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군사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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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12.12의 주역들


12.12 군사반란
날짜
1979년 12월 12일
장소
대한민국, 서울
 진압군반란군
교전국대한민국대한민국
지휘관장태완
정병주
이순길
윤흥기
이건영
노재현
류병현
윤성민
김진기
배정도
손길남
전두환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노태우
정호용
박준병
백운택
동원부대수도경비사령부
특수전사령부
제9공수여단
육군본부
제26보병사단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대한민국 해군
국군보안사령부
제1공수여단
제3공수여단
제5공수여단
제9보병사단
제20보병사단
제71방위사단
결과
반란군의 승리. 진압 실패
기타
반란군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체포,
국방부, 육군본부 점거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하나회의 군사 독재정권 시작
사진에서 서있는 순서대로 상단의 표에 기재했다. 이 사진은 12.12 군사반란을 성공하고 군내 인사가 발표된 후인 1979년 12월 14일국군보안사령부 현관 앞에서 '해당 군사반란에 주도 및 참여하거나 방관한 인물들'을 담은 사진이다. 해당 인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하나회 문서를 참조 바람.



1 개요

1979년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1]하나회전두환이 주도하여 일으킨 군사반란. 12.12 사태 또는 12.12 쿠데타라고도 불린다. 2016년 기준으로 37년 전의 일이며 5.16 이후 두번째로 일어난 국가전복 사건이다.
오더 66


2 원인

10.26 사건 이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박정희 사망으로 인한 계엄의 선포로 인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어 대통령 대행과 함께 정국을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10.26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수사를 총괄하게 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군부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다. 그리고, 곧 계엄사령관 정승화 입장에서 전두환은 곧 숙청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이미 전두환을 위시한 군내 비밀 사조직 하나회는 전두환의 동기생들인 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들을 주력으로 서로 상부상조하여 군부 내의 요직을 하나 둘 차지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는 기존에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고있던 기존 군부세력을 위협할만한 수준으로 군 내부에서도 이들에 대한 권력집중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또한, 기존에 정보활동을 하던 대통령 경호실[2]차지철중앙정보부김재규가 동시에 무력화가 되면서 사실상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 정보기관이 보안사 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정보력이 국군보안사령부로 집중된 것도 전두환의 세력이 강화된 주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더욱이 전두환은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었으므로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합법적으로 자연스럽게 중앙정보부와 검찰, 경찰 등 주요 정보·수사 기관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부장 서리까지 겸임하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한 파워를 손에 쥔다. 이렇게 자신으로 집중된 정보력을 이용해 전두환은 정치인들의 이러저러한 비리를 캐내어 이용하거나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10.26 사건의 수사 내용을 임의로 편집하여 보고하는 등, 정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유도하고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망각한 채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정치에 관여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이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전두환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보직이동을 시키는 등, 하나회의 주요 핵심 인사들부터 조용히 밀어내기로 한다. 그리고, 당시 강직하고 청렴한 참군인으로 평가받던 장태완 소장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 하나회 측의 불온한 움직임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조치들도 서두른다. [3] 그러나, 보안사의 정보력과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군부에 거대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던 하나회 측은 정승화의 이러한 은밀한 움직임을 매우 빨리 감지한다. 요직이란 요직은 모두 하나회가 장악했고 더욱이 당시에는 누가 하나회인지 정확히 알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정승화의 움직임은 이런 사조직의 인맥을 통해서 속속 전두환 측에 전해졌던 것이다.

절대로 그냥 당할 생각은 없었던 전두환과 하나회는 정승화 총장보다 한발 빨리 움직여서 그를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전두환은 10.26 사건 당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와 한패였다고 주장하면서 정승화 총장을 체포할 구실을 만들었고, 하나회 조직원들과 함께 모여서 12월 12일에 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의한다. 전두환 본인은 군사반란 혐의로 재판받을 당시 숫자 짝을 좋아해서 12월 12일에 결행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12월 12일이면 그동안 장성 진급심사가 끝나 하나회 요인들의 일정에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며, 동시에 이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로 인한 개각 등 정부의 대규모 인사변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을 해치우기위한 의도였다. 유신헌법 하에서 박정희가 시행했던 대통령 간접선거에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가 단독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는 국정 운영과 내각 수립에서 안정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 사건에 앞서 전두환 본인이 직접 발표한 수사결과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와 한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정 총장이 초기에 김재규를 신속하게 체포할 것을 명령하여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때문에 전두환은 정승화와 김재규가 사전에 공모하였다는 것이 추가 조사결과 드러났다고 우기며 정승화를 억지로 체포하기로 한다.

당시 정승화 총장에 대한 수사결과 발표 내용은 [이곳을 참조]. 실제로 민주화 이후 12.12 군사반란에 대한 재심이 이루어졌을 때 결국 정승화는 내란방조죄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는다.

요약하자면, 하나회가 일으킨 전형적인 군사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3 과정

3.1 반란의 개시

드디어 1979년 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란를 일으키기로 결심한 하나회 소속의 주요 지휘관들은 각자 준비를 마친 후 경복궁 옆에 위치한 수경사 30경비단[4]에 집합하였다. 수경사 30경비단은 과거 일제 헌병대가 주둔하던 곳이다. 당시 30경비단과 33경비단은 서울 방위의 정예부대로 수경사 소속이긴 했지만 수경사령관의 무장 출입도 불가할 정도로 독립적인 부대였기 때문에 이들이 몰래 모이기엔 딱 좋았다. 이 날의 작전명은 '생일집 잔치'. 이들의 본래 계획은 총장 공관에서 보안사 대원들과 헌병대원 들을 동원하여 정승화를 납치하는 동시에 전두환은 대통령에게 가서 정승화의 추가혐의를 조사하기 위한 대통령의 재가[5]를 받아 이를 합법화하는 것이었다. 이후 법적 처벌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대통령 재가를 먼저 받지 않은 이유는 정승화 체포 의도가 정승화에게 알려질 경우, 역관광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허삼수[6]와 육본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대령은 사건수사 진술을 받겠다는 이유로 미리 약속을 잡고 참모총장 관저를 방문했다. 미리 약속을 잡지 않으면 놓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부가적으로 작전지역을 자신이 미리 유리한 곳으로 선점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리곤 기습적으로 정승화 사령관을 체포, 신병을 확보하여 서빙고로 끌고 오는데 성공하였다. 그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서빙고동 보안사 병력의 오인사격으로 인해 우경윤은 관통상을 입고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더 중요한 점은 바로 정승화 체포와 동시에 정승화 체포수사에 대한 대통령 재가를 받으려던 반란군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당시 최규하호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두환의 단순 진술로는 절대 정승화의 체포에 동의할 수 없으며, 합동수사본부의 상급자에 해당하는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과 상의를 한 후 재가하겠다고 버텼다. 당시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전두환 측에선 국방장관을 사전에 확보해놓지 않았었고, 국방장관은 공관에서 총소리가 나자 가족들과 도망가버려서 찾을 수 없었다.

