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대한민국 국군/인물
전인범(全仁釩) | ||
1958년 ~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기간 | 1981년 ~ 2016년 | |
임관 | 육사 37기 | |
최종계급 | 중장 | |
최종보직 | 제1야전군 부사령관 | |
주요보직 | 27사단장, 육군 특수전사령관 |
목차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2016년 7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현역 시절, 가장 많은 훈장을 수여받은 장성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총 복무 기간은 1977년 3월 1일 ~ 2016년 7월 31일(퇴역식 28일)로 39년 반이다.
1958년 9월 6일생. 서울 출신으로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육사 37기로 임관했다. 동기로는 고명현, 김영식, 박지만, 박찬주, 신원식, 양종수, 엄기학, 이재수, 조보근 등이 있다.[1]
통역이 필요없는 유창한 영어 실력과 뛰어난 업무 추진력으로 주한미군 지휘부와 깊은 신뢰관계를 유지해 우리 군의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불리었다. 주요 보직으로 30사단 작전장교, 한미연합사 기획참모부 우발계획장교, 특전사 연합작전장교, 육본 참모총장실 정책장교, 22사단 55연대 3대대장, 22사단 인사참모·작전참모, 9사단 29연대장,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 국방부 국제협력관실 대미(對美)정책과장, 합참 작전기획부 공동작계 추진단장, 합참 전략기획부 전략기획차장, 합참 전략기획부 전작권 전환 추진단장, 27사단장, 한미연합사 작전참모차장,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겸 한미연합사 부참모장, 특전사령관 등이 있다.
나무위키 업데이트가 매우 빠르고 상당히 칭찬이 많았던 장군. 초기에 27사단 페이지에 역대 사단장으로 전인범 항목이 생겼을 때만 완전히 듣보잡이였지만 이후 고속 승진을 하며 일반인들에게 조금씩 알려졌고, 업데이트가 자주 되니 최근 변경내역에 자주 이름이 등장하여 나무위키러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성웅 이순신 급의 칭찬 릴레이 때문에 대체 어떤 사람인가 알고 싶어서 찾아보고, 찾아보다 보니 업데이트 하는 선순환이 지금도 이루어 지고 있다.사령관님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하시지 말입니다. 아니면 혹시 아들이 위키니트?
참고로 이 항목은 몇 년 전부터 수차례 수정 전쟁이 있었다. 주로 박지만 EG 회장과 연관성과 전인범의 최악 흑역사인 제13공수특전여단 훈련사망사고 관련글이 계속해서 삭제된적이 있고, 반대로 전인범 장군의 각종 훈훈한 미담 사례가 거의 전부 삭제되었다. 특히 가장 길었던 이기자 부대 사단장 시절글이 송두리째 사라졌었다. 지금까지 삭제된 글을 다 합치면 나무위키 군인 문서 중 가장 긴 문서가 될 것이다.
2 생애
2.1 가족관계
할아버지(전항섭)은 유한양행 사장이고 아버지(전주화)는 한의사이다, 어머니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자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였던 홍숙자 박사이다. 국방일보 기사[2]
그의 부인 심화진 여사는 1956년생으로 남편보다 2살 아래이며, 성신여자대학교 총장이다. 또한 그의 고모 전혜성 예일 대학교 교수의 장남으로 미국 보건복지부 보건담당 차관보를 지낸 하워드 고는 그에게 내종형(內從兄)이 된다.
부인 심화진 여사와의 사이에서 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장남 전민규(맨 오른쪽. 레바논 동명부대 파병)와 차남 전민우(맨 왼쪽) 두 아들 모두 아버지와는 달리 현역병으로 병역 의무를 이행했다.
집안 배경을 빼고 보더라도, 본인 나름의 재력도 상당한 편이다. 2016년 3월 관보에 공시에 의하면 총재산은 25억 2149만원으로 군 인사 가운데 개인 재산 1위다.
