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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기

(조선총독부)
소련
군정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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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태봉,후고구려
마한백제후백제미군정대한민국
진한신라신라
변한가야
우산국대한민국 임시정부
탐라국




1 개요

이 문서는 1910년대 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그 전의 역사는 한국사를 찾아보세요.

2012년 MBC 18대 대선개표방송에서 나온 대한민국의 현대사 (1분 10초)
참고로 이 영상의 배경음악은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오프닝이다.
(히스토리 채널)south korea a nation to watch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겪은 국가.

대한민국은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해방 정국속에서의 혼란한 상황 아래에서 냉전 초기의 극도의 이념대립에 맞춰 세워졌다. 이후 6.25 전쟁을 거쳐 나라 전체가 극빈함에 시달렸으며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독재를 국민의 힘으로 몰아냈으나, 그 후 세워진 2공화국을 박정희가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3공화국을 세움에 따라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이 시작되었고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거센 요구가 계속됨에 따라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을 거쳐 6.29 선언에 따른 9차 개헌을 통해서 제도적인 민주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경제개발을 시작하여 GDP 1만 달러 돌파, OECD 가입 등으로 1990년대 중반은 경제부흥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자신감이 가장 부풀어올랐던 시기였다. 하지만, IMF 사태라는 충격을 받은 뒤, 한국 국민들은 언제 자신들이 누리는 부가 언제 다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2만 달러대까지 성장을 한 뒤 현재는 3만 달러대 돌파를 앞두고 있고, 지금까지는 탄탄한 경제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21세기에 들어 선진국으로 진입한 몇 안 되는 국가이자,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 공여국으로 바뀐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도기적인 문제점들은 조금씩 해결되는 기미가 보이고 있지만, 아직 대한민국 내에서는 여러가지로 해결해야 할 사회적으로 고질적인 문제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2 시기별

2.1 1910년대 ~ 1940년대 : 35년간의 일제강점기, 그리고 8.15 광복신탁통치, 미군정 시대

대한제국경술국치로 주권을 상실한 뒤,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30~40년 동안 수난과 고통의 일제강점기 시대를 겪어야만 했다.

Prison_Release_of_Korean_activists.JPG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함으로 해방을 맞이했지만,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는 먼저 진주한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 둘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여운형과 좌우익의 각 인사들이 모여 만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미군정에 의해 부정되었으며 38도선 이북 역시 소련군정의 정치가 계속 되고 있었다.

한반도 전체가 신탁통치에 따른 입장의 차이와 급속한 이념의 대립에 따른 분단의 불안감, 무질서한 경제 등 사회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그와중에 38도선 이남은[1] 소련의 38도선 이북에 대한 총선거 반대에 따른 유엔의 결정으로 남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기로 했고 제헌의회를 구성, 의회 간선제를 통해서 미군정한국민주당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정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3.1 운동 직후 임시정부의 수립이 당면과제로 부각되자, 국내외 독립지사 29명이 1919년 4월10일 밤, 중국 상하이의 허름한 셋집에 모여서 그들의 모임을 ’임시의정원‘으로 정하고 다음날인 11일, 역사적이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데 "국호를 무엇으로 정하느냐?"였다고 한다.

그래서 임시정부에서 국호를 정할 때, 여운형 등은 "대한제국이 짧은 기간 안에 망했으므로 '대한' 대신 '조선'으로 칭하자."라고 주장했으나, 임시정부 초대 교통총장을 지낸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는 의견이 임정 요인 다수의 지지를 얻으면서 대한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8.15 광복 이후에 열린 1948년 7월의 제헌국회에서도 대한 · 조선 · 고려 등의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투표 결과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사실, 이미 북한에서 '조선'이라는 칭호를 가져간 탓도 있긴 했었다. (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그리고, 1948년 7월 제헌국회에서 공식적으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확정하였다.

하지만, 38도선 북부에서는 소련군정의 지지를 등에 업은 김일성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워 대한민국과 대결 양상을 벌였다.[2]

분단과 전쟁을 막기 위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부주석 김규식 등이 남북을 하나로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이승만과 김일성 둘 다에게 거부당하고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이 하나 둘 의문의 암살을 당하게 되자, 통일된 한국을 만들려는 노력은 사그라들게 되었고, 남북은 38도선을 경계로 중소규모의 국지전을 벌이게 되는 위험한 상황을 지속하게 되었다.


