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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ilitarization of the Rhineland
1 개요
히틀러의 유럽 관광시리즈 프리퀄
1936년 3월,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전격적으로 단행된 사건. 한국에서는 라인란트 재점령으로 많이 알려졌으나 엄밀히 말하면 독일은 라인란트를 타국에게 잃은게 아니라 군사를 주둔할 수 없게 된 것이므로 재점령이라고는 할 수 없다.
2 배경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프랑스와 벨기에는 자국의 안전보장을 위해, 서부전선에서 싸웠던 독일의 라인 강 서쪽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 일부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였으며 이를 베르사유 조약에 명문화시켰다. 뒤이어 1925년 로카르노 조약으로 라인란트 비무장지대화는 다시 한 번 명문화되었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라인란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국경은 모두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접하고 있었고, 독일-프랑스 국경의 절반 역시 이 지역과 접하고 있어 프랑스의 안보 위협을 크게 경감시켰다.
하지만 독일인들에게 라인란트는 단치히 및 단치히 회랑과 함께 어서 해결해야 할 영토 문제이자 트라우마였다. 그나마 단치히 및 단치히 회랑은 독일 영토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곳이지만, 라인란트는 명백히 독일의 영토였고 독일의 주권이 행사되는 곳이었으나 단 하나 군대의 주둔 및 무장은 불허되는 곳이었다. 이는 1차 대전 당시 침략을 받은 프랑스와 벨기에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조치였으나, 내부로부터의 중상이라는 망상이 지배하던 독일에서는 치욕스런 조치였다.
1935년, 히틀러는 전격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했지만 비무장지대는 그대로 뒀는데, 여기의 재무장은 로카르노 조약까지 파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벨기에가 이를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연합국의 공동대응전선인 스트레사 체제가 무너지고,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하자 히틀러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라인란트에 독일 국방군을 주둔시키더라도 연합국은 1935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끝내 라인란트 재무장을 용인할 것이라는 근거있는 자신감이었다.
3 독일의 행동
1936년 2월, 히틀러는 외교부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군부에 라인란트 재무장의 뜻을 밝혔다. 군부는 국방장관이며 군부의 1인자인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Werner von Blomberg) 원수를 중심으로 한 세력만 찬성하고 나머지는 결사반대하였는데, 우리도 라인란트 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프랑스가 쳐들어오는데 절대 못 막는다가 핵심 반대 논조였다. 군부에게도 라인란트 재무장은 숙원 중의 숙원이었으나 최소한 이들은 현실적인 감각은 충분했다. 외교부에서도 군부 만큼은 아니지만 반대 기류가 강했는데, 베르사유 조약 파기로 분위기가 형성되어 몇 년 지나면 외교적으로 기회가 올 수 있는 상황에서 괜히 서두르다간 역풍만 맞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반대에도 히틀러는 프랑스는 겁이 많고 나약해서 절대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만을 되풀이하며 라인란트 재무장을 밀어붙였다. 결국 군부는 타협하여 최소한의 병력만을 보내고, 만약 프랑스가 행동하려는 모습이 보이면 즉각 철수하고 화해 신호를 보내기로 하였다.
한편, 독일이 라인란트 재무장을 시도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히틀러는 이미 1935년 영국 및 프랑스 외교관들과의 접견에서 아, 님들 내가 실수했츰. 베르사유 조약 파기하면서 라인란트도 같이 원래대로 돌렸어야 했는데 까비까비하면서 떠 보았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영-프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을 해결하는 것을 우선하고 있었기에, 히틀러의 예상대로 라인란트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영국에서는 1936 베를린 올림픽이 끝난 이후인 10월 즈음에 독일이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전격적으로 군대를 라인란트로 진입시켰다. 히틀러와 군부의 타협대로 투입한 병력은 독일군 22,000명, 지역 경찰 14,000명이었다. 그 중 3천여 명만이 라인 강을 건너고, 나머지 2만 7천여 명은 라인 강 동쪽의 비무장지대에 머물렀다. 이들은 프랑스군이 대응할 경우 즉각 비무장지대를 벗어나기로 되어 있었다.
히틀러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라인란트 점령을 강행한 것은 바로 이탈리아 때문이었다. 이탈리아는 1935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1차 대전 승전국의 공조체제에 따르고 있었으나,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에 대한 영프이 3국 공동대응체제인 스트레사 체제는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무너졌다. 이에 이탈리아의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영국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패전국인 독일의 재군비마저 허용되는데 승전국인 이탈리아의 침략 행위는 용납하겠지?란 생각으로 에티오피아를 침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라인란트 문제에 공동대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이 성공리에 끝나가자, 이후 이탈리아가 다시 대독 공동대응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침략이 채 마무리되기 직전인 36년 3월 초에 전격적으로 라인란트 진주를 시작한 것이다.