2.2 민간인 시절
7살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어머니 홍숙자 박사와 함께 살았다. 외교관인 어머니를 따라 미국에서 5년정도 살았는데 외톨이 신세였다고 한다. 이때 미국에서 2차세계대전을 다룬 TV 시리즈 컴뱃(Combat)을 보며 샌더스 중사에게 푹 빠졌다고 한다.[3] 12살때 한국에 돌아와 외삼촌과 국군의날 행진을 보았는데 외삼촌에게 '군인이 되려면 육사에 가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육사행을 결정하였다.
학창시절에는 워낙 운동을 못하고 겁도 많아 체육에서 C, D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 홍박사는 전인범에게 한국에서 AFKN만 보게 하고, 저녁식사때는 영어로만 대화하게 하였다. 이과정에서 전인범은 '리더스 다이제스트', '뉴스위크', '타임'을 빼놓지 않고 읽는등 군인생 전반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영어 실력은 이때 이미 완성되었다.
육사는 1977년 37기로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 성적이 꼴지에서 두번째였는데 다행히 영어시험에서 만점을 받아 이때문에 합격 시켜 준것으로 스스로 추측하고 있다. 당시 교장은 후일 12.12 군사반란으로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 붙잡히는 수모를 당했던 정승화 중장이였다.
2.3 육군사관학교 37기
육사 37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의 기수로 유명하다. 자신의 아들을 박지만과 학연을 맺게 하여 아들덕에 뭔가 얻어 먹어 볼려는 고위장성들이 넘쳐서, 통상 기수당 1,2명에 그쳤던 고위 장성의 아들이 37기에만 10명이 넘었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박지만과 친한 육사 37기가 약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었고 그러면서 대표적인 육사 37기로 이재수 기무사령관, 신원식 함참 작전본부장, 조보근 국방정보본부장과 함께 전인범이 언론에 자주 소개 되었다. 하지만 박지만의 일화로 선배들이 첫 날에 "니들 중에서 육사가기 싫은데 온 사람은 당장 손들어!"할 때 유일하게 손들었을 정도로 억지로 들어왔었고, 결국 육사 시절 박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의무복무도 안 채우고 대충하다가 그만두고 나왔다. 이후 육사 동기들과 거의 연락을 안 하고 지내기 때문에 육사 37기가 박지만과 박근혜 대통령 때문에 잘나간다는 것은 무리수라는 언론의 분석도 있다.[4]
결국 전인범은 박지만이 있던 37기라는 이유로 그의 영향력으로 소장으로 옷벗을 상황인데 중장으로 승진했다는 얘기도 있다. 통상 한 기수에 중장은 6~7명 정도 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32기-7명/33기-6명/34기-7명/35기-8명/36기-6명) 8명이 중장으로 진급한 37기가 승진이 조금 잘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은 훈장을 받았는데 그대로 옷을 벗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전인범은 다른 장성들에 비해(심지어는 대장까지 포함해도) 훈장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군복무 내내 한 개 받기도 힘든 훈장을 무려 8개씩이나 받았고 그 중 미국이 외국군에게 주는 최고 공로훈장인 Legion of Merit 2개가 들어있었다. 이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손에 꼽는 수훈이다. 다시 말하지만 군복무기간 내내 한번 받기조차 힘든 훈장을 저렇게 많이 받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한 개만 받아도 승진이 빨라야 정상인 훈장을 전인범은 8개나 받았다.
전인범의 어머니 홍숙자 박사는 외교관이라 육영수 여사의 통역을 맡았던 경험이 있다. 홍박사는 전인범에게 '지만이 잘 챙겨줘라'라고 했지만... 박지만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의 아들로 교장인 정승화 중장이 직접 챙겨주는 특별한 생도이며, 박지만과 친해져 볼려고 입학한 장성 아들이 10명에 달하는 상태라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상태였다. 전임범 스스로도 박지만 생도 주변에는 워낙 사람이 많아 가까이 갈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박지만 때문에 재미있는 일화가 많은데, 한번은 월드미스유니버시아 행사를 국내에서 치뤘다. 이때 이들을 환영하는 만찬회가 열렸는데 박지만 덕분에 육사의 키크고 잘생긴 생도들을 차출해서 월드미스유니버시아들의 파트너로 만찬회를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전인범 생도는... 키와 외모 때문에 참석하지는 못했다.
