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 정책

1 개요

78319-004-545F8CDD.jpg
위의 사진은 루스벨트 대통령의먹이를 노려보는 듯한 사진이 있는 뱃지다.

1929년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경제적 비상 사태를 맞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집권기 미국이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내놓은 일련의 정책들을 말한다. 흔히 화자되는 경제적 영향 외에도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장기적인 영향을 남겼다.

2 배경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경제 불황이 미국 전역으로 퍼져고, 당시 대통령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필사적인 방지 대책에도 물가는 폭락하여 GNP를 1932년 당시 1929년의 56%로 떨어뜨리고 1,300만명의 실업자를 양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2년, 이러한 경제적 상황과 정권 교체가 불 보듯 뻔한 시점에서 대통령선거가 찾아오게 되고, 이때 민주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사람이 바로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후보직을 수락한 루스벨트는 곧장 대선의 최대 이슈인 대공황 극복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브레인 트러스트(Brain Trust)라 불리는 각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일종의 정책 자문단을 만드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기회와 부의 불균형, 경제적 불황으로부터 국민들을 구제하겠다는, 즉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신정책)'을 약속한다. 그리하여 당선된 루스벨트는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브레인 트러스트의 자문을 중심으로 구상된 정책들을 내놓게 되는데 이것이 뉴딜 정책의 시작이다.

3 내용

3.1 1차 뉴딜 (1933-1935)

대공황이라는 사태에서 최악의 지지도를 달린 후버도 마냥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정부의 재정 지원 등 대책은 강구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이들을 본인의 정책으로 계승시키기는 하지만 연방정부의 역할이 훨씬 더 확대된 대대적인 회생 계획을 염두해두고 있었다. 이윽고 1933년 3월 백악관에 발을 들인 루스벨트는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첫 100일"이라 불리는 기간동안 미국을 회생시키기 위한 법안들을 의회의 적극 협조에 힘입어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먼저 통과된 것이 연방정부가 대폭적인 지원을 해줌으로써 공황상태로부터 은행을 구출하여 은행의 업무를 정상화 시키려는 긴급은행법으로, 이와 함께 금본위제 중단을 통해 금의 유출을 막아 통화 안정과 유동성을 확보하는 한편 또다시 금융 시장이 미쳐 날뛰지 못하도록 제동 장치를 마련하는 증권법을 통과시켰다.

한편 민생 쪽에 대한 방편으로 나온 것이 우선 과잉생산으로 나락에 빠져있던 주요 농산물 가격을 생산 통제로 가격 안정을 노림과 동시에 직접적인 농업구제 원조의 길을 여는 농업조정법. 거기에 농업이 주요 산업인 동남부의 테네시강에 다목적댐과 발전소 건설 사업을 일으켜 일자리 창출과 전력 공급이 핵심인 되는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Tennessee Valley Authority)의 설립이다. 당시 동남부는 전기조차 들어와 있지 않은 지역이 수두룩한, 여전히 전근대적인 농경사회를 못벗어난 낙후지역으로 대공황의 직격탄을 그대로 맞은 곳이었다. 그런 이 지역에 전기를 들이고 농업의 현대화를 꾀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오늘날까지 개발공사가 유지되고 있다.[1]

