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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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알바 뛰던 시절. 그리고 10승을 했다 본격 알바가 실적 1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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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스승인 김응용 감독과 함께.

이름김성한(金城漢 / Sung-han Kim)
생년월일1958년 5월 18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전라북도 군산시
본관안동 김씨[1]
학력군산중앙초-군산중-군산상고-동국대학교
포지션1루수
2루수, 3루수, 유격수 (1982)[2]
투수 (1982~1983, 1985~1986)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해태 타이거즈 (1982~1995)
신체178cm, 85kg
지도자 경력해태 타이거즈 수석코치 (1997~2000)
해태/KIA 타이거즈 감독 (2000~2004.7)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4.8~2005)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2009)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 (2013~2014.5.14.)
수상 기록
1985년 한국프로야구 MVP
1988년 한국프로야구 MVP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1년
한국프로야구 1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1992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 미스터올스타
1985, 1988, 1989년 한국프로야구 홈런왕
1985, 1988년 한국프로야구 최다 안타상
1982, 1988년 한국프로야구 타점왕
1989년 한국프로야구 최다 득점상[3]
1985, 1988, 1989년 한국프로야구 최고 장타율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1번
창단 멤버김성한(1982~1995)김상진(1996~1999)
해태/KIA 타이거즈 역대 감독
김응용[4]
(1983~2000)
김성한[5]
(2001~2004)
유남호[6]
(2005)

1 개요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멤버로, 은퇴할 때까지 해태에서만 선수생활을 했던 타이거즈의 레전드. 선수 시절 등번호는 11번. 은퇴 후에는 코치로 활동하다가 김응용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로 자리를 옮기며 감독직을 이어받기도 했다.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감독이자 KIA 타이거즈의 첫 감독.

참고로 별명은 타격폼을 본딴 '오리궁둥이', '오궁'

KBO 최초의 30홈런을 달성한 인물, 그보다 더 난공불락인게 타자로써 한시즌에 30홈런과 투수로써 한시즌에 10승을 달성한 야구천재[7]

프로야구 출범 이후 80년대 초~중반 6년간 다승왕투수 승리수는 홈런왕의 홈런수보다 많은갯수를 기록했는데 그것을 깨버린 최초의 인물

2 선수 시절

80년대 해태 타이거즈의 중심 타자이자 최고 스타..라고 하는 표현이 부족한 야구 천재. [8]

해태 타이거즈 레전드 중 한 명으로 해태 초창기를 이끈 개국공신. 해태 타이거즈의 선수가 부족했던 탓에 창단 초기에는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였다. KBO 리그에서 투타겸업을 하면서, 양쪽에서 모두 좋은 성적을 낸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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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마운드에서 투구하는 모습.
빈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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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전설의 오리궁둥이 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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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도 여전한 오리궁뎅이 타법 크다.뭐가?.오리궁둥이가

투수로서 4시즌 동안 통산 방어율 3.02를 기록, 총 167이닝을 던졌고 1982년에는 무려 106.1이닝을 소화했다. 1982년에 타자로서는 타자로 타율 0.305, 13홈런, 69타점, 10도루, 투수로서는 규정이닝을 넘기면서[9] 10승(5패 1세이브), 방어율 2.88을 기록하며 프로데뷔.[10]

32년 뒤 일본에도 후계자가 나타난듯 하다. 아 그친구는 투수 본업에 가끔 타자 알바를 뛰고있지. 심지어 등번호도 같다.

엉덩이를 뒤로 내민 상태로 타격을 하는 특이한 타격폼으로 인해 오리궁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타격폼이 정형화되지 않아 각종 기상천외한 타격폼이 넘쳐났던 당시 기준으로 봐도 이상한 타격폼이었다. 게다가 타점왕까지 탔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한지? 현재까지 본인 한 명밖에 없는 10승 - 10홈런 - 10도루 - 3할 타율 - 타점왕이라는 진기록 보유자.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10-10-10클럽을 개설하고 현재 그 유일한 회원이며 아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승환도 10-10-10 클럽인데 이쪽은 승리, 홀드, 세이브.

