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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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성 썬더스 코치
이규섭(李圭燮)
생년월일1977년 11월 13일
국적대한민국
출신학교대경상고 - 고려대학교
신체198cm, 97kg
포지션파워 포워드 / 스몰 포워드[2]
프로입단2000년 드래프트 1번(수원 삼성 썬더스)
소속팀수원/서울 삼성 썬더스(2000~2013)
2000~2001 한국프로농구 최우수 신인
김성철(안양 SBS 스타즈)이규섭(수원 삼성 썬더스[3])김승현(대구 동양 오리온스)

1 소개

서울 삼성 썬더스의 코치이자 썬더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2 선수 경력

대경상고 시절 최고의 교고 선수로서 주목받았고, 고려대에서도 팀의 간판으로 활약했다. 이미 2000년 드래프트를 앞두고, 이 해의 최대어로는 이규섭을 모두 지목하던 상황. 4번이 주 포지션이지만, 대학 최고의 올라운드 플레이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그를 모든 팀들이 노리고 있었다. 행운의 1순위를 가져간 것은 삼성이었고, 삼성은 주저없이 이규섭을 데리고 갔다.

데뷔 시즌은 2000-01 시즌에 평균 12.7득점 4.7리바운드를 잡으며 4번 자리에서 제 몫을 다 했다. 덕분에 2000-01 시즌 신인상에 여유있게 당첨. 다만 PO에서는 조금 저조하다가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무릎 부상을 당해 그대로 아웃되면서 챔프전에서는 이렇다 할 활약은 보여주지 못하고 우승 반지를 차지했다.

이듬 해인 2001-02 시즌에는 성적이 조금 떨어졌고, 결국 시즌 종료 후에는 군에 입대했다. 그런데 그가 군대를 간 사이에 팀의 변화가 생겼다. 바로 서장훈이 영입된 것. 이규섭의 실력이 나쁘지 않다고 해도, 서장훈은 넘기 힘든 벽이었고, 결국 이규섭의 입지는 애매해 졌다. 일단 식스맨으로 출발했는데, 주전에 준하는 식스맨이라고 하지만, 출전 시간 자체는 신인 시절에 비해 줄어들었다. 결국 이규섭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것은 3번으로의 전향.

이 때부터 이규섭은 신인 시절 골밑과 외곽을 넘나드는 모습에서 온전한 외곽 슈터로 전향하게 된다. 다행히 이 전향은 성공적이었고, 이규섭은 이 때부터 외곽 슈터로서 입지를 잡게 되었다. 식스맨과 주전 자리를 오가면서 평균 두 자리수 득점 이상을 해 준 것. 2005-06 시즌에는 생애 처음으로 챔피언결정전을 온전히 다 뛰면서 평균 14.8점을 기록,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그 뒤로도 꾸준히 시즌 내내 평균 두 자리수 득점을 이어갔다. 삼성이 그 뒤 두 차례 챔프전에 더 올라가는데 기여한 것. 다만, 다른 두 번의 챔프전에서는 극히 부진하면서 팀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받기도 했다. 정규 시즌에서 큰 키를 이용한 3점슛과 공격력도 점차 나이가 들면서 스피드가 떨어지고, 지나친 외곽 일변도의 공격으로 인해 한계를 노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2010-11 시즌부터는 완전히 주전보다는 백업에 더 가까워진 상황.

슈터로서 괜찮았던 이규섭이지만, 팬들의 평가는 좀 냉정한 편인데, 결정적인 이유는 작전 타임 도중에 항명에 가까울 정도로 안준호 감독에게 예의없이 말한 부분이 찍힌 듯. 특히 2006년 챔피언결정전에서는 그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강혁이 떠난 후,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유일하게 남았지만, 그 뒤로 부진한 것도 한 원인으로 보인다.