2.1.1 한국의 민족분열과 분단의 요인 및 고착화

1. 소련과 국경을 직접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었고 놀란 미군이 북위 38도 선에서 양군이 진주할 것을 제안했고 소련이 이를 승인했기 때문에 미군과 소련군의 군정이 시작되었고 이는 분단의 1차적 요인이 되었다. 또한 미군과 소련군정 당국 모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부를 세우기 위해 정치세력을 솎아내는 작업을 하였으며 한반도 남쪽과 북쪽에서 반대되는 정치세력이 일소됨으로써(박헌영, 조만식) 이것도 분단의 원인이 된다.

2. 중국의 공산화를 들 수 있다. 미국이 지원한 장제스의 국민당이 소위 ‘국부천대’ 사건으로 대륙을 포기하여 공산당이 승리하였다. 드넓은 중국이 공산화 되었기 때문에 미국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원래 미국은 중국을 현재 일본과 같은 역할(아시아 지역의 미국의 대리)을 하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일본은 농업화시켜 아시아의 스위스와 같은 국가로 만들 계획이었고 이를 위해 2차대전의 전범을 처벌하고 일본의 사회당(현 사회민주당) 세력을 우대했으나 다시 전범세력이 정계를 장악하게 되었고 사회당 세력은 축소되었고 공산당 세력은 추방되었다. 이 사건을 ‘역코스(reverse course)’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좌우 합작에 우호적(여운형, 김규식 우대)이던 미국이 시큰둥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의 방향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일본의 화족 세력을 중심으로 한 전범세력을 처벌하지 못함으로써 일본 정치는 급격히 우경화되었고 일본의 파벌정치, 세습정치 등의 고질적인 구태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과거사가 청산되지 않음으로써 현재 전시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 문제와 독도 문제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게 된다. 한국에서도 분단-한국전쟁 등으로 상호간의 악감정이 생겨나 분단이 고착화하는 원인이 된다.

3. 그리스를 제외한 발칸반도가 공산화되었고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막아내고 서유럽에 경제지원을 하려는 계획을 가진다. 서독, 일본, 그리스 등의 국가에 원조가 진행되자 위기감을 느낀 소련은 공산진영끼리만 교류하고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조직한다.


2.2 1950년대 : 6.25 전쟁과 이념전쟁, 그리고 최빈국으로의 추락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지 5년 만에 북한의 침공으로 6.25 전쟁을 겪게 된다. 이 6.25 전쟁은 수백만 이상의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다. 이시기의 가난함은 한강의 기적 참고.


2.3 1960년대 ~ 1970년대 : 피의 4.19 혁명5.16 군사정변, 6.3 항쟁, 부마민주항쟁 등의 민주화 운동, 그리고 10월 유신

이승만 정권은 개헌을 반복하며 집권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 3.15 부정선거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3]하게 되고 장면을 행정부 수반 총리, 윤보선을 군통수권자 대통령으로 4.19혁명 정신을 이어받은 제2공화국이 세워지게 된다. 제2공화국 참조.

그러나,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수천여명의 군인, 장교들을 선동하여 5.16 군사정변으로 제2공화국을 무너뜨렸다. 이후 박정희 소장은 제2공화국에서 준비해두었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가져다가 내포적 공업화로 변질시키고 미국몰래 화폐개혁을 저질렀다가 산업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등 여러 실수를 거듭, 1961~1963, 3년 가까이 정치인을 탄압하는 등 폭력적인 군사독재를 펼치며 집권 연장을 준비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참고.