이후 타선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85년까지는 투수로 알바를 뛰었다. 1983년에는 딱 1승만 올렸지만 그 1승이 해태 우승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중심 타순을 이끌어 해태를 7번이나 우승시키는 데 큰 공헌을 쌓았다. 홈런왕 세 번(85, 88, 89)[11], 타점왕 두 번(82, 88), 최다안타 두 번(85, 88), MVP 두 번(85, 88), 올스타전 MVP 한 번(92),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20-20 클럽[12]등등...특히 홈런왕과 타점왕은 타이거즈 선수들은 그 이후로는 소식이 없다가 2009년에 와서야, 김상현이 홈런왕과 타점왕에 올랐다. 30-30을 최초 달성한 선수는 1996년의 박재홍이지만 한 시즌 30홈런과 한 시즌 30도루를 달성한 최초의 선수는 둘 다 김성한이다. 그것도 80년대에..

백스윙을 거의 생략한 간결한 타격폼 덕분에 특히 속구에 강해서 프로에서 최동원한테 가장 많은 안타를 얻어낸 선수였으며,[13] 제 1회 한일 슈퍼게임에서 일방적으로 일본 올스타한테 발리던 와중에 이라부 히데키의 직구를 받아쳐 도쿄돔 상단으로 넘겨서 한국 야구의 자존심을 그나마 세웠던 적도 있다. 게다가 4차전에서도 홈런. 그래서 "슈퍼게임의 사나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다. 또한 1993년에 열린 한일 천선게임(주니치와 롯데 마린스의 방한 시험경기)때도 잠실구장에서 이라부에게 홈런을 뺏은 바 있다.

1991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노쇠하기 시작했다. 1991년 3할에 가까운 타율(.294)과 홈런리그 3위(23개)를 기록하던 방망이는 1992년 15홈런으로 꺾이더니[14] 1993년 이후 다시는 두자릿수 홈런을 치지 못했다. 은퇴한 년도인 95년에도 잠실에서 홈런을 기록했을 정도로 펀치력은 그대로였으나 스윙스피드가 따라주지 못한 것이다. 결국 김성한은 1995년 은퇴를 하게 된다. 그의 은퇴식에는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이만수가 꽃다발을 건내주는 훈훈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가 남긴 통산기록은 .286 1389안타 207홈런 781타점 762득점 247 2루타 2285루타 143도루였다. 1389안타 762득점 247 2루타 2285루타는 은퇴당시에도 프로통산 최고 기록이었으며 이만수가 은퇴할때까지 이기록은 넘지 못하였다. 이만수가 포수였다는 점때문에 커리어 대부분을 1루수로 보낸 김성한이 폄하될 법 하지만 통산 15승을 거둔 투수라는 점에서 그 역시 야구천재라는 사실에 거리낌이 없다. 그리고 둘다 원년부터 뛰었으면서 한국프로야구를 업그레이드시킨 영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3 지도자 시절

  • 감독 성적
역대 전적
연도소속팀경기정규 시즌최종순위
2001KIA 타이거즈133606855위5위
2002133785142위3위[15]
2003133785052위3위[16]
200488414345위[17]
총계48725721218

3.1 해태 타이거즈 코치 시절

은퇴후 1996년은 연수를 갔다와 1997년부터 타격코치가 되었다. 이 시기에 장성호, 홍세완, 이호준 등을 키워냈다.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지?

1997년 한국시리즈 영상을 보면 이종범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장면이 있는 걸로 보아, 선수시절 호타준족이었던지라 수석코치도 하면서 1루코치도 겸했던 것 같다.