이 초기 뉴딜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실업률 문제와 노동자 복지 문제로, 루스벨트는 "첫 100일" 말미에 전국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를 통과시켜 두 개의 기구를 설립한다. 첫번째는 공공공사관리국(Public Works Administration)으로 연방정부 주도로 댐이나 다리 등 거대 공사를 일으켜 실업률을 떨어뜨리고 경제의 활성화에 목적을 두었다. 한편 전국산업부흥법은 행정부에게 각 산업마다 공정경쟁규약을 통해 과도한 경쟁을 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한편, 노동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의 보장을 명시했는데, 이러한 시장의 공정성과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를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 두번째 기구인 전국부흥청(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이다. 그 외에도 지역 정부 단계에서의 실업률 문제 대처를 위해 연방 채권을 지역 정부에게 발행하는 연방긴급구제국(Federal Emergency Relief Administration)가 있었는데, 후버 정권 시절 설립된 기구를 승계하여 시행된 기구로 바로 브레인 트러스트의 핵심 인사인 해리 홉킨스(Harry Hopkins)가 주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곧 이 초기 뉴딜은 위기를 맞게 된다. 우선 정치적 차원에서 뉴딜 정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민주당 소속으로 대중들에게 부자들에 대한 분노를 끌어내는 사회주의적 포퓰리스트 휴이 롱(Huey Long)부터 정반대로 상류층의 지원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 인사에, 뉴딜 정책이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연방정부의 역할을 주장하는 인물 등, 다양한 곳으로 부터 도전을 받게 됐다. 더불어 측근인 브레인 트러스트에서도 의견 불일치 등으로 인사 교체들이 이뤄지며 몇몇은 아예 반 루스벨트로 돌아서기도 하고, 정책의 효과 또한 바닥을 치던 경제를 회복세로 돌리는데는 성공했으나 여전히 실업률은 좀처럼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연방 법원의 판결 문제였다. 당시 연방 판사들은 루스벨트 이전 공화당 정권들에 의해 임명된, 뉴딜 정책과는 반대의 정치적 의견을 지닌 인사들이 대다수였는데, 이들이 여러 뉴딜 정책들 관련 판결에서 연방 정부의 개입에 위헌 판결을 때려버리며 전국산업부흥법, 농업조정법 등 1차 뉴딜의 핵심들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로인해 좀 더 적극적인 정부의 행동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반면에 루스벨트는 정치적 지지를 크게 잃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3.2 2차 뉴딜 (1935-1938)

1935년 이러한 상황속에서 루스벨트는 앞서 실패한 정책들의 골자들을 이어받은 새로운 정책들을 내놓는 한편, 더욱 더 진보적인 과감한 뉴딜 정책을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이때 나온 것이 바로 뉴딜 정책을 대표하는 공공사업진흥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이다. 앞서 연방긴급구제국이 별 재미를 못보자 담당자이던 해리 홉킨스가 아예 뉴딜 정책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광범위한 실업률 구제 사업으로 내놓은 것으로, 지방 정부들과의 연계를 통해 병원, 다리, 공원 등의 시설 공사에 투입될 비숙련직 일자리들을 창출하고, 여기에 더 나아가 음악, 미술, 연극 등 예술 산업에도 손을 뻗쳐 수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뉴딜 정책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정책으로 한창때 330만명의 실업자들을 고용 상태로 돌려놓는 경제적 영향은 물론, 상대적으로 소수이나 여성들 또한 일자리를 마련받아 경제 활동에 참여하고, 흑인 예술가들이 정부 지원을 받아 예술계에 족적을 남기기도 하는 등 사회적 영향 또한 큰 정책이었다.[2]

공공사업진흥국 외에도 1차 뉴딜을 계승하는 많은 정책들이 도입됐다. 우선 전국산업부흥법을 이어받아 똑같이 단결권, 단체교섭권 등 노동자 권리 증진을 발의한 전국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3]을 내놓는 한편,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를 통해 국민들에게 연금 등 전반적인 사회 안전망을 제공하는 복지 시스템을 구축한다.[4] 또한 이러한 정책들을 지원 사격하기 위한 Wealth Tax Act, 소위 부자 증세 혹은 부유세로 불릴만한 세제 개혁을 도입했다. 첫 임기 때 이미 63%까지 올린 소득세율 상한을 79%까지 끌어올린 이 정책은, 휴이 롱의 지지 세력을 루스벨트가 흡수하는 효과까지 낳았다.