3년간의 독재를 통해 정치 기반을 다진 박정희는 한일회담 로비자금으로 오늘날 2조원 가까운 돈[4]을 사비로 챙기며 선거를 준비하였고 중농정책이라는 구호로 전라도와 경상도 농민들의 환심을 사 마침내 1963년 12월 국민 선거를 통해 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경제적 실패를 거듭하였다. 특히 선거 자금 조달을 위해 터뜨렸다고 여겨지는 증권파동은 기업이 자금을 조달하는 데에 있어 막심한 타격을 주었고 그 결과 많은 기업들이 사채를 빌려다 쓰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70년대 초에 이르러 경제 문제로 되돌아오왔고 이에 8.3 사채동결 조치라는 비상식적 조치를 내림으로써 자신들의 책임을 국민들에게 분배해 위기를 모면했다. 대일차관기업의 부실화는 또다른 골칫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는것보다 주는 것이 많았던 한일수교에 의한 물품 무상 공급, 고강도 노동 및 월남전 참전이라는 국민의 유혈 희생, 제2공화국에서 준비해두었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해 미국의 지시대로 수정해 이행한 것에 따라 경제 규모는 커졌고 노동집약형 경공업과 조선, 자동차 등 노동집약형 중공업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제3공화국 참고.

70년대에 이르면 미국은 베트남을 상대로 처음부터 무리를 두고 있었던 야욕[5]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고 동아시아에서는 상하이 공동혁명이 발표되는 등 냉전이 종식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에비해 박정희는 내적으로 경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에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이라는 회유책을 내며 여러가지 잡다한 이유를 들어 비상계엄령을 내려 출판, 언론, 방송에 대한 검열을 합법화하고 정치활동, 집회의 자유를 불법화하였다. 그래놓고서는 동시에 북한과 몰래 내통하며 6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3선 제한을 철폐, 52%의 득표로 7대 대통령에 취임해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헌법의 선포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1차 오일쇼크의 발생과 더불어 건설업체들이 중동지역에 진출함으로써 오일달러를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1970년대에는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1977년에는 1인당 GDP 1,000달러를 돌파하며 신흥공업국으로 발돋움했다. 박정희의 종신집권의 욕구를 실현했다고 평가받는 10월 유신은 곧, 각종 반발로 강하게 이어졌으며 유신독재 정부는 긴급조치들을 선포해 이를 탄압했다. 그러나 YH 사건 등으로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고, 계엄령이 발효되는 와중에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피살되는 10.26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 박정희 정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제4공화국 참고.

어두운 측면으로는 군사독재시대 그 자체와 사회문제에 대한 함구령, 문화에 대한 검열언론 탄압이 있다. 제2공화국 시대에 이르러 미군정기 및 6.25 전쟁 시절에 있었던 양민학살과 정치범죄들에 대한 국민들의 조사요구가 커져갔으나 군사쿠데타로 독재정부가 집권한 이후 반공이라는 이름하에 모조리 묻혀버렸고 학살 • 범죄의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피해자임에도 반정부 범죄자 취급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박정희 정권 이후의 군사독재정권 시대에도 이런 기조는 유지되었으나 이 시기가 더욱 혹독하였다. 결국, 군사정권들의 암울한 역사 덮어두기는 21세기가 되어서야 겨우 진상조사가 벌어져 소수 사례가 진전을 보이게 되었다.[6] 또한, 다수의 금지곡들이 생겨났으며 일반인에 대해서도 두발 규제를 하였고 복장 규제를 하였다. 여성들의 의복을 이슬람 국가처럼 규제한 것이 대표적 의복 규제라 하겠다. 대표적인 것이 미니스커트 길이를 단속하기 위해서 무릎 위를 자로 잰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성추행이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이에 따른 병폐도 상당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국민들의 인권과 자유가 존중받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성장을 이끈 제조업의 주역인 노동자의 처우는 정말 심각하게 나빴다. 이에 대해 1970년 평화시장에서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자살을 하는 사건이 널리 알려져있다. 또한, 한일협정으로 받은 배상금은 본래 피해를 입은 국민에게 돌아갈 몫이었으나 입을 싹 닫고 군사독재정부와 대기업들이 쳐묵쳐묵하는 바람에 피해자들에게 두 번 눈물 흐르게 만들기도 했으며, 이는 현재 최악으로 치닫은 한일관계의 원인 중 하나다. 이런 행위를 해놓고도 경제발전에 성공못했으면...[7]

