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승

奇大升
1527 ~ 1572

조선 중기의 인물. 자는 명언(明彦). 고봉선생(高峯先生)이라고도 불린다.

본관은 행주 기씨로 1527년에 전라도 광주목 소고룡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의 집에서 태어났다. 기대승이 직접 저술한 자경설을 인용해 광주가 아니라 경기도 고양시의 고봉산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이 때문에 출생지에서 따온 고봉을 호로 삼았다고 한다. 실제로 기대승의 아버지인 기진은 서울 청파 만리현 출생이며, 동생인 기준이 기묘사화에 연루되기 전까지는 계속 수도권에 있었다.

5, 6세 때 침착하고 묵직함이 성인과 같았고 1533년에는 글공부를 부지런히 했고 1534년에 어머니가 죽자 매우 슬퍼했으며, 3년상을 마치자 향리의 서당에 나아가 글을 배웠고 총명해 기억을 잘하면서 여러 아이들이 배우는 것까지 통달했다.

시를 지으면 남들을 놀라게 했고 물재공(기대승의 부친 기진(奇進)의 호 '물재'(勿齋)를 높여 부른 호칭)의 훈계하는 글이 있어 마음에 두어 종사했으며, 자신을 위하는 학문의 뜻을 두어 과거 공부는 멸시했다. 중종, 인종이 붕어하자 베옷을 입고 제사를 지냈으며,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음식을 폐하고 눈물을 흘렸다.

1549년에 과거에 응시해 생원, 진사에 합격하고 그 명성은 사림에 드러날 정도로 문장은 그를 필적할 사람이 없었으며, 윤원형이 그를 시기해 고의로 퇴출시켰고 1555년에 물재공이 사망하자 여묘살이를 했고 1557년에는 주자대전을 발췌해 주자문록 3권을 편찬했다. 1558년에는 이황의 제자가 되었고 과거에 응시하면서 문과에 급제해 권지 승문원 정자, 부정자 등을 차례로 지내다가 1561년에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을 지냈으며, 봉교로 승진하고 1563년에는 승정원 주서로 옮겨졌다가 휴가를 요청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시 봉교가 되었다가 고과(考課)에 응시하지 않았다고 해서 벼슬을 깎아 임명되었고 1564년에 사임했다가 수찬에 임명되었으며, 병조좌랑, 성균관 전적, 직강 등을 했다가 이조정랑 겸 교서관 교리를 지냈지만 또다시 휴가를 요청해 고향으로 갔고 예조정랑,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1566년 10월에는 헌납이 되었다가 의정부 검상, 사인으로 승진하고 1567년에는 장령, 사예, 사인, 장령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기대승은 스스로 학문이 성취되지 않았다고 여겨 중요한 관직을 여러 번 맡았지만 항상 한가한 직위를 원했는데, 5월에 홍문관 응교로 부름을 받아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의 사신을 영접하고 전송했다. 명종에게 사화로 죽은 조광조, 이언적을 표창할 것을 상소해 받아들여졌으며, 얼마 안 가서 전한, 직제학 겸 교서원 판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공조 참의, 우승지, 대사간, 좌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1570년 봄에 휴가를 요청해 고향으로 돌아갔고 고마산 남쪽에서 서실을 짓고 살면서 학문에 전념했는데, 제자가 되어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고 대사성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가는 사신으로 임명되었지만 사양했다. 1571년 여름에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의 등으로 임명받았지만 거절했고 1572년에는 종계변무의 일로 주청부사에 임명되자 그 일이 중요하다고 여겨 어쩔 수 없이 조정으로 나갔는데, 그 와중에 대사성에 임명되었다가 조정에 들어가자 사임하고 고향 광주로 돌아갔다.

공조참의, 대사간에 임명된 것도 사양했고 천안군에 이를 때 종기를 앓다가 태인현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졌으며, 함께 가던 김점을 재촉해 김점의 집에 이틀간 머무르다가 사망했다.

이황과는 12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아 8년 동안 사단칠정을 주제로 편지를 한 것이 유명했는데, 이는 유학 사상의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를 스카이에듀의 대표강사 이현은 이를 이문열이 오만하다고 까는 데 이용하였다.

기대승은 장비장판파에 대한 언급이 있다.

"지난번 장필무(張弼武)를 인견하실 때 전교하시기를 '장비(張飛)의 고함에 만군(萬軍)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사(正史)에는 보이지 아니하는데 《삼국지연의(三國志衍義)》에 있다고 들었다.' 하였습니다. 이 책이 나온 지가 오래 되지 아니하여 소신은 아직 보지 못하였으나, 간혹 친구들에게 들으니 허망하고 터무니 없는 말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략)

참고로 정사 삼국지에서도 이 장판파 이야기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장판파 이야기를 허무맹랑하다고 깠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위의 인용문에서도 본인은 아직 보지 못하였고 다만 다른 사람들이 허무맹랑하다고 반응한 것을 언급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