위의 일화 처럼 박지만에 대한 수없이 쏟아지는 유신정권+신군부의 과도한 관심 때문에 선배들이 엄청나게 스트레스 받아서 연대 책임으로 육사 37기를 마구 굴렸다고 한다. 그 바람에 정신이 없어 37기들은 후배들을 거의 통제하지 못했는데, 이때 대표적으로 나서서 후배들을 잡은 사람이 전인범이다. 그 당시 별명이 '잔인범'이라고 38기 이하 후배들은 기억한다.
'잔인범'이 탄생한데 대해서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1학년 시절 하도 심하게 기합 주던 선배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우연히 그와 함께 기합을 받았는데 그 선배는 '원산폭격'을 5분도 못 견뎠다. 알고보니 그 선배는 귀여움만 받았지 기합을 안받아 봤다고 한다. 이를 보고 얻은 전인범의 결론은 '고통을 겪어보지 않으면 남한테 포악하게 구는구나'였다.(응?) 이후 전임범은 '잔인범'으로 탈바꿈 하여 후배들에게 기합을 많이 주게 되었다.[5]
육사 37기는 유신 사무관 마지막 세대로, 여기까지는 비교적 승진이 잘 되는 마지막 기수이다. 왜냐면 육사 37기 까지만 280명 정도를 임관시켰고 승진 경쟁에 밀리는 사람들은 대위 전역 후에 사무관에 임명하는 특혜를 주었기 때문에 동기간의 경쟁이 비교적 수월했다. 그리고 유신사무관 제도를 광고하고 첫 모집한 육사 38기부터는 중간에 사무관으로 많이 나갈 것을 염두해 두고 50명을 더 뽑아 322명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 정작 육사 38기가 대위로 전역할 때가 되자 유신 사무관제도는 폐지되어 버려 승진 경쟁률이 급상승해버렸다. 인사적체도 심각해졌고.
또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나회는 육사 11기부터 시작되어 36기 까지만 모집 되었던 것 같다. 어짜피 하나회는 상위 5%의 경상도 사람만 모집하기 때문에 서울사람인 전인범은 해당사항 없지만, 반면에 동기중에서 요직을 돌며 고속 승진을 일삼는 하나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후 승진에 방해되는 요소가 없어 다행이라 할 수 있다.
2.4 위관급 시절
수많은 훈훈한 전설을 같고 있는 전인범이 처음부터 이러한 인격자는 아니였다. 육사 시절 '잔인범' 일화에도 나오지만 군인으로서 초기의 그는 잔인한 사람이였다. 1981년 소대장을 할 때 사격 못하는 사람들을 군화발로 짓 이겼다. 당시 부하에게 '개대가리'라고 막말을 일삼아 상처 받았다는 편지도 받았다고 한다. 영관급 초기까지 이러한 성향은 이어졌다.
중위 시절 이 계급 최초로 합동참모의장이었던 이기백 대장의 전속부관에 보임되었다(지금은 합참의장 부관을 소령 계급이 맡는다). 1983년 10월 북한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때 중상을 입은 이기백 장군을 긴급 후송해 생명을 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당시 아수라장이었던 폭파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이기백 장군을 구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중위로서는 받기 어려운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훈하였다. 2013. 10. 9. 전인범 소장 전화 인터뷰 그때에 대한 전인범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두부(頭部)에 중상을 입고 쓰러진 이기백 장군의 두발이 길어서 피와 머리카락이 응고되어 정확한 상처 부위를 찾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그때의 경험 때문에 27사단장이 되고 나서는 “전시 혹은 훈련 중에 두부에 상처가 생기면 두발이 짧아야 상흔을 쉽게 찾을 수 있어 치료를 빨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며 사단 全 장병에게 마치 모히칸 머리스타일 같은 짧은 헤어 스타일을 지시했다. 그래서 전 간부가 주 1회 이발을 하느라 바쁘게 지냈다고 한다. 이때의 머리를 이기자 컷이라고 하는데, 옆·뒷머리를 싹 밀고 앞머리가 6㎜인 것이 이기자 컷의 표준이다.
