 불리지 못했고 죽을 때까지 성직자로만 존경받았다.
멘델이 사망한 후, 8년간 혼신을 다한 실험결과와 논문, 연구자료들은 모두 불태워졌다. 죽음과 함께 업적도 영원히 사라졌다.
그러나, 1900년, 멘델이 죽은지 16년이 지난 날 기적이 일어난다. 네덜란드의 식물학자 드 브리스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남아 있던 멘델의 논문을 집어 든 것이다(!)
드 브리스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35년전 멘델이 실험한 논문을 첨부했고, 이후 독일의 과학자 코렌스는 멘델이 이미 끝내놓은 완두콩 실험을 포기했고 오스트리아의 체르마크도 유전에 대한 실험결과를 발표하며 멘델의 논문을 첨부한다. 이후 과학계에서는 1900년을 멘델 법칙 재발견의 해라고 기리고 있다.
1910년에 멘델의 동상이 세워졌고 멘델 광장으로 불리게 된다. 비록 사망한 후였지만, 과학자로써 인정 받게 되었다.
유언은 "언젠가는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 (My time will come)"라는 초절정 간지폭풍 명언이었다고 한다. 자기과신이라기보단 삶의 후반부에 가끔씩 자신이 대화의 화두에 오르면 나지막히 했던 말이다.
농부 집안 출신에 외가 쪽이 원예가였기 때문에, 원예 및 육종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있었다. 덕분에 인공수분 등의 기술이 있었고, 당시 원예사나 육종가들을 난감하게 했던 왜 부모세대에 없던 형질이 왜 자식세대에 나타나기도 하는가 하는 주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거기에 대학 청강을 통해 자연과학 및 통계학 등의 지식도 있었으니 단독으로 연구하기엔 매우 적절했던 셈.
2 업적에 대하여
찰스 다윈과 함께 현대 생명학의 기초를 만든 인물.
찰스 다윈과 동시대를 살았고, 그의 유전 법칙은 진화론의 강력한 메커니즘이자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다윈은 부모의 유전 형질이 반반씩 전해져 내려온다고 생각했는데, 만일 이렇다면 색들을 다 섞으면 칙칙한 회색만 남듯 세대가 내려갈수록 모든 유전적 차이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공격을 많이 받았다.
다윈은 살아 생전에 이 비판만큼은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이때 멘델은 유전 법칙을 완성했다.
불행히도 두 생물학계의 거장은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다만 둘이 서로의 이론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많다. 가령 멘델의 책상 위에서는 종의 기원 초판이 발견되었고, 다윈이 받은 편지 중에는 멘델이 보낸 것이 있다. 하지만, 멘델은 자신의 발견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다윈은 유전 법칙을 몰랐거나 활용할 줄 몰랐던 것 같다. 게다가 진화론은 다윈이 발표한 직후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긴 했으나 공식적인 이론으로 자리잡는 것엔 시간이 많이 걸렸고, 유전 법칙은… 말을 말자.
멘델이 연구 소재로 완두콩을 선택한 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일단 잘 알려진 대로 유전학 연구에 쉬울 정도로 빨리 자라고, 꽃잎이 닫힌 구도라 자가수분이 상대적으로 쉬우며 독립의 법칙[3]을 상당히 잘 지키는(?) 생물이었기 때문. 멘델이 관찰 대상으로 삼은 7가지 형질 유전자 중 일부는 같은 염색체 위에 존재한다. 형질 7개를 따지는데 완두의 염색체가 2n = 14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 그러나 두 유전자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거의 교차 현상이 일어나므로 마치 독립된 염색체 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 거기에 7가지 형질 중 완두콩깍지의 모양은,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관여하는 유전자가 2개였다!! 정말 운이 좋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반면 초파리로 이 실험을 할 때 일부 대립형질끼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만약 이렇게 대립형질끼리 영향을 주는 것이 많은 생물을 실험소재로 삼았다면 이 연구는 벽에 부딪쳤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찰스 다윈인데, 다윈이 연구대상으로 삼은 식물은 불행히도 중간유전이 되는 식물이었다.
훗날 멘델의 완두콩 실험 데이터를 카이 제곱 검정이란 통계 검정법으로 검사해보니 지나치게 숫자들이 예쁘게 나왔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자신의 학설을 위해 숫자를 속였지 않았냐는 말이다. 이 주장의 경우 카이 제곱 검정이 이런 데이터를 검정할 때 적합하지 않다는 점과, 멘델의 추가 실험 데이터가 발견되면서 묻혔지만.
3 이야깃거리
파일:/logos/2011/gregormendel11-hp.jpg
2011년 7월 20일에는 구글에서 멘델의 탄생을 기념하여 콩을 까는 로고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