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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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양 -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얼굴 없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는 무엇을 하였는가.

- 부천 경찰서[1] 성고문 사건 1심 결심공판 변호인단 변론 중 -

1 개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부림사건, 깃발사건 등과 더불어 5공화국 시기에 일어났던 참담할 지경인 대한민국의 흑역사

1986년 6월 5일에 발생하여, 1988년에 이르러서야 해결된 국가 폭력 중 하나. 흔히들 부천서 성고문 사건, 심지어 당시에는 성고문이라는 표현도 제외하고 부천서 사건, 또는 부천서 권양 사건[2] 등으로 에둘러서 표현되었던 사건이다.

2 배경

1986년 5월 3일, 인천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시위(인천 5.3 운동 혹은 흔히 5.3 인천사태)는 대대적인 공안 탄압을 가져오게 된다.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야당인 신한민주당과 재야 운동권 세력 간의 신뢰가 깨진 것이었다. 깨진 신뢰의 틈을 비집고 전두환 정부는 재야 운동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고 사건이 일어난 인천 지역의 노동자 단체에 대한 탄압은 그 중 가장 심했다.

당시 인천 지역에는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노동운동에 투신한 소위 '학출' 들이 많았던 곳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런 학출들이 대대적으로 체포되었다. 학출들은 학력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주민등록 그대로는 취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주민등록증을 대부분 위조한 상태[3]였고 이는 실정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여기에 5.3 인천항쟁의 지도부 격인 인물들이 모두 도피하면서 이들을 잡기 위해 수사가 더욱 강도 높게 진행되던 와중이었다.

3 사건

1986년 5월 21일, 갓 학출이 되어 부천 지역의 노동 운동에 뛰어든 권인숙이라는 여자대학생이 있었다. 5.3 인천항쟁으로 인해 탄압이 격렬해지던 1986년 6월 4일 밤, 권인숙은 그녀의 정체를 의심한 통장의 신고로 자취하던 아파트에서 체포되었다. 조사 도중 권인숙이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사실이 드러났고, 여기에 당시 수배 중이던 양승조를 비롯한 고위 지도층의 소재 또한 추궁받았다. 권인숙은 5일까지 수사를 받았고, 6일 새벽에 경찰서 상황실로 다시 끌려나갔다. 그녀가 자백을 하지 않자 경찰서장이 분노했고, 당시 상황실장이던 문귀동에게 수사를 지시하면서 사건이 벌어졌다.

6월 6일 밤 1차 성고문이 가해졌다.

6월 7일 밤 9시 30분부터 11시까지 2차 성고문이 가해졌다. (자세한 성고문의 양태는 여기서는 생략한다. 관심 있는 위키러들은 김정남 저 "진실 광장에 서다" p.535~538을 읽기를 바란다. 너무 구체적이라서 여기서 그 전말을 상세하게 쓸 수 없다. 때로는 현실은 상상보다 더 잔인하다는 점, 그리고 출판물에 적혀 있는 내용만으로 판단해도 문귀동이 피해자에게 가한 행위는 국내법상 강제추행죄 구성요건을 정확히 충족시켰다[4]는 점만 언급한다. #)

6월 16일 교도소로 이감된 권인숙은 처음에는 자살충동도 일었지만 곧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맞서기로 결심한다. 그녀의 고문 소식이 알려지며서 교도소 내 양심수들이 연대 단식을 했고 그녀도 몸을 추스린 후 6월 28일부터 단식에 돌입했다. 그리고 그녀의 변호인단이 7월 5일 고발장을 제출하면서 사건이 널리 알려졌다.

4 재판과 결말

권인숙의 고발에 대해 검찰의 경우 처음에는 김경회 인천지검장이 사법고시 동기이자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의 친인척인 박철언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5]의 격려로 성실히 수사하였다. 그러나 관계기관대책회의에 참석한 서동권 검찰총장이 돌연 축소 수사를 지시하여 축소 수사를 하고 7월 16일 성고문을 한 문귀동을 기소유예 처분한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한 저 유명한 말. "급진 좌경사상에 의한 노학연계투쟁을 전개했던 권양의 '성적모욕' 의 허위사실 유포는 운동권이 성마저도 혁명의 도구로 쓴다는 증거다".[6] 한 마디로 '이게 다 좌파놈들의 계획적인 수작이다. 네가 잘못한 거다, 네년이 더럽다' 라는 소리다. 그러나 이때 이미 검찰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문귀동을 조사해서 그가 실제로 성고문을 가했음을 확인한 것. 정권의 안위를 위해 검찰은 진실을 묻어버리기로 결정했다.