어쨌든 이 때문에 정승화 체포가 법적으로 위법한 행동이 되어버렸다. 당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부 산하에 있었으므로 정승화는 전두환의 직속 상관이 되기 때문에 지휘체계상 전두환이 함부로 체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계엄사령관보다 위에 있는 것은, 국방장관과 대통령 밖에 없었으므로 이들의 허가를 받아야만 정승화 체포가 합법이 되는 것이다. 당시는 전국 계엄이 아닌 부분 계엄하였기 때문. 정총장 연행을 위해 한남동 공관을 급습한 수경사 33헌병대는 공관을 경비하는 해병대 병력을 제압하여 무장해제 및 포박한 후 보안사 장교들이 공관건물로 들어가 정총장을 연행하는데 성공하였고 서빙고 분실로 데려갔다. 한편 공관 안에서 연행을 위해 정총장측과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을때 공관관리인이 몰래 공관 밖으로 탈출하여 공관 인근에 주둔한 해병경비대대로 달려가 괴한들이 총장을 납치하려 한다고 알렸다. 이에 경비대대가 공관으로 출동하여 마이크로버스로 막 출발하려던 헌병들에게 총격을 가하며 봉쇄해서 헌병들은 그 마이크로버스 안에 그대로 갇혀있게 된다. 하지만 정총장을 연행한 병력은 이미 공관을 떠난 후였다. 그리고 총성을 듣고 출동한 육본, 해본, 수경사의 5분대기조, 경찰 병력에다가 버스안에 갇힌 헌병들을 구출하기 위해 출동한 30경비단 병력까지 뒤엉키면서 아군끼리 피아식별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치하는 상황이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혹시 저항할지도 모르는 친(親) 정승화계열의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그리고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은 연희동의 연회장으로 미리 초대하여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이 대신 접대하도록 유인해 두었다. 이때 수경사 헌병단장이던 조홍 대령도 있었는데, 그는 하나회 소속이 아니었지만 정병주, 장태완 장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와 있던 것이었다. 직속 부하인 헌병단장이 연회장에 있는 것에 장태완이 "허락도 없이 여긴 왜 와 있느냐?"고 호통을 치자 조홍은 "전두환 장군이 저한테 준장 진급주를 산다고 해서 왔다"라고 답했고, 장태완은 혀를 차며 "그걸 오란다고 오는 네놈이나 직속상관은 건너뛰고 술을 사주겠다는 전장군이나 똑같이 문제다."라고 면박을 주었다. 이를 보다 못한 정병주는 "이번에 조 대령이 준장으로 진급했으니 겸사겸사 축하나 해주자."고 장태완을 달래어 조홍은 연회에 동석할 수 있었다. 사족이지만 당시 이 연희동 연회장은 일반 술집이 아니라 가정집으로, 전두환이 연회를 부탁한 '민마담'의 여동생 집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하나회 회원들이 반란를 모의하기도 했고, 이후에 이 곳은 제5공화국 요정정치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평범한 민가로 개축되었다.

어쨌든 그곳에서 갑자기 최규하를 만나게 되어 늦게 된 전두환 대신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의 접대를 받으며 저녁 7시까지 전두환을 기다리며 먼저 식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안사 참모장은 하나회 출신이 아니어서 완전한 정보 통제가 되지 않았고, 결국 총리 공관에서 총성이 들렸다는 보고를 받고 그 셋은 자리에서 일어나 복귀했다. 이 때 장태완은 수경사로, 정병주는 특전사로, 김진기는 육군본부로 간다. 그리고 같이 연회장에 있던 조홍은 사령관을 따라 수경사로 복귀하던 도중에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뉴데일리에선 " 연회에서 술을 마신 장태완 장군이 술에 취해 앞뒤 분간 못하며 즉흥적으로 명령을 내렸다."라고 하며 반란군을 강력하게 진압하라는 장태완의 명령이 취중에 잘못된 판단에서 내려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당시 장태완 장군을 비롯한 일행들은 전두환을 기다리다 보니 은 단 한잔도 마시지 않았었다. 그래서 기다리다 지친 정병주 사령관이 "전두환 장군이 늦을 것 같은데, 그냥 우리끼리 먼저 한잔 하죠?" 해서 막 한두 잔 마실 찰나에 상황을 알게 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정병주의 저 발언 이후 일행이 사태 소식을 접했던 때까지의 시간이 10분 내외이다. 말 그대로 술 한잔 마실 시간. 본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술 한잔을 비우는 둥 마는 둥 하고 곧바로 튀어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매우 강직하고 고지식한 성품의 소유자들이다. 아무리 전두환이 자신들의 후배라지만, 자신들을 초대한 주빈인 그가 오기도 전부터 곤드레 만드레 취해 있을 정도로 몰상식한 행동을 할 이들이 아니었다. 육군본부 측은 정승화 참모총장의 부인이 건 전화에 의해 처음으로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승화를 납치한 사람들이 누구인지조차 알 길이 없어서 처음에는 북한의 기습이 아닌가 할 정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곧 납치세력이 합동 수사본부 소속임이 확인되고 여타 정황들이 종합되면서 전두환 측이 벌인 일임을 확인하였고, 전군에 비상을 걸고 대응에 들어갔다.

한편, 수경사령부로 복귀한 장태완은 참모장 김기택 준장으로부터 30경비단에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일당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경비단장 장세동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대신 전화를 받은 선배인 황영시와 유학성이 "알 만한 친구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가? 30경비단으로 와서 우리랑 얘기해 보면 정승화 총장 체포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이라고 설득하려고 했지만 장태완은 펄펄 뛰면서 "이 반란군 놈의 새끼들! 거기 꼼짝말고 있거라! 내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 버리겠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드라마에선 황영시-유학성 순으로 통화하는 것으로 묘사됐으나, 실제 통화에서는 유학성-황영시 순으로 이뤄졌다. 이에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일당들은 장태완이 공격해 올 것을 걱정하며 대비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렇게 욕하지도 말고, 조용히 바로 찾아가서 기습하는게 좋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여기저기 보안사가 도청하고 있어서 안될거야 아마.. 걍 오던 탱크더러 오는 길목에 있는 합수부를 포격하라고 하면 될 것을.[7] 그리고 전두환은 하나회를 통해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청와대 경호실 병력[8]으로 최규하가 있던 국무총리 공관을 확보하였다. 이미 12월 초에 대선은 끝나 최규하가 대통령이긴 했지만, 정식 취임은 하지 않아 아직 국무총리인 셈. 원래 총리공관 경비는 육본 헌병대[9]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헌병감 김진기에 의해 실제로 전두환 체포명령이 내려오기도 했었지만 재가를 받기 위해 전두환이 총리공관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게 되자, 임기응변으로 노태우가 청와대 경호실 병력을 보내 헌병대를 제압하고 총리공관을 장악한 것이다.

