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참의장 재임 시절
퇴역 후 모습
金辰浩
1941년~
대한민국 육군의 제2작전사령관 | ||||
28대 조성태 | → | 29대 김진호 | → | 30대 조영길 |
대한민국 국군의 합동참모의장 | ||||
27대 윤용남 | → | 28대 김진호 | → | 29대 조영길 |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4성 장군이며, 학군 출신으로는 유일무이하게 대한민국 군 서열 1위인 합동참모의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2001~2004년에는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맡아서 개성공단 사업을 주도하였다.
2 생애
2.1 초기
1941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전농동에서 김삼봉과 심학실의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서울 전농동에서 살아온, 평범한 집안이었고, 비교적 유복한 가문이었으나, 1950년에 6.25를 맞이하여 온갖 고난을 겪었다. 그 당시 작은 형님이 국군을 죽이는 인민군이 싫다며 따발총의 실탄을 빼서 땅에 파묻어버려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1954년에 전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배재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57년에는 배재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그 시절에 공부를 그렇게까지 잘 하지는 못했다. 한때는 가출을 한 적도 있었고, 고교 시절에는 우열반을 나눠서 편성했는데, 열반에 배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암기과목 위주로 노력했다. 잠을 쫓는 약인 ‘카페나’라는 각성제까지 먹어가며 새벽 2시, 3시까지 공부하였다. 그 덕분에 1960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에 진학했다. 사학과에 진학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역사교사였던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그렇게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후 럭비선수로 크게 활약했다. 그리고 사학과 과대표 선거에도 출마했는데 낙마하였다.
2.2 군인 초기
그 후 리더십과 순발력을 배우기 위해 ROTC에 지원하여 1964년에 2기로 임관했다. 첫 부임지는 강원도 양구의 2사단 전방의 어느 소대였다.
강원도 양구에서 소대장의 임무를 다 하면서도 군에서 스케이트 선수로 활약했다. 징계를 면하기 위해 권투선수로 나선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의무복무기간을 다 채우고 전역할 무렵에 "네가 제대하면 선수로 출전할 사람이 없지 않느냐"는 말을 듣고 전역명령을 취소시키며 그냥 군에 눌러 앉아 버렸다. 처음에는 대령까지 진급하는 게 목표였다.
그 뒤 1968년에는 베트남전에 군사장교로 참전하였다. 베트남에서 전투를 치르던 중 부친이 별세했지만, 모든 가족이 ‘흔들림 없이 복무하라’는 의미에서 이를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귀국하여 이 사실을 알고 아버지께 드리려고 서울로 보냈던 라이터를 보며 통곡했다.
보병 제5사단 대대장과 수경사 30경비단 부단장을 거쳐, 자신의 목표였던 대령 자리까지 진급했다. 그러나 대령에 진급하고도 연대장 보직을 받지 못했다(당시 특전사 제3공수 특전여단 부여단장이었음). 이것이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견제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새벽 일찍 장세동 청와대 경호실장에게 직접 전화로 따졌다.[1] 하나회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당시 장세동이 도와준 덕분에 전방 지오피(GOP) 담당 연대장으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지오피 연대장으로 근무할 때는 내무반 사고를 없애기 위해 전방 근무자를 세심하게 가려서 뽑았다.관련 기사
2.3 장군으로
그 뒤에는 계속 승승장구했다. 준장으로 진급한 뒤,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제37사단장의 자리에 부임하였다. 그리고 1991년에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으로 승진했고, 1993년에는 제11군단장을 역임했다. 1996년에는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제2군사령관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1998년 3월에는 제28대 합동참모본부 의장 겸 통합방위본부 본부장의 자리에 올랐다. 학군 출신으로는 전례 없는 승진이었다.[2]
2.4 합참의장 시절
합참의장으로 재임하면서 동해안 잠수정 침투, 여수 반잠수정 격침, 제1차 연평해전 등 다수의 북한 군사도발에 맞섰다. 그때 유난히도 북한 측의 공세가 더 거셌던 것은 당시 김대중 정부의 대북화해 정책을 시험하고, 더 많은 지원을 얻기 위하여 북한이 화전(和戰)양면 전술을 썼기 때문이었다.
1999년 제1차 연평해전 당시, 존 틸럴리 주한미군 사령관과의 회동 모습
다행히 북한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도발에 우리 상하급부대가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1999년 제1차 연평해전을 압승으로 마무리하였다. 당시 김진호는 북한 경비정의 NLL 도발 시 교전규칙에 따라 강력한 대응을 주문했다.[3]
2.5 전역 이후
1999년 10월에 명예로운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하였다. 예편 후에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지냈다. 김대중 정부와 김정일 정권 간의 남북경제협력 합의에 따라 개성공단 사업을 진두지휘하게 되었다.
