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역대 왕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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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妃 安氏
?~1428
1 소개
(?~1428)
공민왕의 제4비[1]이자 고려 최후의 왕대비. 그리고 고려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일생을 살아온 왕비. 정식 칭호는 정숙선명경신익성유혜왕대비(貞淑宣明敬信翼成柔惠王大妃)이고, 왕대비로서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보통 왕대비 안씨(王大妃 安氏)로 불리기도 한다.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이라면 잠깐으로라도 꼭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대부분 조선 건국 이후로는 등장하지 않기에 그녀가 이방원보다 6년이나 더 살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 일생
출생년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죽성군 안극인(竹城君 安克人)의 딸로 태어나서 1366년에 공민왕의 왕비로 간택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비극적인 일생의 시작이었는데...
2.1 공민왕 시기
잘 알려져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당시에 동지밀직(同知密直)이었던 아버지 안극인이 노국대장공주의 영전 공사[2]의 중지를 공민왕에게 건의한 일로 아버지 안극인은 파직되고 정비 안씨는 궁에서 쫓겨나게 되나 얼마뒤 다시 입궁하게 된다.(첫 번째 비극)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때 재입궁을 한 것이 그녀에겐 비극의 진짜 시작이었다.
재입궁 뒤에 공민왕은 정비 안씨에게 강제로 자제위(子弟衛)의 청년들과 성관계를 맺기를 강요하는 등의 비행을 일삼았으나 그녀는 단호하게 거부하였다.(2번째 비극)머리를 풀고 자결까지 시도하자 공민왕이 물러났다고 한다.
2.2 우왕 ~ 고려멸망 시기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하자 우왕은 정비를 두고 "나의 후궁들은 어찌 모씨(母氏)와 같은 이가 없는가?"라 하며 늘 희롱하였다고 한다. 자주 정비의 처소에 들렀는데 혹은 하루에 2~3차례 가기도 하고 혹은 밤에 가기도 하였으며, 혹은 들렀다가 들어가지 못하니 추한 소문이 외부에 파다했다고. 우왕이 어느 날 정비의 처소에 갔으나 비가 병이 들어 머리를 빗지 않았으므로 만나지 않았는데 정비가 조카, 정확히는 남동생인 판서 안숙로(安淑老)의 딸을 우왕에게 보이자 우왕이 맞아들여 현비(賢妃)를 삼으니 사람들은 "정비가 남의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감추려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3번째 비극)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우왕을 강화도로 유배시키자 고려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정비 안씨는 우왕을 폐위하는 교서와 조민수와 이색의 주청을 받아들여 창왕을 즉위시키는 교서를 선포한다.(4번째 비극) 하지만 창왕이 즉위한 지 1년 만인 1389년에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킬 것을 강요하자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키는 내용의 교서를 다시금 선포한다.(5번째 비극)
1392년 배극렴등 이성계의 일파가 공양왕의 폐위와 새 왕조의 창업을 윤허하는 교서를 강요하며 정비 안씨를 협박하자 모든 실권을 상실한 그녀는 할 수 없이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즉위 교서를 선포하고 어보를 이성계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써 고려는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다.(6번째 비극)
2.3 조선 건국 이후
그녀는 조선 개국 이후, 의화궁주(義和宮主)로 강등된 후, 조선건국 후 30년 뒤인 1428년(세종 10년)에 사망한다. 그녀는 강등 이후 술을 가까이 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녀의 음주기록이 보여지는 것으로 보아[3][4] 그녀는 고려 멸망 이후에 슬픔과 죄책감 때문에 여생을 술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3 평가
위에서도 썼지만 고려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일생을 살아온 왕비.
왕비가 된지 얼마 안되서 폐출되는가 하면, 다시 궁궐에 돌아와서는 강간 미수에 아들뻘인 우왕에게 희롱을 당하고 이상한 소문이 나도는가 하면, 왕의 폐위 교서를 3번이나 내리고 결국 자신이 속했던 고려 왕실을 문닫는 역할까지 하면서 알콜중독(?)으로 여생을 보낸 비극적인 여인. 하지만 여말선초의 혼란기에 워낙 포스있는 인물들이 넘쳐나서 역사의 조연급으로 묻힌 안습의 왕비라고 할수 있다. 왕비 자리에서 물러나 볼 골 못 볼 꼴 다 보고 살다가 죽었다는 점에서는 조선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 송씨의 선배격 인생을 산 사람.
4 사극에서
용의 눈물에서는 故한은진, 신돈(드라마)에서는 서지승[5], 정도전(드라마)에서는 김민주가 배역을 맡았다.
용의 눈물에서는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는지 실제 역사에서의 연령대와는 다르게 당시 79세였던 원로 배우인 故 한은진이 이 역을 맡은 바 있었다.[6] 실제 정비 안씨는 1366년에 왕비가 되었으므로 용의 눈물 도입부인 우왕~공양왕 시점의 나이는 기껏해야 40세 전후였을 것이다. 고려가 망하고 궁을 떠나기 직전 신덕왕후와 마주치는데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했으니 언젠가 똑같이 피눈물을 쏟게 될 거라는 저주를 퍼부으며 퇴장한다.
신돈에서는 그냥 지나가는 조연 정도의 비중.
정도전(드라마)에서의 정비 안씨는 해당 항목에서 확인.- ↑ 고려 때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국왕이 여러 왕비를 들일 수 있었다. 문제는 원간섭기에 내명부 품계가 사실상 무너지는 바람에 품계가 좀 이상해져서 정식 왕비만이 아니라 후궁에게도 비 칭호가 붙곤 했다는 것. (자세한 건 후궁 항목 참조) 일단 공민왕의 경우 노국대장공주 이외에는 후궁으로 들인 것에 가까웠지만 당시 정실 부인과 후궁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아서 정비는 계속 왕실의 어른으로 남았다.
- ↑ 정도전(드라마)에서 첫 부분에서 나오는 그 노국공주의 영전공사다.
- ↑ 이명덕(李明德)에게 하교하기를, “의화궁주(義和宮主)가 늙고 병이 있어서 약주(藥酒)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부터 묵은 술을 쓰지 말고 새 술을 바치도록 하라.”하였다. 궁주(宮主)는 전조(前朝) 현릉(玄陵) 의 정비(定妃) 안씨(安氏)였다. -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36권 18년 8월 6일 7번째 기사.
- ↑ 날마다 술 1병씩을 의화궁주(義和宮主) 안씨(安氏)에게 내려 주었으니, 곧 전조(前朝)의 공민왕의 정비(定妃)다. -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29권 15년 5월 25일 4번째 기사.
- ↑ 전 프로게이머 서지수의 동생.
- ↑ 1918년생으로 이성계 역의 故 김무생보다 25세나 위였고 2003년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