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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혁 농구 인생 최고의 순간인 2005-06 챔피언결정전 MVP 발표 직후.
이름 | 강혁 |
생년월일 | 1976년 9월 16일 |
국적 | 한국 |
출신학교 | 삼일상고-경희대 |
포지션 | 포인트 가드 |
체격 | 188Cm, 82Kg |
프로입단 | 1999년 드래프트 전체 5번(서울 삼성 썬더스) |
소속팀 | 서울 삼성 썬더스(1999~2011)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2011~2013) |
2000~2001 한국프로농구 최우수 후보선수상 | |||||
황문용(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 → | 강 혁(수원 삼성 썬더스) | → | 정재근(전주 KCC 이지스) |
2004~2005 한국프로농구 이성구 기념상(모범선수상) | |||||
황진원(서울 SK 나이츠) | → | 강 혁(서울 삼성 썬더스) | → | 현주엽(창원 LG 세이커스)[1] |
2005~2006 한국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 | |||||
김주성(원주 TG삼보 엑서스) | → | 강 혁(서울 삼성 썬더스) | → | 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 |
1 소개
한국의 농구 선수. 서울 삼성 썬더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였고, 말년에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에서 뛰었다. 픽앤롤 플레이의 달인이었던 선수. 등번호는 7번. 여담으로 엄청난 동안이다. KBO에 박정진이 있다면 KBL에는 강혁이 있다고 할 정도...
농구판 김진욱
2 아마추어 선수 시절
대학생 시절 비록 연세대, 고려대의 벽을 넘지 못하고 농구대잔치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김성철, 윤영필 등과 함께 맹활약하며 경희대의 도약을 이끌었던 뛰어난 가드였다.
3 프로 선수 시절
1999년 서울 삼성 썬더스에 드래프트 전체 5번으로 지명되면서 입단했다. 당시 외국인 선수를 두 명 쓰던 시절이었고, 또 주전가드로는 주희정도 있었기 때문에 주로 식스맨으로 뛰었지만, 상당한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삼성의 프로농구 첫 우승인 2000-01 시즌에도 뛰었지만, 이 때는 주역은 아니었다. 식스맨으로 두 시즌을 뛴 후,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해서 병역을 해결한뒤에 다시 삼성으로 복귀하였다. .
가장 빛나던 시기는 2005-2006 시즌. 정규시즌 2위로 올라온 삼성은 4전 전승으로 우승하며, PO 포함 7전 전승 우승의 대기록을 작성한다. 이 해 챔프전에서 올루미데 오예데지와 서장훈 더블 포스트의 골밑 공략을 대비하던 울산 모비스 피버스의 허를 찌르고, 네이트 존슨과의 2:2 픽앤롤 플레이로 팀 우승의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챔피언결정전 당시 성적은 평균 17.3 득점 6.5 어시스트. 이 때의 맹활약 덕분에 2005-06 시즌 챔피언 결정전 MVP로 선정되었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소속팀에서 오랫동안 식스맨(교체선수)으로 활약하다가 주축가드로 도약하는데 성공한 선수이다. 최고의 식스맨으로 불리웠지만 교체선수의 특성상 별 조명을 받지 못했었지만, 챔프전의 활약이 겹치면서 강혁은 선수생활 말미에 주목받기 시작. 특유의 승부욕, 근면성이 비로소 팬들에게도 인정받은 것이다. 이후 2007 남자프로농구 올스타에 뽑히기도 했다.
자유투 성공률은 리그 최상위권이며 앞서 2005-06 챔프전을 언급한 것처럼, 2:2 플레이에 매우 능하다. 수비력도 출중해서 2003-04 시즌부터 4시즌 연속 수비 5걸에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스틸에 매우 뛰어나다.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서울) 안내 방송을 맡는 등 삼성 썬더스의 프렌차이즈 스타로 오랫동안 활약했다. 그러나 2010/11 시즌 삼성이 6강 플레이오프에서 3연패로 탈락하자 감독 교체 등 대대적인 팀개편이 있었는데, 강혁이 그 대상이 되었다. 오래도록 뛴 팀을 떠나 이병석, 김태형과의 2:1 트레이드를 통해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로 이적했다. 이때 은퇴를 생각하기도 했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전자랜드맨 거듭난 강혁 “팀이 버리기 전까진 배신은 없다” 10년 넘게 한 팀에서 꾸준히 생활한 강혁에게 있어서 선수 생활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임을 짐작할 만하다.