이런 보도지침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장세동이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적반하장의 처리에 여론이 분노했지만 검찰의 수사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변호인단은 재정신청[7]을 냈지만 이는 계속 치일피일 미뤄졌다. 그 사이 권인숙은 주민등록증 위조 등의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렇게 끝나는가 싶었지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6월 항쟁은 거짓의 역사를 끝냈다. 상황이 완전히 바뀌면서 차일피일 미루던 재정신청을 법원이 전격 수용했다. 1988년 2월 9일 대법원에서 재정신청(기소독점주의상 검사밖에 기소를 할 수 없으나 이 사건의 경우 검사가 전부 기소를 거부했다)을 수용했고 1989년 문귀동은 징역 5년의 형을 선고받고 감옥으로 직행했다. 이때 처음으로 특별검사가 임명되어 이 사건을 맡았다. 권인숙은 6월 항쟁 직후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는 여론에 따라 석방되었다.

5 평가 및 에필로그

이 사건은 제 5공화국의 부도덕성을 다시금 드러내었다. 그리고 경찰의 흑역사이기도 했다. 이때 제대로 뿌리를 뽑지 못한 고문의 마수는 기어이 한 대학생의 생명을 앗아간다. 바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다. 그리고 이는 6월 항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의 후일담 및 에필로그는 다음과 같다.