3.2 해태 타이거즈 감독 시절

2000시즌 종료후 김응용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로 떠나자[18] 2001년 해태의 마지막 감독을 맡게 된다. 당시 해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던 비밀번호 5-7-6을 찍던, 다 무너져가던 팀이었다. 홍현우마저 엘지로 갔다. 말 그대로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현우도 없던...시기[19][20]

하지만 남은 선수들로 기적같은 투혼을 발휘한다. 사실 5월까지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창단의사를 뚜렷히 밝히지 못하는 상태였다. 5월 하순까지 22승 1무 19패로 4위를 마크하며 IMF는 개나 줘붜리라며 타격의 힘으로 승승장구했다. 문제는 투수진, 점점 힘이 떨어졌다. 6월까지 3위 두산 베어스와 더불어 승승장구하며 3, 4위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팀은 6월말부터 힘이 떨어지면서 7월에는 그야말로 힘없는 팀이 돼버린다. 팀은 7월 29일에 마지막 게임을 치뤘지만 마지막 승리는 7월25일 사직구장 대 롯데전이며 해태의 마지막 승리투수, 마지막 완투승 투수이자 마지막 완봉승투수도 그때 완봉승을 거둔 최상덕이며 팀의 마지막 승리타점도 그때 2점홈런을 쳐낸 해태의 루이스 산토스이다. 마지막경기는 공교롭게도 당시 김응용감독이 이끌던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였다. 그 경기는 6:8로 졌다.

3.3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팀이 KIA 자동차 그룹으로 인수되자 KIA의 첫 번째 감독으로 임명된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페넌트레이스에서 해태시절에도 달성하지 못했던 2년 연속 승률 6할[21]을 달성했다. KIA 감독 시절 김성한 감독의 야구 스타일은 일명 '감의 야구'라고 불리며 데이터에 따른 기계적인 선수 운용 대신 선수의 컨디션 및 상황에 따라 감독의 직감으로 교체카드를 쓰는 스타일. 그리고 대체로 강공 위주로 공격을 지시하고, 투수를 가능한한 최대한 믿고 오래 끄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 잘 나가던 감독들인 짜내기 야구 및 지키는 야구의 대가 김재박, 벌떼계투진으로 대표되는 상대 맞춤형 전술의 김성근 감독, 데이터야구의 전도사 조범현 감독의 스타일과는 극단적으로 반대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그놈의 강공 위주 공격 때문에 일명 '짜내는 야구'를 잘 시도하지 않다보니[22] 이길 때는 화끈한 타격의 힘으로 크게 이겨주나, 질 때는 강공 실패가 반복되며 결국 수많은 잔루를 남기며 스스로 자멸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단기전에 약했다. 또한, '감의 야구'의 영향으로 당시 기아 타이거즈는 구단 내에서 '정보분석팀'의 영향력이 많이 약했고 이 당시 기아는 정보분석을 통한 확률놀이보다 감독이 관찰한 컨디션이나 감을 중시하다보니 부족한 인원으로 기껏 정보를 구해와도 그 정보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편이었다. 실제로도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조범현 감독 시절의 SK 와이번스에게 현미경 야구를 당하며 스윕으로 털리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정보분석팀의 차이'가 지적되기도 했다.그리고 이미 악명(?)을 떨쳤다시피 선수들을 무지하게 폭행했으며, 정신력을 다잡는다는 이유로 선수들을 국토대장정[23]을 시킨다든지 하는 기행을 벌였다.OMG 승률 6할을 찍을당시엔 성적이 나오니 이거에 대해 별말이 없었지만,성적이 조금씩 떨어지던 2004년에는 바로 이것이 발목을 잡아 김성한 감독의 명줄을 앞당기는 사유가 됐다.물론 당시 정재공 단장하고 사이가 안좋기도 했고.

결국 2002, 2003년 연속으로 플옵에서 털리고, 2004년에는 전년도 2위 팀을 4위로 떨어뜨린 성적부진(?)과 2002시즌중 팀의 2군 포수이던 김지영을 방망이로 구타하여 머리가 찢어지는 불상사를 일으켜 논란을 일으켰고(김성한 구타 사건), 2004년 시즌에는 갑자기 데이터 야구랍시고 트레이드로 데려온 방동민[24]을 계속 올려서 불을 화끈하게 지른 끝에 시즌 도중 중도사퇴했지만 결국 단장과의 알력으로 인해 잘린셈.

