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1962)

20091104135804430.jpg

KIA 타이거즈 No.86
김정수(金正洙 / Jung-soo Kim)
생년월일1962년 7월 24일
출신지전라남도 화순군
학력광주남초-전남중-진흥고-연세대
포지션투수
투타좌투우타
프로입단1986년 해태 타이거즈 1차 지명
소속팀해태 타이거즈 (1986~1999)
SK 와이번스 (2000)
한화 이글스 (2001~2003)
SK 와이번스 (2003)
지도자 경력한화 이글스 투수코치(2004~2005)
KIA 타이거즈 투수코치(2005~2007, 2009~2011)
KIA 타이거즈 운영팀 전력분석원(2012)
KIA 타이거즈 투수코치 (2013~2016)
KIA 타이거즈 2군 재활코치 (2017~)
1986년 한국시리즈 MVP
한국시리즈 무산[1]김정수(해태 타이거즈)김준환(해태 타이거즈)

1 소개

가을까치[2]

해태 타이거즈,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의 투수이자 現 KIA 타이거즈의 투수코치.

정규 시즌 통산 18시즌 92승 77패 34세이브로 뛰어난 성적을 보여 주었고, 특히 한국시리즈에서 7승 3패 1세이브의 기록으로 KS 최다승 기록 & 최다 경기 등판 기록을 보유해 해태 타이거즈의 불멸의 기록 V9을 가능하게 한 주인공으로 인정받는 선수. 가을야구에서 선동열을 능가하는 활약을 한 것과 평소 까치발같은 피칭 동작 때문에 '가을 까치'란 별명을 갖고 있다. KBO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를 무려 8개나 갖고 있어 현재까지 최다 우승반지 보유자이다.[3]

전라남도 화순의 광부촌 출신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훗날 중·진흥고 입학 및 연세대 입학 당시에도 스카우트 경쟁을 이용하여 몸값을 올려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광주로 이사간 후 4학년 때에 야구부에 입단하면서 오른손잡이인데도 왼손으로 공을 던지는 '좌투우타' 스타일이 되었다. 마라톤 선수도 능가할 정도의 폐활량과 몸의 유연성이 장점으로 호리한 몸매로 휘청거리듯 피칭한다고 하여 처음의 별명은 '낙지'. 그 덕인지 이상윤이 은퇴한 후 무려 10년간 해태 투수진의 최연장자였고, 선동열이 떠난 후에는 투수진의 최고참으로 96~97의 우승을 이끌었다.[4]

왼손 파이어볼러로서는 파천황격인 선수. 덕분에 많은 왼손 파이어볼러 후배들이 등번호 47번을 선호하는 경향이 생겼다. 대표적인 선수가 이상훈[5], 권혁, 나성범[6].

2 선수 생활

2.1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991219000012364.jpg
(출처 : 포토로)

정통파가 아닌 쓰리쿼터에 가까운 스타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당시로선 보기 드문 좌완 강속구 투수였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나쁜 제구력을 가져 볼넷몸에 맞는 공을 많이 내주었다. 그러나 '강철심장'을 가진 담력 센 투수로서의 특징이 KBO 한국시리즈에서는 큰 빛을 발하였다.이혜천 + 유원상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 당시, 우승의 주역이 될 거라고 많은 이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선동열이 투런 및 밀어내기로 3실점씩이나 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강판된 후 계투로 올라와 2이닝 4삼진 2볼넷 1안타로 틀어막고 승리 투수가 되었다. 그 다음 3차전에서도 기존의 해태 에이스 이상윤이 1이닝을 못 넘기고 난타당하는 등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등판하여 5이닝 2실점으로 틀어막고 구원승, 5차전에는 선발로 등판하여 당시 상대 팀 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였던 김시진과의 맞대결에서 5이닝 2실점으로 판정승을 거두며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짓고 신인 최초로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였다. 이후에도 한국시리즈에서 맹활약을 펼쳐 한국시리즈 최다승 기록을 보유. 정규 시즌에서는 그렇게 두드러지는 투수가 아니었으나, 한국시리즈만 되면 펄펄 난 특이한 케이스로,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쁜 제구력 덕이었다고도 한다.[7] 하지만 김정수가 가을의 사나이가 된 가장 큰 원인은 부상 때문이다. 데뷔 초창기에는 매년 시즌 중에 부상을 당한 덕분에[8] 정규시즌 중에는 크게 활약을 하지 못하다가[9] 가을쯤 되면 부상이 완치가 되고 비로소 제 컨디션을 찾는 패턴을 반복하다보니 정규시즌의 성적에 비해서 한국시리즈의 성적이 특출나게 좋아보이는 효과를 가져왔고 이 때문에 여름까지는 안 보이다가 가을만 되면 돌아와서 맹활약하는 가을까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타격 기계"로 유명한 故 장효조 선수에게 꽤 강한 편이었다.