테러 당시의 영상. 1분 26초경 이기백 대장을 구하기 위해 폐허 더미를 헤집고 다가가고 있는 장교가 전인범 중위이다. 전인범은 상황실에 있다가 카메라 배터리를 교체하러 잠깐 나갔었는데 이때 폭판이 터졌다. 2분 16초에는 합참의장을 무너진 더미에서 빼내어 놓고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으로 나오며, 3분 16초에 들것을 옮기고 있는 왼쪽의 넥타이 맨 인물로 등장한다.
이기백 장군은 온몸에 박힌 파편 제거수술을 받고 붕대로 칭칭 감겨 있던 상태에서, 의식이 돌아오자 첫 마디가 '각하 괜찮으시냐? 지금 몇 시냐? 밥은 먹었냐?'였다. 전인범은 저런 상황속에서도 상관과 부하를 챙기는 위하는 것이 진짜 군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2.5 영관급 시절
중대장 시절에는 우수 전투중대장에게만 주는 재구상을 받기도 했다.
22사단 대대장을 할 때 매년 1명씩 3명이 자살했었다. 연대장이 관에 태극기를 덮어주라고 했지만 안덮어 주었다. 마지막 세번째 자살자에게만 덮어 주었다. 이과정에서 부하를 자식처럼 여긴다고 입으로만 말했지 정말 자식처럼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뒤로는 부하를 아들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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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7월 11일 오전 청와대에서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 전인범 대령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2004년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MNF-I) 선거지원과장으로 근무했을 당시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업무의 주역으로 외국군(미국, 영국, 호주, 루마니아)을 지휘·감독하여 이라크 민주주의 탄생에 기여했다. 이때 국제선거관리위원회에서 승진받은 투표용지를 중국 등로부터 수송기로 받아 이라크 전역의 5800개 투표소에 분대하고 직원들 봉급을 비롯해 비용을 전달하는 일을 했다. 서울신문 기사 이때 이라크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우리 정부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한국 군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정부로부터 동성훈장(Bronze Star Medal)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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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일 장성으로 진급 후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김관진 대장과 함께
2007년 7월 국제 테러단체인 탈레반에 의한 아프간 한국인 납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 정부를 대표한 카불 군사협조단장으로 급파, 적극적인 인질 구출작전으로 사건 발생 43일 만에 21명의 인질을 구출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연합뉴스 기사 이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구출된 인질들은 기자회견장에서 "전인범 단장에게 감사하다."라고 했었다. 전인범 군사협조단장은, 아프카니스탄 국제안보지원군(ISAF)에 파견되어 협조체계를 구축하였다. 이과정에서 상황실에 미국 유학시절 알고 지낸 독일군, 미군이 있어 도움을 받게 되었다. 전인범이 괜히 미국통이 아닌 것이다.
2.6 장군 시절: (1) 초기
2009년 11월 소장으로 진급해 제27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재임기간 동안 사단 예하 모든 부대와 일선 장병들이 전투적 사고와 호전적 공세 기질을 갖춘 최정예 전투형 부대가 될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했다. 또한 이를 통해 지금 당장 싸울 수 있는 거점 전비태세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당시 27사단 장병들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를 소개하며 그를 참군인으로 평가했다. #
위에서 언급된 이기자 컷도 이 시절 존재하였다. 백마부대 29연대장 시절에는 그냥 돌격머리라고 불렀지만, 워낙 이기자컷이라는 단어가 인터넷상으로 유명해져서 이 명칭이 반 공식화 되었다. 나무위키 시절 이 문서의 초창기 버전은 이기자 부대 사단장 시절의 전인범을 다루면서 시작되었고, 이때의 이기자컷으로 전인범 자체가 유명해졌다. 이후 전인범의 계속되는 영전으로 이기자 컷은 점점 퍼져만 가는데...[6]
이때 수많은 미담과 소탈한 면모를 과시하였다. 인터넷에 이기자부대 전인범이라고 치면 당시 미담들이 쏟아 진다. 나무위키에 어느정도 기술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전부 삭제됨
2014 동해안 폭설 사태 당시 한 블로그를 통해 27사단장 시절 제설작업에 직접 넉가래를 들고 진두지휘하시는 무시무시한 짤방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겪어본 블로거들의 말로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평가다. 투스타의 귀도리가 깜찍하다.