참고로 네임드인 검증된 타자인 신동주를 7번에 박아가면서 까지 김경언을 6번타자로 중용했다. 기아에서는 빛을 못봤지만 10년도 넘는 세월이 흐른 후 한화에서 각성했다. 김경언은 김성한에게 감사해야할 듯..

3.4 휴식기

휴식기 들어서 광주CMB에서 KIA 타이거즈 홈 경기 중계를 하는데, 해설을 맡게 되었다. 군산상고 감독 [25] 등을 맡으며 '카리스마'가 넘쳤다는 증언을 듣기도. 이 시기에 그의 제자였던 개씹차 차우찬삼성에 지명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삼성 감독이 팀 후배였던 선동열이어서 가능했다. 그 후 KBO 기술위원으로 재직. 미국 연수를 끝내고 나서는 천하무적 야구단에 자주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기술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고정 확정, 매 경기 해설을 맡기도 했다. 해설 이외에도 연습경기에 참여하는데, 연습경기에 참여하면 매번 삼진아웃을 당한다고 한다. 2009년에는 WBC 대표팀 수석코치로도 참가했다.

참고로 기아의 감독에서 성적부진 명목으로 불명예 퇴진했으나 나름대로 팀 성적은 좋았던 터라[26] 이후 유남호, 서정환 감독 때에도 팬들 사이에서 수없이 김성한 감독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고 그동안 해태-기아를 맡아왔던 빠따질감독들보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조범현 감독이 2008년 팀을 맡고 역시 하위권을 기록하자 선수들이 빠져서 그렇다는 팬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고 역시 김성한 감독을 다시 데려오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결국 조범현 감독이 2009년 팀을 우승으로 이끈 후에야 이는 어느정도 잠잠해졌으나 지금도 팀성적이 다소 부진할 때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떡밥이 바로 김성한 감독 떡밥이다. 본인 역시 인터뷰 등에서 감독 복귀를 꿈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위에서 나오는 폭행 사건이라든지 국토 대장정 병크들을 생각해보면 그의 복귀는 사실상 제로에 수렴한다. 요즘은 광주광역시 상무지구에서 사모님이 운영하시는 하이난(중식당)[27]에서 식당일을 돕고 계신다고...심지어 손님이 많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직접 손님들 차 발레파킹 해주러 오실 정도란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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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상고 3학년 김성한 2011년 군산상고 VS 경남고 30주년 리매치에서.

NC 다이노스KT 위즈가 창단했을때 그 구단들의 감독으로 여러사람들이 거론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김성한 전 감독의 이름은 어디서도 거론되지 않고 있다. 업적이나 공과로 놓고보면 지금 NC 다이노스KT 위즈 감독후보들 중 김성한 전감독보다 훨씬 흠결이 많은[29] 감독후보들이 적지 않음에도 양상문 김성한 전감독이 거론되지 못한다는것에 대해 올드팬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는듯 하다. 김성한 전감독 본인은 강력히 복귀를 열망하고 있지만...해태시절 선수생활을 보냈고 여러가지 강압적으로 비쳐질수 있는 방식등등...본인이 강력하게 변해야 한다는 의지가 수반되어야 할듯하다.

당장 프로감독이 못 된다해도 고교 & 대학팀 등에서 지도자 오퍼가 온다면 현장감각도 다시 살리는 의미에서 수락하는것도 좋을듯하다. 김성한 감독이 강성인건 맞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서 더 크게 비친면도 있고 다 드러난다면 감독할 사람 아무도 없긴하다. 더군다나 군기로는 사상최강급인 해태에서만 선수생활을 보낸 해태 프랜차이즈 스타이다. 그에 따른 야구관정립문제도 있을 터이니 억울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본인이 철저히 변해야한다는 의지표현 역시 필요하기도 할 듯하다. 신생구단 창단소식에도 자신의 이름이 거론조차 안되는건 김성한 전 감독의 책임도 어느 정도는 있으므로.