그저, 결과만을 위해 탈법적인 수단마저 가리지 않고 억지로 정당화 된 결과로 얻어낸 경제성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할지 개개인에게 맡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당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고만 말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발언이라는 것이다. 다만, 영국 등 서구의 산업화 과정도 역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2.4 1980년대: 하나회12.12 군사반란5.18 광주 민주화운동, 그리고 26년의 군사독재정권을 종식시킨 6월 항쟁제6공화국 시대

1980년대의 사건
시기사건
1980년 5월 18일5.18 민주화운동
1981년 5월 28일국풍81
1981년 9월 30일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
1982년 1월 5일3S정책의 일환으로 야간통행금지령이 해제
1982년 3월 27일3S정책의 일환으로 한국프로야구가 출범
1983년 1월 11일일본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전후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
1983년 6월 30일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
1983년 8월 3일삼성반도체가 64KB D램을 개발
1983년 10월 9일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1984년 5월 1일과천 서울대공원 개원
1984년 9월 6일전두환 대통령 전후 처음으로 일본 방문
1985년 9월 30일63빌딩 개장
1986년 5월 3일5.3 인천사태
1986년 9월 20일1986 서울 아시안 게임
1987년 1월 14일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6월 10일6월 항쟁
1987년 6월 29일6.29 선언
1987년 7월 5일이한열 사망 사건
1987년 11월 29일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년 12월 16일제13대 대통령 선거 노태우 당선
1988년 9월 17일1988 서울 올림픽 개최
1989년 5월 10일이철규 의문사 사건
1989년 7월 12일롯데월드 개장
1989년 11월 1일대한민국과 폴란드가 외교관계를 수립
1989년 11월 3일우지 파동

10.26 사태가 터짐에 따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군대 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를 중심으로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고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는 제5공화국이 세워지게 되었다.

12.12 군사반란에 따라 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으나 신군부 정권은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언론통제 및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채찍과, 야간통행금지 해제, 교복자율화, 국풍81과 같은 당근을 교묘하게 사용하면서 정권을 유지시켰다.

1980년대 말,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엔고에 의한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시대의 이른바 삼저호황으로 경제규모가 성장하였다.

1986년에는 서울에서 제 10회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게 되었다. 당초 1970년에 개최하기로 했으나, 대한민국 정부가 개최권을 반납함에 따라 태국 방콕에서 대신 개최하였다.

이 시기에는 각종 악법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난무했다. 정치풍토쇄신특별조치법, 제3자개입금지법 등이 제정되었으며, 반공법 폐지 이후 사회안전법을 만들어 정적이었던 정치인사들과 무고한 국민들을 억압하였다. 이러한 악법들에 맞서서 민주화 운동이 계속되는 도중에 결정적으로 1986년 7월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터졌으며,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역사다시보기 - 6월 민주항쟁

1987년 6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헌법 중 대통령 간접선거 조항을 사수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이제껏 쌓여왔던 국민들의 분노가 강하게 폭발했고 이는 26년간의 군사독재정권을 종결시키도록 만들었다.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헌법과 정권의 개혁안을 발표하게 만든 사건이다.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자유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고, 이후 여러 독재관련 피해 사건들이 재심을 받은 뒤 무죄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9차 개정안이 현재까지 한국 정치와 법률 운영의 기초가 되고 있다.

1988년에는 19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여 국제올림픽위원회 회원국 160개국이 참가하게 되었고, 특히 당시 동서냉전으로 갈등과 분쟁을 벌여왔던 미국소련, 그리고 서유럽동유럽 국가들이 한 자리에 모두 모여서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종합 4위를 달성하면서 주최국으로서의 강한 저력을 발휘하였으며 대한민국이 더욱 선진화되고 불굴의 신화를 입증하는 한강의 기적과 국력을 전세계에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부터 주식시장에 대한 제한조치가 풀렸다.

