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이름이문열(李文烈), 본명 이열(李烈)
출생1948년 5월 18일
첫 작품나자레를 아십니까 (1977)
최근작리투아니아 여인 (2010~2011)
제15회 동인문학상 수상
전상국
(1980)
이문열, 오정희
금시조
동경
(1982)
김원일
(1984)
제11회 이상문학상 수상
최일남
(1986)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1987)
임철우
한승원
(1988)
제37회 현대문학상 수상
한수산
(1991)
이문열
시인과 도둑
(1992)
박완서
(1993)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수상

1 개요

대한민국소설가. 1948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태어났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새하곡'이 당선돼 등단했으며, 능란하고 교양적인 문체와 다양한 작품세계를 지닌 소설들을 발표해 작품성과 대중성 면에서 모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와 함께 보수 논객으로서의 행보 역시 주목받았으며 이 점에 있어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은 편이다.

2 생애

1948년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열(李烈)인데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반정부활동을 하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어머니는 이문열을 배에 품고있을 적부터 삐라를 돌리는 등 남편을 지원했는데, 그만 경찰에 잡혀서 유치장에 갇히게 된다. 아버지는 부인의 배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는 뱃속에서도 싸워온 열렬한 투사다' 라고 하면서 그에게 '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보수가 된다 그의 부친 이원철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했으며 그해에 어머니를 따라 고향인 경상북도 영양으로 이사를 갔다.

유년기에 이사를 자주 다녔을 뿐만 아니라 정규교육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했다.[1] 1953년 안동으로 이사를 가서 중앙국민학교에 입학한 이후 57년 서울로 이사해 종암국민학교로, 58년 밀양으로 이사해 밀양국민학교로 전학을 가 61년 졸업했지만 같은 해 들어간 밀양중학교는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이후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64년 안동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별다른 이유 없이 65년 중퇴하고 부산으로 이사를 가서 이후 3년간 하는 일 없이 지냈다.

1968년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인 1969년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히는 한편 이듬해인 1970년 사법고시 준비를 위해 대학교를 중퇴했으나 세 번 연속 떨어졌다.

1973년 결혼한 뒤 군에 입대해 통신병으로 근무했으며, 1976년 제대하고 나서 곧바로 대구로 이사를 가서 학원 강사로 일하는 중이던 1977년 지방지 대구매일신문의 신춘문예에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입선되어 이듬해엔 해당 신문사에 근무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이문열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시 신설됐던 중편 부문에 혹해서 써낸 소설 '새하곡'이 당선되면서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지 10년 만인 32세의 나이에 드디어 중앙문단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같은 해에 당시 중편소설이었던 '사람의 아들'이 대박을 치면서 순식간에 인기작가 반열에 올라섰다. 이 작품은 애당초 1973년 모 잡지의 신인 모집에 투고되었던 소설이다. 당시 26살이던 이문열은 군입대를 앞두고 그때까지의 문학 수업을 결산한다는 의미로 1년간 힘을 쏟아 원고지 350여 장의 중편소설을 만들어냈다. 이 소설을 공모에 투고한 뒤 곧바로 입대했는데, 여섯 달 뒤 첫 휴가를 나와 결과를 확인해보니 예심도 통과하지 못했었고(...) 이문열은 이 사실을 알고 상당히 낙심했다고 한다. 이후 등단 첫해인 79년에 문예지 세계의 문학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오자 이 작품을 다듬어 내밀었는데, 잡지사 측에서는 그냥 발표할 것이 아니라 세계의 문학 측에서 공모하는 오늘의 작가상에 응모하라는 연락을 받았으며, 결국 그 상을 수상하고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이문열은 등단 첫해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이듬해인 1980년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야말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오랜 습작 기간 동안 쌓인 재고가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습작기에 썼던 작품 중 발표된 것만 중편이 3편, 단편이 9편이었다고 한다).1980년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필론과 돼지' 등을, 1981년 '젊은 날의 초상', '금시조' 등을, 1982년 '황제를 위하여', '칼레파 타 칼라', '익명의 섬' 등을, 1983년 '레테의 연가' 등을, 1984년 '영웅시대' 등을 발표했다. 82년 '금시조'로 동인문학상을, 83년 '황제를 위하여'로 대한민국문학상을, 84년 '영웅시대'로 중앙문화대상을 수상했다. 83년엔 평역 삼국지의 자료 수집을 위해 대만을 다녀왔다.

