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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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년이시다.

이름정동진
생년월일1946년 4월 23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대구광역시
포지션포수
투타우투우타
출신학교대구상고
소속팀제일은행 - 해병대 - 제일은행
감독대구상고 (1977~1978)
삼성 라이온즈(1989~1990)
태평양 돌핀스 (1992~1995)
삼성 라이온즈 역대 감독
박영길
(1987~1988)
정동진
(1989~1990)
김성근
(1991~1992)
태평양 돌핀스 역대 감독
박영길
(1991)
정동진
(1992~1995)
김재박
(1996~2006)

1 소개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및 감독.

2 선수 시절

대구상고 출신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약 10여년 간 국가대표 포수로 명성을 날렸다. 인사이드 워크를 중시했던 수비형 포수로 경기 전 선발로 등판하는 투수에게 상대팀 타자들의 장·단점에 대해 꼼꼼히 메모해둔 것을 전해줬다고 한다. 국가대표 포수 계보에 반드시 그 이름이 들어가는 선수.

3 지도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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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감독레옹 까메오 출연 시절

그 뒤 대구상고 야구부 감독을 잠깐 지냈지만, 1978년 이후 약 7년 간 제일은행의 평범한 은행원으로 지낸다. 그러다가 삼성 라이온즈에서 KBO 리그 출범부터 꾸준히 영입을 타진한 끝에, 1984년 삼성 라이온즈의 타격코치로 합류하게 된다. 현역 시절 대구를 대표하던 스타 포수였던지라, 당시 대구 출신 감독이 없었던 삼성이 선수들의 갈등[1]을 중재하고, 포수들의 기량 발전을 위해 영입했다. 1987년부터는 수석코치를 맡았으며 특유의 인화력과 지도력으로 선수들의 신임을 얻었고, 그 결과 김영덕 감독이 물러난 뒤 후임 감독으로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당시에는 선배인 박영길 타격코치에게 양보했다.

3.1 삼성 감독시절 (1989~1990년)

그러다가 1988 시즌 후 박영길 감독이 해임되자[2] 1989년에 후임으로 삼성의 감독에 취임한다. 그 와중에 1988 시즌 후 그룹 차원의 개입으로 장효조, 김시진 등이 롯데 자이언츠트레이드되었고, 반대로 최동원김용철 등이 삼성에 오는 변화가 일어난다.[3] 어수선한 팀 분위기 속에 일단 1989년 시즌에서는 4위로 끝내고, PO 연패를 끊었다. 팀이 도움이 되리라 예상했던 최동원은 부상과 트레이드에 대한 거부 문제로 1989년 8월이 넘어 합류하고, 결국 1990년 시즌 후 조기 은퇴로 이르게 된다.

이듬해인 1990년에는 정규 시즌 4위로 출발해 상위권 팀들을 잇달아 연파하면서 한국시리즈에까지 오른다. 그동안 매번 한국시리즈 우승을 좌절하게 했던 해태 타이거즈마저 3연승으로 격파한 것이 인상적이었지만, 정작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는 LG 트윈스에게 4전 4패로 스윕당해 바로 감독에서 해임된다.[4] 사유는 재계 라이벌인 LG에게 무기력하게 4패로 물러났다는 것. 그 뒤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3.2 태평양 감독 시절 (1992~1995년)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루키-싱글-더블-트리플을 주욱 거치면서 코치 연수를 하면서 선진야구를 체험했다. 미국 유학 도중 1992년 박영길 감독의 후임으로 태평양 돌핀스의 사령탑에 올랐다. 태평양 감독 부임 2년차인 1993년에는 롯데에서 은퇴한 김시진을 투수코치로 불러들였다. 부상에 시달리던 투수들을 기다려 줬고, 또 구단에서도 창단 이래 매년 감독을 바꾸는 진통이 있었던 점을 감안해 정동진 감독에게 계약 기간 3년을 보장해 줬다. 이런 구단 방침으로 부임 첫 해 1992년은 6위, 이듬해인 1993년은 꼴찌였지만 계속 팀을 이끌었다.[5]

그리하여 대망의 1994년에 부상에서 돌아온 투수들이 제 몫을 다하면서 돌풍을 일으켜 인천 연고 프로야구 팀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당시 상대는 이광환 감독이 이끌던 신바람 야구 열풍의 LG 트윈스였다. 또 만났다. 결국 신인 3를 앞세운 강팀 LG 트윈스에 4전 4패로 스윕당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그 덕분에 정동진 감독의 한국시리즈 전적은 모두 LG를 상대하여 승리 없이 8전 8패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김성근 시절에 달성한 3위가 최고 성적이었던 태평양으로서 정동진이 이루어낸 한국시리즈 진출은 바야흐로 창단 후 역대 최고 성적이었다.