또한 루이스 안두하를 잘 던지는데도 뜬금없이 강판시켜 그가 짐싸들고 가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사실 원인은 파파이스

2012년 7월경 교원그룹의 상조 브랜드인 '물망초'의 광고에 김용철 전 롯데감독과 함께 출연하여 주목받기도 했다. 광고 슬로건인 "떠나도 남는다 가슴에 남는다"가 김성한 본인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는 터라 짠해지는 느낌이다.

2012년 10월 15일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로 복귀하게 되었다.

3.5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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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이긴 하지만, 적어도 취임 직후 시점에서 한화팬들의 반응은 그런대로 호의적이었다. 이미 해태의 상징 김응룡 감독이 부임한 마당에 해태 출신이라고 거부반응을 보일 이유도 없으며, 김성한이라는 인물 자체도 순수하게 능력만 따진다면 유능한 인물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일지도.[30] 다혈질의 성격이 불안요소라면 불안요소이긴 한데...5년동안 꼴칰야구를 보면서 혈압이 오를대로 오른 한화팬들은 "최소한 실책이나 병살, 주루사 나왔을때 쪼개는 꼴은 안 보겠네" 하면서 은근히 좋게 보는(...) 분위기. 그러나 시즌이 시작되자...

공백기가 좀 길었지만 능력 자체는 검증된 인물이기 때문에 김응용 감독과 함께 많은 기대를 받았다.
이 기사가 나온걸 보면 한화 선수들이 의외로 버티고 있다는걸 보여준다.

2013년 시즌이 시작된 이후, 투수진의 붕괴로 팀이 총체적 난국에 빠지며 김응룡 감독과 함께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그나마 타격 코칭은 괜찮다는 말도 나오긴 했지만, 여기에도 의구심을 보이는 이들도 많다. 특히, 송창식 문제로 대표되는 한화 불펜진의 고질적인 소진 문제에도 불구하고 김응용 감독에게 이렇다할 진언이나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 하나 없이 손 놓고 있는 느낌도 강하다.

2014년, 5월 14일, 4연패(기아전 3연패+삼성에게 패배) 끝에 "감독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며 사임했다. 자진사퇴의 형식이지만, 김응용 감독의 인터뷰에 의하면 김응용 감독과의 트러블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만한 점으로는, 김성한이 수석코치를 맡기 불과 4개월전에 MBC 정보석의 쥬얼리하우스 이종범편의 초대손님으로 등장했을때, 이종범 보고 절대 코치는 하지말라고[31]만류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킬끼리 김응용의 한화 감독행에 맞물려 강제소집(?)되자 어쩔수없이 이종범과 함께 한화로 들어간것으로 보인다.나이나 경력 등을 고려할때 김성한은 결코 코치 정도로 그칠 인물이 아니고[32] 감독 후보군이었는데 김응용 감독에 대한 으리의리로 억지로 한화 수석코치를 맡았었는데[33] 결국 김성한의 인내심과 김응룡에 대한 서운함이 폭발하여 이 지경까지 이른것으로 보인다.[34][35][36].

3.6 다시 야인생활

야인이 다시 되고, 2014년 2월 무렵 음료광고를 하나 찍었다. 그리고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가 되기 전에 했던 광주CMB KIA 타이거즈 홈경기 해설을 다시 맡게 되었다.

선동열 감독이 부진한 성적으로 계약기간이 끝나고 사실상 재계약이 불가능하리라 여겨졌을 때는 새 감독 후보군으로 오르는 듯 했었으나 선동열의 재계약으로 결국 소문으로 끝났다. 그러나 선동열이 2014년 10월 25일에 사퇴하면서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비록 흑역사가 존재했지만 2년연속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은 김성한 감독이 복귀하면 환영할 기아팬들이 많을 듯하다.[37][38] 하지만, 김기태가 부임하는 바람에 복귀는 당분간 요원해졌다.