이러한 법안들은 당연히 또 사법부의 반대에 부딪힐 것이 뻔했고, 이에 루스벨트는 1937년 연방 법원을 자기측으로 포섭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바로 의회에서 대통령이 연방 판사 인사권을 쥘 수 있게 하는 법안을 발의하는 초강수를 둔 것. 당연히 이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으나 이는 연방 법원에 충격을 주기엔 충분했다. 당시 9명의 연방 판사들 중에는 오웬 로버츠(Owen Roberts)라는 중도적 성향의 공화당계 판사가 4명의 보수적 공화당계 판사들의 판결에 따라가는 형태로 과반수를 만들어 루스벨트의 정책들에 위헌 판결을 내리고 있었는데, 바로 이 로버츠가 이때부터 다른 판결들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위헌 판결을 받은 바있는 최저임금제 관련 소송에서 합헌쪽 과반수를 입장을 바꾼 것을 시작으로 이때부터 친 뉴딜로 입장을 변경, 이후 연방 법원을 친 루스벨트 성향으로 돌리게 됐다.

여담으로, 소득세 79%가 적용되었던 소득 기준은 연수입 500만 달러. 1930년대 기준으로는 비현실적인 소득이었기 때문에, 당시 이 기준에 부합하는 개인은 록펠러 1명 뿐이었다고. 이 외에도 1935년의 개인 소득세율 개정은 슬로건적 효과 쪽이 더 컸으나, 1936년의 사내유보금 과세 등 추가 세제의 도입을 통해 비로소 재원 확충이 가능했다는 시각도 있다. 참조링크(위키백과)

4 결과

이러한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정책들은 대공황이라는 사태로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던 경제를 붙잡아 다시 회복세로 돌리는데는 성공했다. 당장 1937년 GNP, 산업생산지수, 통화량 등 지표 기준으로 대공황 이전 수준까지 회복됐으며 실업률도 어느 정도 낮추는데는 성공했다. 다만 실업률은 상당부분 WPA가 낮춘 부분이 커 장기적으로 볼 때는 여전히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어쨌든 루스벨트는 그야말로 멘붕 상태의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희망을 주는데는 성공하여 1936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재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루스벨트 정권이 집권 2기 시작과 함께 맞게 된 것은 1937년 불황이었다. 불황의 원인으로 다양한 해석이 꼽히는데, 경제 주기상 찾아오는 불황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케인즈주의자들은 뉴딜이라는 대규모 정책을 굴리면서도 적자 예산에 굉장히 민감하게 신경써온 루스벨트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 중 특히 대기업 트러스트 해체, 노조 형성 등의 뉴딜의 급진성에 불만이던 보수 세력에게는 좋은 먹잇감을 던져준 꼴로 1938년 공화당 보수 인사들이 상당수 의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결과로 이어지면서 루스벨트와 대기업-보수 정치세력 간의 갈등이 고조된다.

그러나... 실업률이고 불황이고 진영 갈등이고 뭐고 이 모든 상황을 다 쌈싸먹는 대공황 이상의 대사건이 터지니 바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 이후 미국 경제는 1941년 참전과 함께 뉴딜 정책을 넘어 본격적으로 전시 경제로 돌입하게 되고 종전까지 사실상 실업률 제로라는 막대한 전쟁 특수를 누리게 되면서 대공황을 극복하게 된다. 하지만 뉴딜 정책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어서 TVA, 사회보장제도 등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5 의의

한마디로 말하면 자본주의 경제의 응급처치.[5]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부상했던 시기와 겹쳐 케인즈주의의 영향으로 나온 정책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케인즈주의에 입각해 시작한 정책은 아니다.[6] 다만, 케인즈의 이론과 뉴딜정책이 (노동법, 반독점, 사회보장제도 등) 상당부분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또한 정책의 집행과정에서 케인즈가 자문을 해주기도 했고, 정책을 추진하는 관료들 가운데서도 케인지언들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케인즈주의가 어느정도는 영향을 미쳤다고는 볼 수 있겠다.

위에서 보아서 알 수 있듯이 공업, 농업, 상업, 금융 등 경제 전분야에 있어서 대대적인 정책을 펼쳐었고, 게다가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임으로써, 인위적으로 수요를 만들어냄으로써 묶여있던 자금이 공공사업에 투입되고, 이를 통해 한계는 있었지만 대공황으로 무너져내리던 산업을 회생시켰다.

