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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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였던 원주 TG삼보 엑서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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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에서의 말년.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 감독
신기성(申基成)
생년월일1975년 4월 30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인천광역시
출신학교송도고 - 고려대
포지션포인트가드
신체 사이즈180Cm, 78Kg
프로입단1998년 드래프트 7번(나래)
소속팀원주 나래 블루버드/TG삼보 엑서스 (1998~2005)
부산 KTF 매직윙스/부산 kt 소닉붐 (2005~2010)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2010~2012)
지도자고려대학교 코치 (2013~2014)
부천 KEB하나은행 코치 (2014~2016)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 감독 (2016~)
2004~2005 한국프로농구 정규리그 MVP
김주성(원주 TG삼보 엑서스)신기성(원주 TG삼보 엑서스)서장훈(서울 삼성 썬더스)
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
1998~1999 한국프로농구 최우수 신인
주희정(원주 나래 블루버드)신기성(원주 나래 블루버드)김성철(안양 SBS 스타즈)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농구 선수. 2000년대 KBL을 대표하는 포인트가드였고, 원주 TG삼보의 우승에 기여했던 선수다. 선수 시절 별명은 트레이드마크였던 빠른 스피드를 알리는 총알탄 사나이.

2 선수 시절

2.1 아마추어 선수 시절

고려대학교 1학년 시절부터 부동의 주전 가드로 군림하기 시작하더니, 졸업 내내 포인트 가드 자리를 지켰다. 그에 밀려서 자리가 없다고 판단한 1년 후배 주희정고려대학교를 중퇴하고 프로로 직행한 것은 유명한 일화. 하지만, 리딩에 능한 가드라기보다 슛이 좋고, 돌파력이 좋은 타입이었다.

2.2 프로 선수 시절

전반적으로 빅맨이 인기가 많던 KBL 역사상 첫 드래프트인 1998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7번으로 지명되어 원주 나래에 입단하였다. 주희정을 트레이드시킨 팀은 신기성에게 주전 포인트가드 자리를 맡겼고, 신기성은 12.9득점 4.1어시스트라는 뛰어난 성적을 내면서 신인상을 탔다. 사실 당시 논란이 많았던 점으로, 서장훈이 리바운드 왕을 차지하고, 현주엽도 빼어난 성적을 올렸지만 불필요한 기록경쟁으로 인해 팀 공헌도가 빵점이라, 이 둘이 함께 있던 청주 SK가 6강 플레이오프도 못 가게 되는 바람에 팀을 4위로 이끈 신기성이 받게 되었다.[1]

그 뒤로 꾸준히 활약했지만, 어시스트가 많지는 않았다. 군입대 전인 2000-2001 시즌까지 리딩은 오히려 허재가 주로 담당하고 신기성은 슛에 더 집중하는 편이었다. 데뷔 후, 꾸준히 평균 득점이 증가하는 추세였다. 2000-2001 시즌에 평균득점 15.1점을 기록하고 입대. 물론 그렇다고 어시스트가 적은 것은 아니라서 평균 6.0개를 기록하기는 했다. 상무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 2002-03 시즌에 팀이 첫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TV로 봤다(...).

전역 후에는 다시 팀의 주전 포인트가드로 자리잡았다. 허재의 도움 없이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리딩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 단계 더 성숙한 모습을 보이면서 호평을 받았다. 팀의 주축 포인트가드로 맹활약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여 제대 후 첫 시즌인 2003-04 시즌 어시스트 5.9개, 그리고 2004-05 시즌에 어시스트 7.1개를 기록했다. 득점도 과거의 15점 가량은 아니라도 평균 두 자리수 득점은 기록해 줬다. 이 때의 활약으로 2004-05 시즌 정규시즌 MVP를 차지했다.

김주성자밀 왓킨스를 가지고 있던 팀의 특성을 볼 때, 적절하게 볼을 배급해 주기만 하면 되었고, 득점력이 괜찮기 때문에 외곽에서 활약해주는 그의 슈팅력은 팀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다만, 2004-05 시즌 챔피언결정전에는 감기 몸살에 걸리면서 이렇다할 활약은 못했지만, 우승을 차지하는데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팀에 마땅한 백업 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좋지 않은 몸상태에서 긴 출장시간을 소화했고 정말 많은 고생을 했다.