그리고 상무지구에 차렸던 중국집 '하이난'을 넘겨주고, 나주혁신도시새롭게 '더 하이난'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중국집을 열었다고 한다. 중국집도 하면서, 나주시의 유소년야구와 아마야구 육성에 온 힘을 다하겠다고 한다.

요즘엔 야구칼럼을 쓰는데, 김성한의 눈이라는 타이틀로 엑스포츠뉴스에서 연재를 하고 있다. 상당히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논점으로 글을 풀어나가서 한번 읽어볼 만 하다,

4 기타

  • 참고로 조카가 시각 장애인 가수인 이민석[39]이라고 한다.
  • 1998년 개봉된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 출연하였다. 코치 역으로 출연하여 이 분을 떠오르게 하는 대사를 쳤다. 물론 손발이 오글거리는 발연기를 피하기 힘들었지만, 야구 팬들은 김응룡 감독까지 같이 어색하게 치는 개그를 감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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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빠던 83년 시즌, 타임 요청을 받아주지 않은 심판과 말싸움을 한 짤방이 유명하다. 자세한 스토리는 기사 참조.#
  • 짬뽕에 관한 일화가 있다. 본인의 타격감이 좋지 않다 싶으면 구단 직원을 구장에 일찍 불러서 짬뽕 한 그릇 사주고 배팅볼을 던지게 했고, 코치 시절엔 이호준장성호를 일찍 불러 짬뽕 한 그릇 먹고 훈련시켰던 야구에 열정적이었던 사람이다.
  • 연차가 높던 시절, 해태의 라커룸에는 개인당 의자가 배치된 대신, 평상이 있었는데 신입들은 눈치 보여 앉지도 못하는 평상에 누워 있거나 앉아서 부채를 부쳤다고 한다. 상기 언급한 짬뽕도 베테랑들만이 라커룸에서 시켜먹을 수 있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 타자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1982해태 타이거즈80318.30597
(3위)
17
(5위)
4
(4위)
13
(4위)
69
(1위)
481017.506.340
198396339.327
(3위)
111
(4위)
20074059
(3위)
1342.448.402
(3위)
198498365.25894162124148743.411.336
1985105400.333
(3위)
133
(1위)
29
(1위)
122
(1위)
75
(2위)
66
(2위)
845.575
(1위)
.400
(3위)
1986104404.280113
(4위)
16018
(2위)
57
(5위)
64
(2위)
1038.453.340
198781306.3149622
(3위)
015
(3위)
4643333.533
(3위)
.378
1988104404.324
(3위)
131
(1위)
12030
(1위)
89
(1위)
72
(2위)
1642.577
(1위)
.382
1989118414.280116
(3위)
18026
(1위)
84
(2위)
93
(1위)
32
(3위)
93.512
(1위)
.407
(2위)
199089331.281931721149611445.444.361
1991112411.29412125
(3위)
523
(3위)
83
(4위)
691666.547
(5위)
.388
1992117410.261107180155962644.415.331
1993107362.2739923
(5위)
065245433.387.331
199445157.2363710011417412.318.288
199582229.179414082315018.301.236
14시즌통산13384850.286138924714207781762143571.471.358
  • 투수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ERA경기완투완봉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
1982해태 타이거즈2.88263110510106 1/3[40]88645649
19832.08411110017 1/3131518
19853.351010431040 1/335118112
