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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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五郞
1944년 4월 5일 ~ 1979년 12월 13일

1 소개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 특수전사령관이었던 정병주 소장비서실장.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려던 박종규에게 피살당했다. 사후 1990년에 중령으로 추서되었다.

2 12.12 이전의 이력

경상남도 김해군 태생.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25기) 1969년에 소위로 임관했다. 남재준육군참모총장이 그와 육군사관학교 동기. 그의 첫 병과는 보병이었다.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파병을 다녀온 후 1974년 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을 맡음으로써 특전사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여러 보직을 거치며 44개월 동안 특전사에 몸담았다가 육군대학과정에 입교한 뒤, 육군대학 졸업 후 특전사로 원대복귀했다.

사실 장교들이 특전사로 오래 복무하다가 육군대학을 마치면 통상 후방 지역에서 본인이 원하는 편한 보직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특전사로 복귀한 것은 아내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가 심각한 시력장애를 앓았기 때문에 그나마 치료가 용이한 수도권에 계속 머물고자 했던 것이다. 특전사 복귀 후 제5공수특전여단 부대대장으로 발령 받았으나 불과 한달 만인 1979년 3월에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으로 차출되었다.

3 12.12 당시의 상황

12.12 군사반란의 성패는 수경사와 특전사를 조기에 제압할 수 있느냐의 여부였다. 당시 수도권에 주둔했던 부대 중에서 쿠데타에 대처 가능한 부대는 수경사와 특전사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에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지시로 제3공수특전여단이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체포를 담당한다.

김오랑 소령은 6발의 흉탄을 맞고 현장에서 전사했다.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4 순국 후의 이야기들

김오랑 소령의 부인 백영옥 씨는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완전 실명했다. 체포조를 지휘했던 박종규 중령이 김오랑 소령과 매우 친한 선후배 사이였기 때문에 충격이 더 컸다고 한다. 두 사람은 사태가 발발하기 불과 며칠 전에도 부부 동반으로 저녁식사를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고 한다.

1986년 한 여성지에서 백영옥 씨를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매달 30만원씩 나오는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1] 김오랑-백영옥 부부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백영옥 씨의 건강문제로 인해, 자녀 계획 자체를 미루고 있었기 때문.

백영옥 씨는 1991년 6월에 추락사했고, 자살로 수사가 마무리되었다.

5 추모

2013년 4월 22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고(故) 김오랑 중령 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과 '10·27법난 피해자의 명예회복법', 군사반란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자 보상과 명예회복을 위한 법률안 2건을 심의 및 의결하면서 추모사업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 이 과정에서 군 출신 국회의원들 간에 논쟁이 있었는데, 고 김오랑 중령에게 "무공" 훈장이 적절한지에 대한 여부와 추모비를 육사 내에 세우는 안에 대한 호오가 갈렸다. 김관진 국방장관마저 "대법원 판결은 존중하지만, 전투에 참가하거나 적접 지역에서 공격에 대응하는 등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인지는 전문가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고, 결국 무공훈장 대신 보국훈장으로 수정하여 통과하게 되었다.[2] 그리고 2014년 1월 14일, 국무회의에서 김 중령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 고 김오랑 중령의 형 김태랑(왼쪽) 씨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전수하는 전인범 특전사령관
2014년 4월 1일 특전사 연병장에서 고 김오랑 중령 훈장 전수식이 열렸다. 특전사는 고 김오랑 중령의 가족에게 최고의 예를 갖춘 공식 부대 행사로 훈장을 전수했다. 국방일보 기사
  1. 당시 대기업 사원 월급이 보통 30만원 정도 했으니 적은 돈은 아니다.
  2. 무공훈장은 '전투에 참가해 무공을 세운 자'를 대상으로 하며, 보국훈장은 '전투 이외의 공적으로 국가안보에 기여한 자'를 대상으로 수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