이기자 부대에 있었을 때 중요한 일은 차성도 중위를 재발굴 하고 그를 기리는 상을 제정한 것이다. 차성도 중위는 1970년 27사단 소대장으로 근무하던중 부하가 안전핀을 뺀 수류탄을 놓치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부하를 구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를 당시에는 사고라고 덮어 버리고 이후로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전인범이 누구인가? 중대장 시절 재구상을 받은 사람이다. 강재구 대위도 부하가 놓친 수류탄을 덥쳐 폭사 하였지만, 당시 대대장이 박경석이고 사단장이 바로 그 채명신 소장이였다.
박경석 대대장은 채명신 사단장에게 강재구 사건은 사고가 아니라 '살신성인'이라고 강하게 어필해서, 전국을 강재구 열풍으로 몰아 놓았다. 그리고 채명신 사단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재구상 재정에, 아예 부대 이름을 재구대대로 개명해 버렸다. 지휘관이 누구냐에 따라서 숨겨야할 사고가 되는지, 국민적 영웅이 되는지 결정 되는 것이다. 재구상 까지 받았던 전임범은 잊혀진 차성도 중위 사건을 재발굴 하여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길을 선택 했다. 이후 27사단 주관으로 '차성도 중위 추모제'를 열고 '차성도상을 제정했으며 사료를 발굴하여 보전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27사단의 창고를 1년에 걸쳐 개조하여 사단 역사관을 만들었다. 이때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가 탈레반의 자살폭탄 테러로 전사한 윤장호 하사를 기리는 나무가 미 8군부대에 있었는데, 그 나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인범은 그 나무를 교체하게 건의하고 이기자 역사관 안에 윤장호 하사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었다. 전인범은 '차성도 중위', '윤장호 하사'처럼 그와는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도, 단지 호국의 영웅이라는 이유 만으로 그들을 기리는데 두팔을 걷고 나섰다.[7]
2011년 5월 13일에는 한미 유대를 공고히 하고 연합작전 태세를 발전시킨 공과 한미 우호관계 증진 노력을 인정받아 미국이 외국군에게 주는 최고등급 훈장인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수훈하였다. 미국으로부터 이 상을 받은 다른 외국인은 중국의 장제스 총통, 영국의 조지 6세, 소련의 주코프 원수, 프랑스의 드 골 대통령, 한국의 김용배 대장(제17대 육군참모총장), 김성은 중장(제15대 국방부 장관), 김관진 대장(제43대 국방부 장관), 정승조 대장(제37대 합동참모의장) 등이 있다.
2011년 11월에는 2년 간의 사단장직을 마치고 한미연합사 작전참모차장으로 영전했다. 연합사 작전참모차장은 한·미군의 핵심 보직으로 미군 소장이 작전참모부장을 맡고 한국군을 대표해 차장이 한미연합 작전 실무를 담당한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위협 상황에서 한미연합사령부 작전참모차장 임무를 탁월히 수행했다는 평이다. 아시아투데이 기사
2013년 4월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제16대 한국군 수석대표에 임명됨과 동시에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지상구성군사령부 참모장 직을 겸직하게 되었다. 유엔사 군정위 수석대표는 유엔군사령관 지침에 따라 평시 정전협정 유지 및 관리를 기본 업무로 수행한다. 특히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사례가 발생하면 유엔사 회원국 연락단을 포함한 다국적 특별조사팀을 구성해 조사한다.
2.7 장군 시절: (2) 특수전사령관
영원한 특전사령관
2013년 10월 중장 진급과 함께 특수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가 특전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여러 변화들이 생겼다.