1991년에는 정규시즌 중 빈볼을 던져 퇴장당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은 7월 14일 대구 원정경기에서 삼성이 좌투수용 오더와 우투수용 오더를 준비해 놓고 배대웅 코치가 해태 선발투수로 선동열이 등판한다는 사실을 슬쩍 확인한 후 우투수용 오더를 제출하려다 해태 김봉연 코치에게 들켜 난리가 났는데 이 경기에서 선동열이 난타당해 1:7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구원등판 후 류중일이만수에게 연속 빈볼을 던져 퇴장, 이후 10경기 출장정지와 제재금 50만원의 징계를 받았다.

1996년에는 선동열이 일본에 진출하면서 공석이 된 마무리 자리를 어쩔 수 없이 맡았는데 쓰리쿼터에서 더욱 팔 각도를 내린 것이 주효하여 호성적을 기록했다.[10]

2.2 해태 타이거즈를 떠난 이후

그러나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에서는 다소 푸대접을 받았다. 패넌트레이스에서는 별로 활약하지 못한 탓도 있고, 또 해태가 그다지 선수들에게 돈을 후하게 쓰던 팀이 아니었기도 했고..[11][12] 결국 2000년 당시의 FA 선언 때 구단에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여 사인 & 트레이드SK 와이번스로 이적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사령탑이었던 강병철 감독은 젊은 선수들을 선호하는 편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기량 하락과 겹쳐 예전의 기량을 보여 주지 못한 채 2000 시즌 후 방출되어 한화 이글스로 옮겨 갔는데 당시 사령탑인 이광환 감독은 김정수 등의 베테랑 선수들을 등용하는 편이었다.

그 결과 이적 2년 째인 2002년까지는 2년 연속 10홀드 이상을 기록하며 좌타자 전문 원 포인트 릴리프로 좋은 활약을 했고 이 과정에서 이상열은 2001년 시즌 중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2002년 시즌 후 젊은 선수들을 선호하는 유승안 감독이 부임하면서 설 자리를 잃은 채 2003년 시즌 중 현금 트레이드SK 와이번스로 돌아와 8홀드의 성적을 거두었다.

정규 시즌 후, 이대로 은퇴하나 싶었지만 2003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만 41세 2개월 23일의 나이로 구원 등판하며 KBO 한국시리즈 최고령 출장기록을 세웠다. 다만, 4차전 구원등판 상황에서 첫 타자인 전준호의 머리를 맞추고 칼같이 퇴장당한 것은 옥에 티로 남았다. 빈볼은 아니었지만 그 나이까지 여전했던 제구력 불안 때문에(…) '96 최해식에 이어 '통산 2번째 KBO 한국시리즈 퇴장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마지막 시즌에 출장한 한국시리즈에서 소속팀 SK가 준우승에 그치면서 최고령 우승선수는 되지 못했지만 당시 시점에서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경기 출장과(31경기, 한국시리즈만 계산했을 시 23경기) 최고령 출장선수(41세 2개월 27일) 기록에 이름을 남기고 은퇴할 수 있었다.[13]

3 지도자 생활

은퇴 후, KIA 타이거즈에서 2005년부터 코치로 재직하였고 스카우트로도 활동하였다. 2010 시즌 데스기모토가 성적부진으로 2군으로 내려가면서 1군으로 콜업, 기존에 이강철 코치가 맡았던 1군 불펜코치를 맡았다.

2011 시즌 이후 전력분석 팀장으로 보직을 옮겨 잠시 지도자 생활을 내려놓았으나, 2013 시즌에 앞서 다카하시 투수코치가 해임되고 이강철 투수코치가 넥센 히어로즈의 수석코치로 이동하여 투수코치 자리에 공석이 생기면서 다시 2군 투수코치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2013년 8월 17일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1군으로 올라왔다.