시즌 종료 후, FA로 풀리는데 김주성을 잡아야 하는 팀 특성 상 신기성을 잡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고, 결국 신기성은 부산 KTF로 이적한다. 거기서 팀의 주축 포인트가드로 자리잡으며 맹활약 하는데, 특히 2006-07 시즌에는 팀 역사상 최초의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이끌기도 했다. 다만, 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7차전 접전 끝에 아깝게 패배.[2] 하지만 첫 두 시즌 동안에는 리그 톱 가드라는 말이 허언이 아닌 활약을 보여줬다. 반대로 원주 TG삼보는 포인트가드 문제를 드러내며 하향곡선을 그렸다.[3]

그러나 점차 나이를 속일 수 없는지, 2007-08 시즌부터 득점력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어시스트 개수도 현저하게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출전 시간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족저근막염 증상도 신기성을 힘들게 하였다. 결국 kt와의 마지막 3년 간은 리그의 평범한 가드로 전락했다. 두 번째 FA에서는 아예 kt가 그를 포기했고, 앞 길을 열어주기 위해 보상선수도 받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 자리를 표명일이 4억을 받은게 문제지만.

결국 고향인 인천으로 다시 돌아가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와 계약을 맺었다. 준주전급의 포인트가드로 뛰는데, 과거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식스맨으로서는 괜찮은 편. 2시즌을 뛴 후, 다시 FA 자격을 얻었지만, 가드진이 넘쳐나던 전자랜드가 신기성을 잡지 않았고, 결국 은퇴를 선언하며 프로 선수로서의 경력을 마무리했다. 2012년 6월 4일 공식적으로 은퇴 기자회견을 가졌다.

3 플레이 스타일

신장이 크진 않지만 총알탄 사나이 라는 별명을 가졌을 만큼 빠른 발을 지니고 엄청난 슛팅력을 가졌던 공격형 포인트가드. 통산 필드골이 48.4%가 되며 통산 3점슛 성공률이 42.8%에 좋은 슛터의 기준이라는 170클럽을 4번이나 달성했을 정도로 슛팅력이 뛰어났다. 과소평가되는 부분인데, 경기당 5.3 어시스트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어시스트도 제법 하는 가드였다.

빠른 발을 이용한 돌파로 만드는 득점, 돌파하는 척 하다 멈추고 쏘는 미들슛을 자주 구사하였고 성공률이 매우 높았다. 골밑과 주변에서 넘어오는 패스를 정확한 슈팅으로 마무리하는 능력은 역대급 수준.

다만 이상민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고 거의 유일하게 전성기 김승현을 맞상대 하여 우위를 점했던 포인트가드 이기도 하였다.

4 은퇴 후

엠스플에서 해설을 했다. 어떤 멘트도 높낮이가 없는 억양의 톤으로 일관하며 김태환 해설에 비해 재미와 영양가가 없다는 평이다. 패스 농구나 포워드 농구를 보면 제가 원하는 농구입니다!라고 말하는걸 들을 수 있다

2013년 11월 말 모교인 고려대의 코치직의 부름을 받았으며 해설직은 2013-14 시즌까지만 병행한다고 했다. 그러나 고려대 코치 생활은 길지 않았다. 2014년 4월 1일 부천 하나외환의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2015-2016 시즌 후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의 감독으로 내정됐다.

최근 박재현, 이동엽과 같이 고대출신 후배 가드들이 삽질을 거듭하고 있고, 드래프트를 앞두고 있는 김낙현, 최성모에 대한 기대치도 높지 않은 와중에 고대출신 가드들 중에서는 주희정, 김병철과 함께 가장 독보적인 커리어를 가지고 있기에 고대 출신 가드 유망주가 나오는 기사때마다 믿고 거르는 고대가드(...)라는 표현과 함께, 그 대척점의 대표주자로 계속 언급이 되고 있다.
  1. 물론 지금이라면 서장훈이 거의 무조건 신인왕을 탔을 것이다.
  2. 당시 모비스가 정말 강했다. 양동근이 신기성을 상대로 상당한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신기성도 16.6점 4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대단한 존재감을 보였다.
  3. 다만 김주성을 잡는데 성공하고, 강대협, 표명일이라는 로또가 터지면서 다시 우승에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