이후 최규하를 총리공관에 구금하다시피 조치한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 체포에 대해 사후 재가를 계속 요구[10]했지만 최규하는 노재현 국방장관의 동의 없이는 체포를 허가할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숨어버린 국방장관을 찾기위해(...) 하나회는 발에 땀이나게 뛰어다니게 되었고 숨은 장관찾기 육본 측에선 그들이 장관을 찾아서 재가를 받기 전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회는 이미 정보력에선 육본을 앞서고 있었고 조직도 넓게 분포해 있었다. 원래 보안사 자체가 군을 위한 정보기관이다. 그런데 이들이 배신했으니 육본이 정보를 얻을 곳이 없어진 셈이다. 이들은 육군본부에 화해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척하면서, 정상적인 국군 명령 체계를 완전히 무시한 체 무력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결국 전두환낚시질에 걸린 육군본부 수뇌부는 쌍방간에 상호 병력을 동원하지 말자는 전두환의 '신사협정'에 응한다. 다만, 단순히 낚였다기보단 서울에서 아군끼리 유혈사태를 벌이면 안보에 큰 위험을 끼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란군들은 최전방병력까지 빼돌려 데려왔다지? 강직한 군인인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합동수사본부[11] 측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수도권의 충정부대를 대상으로 병력출동을 독촉하고 있었다. 충정부대는 수방사 예하사단과 특전사 1·3·7·9여단에 수도권의 수기사·17사단·20사단·26사단·30사단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수방사의 작전통제 아래에 대정부 전복시도나 민간인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는 부대들이다. 90년대 초반까지 있었던 충정훈련은 이들 부대의 민간인 진압훈련으로, 이 시절 아저씨들에게 이가 갈리는 악몽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군인이 민간시위 진압을 목적으로 하는 훈련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역으로 전두환은 충정훈련을 받은 부대를 광주에 투입하여 광주학살을 벌였다.. 그리고 더욱 악독한 점은, 경찰의 진압과는 달리 진압시 진압 방패가 없다. 이는 아예 진압 메뉴얼 자체가 방어따윈 생각하지 않는 공격적인 진압을 상정해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두환 측은 장태완의 병력동원 시도에 자극받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정승화 총장의 연행을 기정사실화하고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즉, 겉으로는 신사협정을 맺어서 육군본부의 병력출동을 가능한 오래 저지하면서, 한편으로 자기 측 병력을 본격적으로 동원하여 수뇌부를 무너뜨리겠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작전에 앞서 전두환은 1, 3, 5 공수여단장들에게 잇달아 지시를 내렸었다. 경복궁 30경비단 모임에 참석했던 이들 여단장 가운데 3공수의 최세창 준장과 5공수의 장기오 준장은 비상령이 떨어진 후, 자신들의 부대를 장악하기 위해 부대로 돌아갔고 1공수의 박희도 준장은 한발 늦게 행주대교로 우회해서 귀대해 있었다. 30사단 관할이던 행주대교를 제외한 모든 한강 다리는 수경사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

  • 1공수여단[12]을 동원해 국방부와 육군본부 점령,
  • 3공수여단[13]으로 3공수여단 영내에 있는 특전사령부 본부건물을 습격하여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
  • 5공수여단[14]은 효창운동장으로 출동,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 그리고 하나회 소속 장교들[15]을 이용해 수경사 헌병대를 장악, 수경사령관 장태완을 제압하려 하였다.

전두환 측은 공수여단 외에도 노태우 사단장이 이끄는 9사단 29연대와 30연대 소속 1개 대대 30사단의 90연대[16], 제2기갑여단의 1개 전차대대[17]도 중앙청으로 출동하라고 지시했다. 9사단은 당시에는 물론이고 현재도 우리나라 최전방 예비사단으로 활약중이며, 특히 우리나라는 [18] 최전방 부대 병력의 동원이 필요할 경우 '한미군사동맹' 협정에 의거해 한미연합사령관[19]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만 가능하다. 반란 이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존.A.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이 격렬하게 화를 낸 것도 이 때문이다. 박정희의 암살로 엄청난 혼란상태였고 암살범 김재규는 체포했지만 김재규가 북한의 사주를 받고 암살을 했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언제 북한이 남침할지 모른다는 위기까지 팽배해 있을 때, 중대한 병력의 절반 가까이를 반란을 위해 무단으로 사용한 이러한 행위는 당연히 불법인 동시에 무지막지한 병크이며 매국노짓이나 다를 바 없다.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에서 이게 얼마나 엄청난 미친짓인지 잘 보여주는 대사가 장태완 장군의 "저놈아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전방 병력까지 출동시키진 않겠지...?" 그리고 노태우의 9사단 무단 병력 동원은 노태우하나회 세력에서 전두환 다음으로 2인자에 서게 되는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작용한다. 노태우는 12.12 군사반란 당시 병력동원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중요한 순간에 남침까지 무릅쓰고 자신의 전방병력을 동원한 덕분에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장관 및 여당 대표를 두루 거치면서 결국 대통령까지 올라서는 확실한 전두환의 후계자로 올라선다. 물론, 기존 제5공화국의 헌법에 의거하여 현임 대통령인 전두환이 지명해서 물려받는 형식가 아니라 직선제로 선거에서 이겨서 된 것이긴 했지만 전두환이 자신의 퇴임 이후 안위를 위해서 노태우 당선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엄청난 지원을 해 줄 수 밖에 없었기에 후계자가 맞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고 또 천만다행으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만약, 이 때 북한이 뭔가 냄새를 맡고 휴전선 지역을 공격하는 등의 국지도발을 일으키거나 최악의 경우인 전면 남침을 감행했다면 한반도는 엄청난 대혼란이 일어났을 것은 불보듯이 뻔했다. 이 당시 한국군의 상황은 말 그대로 개판 5분전 막장 상태였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 보안사 등 주요 정보망이 반란군 측에게 넘어가고 반란군과의 대치로 국방부육군본부 등이 제대로 된 사태 파악 및 전선 지휘를 하는 것이 불가능한데다가 9사단, 공수여단 등 주요 전방부대가 반란을 위해서 이동해서 방어선에 큰 구멍이 뚫린 상황이다. 게다가 주한미군 지휘부 및 창설된 지 1년 남짓한 한미연합군사령부 역시 사태 파악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한 10.26 사건 이후 계속해서 지속한 비상대기 상태로 있다보니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전방 야전부대의 전투력들이 감소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군의 도발까지 발생했다면… 더구나, 당시 남한 국방력은 지금처럼 북한을 크게 압도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3.2 진압군의 붕괴

