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국대장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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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공민왕 노국공주.jpg
공민왕과 노국공주
고려의 역대 왕비
충혜왕
정순숙의공주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
공민왕
정비 안씨

魯國大長公主
?~1365

1 소개

고려 31대 공민왕왕비. 공민왕과의 각별한 금슬로 유명하다. 원나라의 황제인 무종 카이산과 인종 아유르바르와다의 아버지가 되는 순종 다르마발라의 증손녀다. 다르마발라의 장남의 아들 위왕(魏王) 베이르 테무르(孛羅 帖木兒)의 딸. 그녀의 고모는 충숙왕의 계비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라서 실제로 공민왕과 그녀는 엄청 먼 친척이지만, 이런 관계 때문에 어떻게 보면 사촌 사이에 결혼한 셈이 된다. 다만 공민왕의 생모는 조국장공주가 아니라 고려인인 공원왕후라서, 사실 사촌 관계는 아니다. 실제로는 9촌쯤 된다. 공민왕은 쿠빌라이 칸의 현손(4대손)이고[1] 노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5대손.

덤으로, 엄밀히 말하면 당시 만악의 근원이었던 원나라에서 시집온 왕비인데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정책들을 지지하고 자기 한에는 공민왕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이미지는 매우 좋다. 태생으로 따지면 외국인 왕비, 그것도 적국 공주 출신의 왕비였던 이가 후대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특이한 케이스. 특히 공민왕과의 로맨스는 정략결혼과 정쟁으로 한 결혼이지만, 말 그대로 세기의 로맨스로서 창작물에서도 흥하고 현대까지도 여러가지 떡밥거리를 안겨준다. 다만 이건 현대 한국인의 시각에서나 적국으로 보일 뿐이지 당시 고려 왕족은 원나라 황가의 일부에 불과했고 이미 상당한 수준의 통혼이 서로 이루어져 실상 한 가문이었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적대적으로 나가기 전까진 오히려 일본 제국의 이왕가처럼 한 나라나 다름없었다. 고려는 그냥 그들의 영지였을 뿐이다. 외국에서는 다 합병된 원나라 영토 취급이다.

다만, 이 순애보가 지나친 나머지 노국공주의 죽음은 여러가지의 개혁을 시도하려던 공민왕에게 결정적인 좌절을 안겨주면서 고려의 몰락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드물게도 그녀의 죽음은 다른 왕실 여인들의 죽음과 다르게 역사교과서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될정도로 반드시 다뤄지는 편. 정사에 영향을 준, 역사 교과서에까지 서술된 얼마 안 되는 역사 로맨스다. 이 부분오면 엥간히 지루한 역사선생들도 로맨스 얘기하느라 재미있어진다

이름은 보르지긴 부다시리(孛兒只斤 寶塔實里). 공민왕이 친히 지어준 고려식 이름은 왕가진(王佳珍)이다. 왕을 가졌다 성은 고려 왕성(王姓)인 왕씨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며, 이름을 풀이해보면, 아름다운 보배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부부애. 흔히 한자어를 우리식대로 읽어 보탑실리라고도 곧잘 일컫는 편.

또한 한국사의 왕비 중에서는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외국계 인물이다.[2]

2 시호

시호는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 보통은 줄여서 노국공주라고도 불린다.

본래 고려왕과 혼인한 원나라 황실의 여성은 시호를 받을 때 실제로 공주였는지와는 관계없이 공주란 명칭이 들어가는데[3], 고려사에 의하면 노국공주는 이례적으로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라는 정식 태후의 시호를 받았다. 그러나 원혜종이 내린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라는 시호와 합쳐져 왕태후의 시호는 삭제된 모양. 그래서 인덕왕후(仁德王后)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정식명칭은 언제까지나 '노국대장공주'다.

참고로 시호에서의 '노국(魯國)'은 춘추전국시대 공자의 고향이었던 바로 그 노나라(...)를 말한다. 옛 중국에서는 시집갈 때 받은 땅의 이름을 취해 공주의 칭호를 정했는데, 이 공주는 '노나라(魯國)'를 시호로 받은 것이다. 국내에서도 조선 시대 때 군주[4], 현주[5]의 시호를 지을 때 지명을 곧잘 사용했으니 이와 비슷한 이치. 또한 대장공주(大長公主)는 황제의 고모나 왕고모뻘인 공주라는 뜻이다.[6]

3 생애

1349년 당시 강릉대군이었던 공민왕과 혼인하여, 1351년에 고려왕비가 된다. 원나라의 공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개혁정치나 반원정책을 지지했다. 그야말로 공민왕의 정치적 동반자나 다름없었으며, 따라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흥왕사의 변 때는 공민왕이 숨은 방 앞에 앉아 반란군을 가로막은 걸로 유명하다.

비록 공민왕을 지지했지만 노국공주는 엄연한 원나라의 공주이고 때문에 원나라를 등에 업고 있던 부원배, 反 공민왕 세력들은 서열상 자신들보다 높고 명분과 권위도 가지고 있는 그녀가 나서면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노국공주 본인은 정치에 나서지 않았지만, 앞서 말한 그녀의 입지 때문에 그 존재만으로도 공민왕의 정치적 보호막이 되어 주었고, 본인도 이런 자신의 입장을 지아비의 개혁정책을 위해 적극 이용했다. 이런 까닭에 원나라오랑캐 취급한 조선왕조 개국 세력인 신진사대부들 조차 그녀를 인정했고, 그런고로 조선 종묘에 있는 공민왕의 사당에는 노국공주가 같이 모셔져 있다.[7] 이외에도 말을 탈 줄 몰랐던 공민왕에게 말 타는 법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금슬에 비해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기에, 1359년 결혼 10년 만에 이제현의 딸인 혜비 이씨를 비로 들였다. 사실 이것도 공민왕은 들이기 정말 꺼려했다지만, 신료들은 물론 어머니인 공원왕후 홍씨마저 청을 올려 어쩔 수 없었다고(...). 들일 때는 노국공주의 허락까지 맡고 들였지만, 들이고 나서는 노국공주가 투기로 인해 식음을 전폐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선 다행스럽게도, 공민왕은 노국공주 외엔 마음을 주지 않았다.[8]