그런데 2003년 4월 30일 개성공단 착공식을 한 뒤 북측에서 당초 80억원에 약속한 50년치 임차료를 갑자기 1200억원으로 올려달라고 했다. 근거도 없는 이런 요구를 들어주면 분양가가 3.3㎡당 10만원에서 40만원으로 급증, 조성 계획에 큰 차질이 발생할 판이었다. 이 상황에서 통일부는 북한과의 다른 사업까지 막혔다며 모든 책임을 미뤘고, 김진호는 계약내용을 바꿀 수 없다며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다른 정부 부처에서도 “1200억원이 무슨 큰돈이냐. 군 출신의 고집”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2003년 12월 22일에 노무현이 김진호 사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후 김진호는 리언 J 러포트 주한 미군 사령관을 만나 개성공단의 전략적 중요성을 설명하고 “훌륭한 사업”이란 평가를 받아 미국 측 협조를 이끌어낸 뒤 북한과 협상하여 보상비 120억원에 출입국관리사무소 건축비 40억원 등 160억 원으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7대 대선에서는 고대 동기인 이명박을 지지하고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3 트리비아
- 고려대학교에 입학할 당시 집안 사정상 등록금 마련이 어려웠다. 그래서 어머니가 동분서주하며 돈을 구하러 다녔고, 김진호는 풀이 죽어 혼자 어디를 갔다 오는데 저 멀리서 어머니가 손을 흔들며 그를 불렀다. “입학금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고려대학교에 진학했는데도 군대에 말뚝을 박겠다고 하니 어머니께서 당연히 엄청나게 반대하셨다. “내가 너를 고려대학 보낼 때 군인이 되라고 보낸 게 아니다”라고 하신 것. 하지만 그 후 그가 장군이 되었을 때에는 어머니께서 아주 좋아하셨다. 어머님이 위독해 급히 병원으로 모시고 가느라 그가 어머니를 등에 업고 허둥지둥 달리자,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장군 아들 등에 업히니 너무 기분이 좋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게 어머니와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 보병 제5사단 대대장 시절에는 실수를 연발하며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대대장급 이상 부부 동반 회식을 할 때, 무대에서 흥에 겨워 춤을 추다가 앞에 있는 사단장을 동료인 줄 알고 머리를 뒤에서 받는 장난을 쳐서 헌병대에 끌려갈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공관까지 따라가서 사죄를 한 끝에 사단장에게서 용서를 받아내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 원래는 김대중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4] 그런데 2군 사령관 시절이던 1997년에 모교인 배재고등학교에서 열린 '자랑스런 배재인상' 행사에 갔다가, 배재중 출신인 김홍일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김홍일이 공군 장교 출신이라고 인사를 하자 깜짝 놀랐고, 오랜 편견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5] 그래서 부하들에게 아침 상황보고 시간을 통해 “김대중이 빨갱이라는 것은 정치적 문제로 덧칠해진 사안”이라고 그동안 자신의 발언을 수정하며, 누구를 대통령으로 찍을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였다.[6]
- 아내는 고려대 사학과 출신 동갑내기이다. 캠퍼스커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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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령에서 대령까지 그와 세차례 같이 근무한 장세동은 그 즉시 하나회 핵심 관계자에게 “차라리 김진호를 전역시켜 버려라”고 강경한 어조로 항의했고, 그 덕분에 인사 불이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 학군 1기인 박세환이 4성 장군으로 제2 작전사령관까지 올랐지만, 합참의장은 김진호가 처음이었다.
- ↑ 그 후 김진호는 자서전에서 제1차 연평해전 당시 북측 피해 규모에 대해 "우리의 통신정보기관에서 북한의 교신 내용을 파악한 바로는 1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강조했다. 종전에는 북한군 사상자가 수십명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 ↑ ‘김대중은 곧 빨갱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저런 공산주의자가 대통령이 되면 큰일인데’라고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 ↑ 직계 조상은 물론 친척 중에 단 1명이라도 공산주의 전력이 있으면 신원조회에 걸려 장교 임용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김홍일이 공군 장교 출신이라면, 김대중은 절대 빨갱이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더 놀라운 것은 김대중의 둘째 김홍업도 학군사관 후보생 출신의 장교였고, 셋째 김홍걸도 육군 현역 출신으로 삼형제가 모두 군 복무를 마쳤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김대중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 이후에는 지역차별주의에서도 벗어났다. 국방부 인사과장 시절 인물을 추천할 때면 “전라도 사람이어도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어봐야 했고, 고위급 장교나 장군의 상위 진출 비율에 호남 출신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도 사실이었는데, 김홍일을 만난 이후로 그러한 편견 역시 버렸다. 나중에는 “호남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가해자였다”고 말하며 “지역색을 극복하지 않으면 성숙한 사회로 진입을 못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