그 때 9공수여단이 정병주 사령관의 지시로 육군본부를 향해 출동했다는 급보가 합수부측에 날아들었다.[20] 전두환 측 장성들은 대경실색 했다. 9공수여단의 주둔지는 1, 3, 5여단보다 서울 중심가에서 가까웠기 때문.[21] 애초에 전두환 측이 이러한 부대를 포섭해놓지 않은 이유는, 9공수여단의 여단장 윤흥기 준장[22]과 참모장 신수종 대령이 모두 갑종 출신이었기 때문에 동원할 수 있는 연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전두환 측의 공수여단 병력들은 이들을 지휘할 여단장이 아직 부대에 도착하지 않았거나, 행주대교 등의 검문소를 통과하는데 잠시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9공수가 훨씬 먼저 서울에 도착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리고 그 9공수의 1차 공격목표는 다름 아닌 자신들이 모여있는 보안사령부와 경복궁 30경비단일 것은 더더욱 뻔한 일이었다. 이 때 노태우는 자결을 결심했었다고 회고했다.[조선일보 기사]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보안사령관실에 모여 있던 전두환 측 장성들은 제각기 전화통을 붙잡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9공수 출동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육본 측에 전화를 건 유학성 중장과 황영시 중장 曰 "왜 신사협정을 맺었는데 깨는 거요? 당장 9공수를 원대복귀 시키시오."

그리고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육군본부 수뇌부들은 전두환이 정말로 신사협정을 지킬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이 전두환의 신사협정에 응한 가장 큰 이유는 남침의 절호의 기회를 맞은 김일성을 눈 앞에 두고 서울에서 대규모 유혈사태를 벌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도 맞는 말이지만, 상대의 의도도 파악 못 하고, '협상'의 기본조차 어긋난, 그야말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당시 육군본부의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은 9공수여단장 윤흥기 준장에게 부대로 복귀할 것을 지시하였고, 우직한 윤 준장은 이에 두말 없이 응하여 진압군 측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9공수여단 병력은 신월IC 부근에서 회군하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병력 동원을 주저하던 우유부단함의 대가는 확실하게 치르게 된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1공수여단 측 병력들에 의해 순식간에 점령당하였다. 국방부 청사 옥상에서 발사된 발칸포(대공용으로 설치되어 있던 걸 눕혀서 발사했다고)를 이용한 방어에 사망자와 여러 명의 부상자가 나오는 등 어느 정도 저항이 있기는 하였으나, 최정예 공격병력인 이들을 상대로 버틴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 게다가 애초에 육본 방어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육본은 지휘부를 모두 수경사로 옮겨놓은 상태긴 했다. 남아서 희생된 양측 병사들만 불쌍하지..

한편 정병주 사령관이 있는 특전사령부 본부는 최세창의 3공수여단 병력에 의해 순식간에 점령되었다. 당시 특전사령부 본부 건물은 바로 3공수여단의 영내에 위치해 있었으며 사령부 본부 건물내엔 행정병과 인원들만 있어서 정병주 사령관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무장병력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박희도 1공수여단장, 최세창 3공수여단장, 장기오 5공수여단장 등 부하들의 하극상으로 수도권의 1, 3, 5여단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데다가 자체 직속 무장병력도 없는 상태에서 반란부대인 3공수여단 영내의 사령부 본부건물에 있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독안에 든 쥐같이 무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반란군에 의해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고, 이 와중에 특전사령부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소령은 단신으로 사령관을 지키려 권총으로 사격하며 저항을 하다가 반란군의 총에 사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도망다니던 노재현 국방장관은 하필이면 하나회 쪽 병력에 의해 국방부가 장악당한 시기에 국방부로 털레털레 왔다가 바로 하나회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비굴하게 반란군에게 협조했다. 저런 인간이 국방부 장관이 될 수 있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우스울 뿐이다.. 장태완은 휘하 전차대대와 소수의 직속병력으로 목숨을 걸고 어떻게든 하나회의 반란에 저항하려 했지만, 전두환을 따르는 하나회 장교들이 이미 하극상을 벌이며 수방사의 지휘 체계를 교란하고 있었던 탓에 당장 직속 부하가 장세동이었잖아? 안 될 거야 아마 그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실병력은 극히 적었다.[23] 그리고 반란군에게 협조하게 된 노재현 장관이 저항을 그만두라고 연락하자, 명령에는 따를 수 밖에 없다며 병력동원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부하들인 수경사 헌병대[24]에게 체포를 당하면서 수경사 또한 반란군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만다.

하나회는 반란 초기에 경호실 병력을 동원해 최규하를 구금하다시피 했고, 참모총장인 정승화는 반란군의 손아귀에 있었으니 당시 상황에서 정상적인 명령 체계를 동원해 반란 진압을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노재현 국방장관 뿐이었다. 그 때문에 반란군도 반란을 진압하려던 장군들도 노재현의 행방을 찾고자 했고, 최대한 자의적으로 병력을 움직이려 한 장태완 사령관을 육본 측에서 말릴 때도 이유가 "국방부 장관이 있어야 된다."였다. 하지만 노재현이 자신의 몸만을 지키기 위해 사실 가족들도 같이 피신시키긴 했다. 그냥 도망쳐 다닌 끝에, 정상적인 명령체계를 지키려던 이들이 정상적인 명령 체계를 무시한 반란군의 행동에 끌려다니다 반란군에게 제압당하는 상황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현재 노재현 전 국방장관은 성우회 소속으로 각종 국방 이슈에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본인의 이름을 내걸고 의견을 내고 있다.(…) 뭐라고 욕을 해야 적절할까? 붙잡힌 노재현은 눈치껏 정승화 체포 동의안에 서명했고, 최규하에게 "옳지는 않지만 사태가 더 악화되고 군이 분열되는 것을 막기위해서" 라는 이유로 서명을 할 것을 부탁했다. 12.12 군사반란에 대한 재판 당시 이러한 이유를 부끄럽지도 않은지 변명이랍시고 자기 입으로 말했다. 결국, 최규하는 정승화 체포 동의안에 서명을 했는데 다만, 이 때 동의안 표지에 재가 날짜와 시간을 적었다.[25] 이 때문에 체포 당사자들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두환 측의 행위가 '선체포 후동의'라는 명실상부한 불법임이 확인될 수 있었다.

이렇게 작전 10시간 만에 반란은 성공하였다.


4 결과

4.1 진압군에 대한 처리

이 사건 이후 정승화 총장은 고문을 당한 이후 불명예 제대를 당했다. 야사에 따르면 오줌발 맞는건 기본이었다고. 여하간 당시 고문이란 자체가 그리 강도가 낮았을리 없다. 그것도 쿠데타를 방관했다는 사실은 막으려 했다는 죄목으로 최고 계급인 대장에서 최하 계급인 이등병까지 17계급 강등당했다. 물론 전두환이 백담사로 들어간 이후에는 대장으로 복권되었으며, 87년 대선에서 통일민주당 고문으로 취임하면서 YS의 추격전에 일조할 때도 당연히 대장이라고 다 불렀다. 장태완, 정병주 등 반대세력들도 숙청[26]당했으며, 전두환과 하나회 일원들은 군부 요직을 장악하면서 사실상 실권자가 되었고, 이후 이들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와 야당의 반대를 무시하고 5.17 내란을 일으키고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는 등의 피를 뿌리면서 결국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다.