전인범 중장이 특전사령관에 부임한 뒤 특전사 베레모는 이렇게 바뀌었다. 특전사 베레모의 모표도 그동안 장교는 계급장만 달고 특전휘장을 달지 않던 것에서 특전휘장 아래에 계급장을 달도록 바꾸고, 특전훈련을 이수하지 않은 인원(특전병 등)은 베레모에 특전휘장을 달지 못 하도록 바꿨는데, 전인범 장군 자신도 사령관이긴 하나 해당 훈련 미이수자였으므로 특전휘장을 재직기간 동안 달지 않았다. 그리고 장기복무자들에게 불필요하게 반복적이고 지나친 육체적 소모와 부상을 가져오던 기존의 정기적인 천리행군을 자대배치 전에 특전교육단에서 한 번만 하고 이후에 자대에 가서는 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다. 천리행군의 방식도 바뀌었는데, 마치 지옥주처럼 7일간 잠을 안 자는 무박으로 강행군하고 중도 포기자는 모두 퇴교시키는 일종의 살아남기식 자격 훈련 방식으로 바뀌었다. 또한 예전엔 사제 택티컬 장비의 사용 가능 여부가 각 대대의 대대장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저마다 달랐는데, 전인범 사령관은 모든 예하 부대에 그와 같은 장비의 사용을 허용하였다.
특전사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 했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세종시에 달려가서 관료들 만나 빌고, 울고, 협박도 했어요."라고 할 정도.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그 결과가 강하 수당이 15년 만에 5만원에서 7만원으로 40%인상이다. 전투력을 올리면서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기회를 많이 보장해줘야 하겠다는 생각에 만든 제도가 한달에 250km를 뛰면 휴가 하루! 씨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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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한미연합방위체계 구축과 한미동맹 강화, 상호 유대관계 증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다시 한 번 수훈하였다. 이로서 그는 한미 양국으로부터 총 8개의 훈장을 받아 대한민국 현역 장성들 중 최다 훈장 수상 기록을 세웠다. 연합뉴스 기사 저사진 찍힌곳이 어딘지 말하면 콜렁탕당첨
특전사 포로 체험 훈련을 지시한 사람으로 제13공수특전여단 훈련사망사고와 관련성이 크다.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한 이 사건에 대한 처벌은 서면경고를 받는데 그쳐 이에 대한 비난 여론이 있었다. 반대급부로 대장 진급이 막히게 된 계기라 많은 이들이 짐작하는데, 상부에서 이리저리 튀는 편인 전 장군을 탐탁찮게 보는 시선이 많아 정적이던 장군들이 이걸 기회로 4성 장군 진급을 막아버린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전인범 장군은 이 사건에 대해 “최근 일어났던 13공수여단 훈련사망사고는 진짜 특수부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부대를 혹독히 담금질하는 과정 중에 있었던 안타까운 사고”라면서 “전우를 잃은 사고는 가슴 아프지만, 여기서 개혁을 멈춘다면 적이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떨었던 세계 최강의 특전사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 장군은 이후에도 사망한 '조용준, 이유성 하사'에 대해 절대적인 책임이 있다는 말을 하곤 하였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두 사람의 이름을 죽을 때까지 새기고 가야 한다는 벌을 받았습니다.'라고 하는등 일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특전사령관 취임 1년차에 접어들면서 부대의 장비 구입을 위한 예산 확보, 새로운 장비의 개발, 해외 특수부대와의 교류협력 등 특전사의 전투력 강화를 위한 개혁을 주도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서울신문 기사 이 기사에 의하면, 특전사에 근무하다가 전역해 현재는 보안 관련 업계에 종사하며 후배들에게 자문활동을 해주고 있는 한 예비역 중사는 “지금과 같은 사령관이 있었다면 전역 안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신동아 2016년 5월호 225페이지에 드라마 <태양에 후예> 관련으로 "드라마에서처럼 부하를 아끼는 사령관도 실재한다. 전인범 사령관이 그런 사례이다. 보급품 확충, 수당인상, 사제품 허용, 간결한 훈시 등 여러면에서 부하들을 꼼꼼하게 챙겼다."라고 한다. 이에 "국회의원들을 초대해 특공무술 시범을 한적이 있는데, 그날 식사시간에 전 사령관이 의원들에게 전투식량을 건네보이며 '우리 애들이 이런 대우 받을 애들 아니다, 더 잘먹여야 훈련도 더 잘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 후로 정말 전투식량이 좋아졌다. 군에 그런 분이 많으면 나도 유(시진) 대위 같은 군인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부사관 출A씨)라는 글이 실려 있다.