잠시 작가로서의 공백기를 가진 뒤 이문열은 다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86년 대하소설 변경을 한국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고, 1987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을, 1988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을, 1990년 '시인' 등을 발표했다. 87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이상문학상을, 92년 '시인과 도둑'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88년에는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출간해 현재까지 약 1800만 부의 판매고를 올리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세웠다. 91년에는 이문열 평역 수호지를 출간한다.

1994년엔 '이문열 중단편전집'이 출간되었으며, 같은 해 세종대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1994년에는 뮤지컬 명성황후의 원작인 장막 희곡 '여우 사냥'과 단편 '아우와의 만남' 등을 발표했으며, 1997년에는 장편소설 '선택'을 출간해 여성주의 진영과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같은 해에 교수직을 사임한다. 1998년 '변경'이 전12권으로 완간되었고 같은 해엔 부악문원을 열어 후진 양성에 힘쓰기 시작했다. 98년 '전야, 혹은 시대의 마지막 밤'으로 21세기문학상을, 99년 '변경'으로 호암예술상을 수상했다.

2000년 '아가'를, 2001년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 등을 발표했다. 같은 해에 한 칼럼에서 시민단체를 정권의 홍위병에 비유한 것으로 인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결국 책 장례식까지 당하는 일이 일어났지만 이후에도 보수 성향의 발언들을 계속해나갔다. 2003년에는 당시 위기에 빠져 있었던 한나라당의 공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6년 '호모 엑세쿠탄스'를, 2008년 '초한지'를, 2010년 '불멸'을, 2011년 '리투아니아 여인'을 출간했다. 그리고 조중동 연재소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다[2] 2012년 '리투아니아 여인'으로 동리문학상을, 2015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현재는 시기상으로 '변경'의 다음 부분인 80년대를 그리는 소설을 집필 중이다.

이문열은 80년대를 전성기로 보냈다. 80년대 그의 문명과 다양한 작품세계, 판매량을 따라갈 작가는 없었다. 각종 정치적 논쟁에 휩쓸렸던 90년대 이후의 작품은 전성기보다 비교적 저평가되고 있다는 시각이 있다. 한편 이문열의 소설들 중에선 안 뜬 작품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장편의 경우 '미로의 날들'(84), '오디세이아 서울'(93), 그리고 출간도 안 된 소설 '성년의 오후'(93~94)가 대표적이다.

보수적 정치성향을 보여왔다. 제5공화국 때 여당 민주정의당의 국회의원 공천 제의를 받은 적이 있으나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다. 다만 2004년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한 경력은 있다. 그리고 1990년 무렵 한때 장기표, 이우재 등의 재야세력이 주축이 된 민중당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3] [4] 하지만 한국 진보 진영에 대한 거부감은 오래 전부터 밝히고 있다. 그의 초기작들에서도 그런 기색이 엿보여서 진보적인 문단으로부터 보수반동 취급을 받는다.
2009년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 인문대의 석좌교수로 임용, 세계문학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였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이석기와 임수경 등을 배출한 외대의 성향 덕분에 큰 인기를 끌지는 못하였다.

3 특징

이문열은 소설을 통해 "참혹한 현실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영웅"을 모색하려 했다. 대표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의 소설 속에서 영웅은 일그러진 존재다. 완전무결해 보이지만 실상 컴플렉스와 이루지 못한 욕망에 허덕이는 일그러진 존재들이다. 그 몰락은 누구 할 것 없이 처참하다. 그들은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 몰락한다. 역설적으로,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문열은 묻고 있다.