1364년 드디어 아이를 가졌지만[9] 다음 해 음력 2월 16일 난산으로 사망한다. 공민왕이 얼마나 절실하게 순산을 바랐는지 사형수를 제외한 나머지 죄수들을 사면하고[10], 공주가 위독해지자 산천과 사찰에 기원을 드리도록 했으며[11] 나중에는 사형수까지 모두 사면했을 정도.[12]

하다못해 아이는 죽어도 아내인 공주만은 살기를 바랐을 터인데, 끝끝내 공주도 숨을 거두었다. 크게 상심한 공민왕은 그날 이후 정치에 뜻을 잃었고, 고려 왕조의 운명도 그날부로 사실상 끝났다. 당시 왕의 보령(寶齡)[13]은 고작 36세였다. 공주를 지극히 사랑했던 왕은 공주가 죽은 뒤에도 그녀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식사를 차렸으며, 공주가 살아 있을 적과 다름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지고(至高)의 사랑.

능은 정릉(正陵)으로, 고려시대 왕과 왕비를 합장한 유일한 쌍릉 형식이다. 공민왕의 능은 옆에 있는 현릉(玄陵)으로, 보통 '공민왕릉' 혹은 '현정릉(玄正陵)' 식으로 둘을 합쳐 부른다. 여기에는 두 능 사이를 잇는 조그만 구멍이 있는데, 이는 '영혼의 통로'라고 하며, 무덤 공사도 왕이 직접 주관했다고 한다. 타지마할?

(노국)공주가 죽은 지 8년 뒤 어느 날.

공원왕후[14] : "어찌하여 비빈들을 가까이 하지 않소?"
공민왕 : "공주만한 여자가 없습니다."
공원왕후 : "한 번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요, 왕도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터인데 어찌 그다지 심히 슬퍼하시오. 남들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우니 다시는 그리 슬퍼마시오."
ㅡ <고려사절요>, 1373년 3월.

괜히 세기의 로맨스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이후에 연산군 때 언급이 되는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노국대장공주와 닮았다는 말을 들은 연산군은 당장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가져오게 했다고 한다. 근데 닮았다손 쳐도 성격은 180도 다르다. 애초에 두 왕비의 생몰년이 1백년은 족히 넘게 차이가 나는데, 살아서 두 사람의 얼굴을 모두 본 증언자가 있을 리 만무하다

4 드라마화

80년대 드라마 개국에서는 선우은숙이 역을 맡았다.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서지혜가 역을 맡았다. 서지혜는 난산 장면에서 혼신의 열연[15]을 펼쳐 호평을 받았고 반야와 1인 2역, 심의에 걸리지 않는 베드신도 보여준다(…).
신의에서는 박세영이 역을 맡았다. 자세한건 노국공주(신의)

  1. 공민왕의 증조모가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였다.
  2. 영친왕과 혼인한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는 '태자비'이며 황후가 아니다.
  3.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었던 제국대장공주를 제외하고, 보통은 종친의 딸을 황제가 양녀로 삼아 공주의 칭호를 내리는 식이었다.
  4. 왕세자의 정실 딸.
  5. 왕세자의 측실 딸.
  6. 한 단계(?) 밑으로는 그냥 장공주(長公主)가 있다.
  7. 사실 이럴 경우 많은 역사적 유사 사례들을 비추어 보면 보통은 왕이랑 왕비가 적대/대립관계가 되기 쉬웠고, 모른 척하거나 그 때의 유력 권문세가들의 손을 들어줬다면 진작에 공민왕이 정책은 브레이크가 심하게 걸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국공주가 공민왕의 손을 들어주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방패막이가 되어줬기 때문에, 공민왕에세 정치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의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래저래 손꼽히는 연리지. 진정한 내조의 여왕
  8. 노국공주를 제외한 4명의 비(들인 순서대로 혜비 이씨(1359년), 익비 한씨(1366, 원래는 왕족이나, 한씨를 사성받았다.), 정비 안씨(1366년), 신비 염씨(1371년))는 대부분 후계자 문제 때문에 들였는데, 그 중 혜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주의 사후에 들인데다 그나마 반야가 유일한 소생이었던 우왕을 낳을 수 있었던 이유마저, 그녀가 노국공주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9. 기록상으로는 2번째 아이. 첫 아이는 유산됐다고 고려사 열전에 나온다.
  10. 물론 이 정도는 그럴 만도 한 것이, 왕실에 경사가 있으면 사면을 내리는 건 흔했다.
  11. 조선시대에도 역시 왕이나 왕비가 위독하면 종묘사직이나 명산대천등 여러 곳에 기도를 드리곤 했다.
  12. 이 부분은 정말 공주를 아끼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보통 사면령을 내려도 사형수를 사면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당시에 아기가 태어날 때 사람을 죽이면 그 원혼이 아기에게 해를 끼친다는 말이 있어서 사형은 미루기도 했다.
  13. 임금을 높이어 그의 나이를 이르는 말
  14. 공민왕의 모후
  15. 난산으로 자궁이 열리지 않자 '내 배를 갈라야 아이가 숨을 쉴 것이니 을 가져오라'고 절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