2011-12 시즌 도중 무릎 인대 파열로 인해 시즌 아웃에 가까운 상황이다. 2012-13 시즌 복귀하여 식스맨으로 뛰면서 평균 4.59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2012-13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공식 선언하면서 농구 선수로서의 경력을 마쳤다. 삼성 썬더스 구단은 현역 시절에 달던 13번 혹은 9번을 영구결번으로 할 지 검토 중이라고 밝혔는데 그 이후로 별다른 소식이 없다.[4]

국가대표로 꾸준히 이름을 올렸고 동시대 다른 슈터들보다 큰 신장을 바탕으로 국제전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한가지 에피소드는 2006년 미국 농구대표팀과의 대결에서 왼쪽 코너에서 이규섭에게 완벽한 오픈 찬스가 났고 잠시 볼을 더듬었지만 자신감있게 슛을 올라갔다. 그런데 골밑을 지키고 있던 드와이트 하워드가 그 찰나의 순간에 접근, 날아올라 블락슛해버렸다. 이 장면은 한국 농구와 미국의 격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였고, 꾸준히 농구팬들의 인구에 회자되곤한다. 본인도 블락슛 당하고는 두고두고 되풀이될 명장면의 희생양이 되었음을 직감했다고(...)[1]

3 지도자 경력

은퇴 직후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산하의 NBA D리그 팀인 산타크루즈 워리어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처음에는 아시아에서 왔다고 벤치에도 못 앉고 은근히 무시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프런트 직원들[5]과 코칭 스태프들[6]과 함께 12점짜리 픽업 게임을 7차례 했는데 그 중 3경기에서 위닝샷을 넣어 그 이후로 "Big Shot"이라는 별명도 얻고 대우 또한 상당히 달라졌다고 한다.[7]

귀국 후 삼성 썬더스의 코치로 부임해서 이상민 감독, 박훈근 코치와 함께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다만 코칭스탭이 전원 초짜라서 팀의 경기력이 좋지 못한데다 흑역사에 가까운 패배들도 많아 팬들의 불만이 속출했다(특히 2014-2015 시즌!). 강경한 이들 중엔 선수 시절 안준호 감독을 무시한데에 따른 업보가 아니냐는 글까지 올릴 정도.

4 기타

  • 2013년 미국 연수 당시 워리어스 선수라곤 안드레 이궈달라 밖에 몰라 그와 사진을 함께 찍은 반면 스테판 커리라는 선수는 누군지 몰라[8] 인터넷 검색 후 '아, 3점슛 좀 쏘는 애인가 보네?'하고 그냥 잊어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이불킥하고 있을 수 있다 드레이먼드 그린의 경우 언더사이즈 빅맨인데다가 당시엔 아직 슈퍼스타로 명성을 날리던 때가 아니어서인지 '쟤 KBL에 오면 딱인듯ㅎㅎ'이라고 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후 삼성에서 같이 일하는 이상민 감독도 "지머 프레딧>>카이리 어빙" 등으로 대표되는 농알못 발언을 몇 차례 한 적이 있어 팬들 사이에서 꾸준히 회자된다(...)
  1. 당시, 안양 KGC인삼공사 농구단은 안양 KT&G 카이츠였다.
  2. 05-06시즌부터
  3. 당시에는 삼성 썬더스가 서울특별시에 없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수원시가 연고지.
  4. 13번은 대학 선배 전희철을 롤모델로 삼아 전성기때 달던 번호였고 9번은 그 기간 동안 한번씩이나 달았던 번호이기도 하다.
  5. 선수 출신이 대부분으로 당시 나이가 30~40대 사이로 운동능력도 어느 정도 남아있던 상태였다고 한다.
  6. 당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감독이자 NBA 올스타 포인트가드였던 마크 잭슨도 있었다.
  7. 연합뉴스 : 미국서 코치 연수 이규섭 "은퇴식서 눈물 참았죠" 및 네이버 라디오방송 바스켓카운트 2015년 12월 28일자 참고.
  8. 참고로 2009년 드래프트에서 팀이 7순위로 뽑은 선수였다. 그리고 2013년 당시 이미 골든스테이트의 새로운 에이스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근무하는 팀의 스타선수 정도는 알아야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