이때까지도, 대한민국은 북한과 체제, 국력, 외교적인 측면에서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는 중이었고, 과거에는 공산권의 전폭적 지원을 얻는 북한보다 국력이 열세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공산권의 침체나 여러 외교적 성과,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유치 등은 대한민국의 저력을 전세계에 조금씩 알리고 과시하는 계기 중의 하나가 되었고, 이렇게 하여 한국인들은 "우리가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이겼다!" 라는 확신을 얻게 되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공산권의 몰락에도 일정 영향을 끼쳤는데, 미국-소련의 대립으로 인해, 서구권과 동구권 국가들은 몇 년 동안 올림픽에서 서로 마주하지 못하다가 서울에서 결국 올림픽에 함께 모여서 참가하였고, 동구권의 국가들은 직접 '서울'을 방문하고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대한민국이 일본 식민지에서 8.15 광복이 되었지만 6.25 전쟁으로 박살났고, 1950년~1960년쯤에는 거지들이 들끓는 서울이었는데 전혀 딴판으로 변한 것이었다.

게다가 북한은 동구권 국가들에게 "우리는 지상락원이지만 남조선은 거지 천국이다."라는 선전을 해댔기에 공산권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알던 사실과 전혀 다른 서울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동구권 인민들이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돌아서게 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제법 유명하다.


2.5 1990년대: OECD 가입과 제 1의 사고공화국, 그리고 끔찍한 1997년 외환 위기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

1990년대, 마지막 군부정권 출신으로 여겨지던 노태우 정부와 그 후 문민정부의 시대를 열게 된 김영삼 정부는 민주화와 더불어 군사독재정권 시대에 쌓여있던 여러가지 문제점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3당 합당의 후유증,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으로 대표되는 사고 공화국이 바로 그 것이다. 그리고, 1993년에는 대전에서 세계박람회(엑스포)를 개최하면서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1997년, 11월 21일, 김영삼 정권은 IMF 사태[8]로 대미를 장식했고, 그 이후 15대 대선이 실시되면서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고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이명박 대통령의 이명박 정부가 그 뒤를 이어갔지만 이러한 부분은 지금 시점에서는 아직까지 "현 시대의 정치"에 가깝다.

1999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파급력을 호칭하는 '한류'라는 단어가 중국의 언론 등에서 먼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류라는 단어가 대한민국의 대중문화를 거론하는 고유명사로 각인된다.


2.6 2000년대: IMF 극복기와 급격한 경제성장과 문화부흥, 그리고 한류의 유행

산업 구조도 급격히 바뀌었는데, 별 볼일 없는 농업 국가에서 경공업, 중화학 공업이 크게 발전하였으며, 90년대와 21세기에는 세계 굴지의 첨단 과학, IT 분야의 강국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 영화 산업도 2000년대 들어서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대한민국의 문화산업은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9]

예를 들어, 경제성장과 민주화로 풍요롭게 살고 있는 신세대들과 과거 가난을 겪으며 자라거나 보수적인 사상에 익숙한 청년세대와 기성세대들간의 세대갈등부터 지역개발의 차이에서 오는 지역갈등같이 사회문제에서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편협한 시각이나 돈이면 다 해결된다는 황금만능주의, 성장을 위한 지나친 경쟁사회로 인해 일어나는 인간소외현상, 지나친 개발로 인한 자연파괴 등이 있다.

2002년에는 대한민국일본에서 FIFA 월드컵동시에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은 종합순위 4위를 달성하면서 4강 신화를 이뤄내기도 했다. 같은 해에 부산에서는 제 14회 아시안 게임이 개최하였으며 사상 최초로 북한이 공식 참가하여 남북한이 동시입장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 들어 1인당 GDP는 2만 달러까지 진입하게 된다.

ペ・ヨンジュンBYJ, Ardent love?! Report Image!

그리고, 2000년대 초 일본에서도 겨울 연가를 시작으로 일본의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배용준의 욘사마 신드롬과 함께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급속도로 영향력이 커지면서 일본에서도 한류라는 단어가 전해지게 된다.


2.7 2010년대 :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중흥기, 그리고 제 2의 사고공화국

2010년대에 이르러 한국은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인해 국제사회로부터 엄연한 선진국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지나치게 급속도로 진행된 경제성장으로 인한 여러 부분에서 과도기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2011년 8월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개최했으며 2012년에는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세계박람회를 개최했다. 2014년에는 인천광역시에서 제 17회 아시안 게임을 개최했으며 2018년에는 강원도 평창군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될 예정이다.