소설에서 내보이는 그의 세계관은 한마디로 영웅 찬가다. 소설 속에 묘사되는 사회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역사를 만드는 영웅과 말만 많은 지식인, 그리고 이들에게 휩쓸려 움직이는 대중으로 이루어졌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경우, 주로 빨치산을 하다가 사살당하거나 월북한 걸로 나온다. 이는 작가의 가족사 때문인데, 이문열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전시점령 서울대학교 농대 학장으로 임시 임명되어 북한정권에 협조하고 월북하였다.[5]

이문열의 아버지는 한때 북에서도 나름대로 잘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노년엔 조그만 농장의 일꾼으로 초라하게 살았다고. 이문열은 "가족 다 버리고 북에 갔으면 거기서 잘 살기라도 할 것이지..."라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사찰을 당하고, 이웃에게서 멸시를 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게 동네에 소문나면 다른 동네로 이사하고, 이사한 동네에서 또 들통나면 다시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하는 통에 그는 젊은 시절 전국 곳곳을 떠돌며 살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떠돌던 삶이 가문과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집착을 가져왔다는 의견도 있다. 모진 고통 속에 살았던 이문열의 모친은 남편이 북에서 새장가를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과거를 겪은 그의 삶과 문학 속에서 좌파에 대한 혐오감이 발견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터. 하지만 배고픈 시절을 겪어본 사람답게 천민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에 대해서도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건 마찬가지이다(영웅시대와 그 연작 변경 시리즈를 참조). 재미있는 점은 이문열의 작품에 드러나는 아버지에 대한 컴플렉스를 비판했던 평론가 김명인이, 90년대에 그의 작품이 인기를 끈 것은 정치적 속성이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읽기 쉬우면서도 맛깔나는 문체로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며[6], 이문열의 작품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이문열은 글쓰기에 악마적인 재주를 가졌다"며 이 점만큼은 인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책의 제목을 짓는 센스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90년대 이후 나온 그의 작품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만서도 제목을 짓는 센스만큼은 여전히 인정받고 있다.

4 정치적 발언과 논란

이문열이 자신의 정치적 보수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그가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로 결심한 까닭으로 언급한 것은 '몫과 균형의 문제'였다. 80년대 당시 진보진영의 주장들이 대두되고 있는 양상을 보면서 그것들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유행처럼 번져 하나의 시각만이 사회 전체에서 너무 큰 크기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는 반발했기 때문에 다른 입장의 의견을 내세우는 이들의 존재도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7][8] 이문열은 현재까지도 보수의 입장을 개진하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일부 발언들은 그 언어의 과격성 또는 비논리성 때문에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문민정부에서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재판과 처벌이 이뤄졌을 당시, "이런 식으로 쿠데타 세력을 처벌하면 이 이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처벌받기 싫어서라도 죽을 때까지 권력을 붙잡고 놓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 주장은 "A면 B일 것이다"가 아니라 "A이면 이후 C의 상황일 때 B일 것이다"라는 교묘한 조건부명제로 단순히 박정희의 전례만 놓고 보더라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세력은 이런 처벌과 관계 없이 죽을 때까지 권력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별로 설득력이 없는 발언이다라는 비판의 여지가 존재한다.

정치적인 발언에 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1997년 출간됐던 장편소설 선택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은 작품이 연재될 때부터 일어났다. 이문열은 이 작품을 통해 당시의 일부 건강하지 않은 페미니즘 운동을 비판하고 전통적 여인상에도 가치가 있었다는 점을 설득하고 싶어했으나 많은 이들로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로 쓴 글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문열이 단순히 복고적이거나 전통을 긍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반동적, 수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선택을 둘러싼 논쟁은 이문열의 정치적, 사회적 발언으로부터 논란이 일어난 것이 아닌 작품 자체로부터 논란을 촉발한 사례였으며, 비슷한 논란이 호모 엑세쿠탄스를 발표한 때에도 일어나기도 했다.