19869.001000100320300
통산4시즌3.024152151020167138871869
  1. 27세 한(漢)자 항렬이다. 즉 야인시대김두한덕혜옹주의 김장한이 형제 뻘이란 소리(...). 나이에 비해 항렬이 상당히 높다.
  2. 포수를 제외하고 내야수 모든 포지션을 원년에 뛰었다. 당시에 해태는 14명으로 시작한 초미니구단이라서 숫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3. 최다 득점상은 1999년에 신설
  4. 중도사퇴로 김성한 코치의 감독대행 체제로 잔여시즌 종료
  5. 시즌 도중 경질로 유남호 코치의 감독대행 체제로 잔여시즌 종료
  6. 시즌 도중 경질로 서정환 당시 2군 감독 체제로 잔여시즌 종료
  7. 앞으로 이승엽, 박병호보다 좋은 타자가 나타날 가능성은 있지만, 그 선수가 동시에 투수로 뛰면서 한 시즌에 10승을 일굴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봐야겠다. 그런데 21세기, 그것도 2014년에 일본에서 10승-10홈런을 기록한 괴물이 나타났다... 게다가 그선수 등번호도 11번......
  8. 젊은 타이거즈 팬들에게는 KIA 감독 시절 번번히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한 것과 김성한 구타 사건으로 인해 이미지가 그렇게 썩 좋다고 볼 순 없지만, 선수 전성기 시절 김성한은 쟁쟁한 스타들이 즐비한 해태 타이거즈의 선수들 중 중에서도 독보적인 인기를 자랑했다. 선동열, 이순철, 한대화보다도 더.
  9. 이때는 80경기만 했기 때문에 규정이닝을 넘긴 수치이다.
  10. 이 사람의 야구능력을 엿볼수있는, 대단한 기록인데 당시 10승과 2.88은 해태 팀내에서 평균자책점 1위에 다승 1위였다. 더군다나 그때 80경기 체제에 타자로서도 13홈런 10도루면 오늘날은 거의 2~3점대 평균자책점에 15승, 20-20클럽을 달성한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20-20 클럽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상황에서 제일 먼저 달성한 것도 김성한이었다.
  11. 특히 한국프로야구 첫 시즌 30+홈런은 김성한이 가장 먼저 달성하였다. 1988년 30홈런.
  12. 89년 26홈런 32도루를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야구전문지 <주간야구>만이 대서특필했을 뿐, 그 외에는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13. 통산 31개
  14. 대신 이때 투수로 올스타전 마운드에 올라 3이닝 무실점으로 막고 미스터올스타를 수상했다.
  15. 플레이오프에서 LG에게 패하며 최종 3위
  16. 플레이오프에서 SK에 패하며 최종 3위
  17. 시즌 도중 사퇴 당시
  18. 이 무렵 유남호, 김종모,이상윤 등의 코치들이 같이 삼성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서정환,최해식,김봉근,이건열,백인호가 새 코치로 오게된다.
  19. 홍현우는 대단한 선수였다. 96년 그는 .332의 타율에 .453의 출루율을 찍는다. 당시는 세이버메트릭스가 전해지지 않았었기에 묻히긴 했지만, 해태 역대 최대 출루율은 94년 196안타 51볼넷 .452의 출루율을 기록한 이종범이 아닌 96년의 142안타 97볼넷 .453의 출루율을 기록한 홍현우였다!!
  20. 홍현우는 1999년 김종국의 부상으로 빈 2루수 자리에서 커리어하이를 찍는다.이 시절 장타력도 높은데, 웨이트트레이닝으로 키운 덕분이다. 그러나, 이 것이 부상을 낳았고 결국 LG에서 먹튀가 된다.
  21. 2002시즌,03시즌 6할 달성.그러나 02시즌때는 4위 LG 트윈스에게 플레이오프에서 패퇴했고 03시즌에는 4위 SK 와이번스에게 스윕으로 업셋당하며 철저하게 발렸다(...)
  22. 타고투저인 지금과는 다르게 이때는 강공위주 플레이는 장단점이 극명하다고 평가받았고 짜내는 플레이를 섞어쓰는게 권장되는 분위기였다.