미국은 처음에는 이걸 막으려 했지만 초반 정보의 혼선과 부족으로 대응 시기를 놓쳤고 이때 지미 카터레임덕이라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게다가 나중에는 전두환이 알아서 설설 기었기에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전두환 정권을 묵인했고, 그 대가로 전두환 정부는 정치적으로 미국에게 많이 의지하게 된다.[27] 더군다나 당시 한국은 박정희와 카터의 대립으로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28] 때문에 전두환은 정권의 인정을 위한 적극적인 친미정책을 밀었고, 이에 레이건 정부는 물론 미국 군부의 주도로 5공화국이 묵인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사건과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에 미국이 침묵했다는 사실이 미국의 묵인으로 대한민국 내에 알려지면서 80년대 반미감정이 거세게 일어났고[29] 이에 부담을 느낀 미국은 87년 6월 항쟁이 벌어지자 역시 이익에 밝은 천조국 재빠르게 전두환을 버려버렸다.

반란의 중심에 있었던 특전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특전사령부의 직할부대인 707특임대를 창설하게 된다. 3여단의 반란으로 3여단 영내에 있던 무방비 상태의 특전사령부 본부가 너무 쉽게 접수되자, 나중에 혹시나 자신들도 똑같이 역관광을 당할까봐 사령관을 호위하는 사령관 직속 무장병력 친위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만든 것이다. 특전사령부는 기존 3여단의 영내가 아닌 독자적인 공간을 가진 3여단 바로 옆의 부지로 옮겨지게 되었고 707특임대도 그곳에 위치하게 된다. 이후 상황이 안정화되면서 역쿠데타나 하극상의 우려가 희박해져서 사령관 보호라는 임무는 차차 없어졌고,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대비하면서 대테러 전문 임무쪽에 전념하게 된다.

이 사건이 발생할 당시의 대통령이였던 최규하는 영문도 모르는 채 강제로 하야를 당하고 말았다. 최규하 대통령은 아주 착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아직 대통령을 하고 있었는데 싸가지없는 반란군놈들이…


4.2 반란군의 성과

반란에 가담한 인원들은 다음과 같은 혜택을 얻었다.