2.8 장군 시절: (3) 특수전사령관 이후
2015년 4월 14일 특수전사령관 임기를 마치고 제1야전군 부사령관으로 영전하였다. 특전사령관 이임사에서 그는 “우리는 야수의 본능을 잃어가는 동물원의 사자가 아닌 초원을 질주하며 천하를 호령하는 용맹함을 간직한 대한민국 육군의 대표부대 특전사 검은 베레 용사들”이라며 “누구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도전하고 노력하는 정신이 바로 특전정신이다. 우리들 특전용사에게 결코 불가능은 없다.”고 강조했다. 뉴시스 기사 전인범 25대 특전사령관 이임사 영상
2016년 상반기 장성 인사에서 고현수 중장이 제1야전군 부사령관으로 보직이동함에 따라 전인범 중장은 육군본부 정책연구관이란 직책으로 전역 대기상태가 되었다.
2.9 퇴역
7월 28일, 경기도 이천시 육군특수전사령부 연병장에서 전역식을 갖고 36년 동안의 군 생활을 명예롭게 마감했다. 이날 보국훈장 국선장과 함께,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 사령관으로부터 미군 통합특수전사령부 훈장도 받았다. 해당 훈장은 한국군 출신에게는 처음 수여된 것이다. 전역식에는 이기백[8], 정호용, 김동진,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도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다.
퇴역 직전, 한국군사학회 부회장으로 영입되었다. 다만 해당 단체에는 이미 10명 이상의 부회장직이 존재하므로, 일종의 명예직에 가깝다.
10월부터는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 방문학자,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 객원 연구원으로 일하기로 예정 되었다.
3 평가
현존하는 한국군 제일의 스타 장군
통역이 필요없는 유창한 영어 실력과 뛰어난 업무 추진력으로 주한미군 지휘부와 깊은 신뢰관계를 유지해 우리 군의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불린다. 한미연합군사령관이던 미 육군대장 커티스 스캐퍼로티 장군은 그를 일컬어 ‘가장 절친’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미군들의 신뢰를 받으며 강력한 한·미 군사동맹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아시아투데이 기사
육사 한 기수 선배인 육군대장 장준규 장군과는 인연이 깊은데, 비슷한 시기에 1야전군사령부 관할 지역인 강원도에서 대대장을, 3야전군사령부 예하 9사단에서 연대장을, 다시 1야전군 관할 지역의 사단장을 지냈고, 특전사령관도 차례로 거쳤다. 2015년 9월 장준규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하기 전까지 1야전군사령부에서 각자 사령관과 부사령관으로 일했다. 후임 사령관으로는 육사 37기 동기생인 김영식 장군이 취임했다.
2015년 하반기 군 수뇌부 인사가 야전 경력 위주의 인사가 이뤄졌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 가운데 신원식, 이재수 장군은 박지만 EG그룹 회장과의 친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전인범 중장을 배제한 것은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결과를 불러온 이유로 그가 야전보다 ‘미국통’ 이미지가 더 강했던 것 외에 지나치게 강직한 성격이 지목되기도 했다. 뉴스1 기사 국민일보 기사 주간동아 기사 게다가 그가 특전사를 지휘하는 동안 제13공수특전여단 훈련사망사고가 났다. 지휘관으로서 자기 휘하 부대에서 구타사고나 군무이탈 사고만 나도 진급에 치명적인데 이것들보다 급이 높은 사망 사고가 나버렸으니 진급은 커녕 되려 보직해임을 안 당한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일 지경이다. 참고로 특전사령관은 지휘관 등급은 군단장급이지만 휘하 병력의 머릿수는 연대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타의 군단장급 지휘관에 비해 지휘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해당 사고는 충분한 사전조치가 미비해 발생했음을 고려하면 심한 처사라고 여기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여튼 타 군단장에 비해 지휘책임이 커서 특전사령관이 진급코스임에도 불구하고 특전사령관을 끝으로 전역하거나 더 이상 진급하지 못하는 장성들이 많다.
