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복


金遺腹

1940년생. 본명은 김유복자(金遺腹子)이며 부산 출신이다.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병으로 별세하셔서 '유복자'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남자를 좋아하게 되고, 부산에서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상경하여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55년 간 어머니와 생이별하여 어머니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유일한 혈육이었던 누나마저 오래 전 세상을 떠나 현재의 보호자는 과거 트랜스젠더 바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이요나 목사가 유일하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MBC 라디오 전속가수와 연극 배우로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당시 풍부한 가창력으로 가수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꽤 높았다고 한다. .

그런데 낮에는 MBC 라디오 전속가수로 일하는 한 편, 밤에는 이태원 게이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중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당시는 여성 호르몬을 맞기 전이었다.

그러다가 30대 초반, MBC에서의 가수 생활을 그만 두고 밤무대로 발을 옮기면서 여장을 시작하게 되었고, 눈썹 문신을 하고 약국에서 여성 호르몬제를 사서 맞기도 했다고 한다. [1]

이요나 목사와 처음 만난 곳은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에 있었던 한 게이바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당시 이요나 목사는 충무로에서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동성애자 친구가 대구에서 올라오자 친구들과 같이 술자리를 가지려 게이바에 갔었다고 한다.

그 때 김유복 씨는 붉은 집시 옷과 작은 손부채를 들고 쿠바의 볼레로 노래인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 (Quizas quizas quizas)' [2] 를 부르고, 이 외에도 일본의 엔카, 라틴 음악, 팝을 자유 자재로 불렀다고 한다.

이 후 김유복 씨가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았던 이요나 목사는 1980년 이태원동에서 최초의 게이바 '열애클럽'을 개업했을 때 전속 가수로 캐스팅하면서 김유복 씨는 '김마리네'라는 이름으로 단독 무대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점차 이요나 목사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지금도 클럽 '열애'는 아직도 있는데, 자신이 개업한 게이바 (트랜스젠더바) 를 중심으로 현재 이태원에 파악된 게이바가 100개가 넘는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랬다고 한다. 당시 게이바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큰 센세이션이 되어 당시 인기가 높았던 가수들이 많이 방문했었는데, 가수 패티김이 김유복 씨의 노래를 듣고 "절대 음감의 소유자"라고 엄청 칭찬했다고 한다.

엄청나게 성업한 '열애클럽'은 일본 신주쿠에 지점까지 개업했는데, 이름은 '벨라미 클럽'. 김유복 씨는 일본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 위해 1년 간 일본에 원정을 다녀왔다고 한다. 이 때 김유복 씨는 인생의 황금기를 누렸다.

그리고 게이의 인생을 다룬 뮤지컬 '미스터 레이디'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더욱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 #

그런데 1985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에서 퇴폐 유흥업소를 단속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 열애클럽이 적발되며 벌금과 함께 1개월 영업 정지 처분을 받았지만 이요나 목사는 게이바 이외에도 4개의 가게를 운영하면서 영업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1989년 사회 정화를 목적으로 더욱 강화되고 본격적으로 유흥업소를 단속하기 시작하면서 이요나 목사는 1989년 말 일본으로 몸을 피했고, 이 때 김유복 씨와의 인연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3년 일본에서 탈동성애를 하고 이후 신학을 공부하면서 일본 갈보리채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94년 6월 현재의 갈보리채플 서울 교회를 창립한 이 후 수소문 끝에 1995년 5월 김유복 씨를 찾게 되었는데, 이태원의 5평 남짓한 쪽방에서 비참한 상태로 생활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만성 척추 측만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증세가 더 악화되고 거기에다 여성 호르몬 과다 투입으로 인한 후유증이었던 것이다.

이요나 목사의 설득 끝에 여자 옷과 악세사리 등을 다 버리고 여성 호르몬 주사 투여도 중지하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김 씨는 동성애를 버리지 못하고 "미안하다"라는 말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이 후 10년 뒤 주변 지인들로 부터 김 씨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데, 2004년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다가 의료사고로 신경이 끊어져 한남동 도깨비시장 [3] 구석의 단칸방에서 알몸에 기저귀만 찬 채로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

김 씨는 이요나 목사의 도움으로 2007년 재수술을 받았지만 소용없었고, 이 후 10년을 외출도 못 한 채 누운 채로 생활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2015년 3월, 이요나 목사와 함께 <나는 더 이상 게이가 아닙니다>라는 탈동성애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였다.

그러다가 2016년 4월, 서울 양천구의 요양원으로 입원하였다.

2016년 8월 6일, 갑자기 패혈증세가 심각해지면서 한남동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응급실에 입원하였고, 입원 첫 주에 "주말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예상이 있었지만, 현재까지 중환자실에 입원하면서 퇴원은 불가능하고 현재 상황으로 임종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임종 전 이요나 목사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장례는 이요나 목사가 맡아서 집례하고, 후원금에서 요양비와 장례비를 치르고 남은 돈은 교회 사역하는데 보태달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말을 국민일보가 정리한 것 #, #

편집에 8월 22일자 팩트올 기사와 이요나 목사의 다음 카페 게시글을 참고하였다. #, #

2016년 10월 11일 오전 1시 5분, 투병 중이었던 폐혈증으로 인해 만 76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발인은 10월 13일 오전 10시 이요나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갈보리채플 서울교회장으로 순천향대학병원에서 치뤄졌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 안장되었다.
  1. 지금은 여성 호르몬제가 처방전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전문 의약품으로 분류된다
  2. 쿠바의 오스발도 파레스가 1947년에 만든 곡이다. 이 후 냇킹 콜, 빙크로스비가 불러 유명해졌다
  3. 이태원 (한남동) 이슬람 성원을 지나 더 올라가면 나온다. 쉽게 설명하자면 한남대교 강북 방면으로 건너다보면 왼편으로 언덕에 집들이 촘촘히 모여있고 그 위에 조그마한 교회가 보이는데 그 부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