  • 전두환 -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소장
이 반란을 성공시키고 대장까지 스스로 진급시킨 뒤 예편[30]
  • 노태우 - 소장
이 반란을 성공시킨 뒤 군부 핵심 자리 중 하나인 수도경비사령관에 취임했다. 이후 대장으로 광속진급한후에 예편하였다. 제5공화국 출범하자 정무2장관, 체육부장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거친 후 우범곤이 사건을 저지르자 이로 인해 해임된 서정화 내무부장관의 후임으로 내무부장관이 되었다가 내무부장관을 사퇴한 후에는 1985년 12대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 다음 곧바로 민정당 대표위원이 되어 전두환의 후계자로 완벽히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6월 항쟁을 계기로 이뤄진 직선제 개헌에 따라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승리한다. 대통령직은 전두환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고 분열된 민주 진영을 누르고 선거로 선출되었다. 이후 전두환을 보호해 주지 않고 백담사로 2년간 유배 보내는데, 국민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해석도 있고, 전두환이 원래 물려주기로 했던 대통령직을 물려주지 않고 그냥 군사정권을 끝내버리고 고생시키는 바람에 열받아서 사이가 틀어져 유배를 보내버렸다는 주장도 있다(...)
  • 유학성 - 당시 중장
국방부 군수차관보를 맡고 있던 유학성은 3군사령관을 거쳐 이후 대장으로 예편하고, 전두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다음 중앙정보부를 국가안전기획부로 바꿔 초대 안기부장이 되었다.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의 책임을 지고 안기부장에서 경질된 뒤에는 반공연맹[31] 회장이 되었으며, 12대 총선에서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13대 총선에서 고향인 경북 예천에 민정당으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14대 총선에서도 민자당으로 예천에서 당선되었으나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직후 발생한 재산공개 파동으로 인해 의원직을 사퇴하고 국회를 떠나야 했다. 1997년 사망.
  • 황영시 - 당시 중장
1군단장 황영시 또한 반란의 공신으로 큰 포상을 받았다. 육군참모차장과 3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했으며 감사원장[32]까지 역임했다.
  • 차규헌 - 당시 중장
유학성과 황영시에 비해,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은 그리 빛을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육사교장을 거쳐 2군사령관에 올라 대장으로 예편했으며 교통부 장관과 비상기획위원장을 지냈다. 2011년 사망.
  • 정호용 - 당시 소장
반란이 끝나고 다음날 오전에 합류한 50사단장 정호용은 육사 11기 하나회 창설멤버라는 위상 덕택에 반란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승승장구했다. 12.12 다음날 이뤄진 군 인사에서 특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라 대장으로 예편했으며 예편과 동시에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어 전두환이 퇴임할 때까지 함께 했다. 13대 총선에서는 민정당 공천을 받아 대구 서구갑에 출마해 당선되었지만, 13대 국회에서 벌어진 '5공 청산' 과정에서 의원직 사퇴를 요구받고 국회를 떠났다. 14대 총선에서는 무소속으로 다시 대구 서구갑에 출마해 압승을 거두고 민자당으로 복당했지만, 1995년 '역사 바로 세우기' 과정에서 검찰에 기소되어 법의 심판을 받는다. 이런 와중에서도 끝끝내 15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옥중출마를 감행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무소속 백승홍 후보에게 패해 정계를 떠나야 했다.
20사단장 박준병은 일명 '쓰리박[33]'의 선두 주자로 5공화국 출범 이후 중장으로 진급해 군사정권의 핵심 중 핵심인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보안사령관 재직 중에는 절친한 친구였던 수경사령관 박세직 소장을 직접 조사해 예편시켜야 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2대 총선에서 민정당 공천을 받아 고향인 충복 보은-옥천-영동에 출마해 전국 최고득표로 당선되었으며, 13대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에서 민정당으로 당선되었다. 재선임에도 불구하고 13대 국회 내내 민정당 사무총장, 민자당 초대 사무총장에 임명되며 승승장구했고 14대 총선에서도 3선의 고지를 밟았다. 1995년 김종필이 자민련을 창당해 그해 지방선거에서 충청권 전역을 휩쓸자 그해 말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했다. '역사 바로 세우기' 과정에서 반란 주도세력으로 지목되어 재판 때문에 15대 총선에는 출마하지 못했으며, 결국 유죄가 선고된다. 1997년 말 사면복권되었다. 그 뒤 1998년에는 자유민주연합 사무총장에 임명되었고 그해 7월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서울 서초갑구에 여권 단일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0년에는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 대상자로 선정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고향 보은-옥천-영동에서 무명의 한나라당 심규철 후보에게 간발의 차이로 패하며 정계를 떠났다. 2016년 사망.
  • 백운택 - 당시 준장
71방위사단장 백운택은 1982년 중장이 되어 1군단장을 거쳐, 대구에서 근무하던 중 타계하여 더 이상의 영화를 누리지 못했다. 1982년 사망.
  • 박희도 - 당시 준장
아버지와도 같았던 정병주[34]를 배신한 댓가는 참으로 달콤했다. 전두환 정권 내내 그는 군인으로 승승장구했다. 1공수여단장 신분으로 반란에 적극 가담해서 성공한 덕에 은인인 정병주가 달고 있던 보직인 특전사령관이 되고 그 후 전두환정권 말기에는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35] 그러나 노태우는 대통령 취임 이후 군내의 전두환 인맥을 솎아내는 차원에서 박희도를 전격적으로 해임하고 복무부적격 판정을 내려 옷을 벗겼다.
  • 최세창 - 당시 준장
직접 부하들을 출동시켜 정병주를 체포하고 김오랑을 죽게 한 최세창 역시 달콤한 배신의 댓가를 누렸다. 3군사령관과 합참의장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한 뒤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 장기오 - 당시 준장
5공수여단장으로 행동에 나선 액션그룹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실전에 투입되는 대신 효창운동장에서 예비대로 대기만 한 까닭에서인지, 박희도나 최세창과 같이 대장이 되지는 못하고 중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총무처 장관을 역임한다.
  • 허화평 - 당시 대령
보안사 비서실장으로 12.12 당일 밤 전두환의 책사 역할을 유감없이 해낸 허화평 대령은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곧바로 준장 예편해 청와대 비서실 보좌관에 임명되었다. 비서실 보좌관이라는 직책은 전례가 없었고 허화평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 자리는 5공 초창기 청와대 최고의 요직이었다. 대통령 집무실 바로 밑에 사무실[36]을 갖고 모든 정보와 문서를 장악한 사실상의 비서실장 자리였다. 그만큼 허화평이 5공을 세우는 동안 책사로서, 정권의 이데올로그로서 소위 자신들의 '개혁 주도'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는 의미다. 그러나 1981년 말 비서실 보좌관에서 정무수석으로 이임하면서 서서히 권력 핵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으며, 결정적으로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전두환과 이순자의 눈 밖에 나게 된다. 결국 허화평은 1982년 말 사정수석 허삼수와 함께 청와대를 떠나 미국으로 출국해 5공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13대 국회에서는 5공 청문회에서 출석해 야당의원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14대 총선에서는 고향인 포항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뒤 민자당에 입당했다. 1995년 '역사 바로 세우기' 과정에서 투옥된 허화평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옥중 무소속 출마를 감행해 당선되었다. 하지만 최종선고를 받아 1997년 의원직을 상실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치러진 보궐선거에서는 일본에서 귀국한 박태준 전 포철 회장이 당선되었다.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던 중 1997년 말 사면복권되었다. 재판과정과 재판 이후에 걸쳐 허화평은 5공 정권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군사정권 이후의 문민 정부들을 '지도력의 위기'에 처한 정부라고 매도하였다. 머리가 좋아서 더 나쁜 것 같다
  • 허삼수 - 당시 대령
보안사 인사처장으로 12.12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해 연행한 허삼수 대령은 전두환의 집권과 함께 준장 예편, 청와대 사정수석비서관에 임명되었으며, 정부 최고의 사정기구로 창설된 '사정협의회'의 의장이 되어 관가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을 처리하면서 그 또한 전두환과 이순자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창업에서 수성의 단계로 접어든 전두환은 더 이상 허화평과 허삼수를 기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1982년 말 허삼수는 허화평과 함께 청와대를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민주화 이후 귀국해 1988년 13대 총선에서 민정당 공천을 받아 부산 동구에 출마했지만 통일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패했다. 4년 뒤 14대 총선에서는 민자당 공천을 받아 다시 노무현 의원과 맞붙어 승리했지만 1995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을 받으면서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15대 총선에서는 허화평과 똑같이 옥중 출마를 감행했지만 참패했고,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던 중 1997년 말 사면복권되었다.
  • 이학봉 - 당시 중령
보안사 대공처장[37]으로 정치인들과 재야인사들의 수사와 조사를 지휘한 이학봉 대령은 1980년 9월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준장으로 예편해 군복을 벗고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되었다. 허삼수나 허화평과는 달리 이학봉은 1986년까지 민정수석으로 재직했다. 1986년 안기부 2차장으로 임명되어 장세동 안기부장을 보좌하면서 평화의 댐 건설,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에 관여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는 민정당 공천을 받아 고향 김해에 출마해 당선되었지만 5공 비리 청산 정국에서 구속되었고 1995년 '역사 바로 세우기' 과정에서 다시 구속수감되었다.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던 중 1997년 말 사면복권되었다. 이후 2014년 5월 24일 사망하였다.
  • 장세동 - 당시 대령
12.12 당시 수경사 30경비단장으로 수경사령관인 장태완 사령관의 명령을 위반하고 12.12에 가담하였다. 12.12 이후 특전사 작전참모, 3공수여단장을 지냈고 5공 때에는 경호실장[38]과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을 역임하였다.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등에 관여 하였고 박종철 고문 사건으로 인해 그 책임을 지고 사임을 한다. 5공 청산 때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자처하였고, 1993년, 1987년의 용팔이 사건이 밝혀지자 스스로 책임을 지고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다. 1995년 풀려났으나, 그 해의 12.12, 5.18 관련 수사로 체포되어 다시 투옥되었고, 1997년 12월 석방되었다. 이후 16대 대선에 출마하여 정계 복귀를 도모하기도 했으나 가자! 으뜸의 나라로 뭐 결과는 아시다시피.
  • 김진영 - 당시 대령
12.12 당시 수경가 33경비단장으로 장세동과 마찬가지로 장태완 사령관의 명령을 위반하고 반란에 가담했다. 이후 군인의 길을 걸으며 5공화국 마지막 수도방위사령관을 지냈고, 노태우 정권의 마지막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문민정부 출범과 동시에 김영삼에 의해서 전화 한통에 숙청당했다. 12.12 주요 종사자 중 가장 마지막까지 군에 남아있었다.


