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수

이름문희수(文熙秀 / Moon-hei Soo)
생년월일1965년 3월 15일
출신지광주광역시
출신학교광주서석초-광주충장중-광주일고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4년 해태 타이거즈 1차 지명
소속팀해태 타이거즈(1984~1995)
지도자 경력해태 타이거즈 투수코치(1998~2001)
동강대학교 감독(2004~2015)
고창영선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16~)
1988년 한국시리즈 MVP
김준환 (해태 타이거즈)문희수(해태 타이거즈)박철우 (해태 타이거즈)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6번(1990~1995)
이상윤(1982~1989)문희수(1990~1995)김종국(1996~2010)

1 소개

해태 타이거즈의 야구선수이자 前 동강대학 야구부 감독. 현역시절 별명은 무등산 꽃돼지.

광주일고 3학년생이었던 1983년, 방어율 제로와 3할대 중반 타율을 기록하면서 광주일고의 시즌 3관왕[1]을 이끌었던 투타 만능의 에이스였고, 1984년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아 프로에 뛰어들었다. 그 때까지 2차례 있었던 신인지명에서 고3 선수가 단 1명도 호명되지 못했고[2], 이후 해태의 역사에서도 고졸이 1차 지명을 받은 경우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 점을 생각하면 그가 야구 게임 유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허접한 투수가 결코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담으로 원래는 후보선수 두 명과 함께 동국대학교에 진학하기로 약속이 되었는데, 문희수가 프로로 돌아서는 바람에 친구 두 명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고, 이 때문에 학부모들의 원성을 들은 광주일고 김대권 감독은 사표를 썼다고 한다.(...)

2 선수 시절

프로에서의 성적은 입단 당시의 기대보다 좋지 못했다. 10승 이상을 거둔 시즌은 1985년, 1992년 두 번에 불과했고[3], 1989년부터는 무릎 부상과 급속한 체중 증가로 인해 재활병동에서 반년을 보내다가 가을에 잠깐 얼굴을 보이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그래도 KBO 한국시리즈에서는 가을까치 김정수와 함께 필살의 히든카드로 활약하면서 1988년 한국시리즈 MVP를 거머쥐었고,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삼성의 에이스 박충식과의 투수전에서 대등하게 맞서는 등 인상깊은 모습을 많이 남겼다. 다만 1993년의 경우는 3회에 강판되고 선동열 VS 박충식 구도가 성립됐다.

'3차전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이것은 그가 1987, 1988, 1989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연달아 승리투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그것을 믿고 김응용 감독이 페넌트레이스에서 부진했던 문희수를 선발로 넣었지만 결과는..

참고로 한국 시리즈 방어율이 0.68 이라고 한다. ㅎㄷㄷ

KBO 리그 통산 12시즌 241경기 943.1이닝 59승 49패 13세이브 17완투 5완봉 평균자책점 3.69를 기록하였다.

3 은퇴 후

1995년 은퇴한 뒤 1996년부터 2003년까지 해태와 그 후신 KIA의 투수코치를 맡았다가 2004년부터 동강대학의 야구부의 감독을 맡고 있다. 동강대 야구부는 통산 8년 동안 프로야구 드래프트에서 2013년 드래프트에서 KIA 타이거즈에 7라운드 지명으로 박준표가 지명되기 전까지 단 한 명도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지 못했을 정도로 약팀이지만[4], 그래도 계속 감독직을 맡는 것을 보면 학교재단 측이나 학부모들의 신뢰가 상당한 것 같다. 동강대가 2년제 대학이라 신경을 안 쓰는 걸지도..

2015년을 끝으로 동강대학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후임 동강대 감독은 홍현우. 이후 새로 창단한 고창영선고등학교 야구부 수석코치로 선임되었다.

2016년 고창영선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승진하였다.

4 여담

운동선수로는 보기 드문 진보신당 당원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보신당 당원들은 당원 체육대회에서 야구를 하면 선출 사기 캐릭터 문희수가 속한 광주시당에게 질게 뻔하니 당원 체육대회에서 야구 종목을 빼자고 한다.

5 가족

그의 아들 문지훈은 광주일고 야구부에서 투수로 활동했으며, 2014년 두산 베어스의 2차 10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고려대학교에 입학했다.
  1. 대통령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2. 따라서 이 때 지명된 문희수 외에 고졸 출신인 정성룡(삼성), 조용철(롯데) 등 3명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고졸 신인이었다.
  3. 그나마도 1992년은 5점대 방어율에 145이닝을 던지는데 그친, 다분히 운이 따른 10승이었다.(…)
  4. 2011년까지 고율, 차정구, 전준호 등 3명이 신고선수로 프로에 입단했다.(그 중 차정구 현 KBO 심판은 차영화 코치의 아들이다.) 2011년 삼성에 입단한 이경록도 이후 대불대(현 세한대)에 편입했지만 원래 동강대에 입학했었다. 여담으로 이 4명 다 입단한 팀이 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