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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감독대행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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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준환(金準桓 / Jun-hwan Kim) |
생년월일 | 1955년 5월 9일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군산상고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소속팀 | 해태 타이거즈 (1982~1989) |
지도자 | 해태 타이거즈 코치 (1989) 쌍방울 레이더스 1군 수석코치 (1990~1999)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대행 (1999)[1] SK 와이번스 1군 수석코치 (2000) 원광대학교 감독 (2003~ ) |
1987년 한국시리즈 MVP | |||||
김정수 (해태 타이거즈) | → | 김준환(해태 타이거즈) | → | 문희수 (해태 타이거즈) |
1982년 한국프로야구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 ||||
프로야구 출범 | → | 김준환(해태 타이거즈) 양승관(삼미 슈퍼스타즈) 김성관(롯데 자이언츠) | → | 김종모(해태 타이거즈)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박종훈(OB 베어스) |
해태 타이거즈 역대 주장 | ||||
김봉연 (1982~1983) | → | 김준환 (1984) | → | 김일권 (1985) |
쌍방울 레이더스 역대 감독 | ||||
김성근[2] (1996~1999) | → | 김준환 (1999) | → | 팀 해체 |
1 소개
해태 타이거즈의 공포의 KKK 타선을 이끌었던 선수이고, 현재는 원광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는 지도자.
2 선수 시절
1972년 군산상고의 극적인 황금사자기 결승전 대역전극의 주인공 중 한 명이 김준환이었다. 당시 김봉연, 김일권 등과 함께 결승전에서 3점차로 뒤지던 경기를 9회말 4점을 뽑으면서 역전할 때 주역이었다. 바로 우승을 결정짓는 역전 적시타의 주인공이 김준환이었기 때문이다. 고교 시절에는 말썽도 많이 부렸다고 한다. 당시 술먹고 싸우다가 걸려서 혼났다고. 그런데 당시 감독인 최관수씨가 "너희를 잘못 가르쳐서 일어나 일이니, 나를 때려라." 라고 한 말에 정신을 차리고 야구에 전념했다고 한다.[3]
그 뒤 상업은행을 거치면서 실업팀 선수로서 활약하다가 해태 타이거즈 창단 당시에 창단 멤버로 합류했다. 원래 포지션은 2루수였지만, 그 시점에서는 외야수로 전향한 상태였다. 그러나 수비 위치와 상관없이 이미 타격에 있어서는 궤도에 오른 선수였다. 초기 해태의 K포 라인 (김성한-김봉연-김준환-김종모)의 한 축이었다. 1982년 프로 원년시즌 그는 김봉연에 이어 백인천과 더불어 홈런 공동 2위에 오른다. 나머지 시즌은 성적 자체는 아주 빼어난 그것까지는 아니었다. 1985년을 제외하면 다소 평범한 수준.
특히 1987년은 완전히 실패한 시즌이었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중병으로 간호를 하면서 시즌을 치르다 보니 결국 타율 0.204로 최악의 커리어를 기록했다. 당시 33세였기 때문에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던 시즌. 그러나 이 해 한국시리즈에서 3차전과 4차전에서 잇따라 역전 홈런을 쳐내면서 맹활약. 그 해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다. 그 뒤 2년 정도 선수 생활을 더 하다가, 고향인 전북에 생기는 쌍방울 레이더스에 합류한다.[4] 선수로서 뛴 것은 아니고, 플레잉코치로 첫 해 전지훈련에 합류했다가 그 뒤 그대로 코치로 남게 된다.
3 지도자 시절
새롭게 창단한 고향 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주로 타격코치를 담당하면서 팀에 계속 있게 되었다. 워낙 프런트와 코치진, 코치진 내부의 갈등이 심해 자주 코치진이 바뀌는 쌍방울이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팀에 꾸준히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 체제 아래에서 수석코치까지 오르게 되었다.
1999 시즌 이미 주전 선수를 다 팔아먹은 쌍방울 수뇌부는 자존심이라고 성적 부진의 책임을 물어 김성근 감독을 중도 해임하고 감독 대행으로 김준환을 앉혔다. 그러나 천하의 김성근 감독도 어쩔 수 없었던 팀을 그가 바꿀 수 없는 노릇이었다. 11승 38패를 기록했으며 해도 해도 안 되는 전력으로 분투하며 승과 패를 반복하지만 결국 시즌 말기 전력이 완전히 동이 남으로써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두번째 최다 연패인 17연패로 내몰렸다. 그나마 시즌 마지막 경기는 승리함으로써 18연패는 피하고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시즌 후, 감독으로 정식 임명된다. 그러나 팀은 2000년 2월, 해체의 비운을 맞고, 그 해 3월 3일 쌍방울의 선수들을 가지고 만든 SK 와이번스가 탄생한다. 이 때 감독으로 임명되었다면, 정식으로 게임을 치뤘겠지만 신임 감독에는 강병철이 임명되고, 그는 수석코치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1년 뒤에 SK가 쌍방울의 색을 지우기 위해 대거 선수들을 방출하고, 코치진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그도 짤린다. 그래서 한국프로야구 감독 중에 유일하게 정식으로 게임을 치루지 못한 감독이 되었다. 안습. 그래도 강병철 감독이 시드니 올림픽 코치진에 선임되어 준비하는 과정에서 잠시 감독 대행을 몇 경기 동안 맡기도 했다.
2000년도 sk는 44승 3무 86패에 역대 최다 피홈런인 195 피홈런을 찍었다. 물론 쌍방울의 전력을 사실상 그대로 계승한 후 신생팀에 걸맞는 지원만 어느 정도 받은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저조하지만 백골퍼가 지휘하던 02,03 롯데에비하면 아주 준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