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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성철(金晟徹) |
생년월일 | 1976년 5월 14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학교 | 삼일상업고등학교 - 경희대학교 |
포지션 | 스몰 포워드 |
신체 사이즈 | 195Cm, 88Kg |
프로입단 | 1999년 드래프트 4번(안양 SBS 스타즈) |
소속팀 | 안양 SBS 스타즈/KT&G 카이츠/KGC인삼공사(1999~2006, 2009~2013)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2006~2009) |
국가대표팀 | 1998 그리스 세계선수권 / 방콕 아시안게임 2006 도하 아시안게임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
수상내역 | KBL 최우수신인 (2000)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은메달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은메달 |
1999~2000 한국프로농구 최우수 신인 | |||||
신기성(원주 나래 블루버드) | → | 김성철(안양 SBS 스타즈) | → | 이규섭(수원 삼성 썬더스) |
1 소개
안양 KGC인삼공사 농구단 소속의 농구 선수. 안양 SBS 시절부터 팀의 간판이었던 선수로, 잠시 전자랜드로 이적한 기간은 있었지만,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인정하는 선수다.
2 선수시절
삼일상고와 경희대를 나와 고교와 대학 모두 같은 학교인 강혁, 윤영필과 함께 경희대학교 농구부가 연세대와 고려대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데 주역으로 뛰었다. 이 때의 활약상 때문에 1999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4번으로 지명되었고, 평균 득점 12.7점의 준수한 활약을 발판삼아 1999-2000 시즌 신인상을 탔다. 신인상 수상에는 약간 운도 따랐는데, 성적은 조상현이 더 좋았지만 신인상과 MVP 독식 방지라는 묘한 암묵적인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1]
준수한 포워드로 군 복무 시절을 포함해 데뷔 후, 6시즌 연속 두 자리 수 평균 득점을 기록한 선수다. 젊은 시절에는 운동 능력이 빼어난 편이라서 돌파력도 상당하고, 탄력을 바탕으로 서장훈을 앞에 두고 인 유어 페이스 덩크를 작렬할 정도였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런 돌파를 위주로 하는 슬래셔 타입에서 외곽에서 기회를 봐서 찾아 들어가는 3점슛이 장기인 선수로 변모했다. 꾸준한 맛이 있기 때문에 항상 자기 몫은 충분히 하는 선수다. 성실한 타입으로 오로지 벤치에서 모범이 되는 선수로 쓰기 위해 유재학 감독이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로 발탁해서 광저우로 데리고 갔을 정도.
2005-06 시즌 종료 후에, 더 많은 금액을 부른 전자랜드로 FA 이적했지만, 전자랜드에서의 첫 시즌 이후에는 다소 주춤했다. 또한 창원 LG 세이커스와의 경기 도중 당시 신인이었던 기승호의 거친 수비에 화가 나 엘보 어택을 날린 흑역사도 있었다. 하지만 전자랜드 시절이 전부 흑역사였던 것은 절대 아니다. 전자랜드에게 있어서 문경은 이적 이후 문태종이 오기 전까지 전자랜드의 슈터는 김성철이였으며, 07-08 시절의 방성윤과의 3점슛 쇼다운[2]은 시즌 통틀어도 명경기로 꼽힐만 했으며, 08-09에는 2,3번을 오가며 전자랜드 시즌 막판 신바람 8연승에 기여했었다. 그러나 09-10은 길어진 3점슛 거리에 부상까지 겹치며 극도의 부진을 겪에 되고 결국 유도훈 감독 취임 이후, 팀 개편에 따라 다시 친정팀은 안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안양에 돌아가서는 다시금 활약하면서 팀의 간판으로 부상했다. 특히, 리빌딩 기간 동안 팀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후배들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았다. 전자랜드도 손해본 것은 아니라 이현호를 이 때 얻었으니 나름대로 윈-윈 트레이드.
2011-12 시즌에는 그야말로 회춘했다. 워낙 좋은 후배들이 넘쳐서 체력 관리를 받으면서 뛰어서 그런지 식스맨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프로 통산 5,000득점 고지도 돌파했다. 프로 데뷔한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챔프전 경험이 단 한 경기도 없는 선수였는데, 드디어 2011-12 시즌에 감격의 챔프전 무대를 밟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고비 때마다 흥분하는 젊은 선수들을 다독이고, 허슬 플레이에 외곽슛을 넣으면서 알토란같은 활약을 했다. 그런 활약에 힘입어 안양 KGC인삼공사는 창단 첫 우승이라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김성철도 생애 첫 우승반지를 끼면서 말년에 제대로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2012-13 시즌에는 KGC의 백업으로 뛰면서 팀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다. PO 진출 전에 2012-13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마지막 챔프 반지를 끼기 위해 오리온스와의 6강 PO에서는 부상 중에도 출전해서 팀의 4강 PO 진출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팀이 4강 PO에서 SK에게 패하면서 탈락, 김성철의 현역은 4강 PO 4차전으로 마무리되었다. 마지막 경기가 종료된 후, 팀원들이 함께 은퇴하는 은희석과 함께 헹가레를 쳐주면서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의 노고에 대해 치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공식 은퇴식은 2013-14 시즌 홈 개막전에서 치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