4 주변국의 대응
히틀러의 예상대로 이탈리아와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 침략에 정신이 팔렸고, 침략 과정에서 영국-프랑스와의 관계도 악화되어 라인란트 문제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예상을 벗어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영국이었다. 히틀러는 영독 해군협정 체결 등으로 영국이 독일의 정당한 권리 회복에 간섭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나, 영국은 독일 강경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영국의 문제는 실제 전쟁수행을 위한 지상군 병력이 형편없이 적다는데 있었다. 결국 대 독일 전쟁 수행을 위해선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을 받게 되는 프랑스와 벨기에, 특히 대규모 지상군을 갖춘 프랑스가 동조해야 했다.
벨기에는 1차 대전 이후 오랜 중립 정책을 포기하고 프랑스와 군사 동맹을 맺어 대독전선에서 공동대응을 하고 있었기에 이제 모든 것은 프랑스에 달려 있었다.
독일에 대한 대비 때문에 거금을 들여 국경지대에 마지노선까지 구축한 프랑스가 독일군이 국경 너머에 나타나는 일을 반가워할 리 없었다. 그러나 군 수뇌부에서는 절망적인 보고를 했다. 총참모장 모리스 가믈랭 장군은 수뇌부의 의견을 종합하여 세계 대공황 이후 국방예산 삭감으로 프랑스군은 크게 약화된 반면, 독일군은 질적으로 숫적으로 크게 증강되어 우리보다 우세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때문에 프랑스군 수뇌부는 대독 공동대응에 나서는 기존 연합국 및 군사동맹국 간의 공동작전을 생각했다. 그러나 벨기에를 제외하면 믿을 놈이 하나도 없었다. 이탈리아는 상술했듯 라인란트 문제에 관심이 없었고, 독일의 동쪽에서 양면전쟁을 강요할 프랑스의 또 다른 군사동맹국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는 라인란트? 먹는 건가?인데다[1], 프랑스가 라인란트로 진공하는 것은 독일이 먼저 침략하는 것이 아닌 독일 영토에 대한 프랑스의 침략이라며 대독 군사행동에 동참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다.그리고 나중에 한 놈은 배신당하고 멸망, 다른 한 놈은 샌드위치당해 멸망 그리고 강력한 대응을 천명한 영국은 이미 작년에 프랑스를 배신한 전례가 있는데다, 애초에 지상군도 얼마 없는 놈들이었다.
그래도 프랑스 정부는 안보위협 문제를 간과하지 않고 군부에 어떻게든 대응방안을 모색해 보라고 했으나, 군 첩보부가 라인란트에 투입된 독일군 병력을 30만 이상으로 오판하는 바람에 의지를 상실했다. 사실 어떻게든 군사행동에 나설 수는 있었겠지만, 이기더라도 1차 대전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병력 피해가 우려되었다. 이는 곧 있을 프랑스 총선거에서 집권 내각에 커다란 악재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프랑스는 대독 강경대응을 포기하며 라인란트 재무장을 용인하고 말았다. 혼자 목소리 높이던 영국은 메인 탱커 프랑스가 빠지자 같이 침묵했다.
5 결과
전 독일, 나치와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던 사람들조차도 퓌러를 연발하며 히틀러를 찬양했다. 라인란트 재무장은 히틀러 최대의 업적으로 소개되었고, 독일 국민들은 지난 패전의 울분을 상당부분 떨쳐낼 수 있었다. 당시 망명 중이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국내 지하 조직마저 독재자에 대한 국민들의 열광적 지지는 진짜라며 한탄했다.
이러한 열광적 지지와 히틀러의 주장대로 프랑스가 대응을 포기했다는 점 때문에, 히틀러 독재 체제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군사적, 외교적 이유로 라인란트 재무장을 반대했던 관료 및 군부는 총통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벨기에는 프랑스가 끝내 라인란트 재무장을 용인하자 경악하며, 저런 못 믿을 놈들과 동맹하느니 차라리 중립정책으로의 회귀가 더 안전하겠다는 치명적인 오판을 내려 프랑스와의 군사 동맹을 파기하고 중립을 선언한다.- ↑ 단 폴란드는 원래 프랑스와 함께 독일을 쌈싸먹으려고 했다. 당시 폴란드 지도자였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히틀러가 집권할 때부터 이미 히틀러 정권의 싹수가 노란 걸 알아보고 프랑스에 대독 공격을 제안했지만, 프랑스에서 상큼하게 씹자 그냥 히틀러의 독일을 용인했다. 이후 서로 불가침조약 맺고 서로 좋게 지내다가 그가 1935년에 죽은 지 4년 만에 폴란드 침공을 당했다.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독립 과정에서의 높은 공헌으로 인해 폴란드 내에서 국부급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때 히틀러를 용인한 것과 독재 정치가로서의 행보로 폴란드 내에서 욕을 먹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