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시대 왕실 도서관이자 문화중흥연구기관이었던 규장각에서 기록한 기록물.
1779년 1월부터 1883년 2월까지 약 105년간 저술되었으며 총 1,245책이다.
2 내용
규장각의 이문원(摛文院)에 있는 관원이 매일 규장각에서 있었던 일과 업무에 대해 기록하였다. 규장각의 업무나 문화 사업에 관련된 일을 모두 싣고 있으며 일반 정사나 왕의 동정에 대한 일도 승정원의 입직주서(入直注書)의 협조를 받아 수록하였다.
3 특징
정조는 학문과 문화에 기반한 정치의 중흥을 표방하였고, 이러한 개혁의 목적으로 1776년에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규장각은 왕실 도서관인 동시에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의 역할을 하였으며, 여러 도서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한편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 정치 기관이 되어 승정원과 홍문관의 기능 일부도 맡게 되었다. 때문에 내각일력은 단순 문화적 내용 뿐만 아니라 승정원일기나 기타 다른 정부 기록물에는 기록되지 않은 중요 정치적 회의나 사건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정조는 규장각에서 당파나 신분에 구애 없이 젊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모아 개혁정치의 파트너로 삼았는데 정약용과 같은 학자들과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와 같은 서얼들이 신분을 초월하여 규장각을 통해 중앙정부에 등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客來不起라 하여 누가 오더라도 공부 중 일어나 인사할 필요 없고, 雖大官文衡 非先生毋得升堂이라 하여 아무리 관직이 높은 고관대신이라도 함부로 규장각에 들어올 수 없게 함으로써 외부의 정치적 간섭과 연구의 방해를 완전히 배제하였다. 이에 따라 내각일력을 통해 정조 시대 개혁 정치의 방향과 의도, 그에 대한 토론 등을 볼 수 있으며, 고관대작들의 손을 전혀 타지 않아 당대의 일을 왜곡과 여감없이 순수하게 보여주고 있다.
내각일력은 편성 절차와 목록, 차례가 승정원일기와 비슷하다. 때문에 100년분 분량에, 주로 규장각 내에서의 일에 국한되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 카테고리 내에서는 승정원일기 못지 않은 수준으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빠진 부분이 많은 승정원일기와는 달리 분실된 부분도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임원경제지를 지은 서유구의 경우 관련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엔 64건, 일성록엔 505건, 승정원일기에는 1273건이 기록되어 있지만 내각일력에는 2788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만큼 내각일력의 내용이 세밀하고 자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는 관리들이 규장각에서 재교육을 받는 제도인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미 과거를 거친 사람 가운데 재교육이 필요한 사람을 뽑아 3년 정도 특별 교육을 시키는 제도였다. 이 과정에서 정조가 친히 강론에 참여하거나 직접 시험을 보여 채점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도 내각일력을 통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4 기타
프랑스에 있던 외규장각 의궤가 우리나라로 영구대여되어 돌아왔을 때 행렬단 500여명이 기수대, 취타대 등 각 역할을 맡아 환영행사를 가졌는데, 이는 아무렇게나 한 것이 아니라 어람용 의궤를 비롯한 도서를 외규장각으로 옮기는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내각일력의 정조7년의 기록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의외로 김홍도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정조 시대엔 국왕이 직접 관리했던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이 있었는데 이는 도화서가 아니라 규장각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험을 통해 특별히 선발된 10명의 화원 중에 김홍도가 있었기 때문. 정조는 화원들을 정기적인 시험을 통해 관리했고 문제 또한 직접 냈다. 그리고 당시 가장 많이 낸 시험 중 하나가 바로 풍속화였다.#
내각일력에 당시 출제됐던 풍속화 시험문제의 일부가 남아있는데 남산 일대에서 유명했던 벚꽃놀이에서부터 군사들의 활쏘기, 정월의 씨름놀이, 광대들의 놀이, 씨름판의 모습, 서울의 시장 풍경, 농민들의 생활상 등이었다. 국왕이기에 마음대로 밖에 나갈 수 없었던 정조에게 풍속화는 백성들의 삶과 나라 안팎의 일을 알아볼 수 있는 국정보고자료였기 때문. 내각일력에는 약 100년 동안 궁중화원 100여명이 치렀던 840여회의 시험 문제와 시험 성적 , 각종 평가 등이 담겨 있다고 한다.#
또한 정조는 1792년 한양 전체를 담은 성시전도(城市全圖)를 그리게 하고 이 그림을 소재로 규장각 문신들에게 시를 짓게 했는데, 이 200구(句) 1천400자(字)에 달하는 장편시인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도 일성록과 내각일력 두 기록물에서만 나온다.#
다만 워낙 자세하게 기록하다 보니 정조의 흑역사도 가감없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맘에 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삐져서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과 이응록의 아버지인 이종현을 귀양 보내버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