결과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삼성에게는 뼈아픈 실수였다. 삼성은 가드진의 부실화로 14연패라는 수모끝에 꼴찌로 시즌을 마감한 반면에, 강혁을 얻은 전자랜드는 팀이 안정화되면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이게 다 돌상준 때문이야!! 군입대 한 정영삼의 공백을 말끔히 메우고, 후배들을 잘 가르쳐주면서도 간혹가다가 20점 이상의 득점도 올리면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
워낙 한 팀에 오랫동안 있었던 까닭인지 팀을 옮기고 나서도 삼성과의 경기를 했을 때 넘어지거나 하는 경우 룸메이트였던 이시준을 비롯해서 삼성 선수들이 먼저 달려와 일으켜주거나 걱정하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였다.
데뷔 이후 한 번도 빠짐없이 플레이오프에 출석 도장을 찍고 있다. 강혁이 입단한 이후 삼성이 딱 한 번(첫 우승 다음 해) 플레이오프에 탈락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강혁은 상무에 있었다. 그리고 강혁을 버리자마자 삼성은 꼴찌로 추락하는 폭풍 위엄을 보여줬다. 당시 이정석의 백업 포인트 가드가 아쉬운 와중-개중 나은 수준의 이시준은 리딩력이 떨어졌다-에도 굳이 남아도는 포워드-&꼽사리-와 트레이드를 해서 이정석이 부상으로 시즌초에 시즌 아웃 당하고 나자 속절없이 무너졌다. 준비 없는 감독이 팀을 운영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
참고로 입단 이후 은퇴를 생각하는 나이가 될때까지 계속 플레이오프에 개근한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몇 년 전까진 김승현과 함께 유이한 선수였으나 김승현이 오랫동안 모종의 사건으로 몇 년 간 리그를 못 뛰는 바람에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신인급 선수 외에 혹시 또 다른 선수가 있다면 추가바람.
2012-13 시즌에는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었고, 식스맨으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하면서 전자랜드를 정규시즌 3위로 올려놓는데 공헌을 했다. 그리고 친정팀 삼성을 3:0으로 누르고 4강 PO에 올랐지만, 그 과정에서 그만 부상을 당하면서 결국 선수 은퇴를 선언했다. 전자랜드가 모비스에게 패한 4강 PO 3차전에서 은퇴식을 가지고 공식 은퇴했다. 사실 원래 이렇게 급작스럽게 은퇴식을 하는 경우는 드문 편인데, 전자랜드가 2013-14 시즌 참가가 불투명할 정도로[2] 팀 해체의 위기를 맞은 상황이라 급하게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지막 경기가 끝나기 직전에 정병국의 패스를 받아 클린 3점을 성공시키면서 더 감동을 자아냈다. 그것도 상대 수비가 던지라고 길을 열어준 게 아니라 끝까지 수비를 펼치고 있던 상황에서 성공시켜서 더 빛나는 슛 성공이였다.
4 지도자 경력
은퇴 후에는 모교인 삼일상고의 코치로 지도자 인생을 시작했다.
5 기타
운동 선수치고는 결혼을 늦게 한 편인데 친분이 있는 정지원 아나운서가 경기 전 인터뷰에서 결혼 언제 하냐고 집요하게 묻자 장훈이 형(당시 삼성 소속) 결혼하면 할 거라고 말하며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서장훈이 결혼한 후에 결혼했다! 서장훈은 2009년 5월 23일. 강혁은 2009년 8월 8일. 안타깝게도 한쪽은 파경을 맞았지만...
평소 무표정하고 잘 웃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있는데(경기 중에도 정말 극적으로 득점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웃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본인은 웃음이 굉장히 많다며 코트에서는 사실 웃긴 일이 없기 때문에 잘 웃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본인 실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기보다는 모자란 점을 먼저 생각하는 타입인 듯. 그리고 딸에 대해 팔불출인 듯하다.관련 인터뷰
몇년간 그야말로 속절없이 무너지는 삼성을 안타깝게 여기는 올드팬들사이에선 '프랜차이즈 강혁을 버렸을 때부터 팀이 망가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