전인범은 이때 서면 경고를 먹으면서 사실상 대장진급이 막혔다. 대장으로 진급하는 자체가 '별을 단 후엔 운칠복삼(運七福三)으로 진급한다'는 말이 군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돌 정도로 워낙 까다로운지라 징계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굉장히 치명적이다.
밀덕들 사이에서는 높은 인지도와 더불어 우호적인 평가를 받는 편이다. 본 문서의 내용과 분량에서도 다른 현역 장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한민국의 역대 국방장관이나 합참의장, 참모총장들의 항목을 크게 상회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비록 대장급으로의 진급은 무산되어 참모총장이나 야전군사령관, 합참의장의 자리까지는 못 오르고 군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 동안의 경력이나 군 내외의 신망 등을 고려하면 앞으로 국방부에서 차관급 이하의 고급 관료, 혹은 국회 국방위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가능성은 충분할 듯.[9] 하지만 최근 부인인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의 비리 혐의들이 뉴스타파 등을 통해 드러나고 있고 위에서 언급한 제13공수특전여단 훈련사망사고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전역 이후 공직 진출에 있어서 부정적인 시각 또한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4 트리비아
대령 시절인 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한미군사동맹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연구(1994-2004)"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4년 후 제27사단장 재직 시절인 2010년 경남대학교에서 "美 닉슨·부시(’01.1~’09.1) 행정부 시기 주한미군 감축결정 비교연구"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둘 다 한미동맹에 관한 주제인데, 해외파병 경험에 따른 한미 연합작전 부문의 근무가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퇴역 직후 <신동아>지와 가진 인터뷰 기사가 2016년 9월호에 게재되었다. 본 문서의 작성 내용 가운데 일부는 여기서 유래한 것들도 있다.
전역 직후 임태훈(인권운동가) 군인권센터 소장이 제13공수특전여단 훈련사망사고의 지휘책임에 대해 전인범을 비난하자언론 기고문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맞비난했다.- ↑ 이때문에 박근혜 정부 초기에는 박지만 인맥으로 구분 되기도 하였지만, 정권 중반을 넘어 가면서 박지만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박지만과 친한 사람은 위의 이재수 정도로 분류된다.
- ↑ 이처럼 본인의 집안 배경은 전형적인 상류층인데도 사병들에게 따뜻하게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그들의 복지에 힘을 썼다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타고난 천성으로도 볼 수 있고 군생활 위관급 시절 얻은 경험이 가미 된 것일 수도 있다.
- ↑ 컴뱃은 워낙 옛날 방송이라 인터넷에서는 구하기 힘들고 IPTV인 'Qook'에 있는 것은 확인 하였다. '머나먼 정글'처럼 미군의 소부대 전투를 다루었다. 전인범이 빠졌던 샌더스 중사의 오마주가 이후 '머나먼 정글'의 앤더슨 중사로 추측된다.
- ↑ 단, 동기생 20명씩으로 중대를 구성하는데 박지만은 자신이 소속되었던 6중대 사람들의 모임에는 매년 참석한다고 한다. 전인범은 6중대원이 아니었다.
- ↑ 이 일화 때문인지 전인범의 이후 행적을 보면 훈련을 혹독하게 시켰다는 구절이 반복해서 나온다. 전인범의 이후 군생활당시 인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화
- ↑ 단지 머리를 짧게 깕으라는 것이 아니라, 수색대는 전시에 사복추진 가야 한다며 머리를 장발로 기르게 하는 등 모든 것은 전시에 입각해서 판단하였다.
- ↑ 이후 전인범의 전역식대 유일하게 축사를 해준사람이, 국가에 차출되었지만 군번도 계급도 공로 인정도 없이 싸웠던 한국유격군총연합회 이진복 부회장이라는 점은 이러한 전인범 장군의 행적과 연관 있다.
- ↑ 문서 위 설명에 나오듯이 1983년 아웅산 테러 당시 합참의장으로 전인범의 도움을 받은 인연이 있다.
- ↑ 중장 출신의 국방부 장관도 의외로 상당수 존재하기 때문에, 아주 운 좋은 경우에는 국방장관으로 인선될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