2010년 ~ 2011년 K-POP을 중심으로 신한류라는 단어도 등장하였다. 특히 2012년에는 싸이강남스타일이 말 그대로 전세계적으로 열풍이 불게 되었고 한국 음악 역사상 처음으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 음악이 전세계의 음반 시장을 뒤흔들었다. 중남미,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구미시 일부에서 한류가 더욱 확산되었다.

2010년 11월 11일에는 G20 정상회의가, 2012년 3월 26일에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가 개막하면서 경제와 안보분야 국제회의에서도 의장국이 되는 등, 긍정적인 국위선양을 이뤄낸 일면도 있다.

그러나, 2010년에 발생한 천안함 피격사건연평도 포격 사태, 2015년 8월에 발생한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서부전선 포격 사건등등 북한의 정권교체 이후 대남 도발도 더욱 거세지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2011년 1월 14일, 대한민국의 저축은행 중 한 곳인 삼화저축은행PF로 인한 부실을 털어내지 못해서 영업정지 처분을 받게 되는 등 다수의 상호저축은행들이 건설사들에게 빌려준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2012년 3월 15일한미 FTA가 발효되었으며, 2015년에는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환태평양 FTA) 협상이 타결되어 세계 GDP의 37%를 차지하는 초거대 경제블록 공동시장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사고 공화국의 재림이라는 말을 빼놓을수가 없다. 4.16 세월호 참사,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아산 오피스텔 붕괴사고 등), 북한의 위협 재증대(서부전선 포격 사건,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 등, 장기적 불경기로 인한 사회적인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성장중심사회로 이어지는 어두운 뒷면을 잘 보여줬던 2010년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여러 안전불감증 관련 사고가 많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으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있다.

3 대한민국에서 개최했던 역대 국제 스포츠 행사


4 대한민국의 정치사


5 관련 문서

[(한국어 위키백과)한국의 역사]
[(영어 위키백과)한국의 역사]


6 관련 항목

  1. 이전 버전에는 '대한민국은' 이라고 되어있었지만 당연히 존재하지도 않은 이전의 사회를 대한민국이라고 하는건 맞지 않는 말이다.
  2. 이전버전에는 '반국가단체를 국가로 참칭하여 세웠다'고 기술되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나 반국가단체이지 세계의 북한에 대한 대접 등 객관적으로 보면 북한 역시 일개 국가이므로 문서의 학술적 객관성을 유지하기에는 맞지 않는 말이다. 애초에 당시 남북한을 비롯해서 남북 베트남, 동서 독일 등 분단국들에게 정통성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 미국과 소련 중 어느 국가의 편에 서있었느냐, 세계 몇개의 국가가 인정했느냐가 정의를 가려준다고 할 수 없기 때문. 지금이야 사회주의 국가의 모순성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사회주의가 더 낫다, 자유민주주의가 더 낫다 말하기 힘들었다. 김원봉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북한으로 가게 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물론 김원봉의 경우 친일경찰이 아직도 판치는 38선 이남의 행태를 참지 못한 탓도 있다.
  3. 당시 언론계부터 학계, 교육계를 비롯 한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등이 망명이라 표현한다. 심지어 이승만 본인도 하야 직전에 학생 대표들과 면담하며 원하는 것이 내가 망명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4. 6600만달러로 밝혀졌다.
  5. 공산당은 나쁜놈들이지만, 베트남의 정통성은 북베트남에 있었고 따라서 UN등이 개입할 수가 없었다. 미국의 욕심이었던 것.
  6. 그러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모든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이명박 정부 때 활동을 종료하게 되었다.
  7. 여담으로, 이 당시 일본이 지불한 배상금은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고의 절반으로, 보상으로 충분한지는 둘째치더라도 어쨌든 슬쩍 챙길만큼 작은 금액은 절대 아니었다.
  8. [[1]]
  9. 이 덕분에 1940~50년대 태생이신 분들은 전 세계에서 흔치않게 농업사회, 공업사회, 정보화사회를 모두 겪은 케이스로 불리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