5 반란군에 대한 단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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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전직 대통령 2명이 구속된 사례, 헌정사상 최초의 전직 대통령 구속사건 및 사형선고가 내려진 사건

문민 정부 시절 전두환과 노태우는 12.12 사태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39] 라는 어마어마한 죄를 저질러 1심에서 전두환씨는 사형, 노태우씨는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가 항소심에서는 감형되어 각각 무기징역, 징역 17년으로 감형했다. 참고로 군 형법상 내란죄는 사형, 형법의 내란 목적 살인 주동자의 형량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이다. 이미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 형을 확정받아 전직대통령 예우 박탈 기준인 금고형을 초과했기 때문에 경호·경비를 제외한 모든 예우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40][41] 물론 문민 정부 임기말인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을 받았기 때문에 '필요한 기간의 경호 및 경비'만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추징금은 벌금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까지 사면되지는 않았다. 노태우는 그나마 2013년까지 추징금을 모두 냈다지만, 전두환은 고액 체납으로 여전히 탈세 현행범이다. 물론, 법령상 예우를 받지 못한다고는 되어있지만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직 대통령 이름으로 사열을 받기도 하고 크게 차이는 없어 보인다. 이 사열 때문에 한 때 정치적으로 문제가 발생한 적도 있다. 원칙적으로는 못하는게 맞다.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한 건 김영삼 대통령으로, 이미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 되기 이전부터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 시켜주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97년 4월 기사] [97년 9월 기사] 김대중 대통령이 사면을 주도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거다. 물론 국민[42]대화합 차원에서 김영삼이 사면 얘기를 수차례 꺼냈고, 당선 이후 김대중도 이에 반대를 하지않아 사면에 소극적으로나마 동의했다고는 할 수 있겠으나, 이를 주도적으로 나서 사면했다고 하는건 사실 왜곡이다. 아예 2009년 김영삼은 인터뷰에서 1년 정도 수감하고 석방 할 생각이었고, 내가 전부 사면했다고 말했다. [2009년 인터뷰]

당시 대구와 경북 시민들은 대체로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원하고 있었긴 했다. [97년 9월 여론조사. 대구, 경북 시민의 63%가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찬성했다]

6 비교 (對 5.16 군사정변)

한편, 12.12 군사반란은 이전의 5.16 군사정변과는 성격이 매우 판이한데, 5.16 군사정변이 바로 청와대까지 들이밀고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데 비해 12.12 군사반란은 군부를 장악했을 뿐 당시 국민들이나 야당의 분위기 때문에 눈치를 보느라 곧바로 정권을 장악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사태라는 애매한 이름이 붙은 것도 이런 혼란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흔히들 알려진 것처럼 이 반란의 성공이 곧바로 신군부의 정권 장악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엄연히 최규하 대통령과 내각이 그들 위에 존재했으며, 이후로도 야당과 대학생 등 반대세력의 저항은 거세어지는 등 신군부의 정권 장악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때문에 신군부 측에서는 또 한 번의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5.17 쿠데타였으며 이 때 비로소 신군부의 정권장악이 완성된다. 이때 전두환은 전국적인 계엄을 내리도록 국무회의를 협박하면서 대통령 바로 밑의 '사실상' 계엄사령관이 된다.[43] 국무회의는 토론은 커녕 확인도 없이 8분만에 처리된 것.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의 끔찍한 비극은 바로 이 결과물이었다. 때문에, 전두환의 정권 장악은 5개월짜리[44]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라는 이상한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물론 실제로 가장 긴 쿠데타라는 건 아니다. 내전을 포함한 양상의 다른 쿠데타들도 많으므로..

12.12 이후 5.17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정권 장악은 크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차근 차근 진행되어 나갔고. 이런 과정에서 여러 언론들이 전비어천가(…)로 자신들을 찬양하는 뉴스로 장식을 하기도 했다. 한편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전두환과 휘하 부하들에 의해 권력이 장악되어 나간다는 걸 알게 모르게 알아챈 사람들은 많았다. [45]. 이 때문에 최규하는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국민들에게 허수아비 대통령 운운하는 말을 듣기도 했다. 대통령되는 과정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박정희는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서 대권을 잡은 반면 전두환은 체육관선거로 당선된 정권찬탈이라는 오명을 벗기가 어려운 점도 있지만 5.16은 정치적 하나의 요인으로 그나마의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 받지만 12.12는 그런거 필요없는 그냥 정권찬탈이라는 점이 차이점.


7 이야깃거리

7.1 반란군에 대한 내용

한편 노태우처남[46]이었던 김복동하나회 소속이면서도 12.12 군사 반란에 반대하였고, 결정적으로 전두환과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1982년 중장 예편 후 노태우 정권 말기인 1992년에야 민주자유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대선 공약으로 '평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내걸었을때 하나회로 이루어진 군 상층부에서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당시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던 일을 상기시켜서 반대여론을 무마시켰다고 한다. 작전권 환수에 대한 의지는 박정희 정권 이후로 쭈욱 있어왔지만 공약으로 내걸고 공론화 시킨것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다. 실제로 평시작전통제권이 환수된 시점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이다. 지금의 상황을 상기시켜보면 참 웃기고 재미있는 역사다 국가의 일은 보닌~ 이득대로~**

여담으로, 전두환의 반란군은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휴전선에 배치된, 정확히는 노태우가 지휘하던 9사단의 2개 연대[47]를 뺐었다. 그리고 이들이 출동하며 상황보고가 상부로 전해졌는데, 당시 3군사령관이던 이건영 중장은 이를 저지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9사단 참모장 구창회 대령은 노태우의 명령만을 따르며 사령관에게 병력 이동은 없다는 거짓 보고를 했고 사령관을 철저하게 기만함으로써 진압군 측의 저지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제5공화국 드라마 해당 장면에서는 이건영-구창회 실제 통화 육성을 그대로 사용하여 당시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우리의 주적은 국민

그리고 12.12 사태 10년후인 1989년 12월 12일에 대대적인 증시 부양책이 발표되었다. 1989년 4월 1일 1009P를 고점으로 코스피 지수가 하락세를 띄었고 증시 침체가 가속화되어나가자 투신권을 동원해서 무제한 매입을 시켰는데 덕택에 일시적으로 코스피 지수가 900P선을 다시 넘기도 했다. 그러나 약빨은 오래가지 못해서 결국 1989년 증시는 908P선으로 1985년 이후 전해 대비 하락세를 보였던데다가 다음해에 주식시장은 거하게 망해서 600P선까지 밀려났다. 덕택에 증권가에서도 흑역사로 치는 사건이다.