  23. 극도한 피로감으로 정신력을 오히려 저하시킬 우려도 있고, 야구하는거랑 군대식 행군을 시키는거랑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선수 고문에 가까운 병크.
  24. 참고로 이 선수를 데려오기 위해 LG에 준 선수는 김상현. 사실 방동민은 부상이 있었지만 김성근 감독이 부상전력을 숨기고 기아에 넘겼다는 설이 있었고, 그 때문에 김성한은 김성근 감독을 향해 야구계 선배가 해도 너무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25. 이 시기의 제자는 차우찬,원종현,황선일,이준호였다. 김성한은 부임하자마자 2005년 대통령배에서 팀을 4강으로 이끌었다.
  26. 2-2-4를 기록했다. 다만 포스트시즌에서 02년(對 LG), 03년(對 SK) 2년 연속 업셋을 당했다. 그것도 시즌 4위팀들한테(...)
  27. 벽마다 김성한의 선수시절 사진들이 걸려있다.
  28.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신 듯
  29. 야구 외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순수하게 감독으로서의 지도능력만 따졌을 때
  30. 순수하게 야구 내적인 능력만 판단했을 때 김성한 수석코치는 분명 강한 카리스마를 가졌으며 최연소 2000안타의 장성호, 인생은 로또 이호준, 100타점 유격수 홍세완 등을 키워내고 팀을 3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고 2년 연속 6할 승률을 찍는 등 타격코치와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검증된 인물이다. 적어도 2013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진 그랬다.
  31. 이 발언은 이종범을 강제은퇴시킨 선동열의 밑에서 코치를 하지 말라는 것으로 선동열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32. 50대 중반이면, 타팀에서 감독을 하고도 남을 레벨이다. 사실 기아 감독시절 성적도 무난한 편이였다. 내년이면 타어강 선동열 각동감독과 킬끼리김응용 감독의 계약기간이 종료되는지라, 감독으로 복귀할 가능성도 생겼다.
  33. 첫 수석코치 등용당시에는 폭력사건으로 인해 막힌 야구계 커리어를 김응용 감독이 해결해주려고 한거 아니냐는게 대다수의 견해였다.
  34. 사실 해태선수 말년에도 불화가 있었다. 1994년 시즌 전 전지훈련지에서 김성한 특유의 오리궁뎅이 타법을 감독이 강제로 뜯어고치려다가 실패해 은퇴로 내몬 것도 있고, 2000년 시즌이 종료된 뒤, 주요 코치진을 김응용 감독이 줄줄이 빼간 것, 그리고 김응용 감독이 과거 타어강 박동희 기자 와의 인터뷰에서 김성한 구타 사건을 대놓고 디스한 적도 있는지라, 겉과는 달리 속으로는 상당히 곪아 있던게 터진 건지도 모르겠다.
  35. 사실 김응용 감독은 과거에 수석코치와 트러블을 빚고서 그 코치를 내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990년 김인식쌍방울 레이더스 초대 감독으로 가면서 수석코치가 된 백기성은 김감독이 자신을 선수들 앞에서 종종 갈구고, 이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자, 김감독에게 육두문자를 들어야 했고 결국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1991년 시즌이 끝나고 사임하고 말았다.
  36. 이와 같은 케이스로는 유남호도 있다. 원래 해태에서 같이 삼성으로 옮긴 유남호는 수석코치로 1992년과 2002년 그를 보좌했으나, 그와의 사이가 틀어져, 2003년 시즌 중 기아 코치로 자리를 옮긴다.
  37. 지금 기아 상황이 답이 없긴 해도, 김감독 초기도 상황은 비슷했다.
  38. 다만 이당 시엔 젊은 선수인 김상훈, 홍세완, 장성호, 이현곤, 정성훈,김진우 등이 있었다는거... 과연 김감독이 와도 잘 할지 의문.
  39. 임요환과 2004년 경기를 가졌던 그 사람. ccm가수로 RickyP와 같이 앨범에 참여한 적도 있다.
  40. 규정이닝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