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깃발사건에서 넘어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실제로 발생한 사건·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합니다. 불법적이거나 따라하면 위험한 내용도 포함할 수 있으며, 일부 이용자들이 불쾌할 수 있으니 열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실제 사건·사고를 설명하므로 충분히 검토 후 사실에 맞게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틀을 적용하시려면 적용한 문서의 최하단에 해당 사건·사고에 맞는 분류도 함께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분류 목록은 분류:사건사고 문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경고! 이 문서는 충격을 유발하는 내용 혹은 표현이 포함된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사용자에 따라 불쾌감, 혐오감,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내용, 이미지, 외부 링크 등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열람에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문서를 열람하여 발생한 피해는 바다위키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 문서를 읽고 싶지 않으시면 즉시 닫아주시기 바랍니다.

1 개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부림사건,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더불어 제5공화국 시기에 일어났던 대한민국의 국가폭력 중 하나

1985년 10월 29일 검찰이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비공개 조직인 민주화추진위원회를 이적단체로 규정해 관련자 26명을 구속한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깃발 사건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2012년 말에 개봉한 영화 '남영동 1985'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2 내용

민주화추진위원회는 1980년대 초에 만들어진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비공개 지도조직으로, 약칭은 '민추위'이다. 산하에 노동문제투쟁위원회, 민주화투쟁위원회, 홍보위원회, 대학간 연락책 등 4개 기구를 두고 1985년 3월 삼민투쟁위원회(삼민투)를 결성, 5월의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을 주도하였다.

또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대우어패럴 동조 시위 등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1984년에는 민추위의 활동에 대한 평가, 올바른 운동방법, 정치 상황에 대한 분석 등을 내용으로 하는 지하신문 《깃발》을 두 차례에 걸쳐 발행하였다. 이 때문에 세간에 '깃발 사건'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로 인해 5공화국 정부는 깃발 전담반을 설치하고, 미국문화원 점거농성사건 이후에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인간도살장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전담하게 하였다. 이어 1985년 10월 29일 검찰은 민추위를 국가보안법상의 이적단체로 규정한 뒤, 관련자 26명은 구속, 3명은 불구속 입건하고, 17명은 지명수배하였다.

검찰은 민추위 관련자들을 자생적 사회주의자들로 규정하였는데, 이후 이 사건과 관련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 故김근태 의장이 구속되어 이근안으로부터 물고문·전기고문 등을 받았다. 김근태 전 장관은 이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다가 2011년 12월 결국 타계하였다. 이때 당시 김근태 의장이 겪었던 22일간의 섬뜩한 이야기는 < 남영동 >이라는 책에 잘 나와있으며,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2012년에 영화로 제작되었다. 영화에서 김근태 전 장관은 '김종태'로, 이근안은 '이두한'으로 나온다.

한편 당시 민추위 위원장은 PC통신 나우누리와 인터넷방송 아프리카TV로 유명한 나우콤의 문용식 전 사장이었다. 문용식은 서울대 국사학번 79학번으로 총학생회장을 거쳐서 1985년 민추위를 결성했다가 구속되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총 5년간 복역하다가 1990년 출소했다. 이후 늦게 학교를 졸업한 후에 1992년 나우콤의 전신인 BNK에 입사해서 사장 자리까지 오른다.

학생운동의 족보로 보면 당시 서울대 민추위는 CNP 논쟁 중에 정립된 소위 ND그룹의 핵심으로 분류된다.

사건내용 출처

3 사건의 배경

이 문서에는 집단연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틀이 달린 문서에는 독자연구를 담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의견들은 다른 이용자의 정당한 반론에 의해 수정될 수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하기 전에 문서 내 검색을 통해 중복된 내용인지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세한 사항은 집단연구 문서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1985년은 2월 12일 치뤄진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정권반대를 외치는 김영삼김대중의 신민당이 떠오르고, 대학생들이 미국 문화원을 점령하고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전두환 군사정부에 대한 저항이 날로 거세지던 시기였다. 또한 잘 알다시피 이 시대는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이 사건은 군사정부 시기에 일어났던 수많은 용공사건과 마찬가지로 정권안정을 위해 일부러 조작한 사건이라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4 사건 이후

국민의 숨소리까지 감시하던 군사정권 시절이라[1] 사건은 이대로 묻히는가 싶었지만 김근태씨의 아내 인재근씨가 이 당시 고문 사실을 미국 언론과 인권단체에 폭로하여 전세계에 알려졌고, 1987년 부부가 공동으로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이듬해에는 독일 함부르크재단이 그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하였다.

그 이후 당연하지만 전혀 재심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오랜기간 고통 속에 살았다. 그러나 김근태가 사망한 뒤 아내인 인재근 의원이가 이듬해 이 사건의 재심을 청구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재심후 무죄를 선고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김근태 뿐 아니라 사건 관계자들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사건 관계자들이 협박·강요·고문을 당했다며 법정 진술을 번복했다"면서 "고문 등 당시 경험에 대한 이들 진술의 상세성, 당시 연행 과정에서도 영장 제시 등 적법한 절차가 이뤄지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위법한 수사가 이뤄졌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선배들이 싸놓은 똥을 다 치우느라 고생인 대한민국 사법부

이어 재판부는 "강요된 상태에서 한 진술은 실체적 진실에 대한 오판을 하게 할 가능성이 있어 유죄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며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해 무죄"라고 판시했다.

민추위 사건 무죄판결 기사
  1. 영화 남영동1985 시작당시 화면에 나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