  • 문귀동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문귀동은 기독교 신앙으로 경찰 내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종교가 윤리의식을 함양한다는 주장에 대해 중요한 반례가 되는 사례다. "종교를 믿는 사람 중에 우연히 이런 악질분자가 끼어들었다" 라고 반론할 수도 없는 것이, 문귀동 이 자는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바로 그 종교를 팔아먹은 자이다. 문귀동의 출소 후 4개월 만에 결국 무허가 단란주점을 수차례 개업해서 물의를 일으켰다는 기사가 나왔고, 1994년에는 재판 도중에 배상금조차 내지 않고 자신의 처형 앞으로 근저당권을 설정했다가 강제집행면탈죄로 검거되어 물의를 빚은 바 있었다.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 권인숙은 출소 후 노동운동계에 남았다가 1994년 여성학 전공을 위해 유학, 현재는 여성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주 연구주제는 '군사주의와 여성' 이다. 현재 명지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 2005년에 <대한민국은 군대다>라는 책을 내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 이 사건의 변호인단은 1980년대 당시 인권변호사들의 총 집결이었다. 대충 언급하자면 조영래, 홍성우, 이상수, 박원순 등이 포함된 거의 인권변호사 올스타에 가까웠다. 1986년 구로동맹파업과 이 사건 변호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약칭 민변으로 발전한다. 대표변호사인 조영래는 변호인단의 중심으로 재정신청 및 사건에 대한 폭로까지 앞장섰다. 위의 변호인단 변론도 그가 작성한 것이다.
  •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위 인권변호사들 중 한 명이 이 시기에 직접적인 빨갱이 논란에 시달리고 이 인물에게 후보직을 양보한 인물 역시 빨갱이를 모른다는 식으로 권인숙이 재직 중인 명지대학교에 있는 또 다른 교수가 모 언론에 평하는 글이 올려져 권인숙 교수에 대한 예우도 없으냐는 비아냥을 당한다.
  • 김수환 추기경은 1986년 7월 21일 명동성당 미사[8]에서 "나는 권양의 고소와 변호인단의 고발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고 말했다. 검찰이 성의 혁명 도구화 운운하던 시점에서 검찰과 전두환 정부에 직격탄을 가한 발언이었다.
  • 당시 MBC 보도국 간부로 성의 혁명 도구화를 크게 선전하고 보도한 인물이 노조원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2008년 YTN 사장으로 취임한 구본홍이다. 문귀동에 대하여 그는 신앙을 들먹이며 옹호했다. 그는 2010년 5월부터 기독교 방송 CTS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 이 사건에 관해 성의 도구화 부분을 크게 쓰고 성고문을 성모욕으로 바꾸라고 지시한 문건이 안기부에서 나와 문공부를 거쳐 언론사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대로 보도가 나갔다. 1986년 9월 9일 이 문건을 포함해 정부가 언론사에 하달한 584개 문건이 폭로된다. 바로 보도지침이다.
  • 김완섭도 저거 가짜 아니냐며 깠다. 참고로 김완섭은 광주 5.18 유공자로 누구보다도 5공화국에 적대감이 강했다. 적대감이 엉뚱하게 변해서 반 경상도 감정이 되었지만... 그러나 김완섭의 다른 주장도 그렇듯이...
  • 고발장을 보면 "최고학부까지 다닌 한 처녀가 입에 담기조차 수치스러운 저 끔찍한 강체추행을 당한 사실을 스스로 밝힌 이상 그 밖에 또 무슨 증거가 필요해서 수사를 못한다는 말인가?" 라는 문장이 있다.[9] 그런데 피해자의 진술에서 가해자 자지의 형태와 자지 어디에 점이 있었는 지 진술했는데 조사결과 진술내용이 거의 맞았다.(...)
  •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김뢰하가 연기한 조용구 형사가 미쳐 날뛰는 계기가 된다. 혐의자인 박현규(박해일)을 취조하면서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군홧발로 마구 폭행한 조용구 형사는 신반장(송재호)에게 계단 위에서 걷어차여 굴러떨어지는 혹독한 질책을 받고 다신 취조에 참여하지 못하는 처분을 당한다. 이에 울분이 쌓인 조용구는 낮부터 고깃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셨는데 텔레비전에서 성고문 사건이 나오자 운동권 학생들이 무식한 형사 새끼들의 X를 다 짤라버려야 한다고 욕을 한다. 이에 흥분한 조용구가 텔레비전을 부수고 여대생들을 "교수랑 붙어먹는 더러운 년들!"하면서 구타한다. 이때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백광호가 휘말리게 되는데...
  • 드라마 끝없는 사랑에서도 이 사건이 나오는데 주인공 서인애가 주민등록증 위조혐의로 구속됐다가 경찰관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대생 윤지혜(권양을 모티브로 만든 가상의인물)를 변호해주면서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5공 몰락의 신호탄을 쏘아올린다. 그리고 안기부장 천태웅은 '이 사건이 사실이라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이 사건으로 인해 정권이 몰락될까봐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한다.'라고 말하는 청와대 경호실장과 안기부 차장 박영태와는 달리 아주 태연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위에서도 서술되어있듯이 실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당시의 안기부장은 장세동으로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한다는 말과 함께 보도지침을 내렸다고 알려진 인물인데, 드라마에서는 상당히 다른 인물로 나온다.

6 유사 사건

  1. 부천 남부경찰서를 거쳐 현재 부천 소사경찰서이다.
  2. 앞서 언급된 성만으로 알고 있는 유명인사라는 것이 이를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건명에는 가해자명을 사용한다는 것을 보면 사건 이름 하나하나마저도 의미심장하다.
  3. 이때문에 권인숙은 허명숙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다.
  4. 판례와 통설은 남성기와 여성기가 접촉하는 정도로는 강간이 성립되지 않고, 남성기가 여성기에 완전히 함몰하는 순간 강간죄의 기수에 이른다고 본다. 즉 간음행위 혹은 성교에 이르지 않았으므로 본 사안에서 강간죄는 성립되지 아니한다.
  5. 검사 출신이었다.
  6. 성의 혁명 도구화 운운은 50년대의 반공검사들인 오제도, 선우종원 시절부터 유구하게 나오던 드립이었다.
  7. 검찰의 불기소에 대해 법원 직권으로 재판하는 것.
  8. 이런 미사는 여러 번 빛을 발하게 된다. 단적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되었음을 폭로한 것도 명동성당에서 한 미사였다.
  9. 다만 이는 저렇게까지 얘기했으니 저 사람 말이 맞다라고 얘기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물증이 없어도 이런 구체적인 진술이 있는데 수사조차 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논리적 오류는 어디까지나 확신을 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