2001년에는 '홍위병 발언'으로 논란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책 장례식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건의 발단은 7월 1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문열은 조선일보에 당시 정부의 언론 세무조사를 비판하는 내용의 시론을 썼다.# 여기 실린 발언에 대해 추미애 의원이 '곡학아세'라는 표현을 쓰는 등 해당 시론을 강하게 비판했고, 이를 둘러싸고 설전이 벌어졌다. 동시에 이문열의 홈페이지에서는 며칠 사이에 3000여 개의 글이 쇄도하는 등 네티즌의 글들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 중 '콜리산'이라는 ID를 가진 네티즌 한 명은 "당신의 태도에 실망했다. 소장하고 있는 책 20여 권을 반송할 테니 주소를 가르쳐달라"고 요구했고 이문열은 "반송해 주시면 책값은 현행법상 최고 이율을 붙여 반환하겠습니다. 아울러 부탁하는 바는 어디 가서 내 책을 읽었다고 하지 마십시오"라고 다소 감정적인 답변을 보냈는데, 이와 관련해서 "자신에게도 책값을 반환해달라"는 요구가 올라오고 책값 반환에 대한 글들이 게시판을 채우는 등 논쟁이 격화되자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감정이 다소 격앙된 상태에서 내 글을 이해 못하는 특정인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값을 반환해주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것이 확대 해석된 것"이며 "책값 반환 문제는 현실적으로 말이 안되는 얘기"라고 밝혔다.## 결국 7월 6일 홈페이지는 잠정적으로 폐쇄되기까지 했고, 9일에는 책값 반환 발언에 대한 사과문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런데 7월 8일 이문열은 안티운동을 벌이는 일부 시민단체를 홍위병에 비유하는 칼럼을 동아일보에 써서 또다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항의하는 독자들이 모여 11월 4일 이문열이 살던 부악문원을 찾아가 책을 반환하려 했지만 이문열 측은 이 책들의 인수를 거부하였고, 반환하려던 측은 그곳에서 그 유명한 '책 장례식'을 치른 뒤 책을 거둬가 고물상에 팔았다. 세 달 뒤에는 옥천에서 이문열의 책들을 풍장을 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다만 이문열이 그들의 고향을 의심하는 발언을 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9] 이문열은 이 일을 회고하면서 "그 사건 이후 담배를 끊은 이유가 '살아남아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밝혔다. 책 장례식 사건이 있은 다음 해인 2002년에는 홍위병 발언 등을 두고 안티조선 측에서 이문열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노무현 정권 당시 신기남의 조상이 친일파 그것도 국가 헌병대 오장이라는게 드러나자 당시 친일청산 아젠다의 형평성과 신기남을 저격하는 내용인 「겜뻬이 고쬬와 오니 게이부」라는 외부칼럼을 중앙일보에 투고, 김대중 정권 당시의 '홍위병 발언' 필화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칼럼도 많은 구설을 불러일으켰다. 전두환의 생일잔치에 참석했던 전력도 있다. 다만 TV 방송에서 임수경에게 육두문자를 날렸다는 것은 오보로 이문열은 그에 대해서 사과까지 받았다.

2000년대 이후 이문열이 쓴 칼럼들에서는 감정적이고 과격한 언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져 그가 온건한 보수가 아니라 극우에 가까운 인사가 아닌가 하는 비판의 여지를 생기게 만들었다.[10] 이문열 본인도 당시의 자신이 과격하고 공격적이었음을 인정했지만, 한편으로 자신을 그렇게 만든 데에는 세상의 공격이 그 원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당시 이문열을 비판하던 진보진영의 논객들이나 네티즌들의 논조가 대부분 강하거나 과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그의 발언들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말보다는 글로 자신의 의견을 주로 피력했을 뿐만 아니라 그 글들의 대부분이 신문사 등의 요청으로 썼던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쓴 것들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문열의 행보를 보면서 아직 그가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니냐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문열은 이미 40대 후반 즈음에 그러한 감정의 그늘에서 벗어났다고 여러 차례 말한 바 있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시각에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작 유년시절 인생 망가뜨린건 권위주의 정권인데 왜 애먼데 화풀이하면서 사시는지...