2014 시즌 KIA 마운드는 프로야구 역사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무너졌다. 저 수치는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의 팀 평균자책점보다 안 좋은 최악의 수치. 타고투저를 고려하더라도 투수코치로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그의 보직이 3군 코치로 변경되기 직전 시점인 6월 10일 KIA의 팀 평균자책점은 6.16이었다.

끝내 1군 메인 투수코치 자리를 이대진에게 넘기고 3군으로 내려갔으며, 대타로 불펜코치로는 홍우태가 올라왔다. 팬들 사이에서는 철밥통이라며 반응이 나쁘다.

4 역대 성적

역대기록
년도소속팀경기수이닝 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86해태 타이거즈41
(3위)
125⅔965
(5위)
02.65939392
19872380⅓67004.37596178
19881154⅓32002.48452423
198995422002.67472639
199026104⅓65002.93846950
19912288⅔63202.54593752
199233165⅓148103.1614498126
199330127⅔108102.751027096
199428141910003.3812058126
199526108⅔711003.89904994
199640766318
(4위)
02.01434097
19974180⅔53404.02714179
19983739⅓10003.43261836
19994835⅓41104.58301843
년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2000SK 와이번스503114037.55401723
년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2001한화 이글스5243⅔22110
(3위)
3.71362445
2002472512112
(3위)
3.24211229
년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2003SK 와이번스361300084.151893
통 산6001394927734333.2811287641131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김정수(투수)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당시 한국시리즈는 전반기 우승팀과 후반기 우승팀이 대결을 가졌으나, 1985년에는 삼성이 전후반기 통합 우승을 하며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다.
  2. 정규시즌은 그저 그런 선수지만 가을야구에는 말 그대로 에이스가된다.
  3. 선수 중에서는.. 감독까지 범위를 넓힌다면 당연히 10회 우승의 김응용.
  4. 선동열이 실제 생년월일이 1962년 10월생이라고 쳐도 생일로 따지면 그가 연장자.
  5. 다만 이상훈은 톰 글래빈을 존경해서 달았다고 밝혔다.
  6. 프로 데뷔 전까지는 투수였다. 2015 플레이오프에서도 1이닝이지만 투수로 나왔을 정도. 게다가 나성범은 진흥고-연세대로 김정수의 직속 후배다.
  7. 단기전 승부에서 어디로 공이 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타자들이 쉽게 현혹되었다고 한다.
  8. 실제로 87~89년의 정규시즌 성적은 아주 초라하다.
  9. 그렇다고 통산 출장수가 적은 건 아니다. 2015년 현재 통산 9위.
  10. 여기에는 다른 이야기가 하나 있다. 원래 선동열의 뒤를 이를 차기 마무리 후보는 임창용이 유력했다. 그러나 선동열은 임창용을 거르고 김정수를 직접 지목했고, 그로인해 김정수가 마무리 보직을 맡게 됐다. 꼭 이것때문은 아니지만 임창용과 선동열의 반목을 얘기할때 꼭 나오는 에피소드다.
  11. 선동열도 연봉이 동결된 적이 있을 정도... 하지만 그 이유는 1987년에 평균자책점 1위를 했지만 의외로 부진했기 때문이다(원래는 삭감당할뻔하지만 해태 특유의 햇빛효과로 동결된다)
  12. 김응용 감독이 좌완을 좋아했다고 하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정작 김응용 감독은 끝끝내 제구가 교정되지 않은 김정수를 많이 깠다. 심지어는 "발로 던져도 내가 더 잘 던지겠다"고까지.. 결정적으로, 김응용 감독이 좋아하는 타입은 그냥 좌완이 아니라 과거 강영식같은 덩치 좋은 좌완이었다.(그래서 한화에 부임하면서 송창현을 데리고 온 것.) 타자로 범위를 넓히면 양준혁.
  13. 포스트시즌만 계산하면 한화 송진우가 2007년 플레이오프 등판으로(만 41세 7개월 28일) 기록을 경신한 후 LG 류택현이 2013년 플레이오프에 등판하면서(만 41세 11개월 26일)로 다시 경신되었다. 한국시리즈 최다경기 출장 기록 또한 2014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배영수가 타이를 이루었기 때문에 경신이 유력하다. 이제 김정수에게 남은 포스트 시즌 관련 타이틀은 한국시리즈 최고령 등판 기록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