1994년 한국시리즈 진출의 공로로 태평양과 재계약했지만 1995 시즌은 팀이 현대그룹으로 매각되던 시절이라 분위기도 어수선했고, 주전 투수들의 이탈과 기존의 타선을 이끌던 선수들의 부진이 겹치면서 전년도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해 정규 시즌을 7위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현대 유니콘스의 창단과 함께 계약 기간 1년을 남긴 시점에서 수석코치 김재박에게 감독직을 넘기며 자연히 물러났다.

다만, 그가 인내심을 가지고 재활을 시켜가면서 기다려 준 인천 지역 내 우수한 투수들은 그 뒤 현대 유니콘스의 전성시대를 이끈 주역이 된다. 그 점에서 현대 유니콘스 전성기의 토대를 닦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4 이후

1996년 SBS 야구해설위원, 1997년 일구회 회장을 거쳐서 KBO 경기감독관, 규칙위원장, 유소년 육성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5 기타

여담으로 S본부 해설위원 시절 낫아웃 오심 사건으로 유명한 1997년 8월 23일 쌍방울 레이더스삼성 라이온즈의 대구 연속경기 1차전 해설을 맡았다.

구타가 일상화되었던 권위주의가 판치던 시절 감독으로써는 보기 드문 덕장 스타일이었다. 대구상고 감독 시절 훈련에 무단불참했던 선수들에게 벌을 주는 대신 "너희들을 잘 통솔하지 못한 내 책임"이라고 말하며 얼차려 자세를 한 뒤 선수들에게 자신의 엉덩이를 10대씩 때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선수 중 하나인 이만수가 감독의 불호령을 견디다 못해 먼저 나서서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때리는(!!) 일이 생겼고, 이게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의 대구상고 동문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서[6]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2014년 SPOtv에서 제작한 KBO 특별기획 야구를 말하다 - 정동진 편
무조건 정신력, 참고 던져라 식의 마인드가 당연시 되던 시대에 부상 투수들은 미국에 보내서 수술을 시키고 장기간 체계적으로 재활시키는 등 선진적인 선수관리, 재활시스템을 최초로 선보인 감독이다.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배워온 이런 선진적인 모습 때문인지, 류중일 감독이 자신이 가장 크게 야구를 배운 분으로 꼽기도 했다.

정동진 감독의 선진적인 야구관을 요약한 글 정동진 야구
  1. 삼성의 경우도 심한 편은 아니지만 대구상고(현 상원고) 출신과 경북고 출신 간의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2.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에게 스윕당한 박영길 감독은 PO에서 10연패를 당했다는 이유로 삼성그룹 기조실의 감사를 받았다고. 예나 지금이나 삼성은 ㅎㄷㄷ하다.
  3. 이 트레이드는 최동원이 선수협 창설을 시도한 것에 대한 KBO구단들의 보복성 조치였다.
  4. 그리고 10년 뒤인 2000년에는 김용희 감독이 현대 유니콘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4전 4패로 스윕당해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다시 10년 뒤인 2010년에는 선동열 감독이 SK 와이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4전 4패로 스윕당한 후 그 해 말 류중일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10년 주기설의 시조
  5. 1993년 꼴지가 되고나서 경질직전까지 갔다가, 당시 사장이 삼미-청보-태평양 통틀어 계약기간 채운감독이 아예 없다는 사실에 기겁해서 이 전통(?)을 깨겠다고 경질을 없던일로 처리했다. 그리고 1994년 정동진 감독은 한국시리즈 진출로 사장에게 보답했다.
  6. 정동진은 감독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만수의 고등학교 12년 선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