12.12 군사반란 당시에 보안사에서 전화 통화 내용을 녹음했던 테이프가 있다. 이는 1995년에 월간조선이 입수해서 부록으로 공개했던 것이다. 지금도 조갑제닷컴에서 들을 수 있다. [듣기]


사건의 배경은 경복궁 앞, 육군참모총장 공관이 있는 한남동, 국방부, 육군본부, 보안사 분실이 있던 용산구 지역이었다. 그런 관계로 유사시에 대비, 잔여 병력 차단을 목적으로 12일 밤 10시 계엄군은 한남동 주변 제 3 한강교를 비롯한 모든 한강 다리들을 접수한 후 차량 통행을 일제히 금지시켰다. 때문에 야간통행금지 시간 앞두고 서둘러 한강 건너 퇴근하려던 시민들은 영문도 모르고 엄청 큰 불편을 겪었다고 하며 다음 날 아침 정승화 총장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또 한번 놀랐다고 한다.(...)[#] [48]
  1. 에서 이러한 사조직을 구성하여 자신들이 군내 요직을 독식하는 것은 불법이다. 다만 박정희가 묵인해줬을 뿐이다.
  2. 본래는 정보활동과 무관하지만 차지철이 월권행위를 통해 중앙정보부에 버금가게 정보활동을 하였다
  3. 단 정승화 대장이 순수한 군인이었느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정승화는 마치 자신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서 전두환 일당에게 당한 것처럼 이야기 했지만, 정승화 자신도 정치적인 중립을 어기면서, "김대중씨가 (선거로) 대통령이 되더라도 군에서 비토할 것"이라는 말도 했다. 말하자면 그가 대통령이 되면 군에서 쿠데타를 일으킬수도 있다는 협박이나 다름 없었다. 전두환처럼 노골적인 정치적 개입은 하지 않았지만, 정승화도 정치적 중립을 어긴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하나회 처럼 국가전복을 꾀하지는 않았다
  4. 경비단장 장세동 대령, 하나회 소속
  5. 허가
  6. 당연히 인사처장이 수사 때문에 방문한다고 하면 의심받을 것이기에 정보처장을 사칭함. 그래서 사태 초기엔 정보처장 이던 권정달이 진압군 측으로부터 욕을 먹었다. 물론 들리진 않았지만
  7. 제 5공화국이란 다큐형 소설에서, 장 사령관 밑에 당장 굴릴 탱크가 4대 있었는데(주력기갑인 장세동이 30여대 끌고 가고 남은 것), 하필 육군본부로 가는 길에 합수부 본부가 있었다고... 이래저래 안습.
  8. 당시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 준장,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작전과장 고명승 대령은 모두 하나회 소속
  9. 당시 총리공관 경호대장은 구정길 중령
  10. 라고 쓰고 협박
  11. &하나회
  12. 여단장 (하나회) 박희도 준장
  13. 여단장 (하나회) 최세창 준장
  14. 여단장 (하나회) 장기오 준장
  15. 이 날 수경사령관 체포작전을 주도한 수경사 헌병부단장 신윤희 중령은 비 하나회 멤버이다. 하지만 이후 신윤희는 무려 12.12를 적극 변호하는 책을 내기까지 했다.
  16. 30사단장 박희모 소장은 육본의 진압 명령을 받았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전두환 측에 가세
  17. 2기갑여단장 이상규 준장은 하나회 멤버
  18.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 또한
  19. 주한미군사령관이 겸직
  20. 당시 9공수여단은 1개 대대를 제외한 나머지가 훈련에 나가있었기 때문에 차량이 없어 출동을 못하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인근 3군지사에서 받기로 한 차량 지원이 늦어지자 우선 가능한 1개 대대만이라도 서울로 출동을 시켰다.
  21. 9공수는 부평 인근에 위치해 경인고속도로를 타면 다른 특전여단보다 빠르게 서울로 진입이 가능했다
  22. 이 분은 5.18 민주화운동때 시위대 진압을 거부한 윤흥정 중장(당시 전투교육사령관 겸 계엄사 전남지역 분소장)의 친동생이다. 역시 그 형에 그 동생?
  23. 사령부 내 행정병, 취사병까지 모두 동원해도 100명이 채 되지 않았다고하니..
  24. 이들도 전두환에게 포섭된 상태
  25. 후일 12.12 공판 당시 신현확 당시 총리의 진술에 의하면 서명 시각은 12.13 오전 5시 10분이며, 정승화 총장 체포가 재가 이전에 벌어진 불법임을 명시하기 위한 조치였으리라고 밝혔다.
  26. 불명예 제대
  27. 이때 미국에 갖다바친 조공중의 하나,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 해당항목 참조. 그 이후 또 한번의 병크29만원덕에 민간로켓까지 제한당해버렸다. 이는 한국의 우주 개발에 심대한 타격이 되어버린다.
  28. 박정희의 반민주적 유신독재를 민주화 지지자 카터가 싫어했고, 이에 반발한 박정희가 독자적인 핵개발을 추진하면서 한미간의 거리는 더욱...
  29. 대표적으로 1982년 부산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있다
  30. 전두환은 박정희와 제법 비슷한 행보를 취했는데, 박정희의 경우 61년 5.16 쿠데타 - 61년 8월 중장 진급 - 61년 11월 대장 진급 - 63년 8월 전역 - 63년 12월 대통령 취임을 했으며, 전두환은 79년 12.12 쿠데타 - 80년 3월 중장 진급 - 80년 8월 대장 진급 - 80년 9월 대통령 취임을 했다. 스스로 진급하는 건 똑같았으나 박정희의 경우 직선제를 거쳤다는 점, 전두환은 최규하 하야 후 간선제를 거쳤다는 점이 다르며 전두환이 좀 더 '광속'으로 진행됐다는 사실에 차이가 있다.
  31. 현 자유총연맹
  32. 부총리급
  33. 박준병, 박희도, 박세직
  34. 76년 전두환의 간청을 받아 1공수여단장이 될 수 있도록 적극 후원했던 점, 78년 무장공비의 1공수여단 위수지역 통과사건에 보직해임 위기를 맞은 박희도를 정병주가 당시 육참총장 이세호 대장 앞에서 간곡히 간청하여 구해줬던 두 번의 은혜를 배신한 셈
  35. 80년 당시 준장이었는데 85년에는 대장 진급을 했으니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
  36. 함께 본관에서 근무
  37. 12.12 당시에는 중령으로 보안사 수사2과장
  38. 현역 군인 신분으로 경호실장에 있었기에 84년 중장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39. [대법원 판례]
  40.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7조 2항 : 전직대통령이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금고 이상의 형 포함)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제6조제4항제1호(경비 및 경호)에 따른 예우를 제외하고는 이 법에 따른 전직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하지 아니한다.
  41. 경호, 경비가 제외되지 않는 이유는 납치에 따른 국가기밀 누설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42. 정확히 말하자면 영호남
  43. 당시 계엄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 이희성 대장이었으나.. 어디까지나 바지 사장이었을 뿐..
  44. 대통령 취임까지 따지면 10개월
  45. 실제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됐던 구호가 바로 '전두환 물러가라'였다 물론 '김대중 석방' 도 있었다.
  46. 김옥숙의 오빠
  47. 정확히는 29연대와 30연대 1개 대대
  48. 차량 통행이 전면 금지되자 각 한강다리 앞 뒤에 묶여있던 시민들은 그 추운 날씨에 걸어서 다리를 오갔으며 자정 넘어 통금시간이 되자 집에 가지도 못하고 여관방 신세를 지는 등 고생 좀 했다고 한다. 다만 반란이 성공하자 이례적으로 한강 교량만 야간통금을 풀어줘서 묶여있던 차량이 다니게끔 조치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