5 주요 작품

5.1 장편

5.2 단편

5.3 평역서

  1.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중퇴한 전력을 가지고 있으며 정규교육을 이수한 기간이 도합 8년여에 불과하다.
  2. 조선일보에서 '불멸'을, 중앙일보에서 '리투아니아 여인'을, 동아일보에선 '성년의 오후'를 연재했다.
  3. 민중당이 망하고 이재오, 김문수 등의 거물들은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4. 이문열이 민중당에 참여한 것은 이재오와 같은 집안이라는 인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5. 물론 진짜 서울대는 대한민국 정부의 피난과 함께 이동하여 1951년까지 부산에 임시캠퍼스를 차렸다. 인민군 점령하의 서울대학교는 말 그대로 괴뢰 국립대학. 따라서 서울대학교는 인민군 점령하의 서울대학교를 완전히 부정한다.
  6. 리듬감이 좋아서 잘 읽힌다.
  7. 이문열은 특히 지식인층에서 이런 쏠림이 있음을 지적했다. 지난 6번의 대선에서 일반 유권자의 지지 형태는 어느 쪽을 여야로 하든 55 대 45의 비율 안에서 움직여왔는데, 작가들의 지지 형태는 9 대 1 혹은 10 대 0으로 보일 만큼 한 정파에 쏠려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8. 같은 이유로 '왜 진보진영의 허점에 대해서는 신랄하면서 보수진영에 대해서는 미온적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이들이 그것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언급이 잘 되지 않은 것들을 중점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9. 이 인터뷰에서 이문열은 자신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의 실패를 아쉬워했다느니, 한일합방은 합법이라고 했다느니 하는 등의 소문이 와전된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10. 당장 위에서 언급된 조선일보에 올라온 글만 보더라도 '국세청이 언론기업의 탈세혐의를 검찰에 고발하는 것을 3개뿐인 방송사가 모두 생중계하고 종일 그 뉴스로 화면을 뒤덮는 걸 보면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나치의 대국민 선전 선동을 연상시킨다.'고 쓰는 등 상당히 강한 논조였다.
  11. 고종이 감동적인 연설을 남기고 1919년에 자결하고, 일본냉전 시기 동서로 분열 되는 등(서일본은 북한과, 동일본은 대한민국과 거의 99% 같은 역사를 밟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내용을 뒤집어서 표현하고 있으나 그다지 잘 팔리지 못했으며 헌책방에서나 가끔 보인다. 인터넷에서 평가도 거의 없는 수준. 대체역사소설이란 말이 있으나 역사의 중요 장면을 비틀어 봤을 뿐이지 대체역사소설이라고 보긴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역사풍자소설이다.
  12. 안중근 의사의 생애에 대하여 쓴 소설. 조선일보에서 연재를 마친 후에 발간되었다. 그의 최근작 중에서 꽤 괜찮다는 평가를 받는 소설.(시인 연작은 사실 작가의 성장 소설이 짙다.)
  13. 이문열이 200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사기》를 읽고 구상한 작품. 평역인 《삼국지》와 다르게 이문열의 오리지널 작품이니, <삼국지>에서처럼 내러티브를 해설로 끊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된 후 출간되었다. 보통 초한지가 항우의 자결이나 한신의 최후에서 끝맺는 경우가 많은데 이문열 초한지는 여후가 죽고 주발진평이 여씨 일족을 토벌하고 한나라의 기강을 다시 세우는 것까지 나온다.
  14. 남한의 교수인 화자가 중국북한 접경 지역에서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이복 아우를 만난다는 내용으로 유교적 방법론에 의한 남북 화해와 통일을 모색하고 있는 작품이다.
  15. 90년대 후일담 문학이 횡행하는 와중에 문학계가 잘 다루지 않았던 운동권의 부정적 실상을 폭로한 작품이다.
  16.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한 시인이 제세선생이란 뜻있는 사람이 이끄는 의적 집단에 붙잡혀 그들과 함께 하며 겪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