다만 이러한 개입정책이 모두에게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특히 보수주의자에게는 노조 결성, 트러스트 해체 등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정책들이 기업들을 억압하고 시장의 자유성을 침해하는 사회주의적 정책이라고 불만이었다. 거기에 진보쪽은 반대로 정책이 너무 보수적이어서 대공황의 주범인 금융계를 정부가 여전히 자유롭게 놔뒀고, 가난한 대중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는 시장 구조, 세제 등에 대한 개혁적인 면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뉴딜 정책이 1935년 위기를 맞았을 때, 인위적인 수요 창출로 통화가 너무 과잉공급된 바람에 인플레이션로 이어지고, 이 인플레를 막기 위해 다시 긴축예산이 편성된 것이 겨우 회복기에 들어선 경기를 바로 붕괴시켜 1937년 대공황을 발생 시켰다는 재정 운영 측면에서의 비판도 있다.

이 외에도 인종 갈등 문제를 좀 더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비판, 관료제의 비실용성을 키웠다는 비판, 등 많다. 또한 노동법 도입 후 성장한 최대 노조 세력 둘이 대립하게 되자 노사 대립을 막기 위해 공정노동기준법을 시행하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2차 세계 대전에 휘말려 성과를 보지 못한 점도 있다. 안습 다만 이는 뉴딜 정책이 워낙 사회 각계에 대대적인 개입을 이루는 정책이다보니 긴 세월 수많은 측면에서 수많은 비판들이 나온 것이며 반대로 부의 분배, 각 산업의 효율적인 균형 형성, 국가 위기 상황에서의 올바른 정부의 개입 선례를 남겼다는 점 등의 평가도 많이 있다.

이러한 평가들을 떠나, 어찌됐든 뉴딜 정책이 향후 미국 사회에 남긴 영향은 막대했다. 뉴딜 정책의 복지 사회로의 방향성 제시는 이후 공화당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집권하고도 많은 부분에서 뉴딜의 관련 정책을 유지하여 이어졌으며, 더 멀리 린든 존슨위대한 사회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도 미국의 자본주의는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는 방임주의적 체제에서 사회주의적 요소가 섞인 혼합경제로 성격이 변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뉴딜 정책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의는 미국이 자본주의 경제를 포기하지 않고 국가의 개입으로 자체 치유할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정책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미국도 다른 국가들처럼 파시즘이나 볼셰비즘같은 극단적인 방향으로 사회가 치닫게 될 수도 있었지만, 국민들에게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사회 내 극단주의자들의 성장을 억제하고 큰 틀에서의 기존의 체제를 지켜내어 결국 2차 대전을 통해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여 전후의 번영을 누리게 되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따지고보자면 '빨갱이 정책'이라는 일부의 편협한 시각과는 달리 진정으로 자본주의를 수호한 정책이라 할 수 있겠다. 사격 중지! 아군이다!
  1. 수십년간 테네시강 유역의 발전소들을 건설, 관리해왔으며 이 중에는 핵발전소도 몇몇 있다.
  2. 20세기 최고의 여성 성악가 중 하나인 매리언 앤더슨도 이 WPA의 수혜자이기도 했고, 아예 흑인으로만 캐스팅된 맥베스 연극이 지원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물론 전반적인 여러 산업들에서 흑인들이 받는 대우는 여전히 시궁창.
  3. 뉴욕주 상원의원이자 브레인 트러스트 멤버이기도 했던 로버트 와그너(Robert Wagner)의 이름을 따서 와그너법이라고도 불린다.
  4.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는 바로 그 소셜 시큐리티, 미국 사회보장제도다!
  5. 응급처치라고 보기에는 스케일도 크지만, 다른 정책들도 섞여 있기는 하다. 다만, 여기서는 구제와 부흥에서의 관점이다.
  6. 단편적으로 루스벨트는 2차 대전 참전까지 평균 3%의 예산 결손을 냈으며 1937년 불황이 찾아왔을대는 균형 예산을 이루기도 하여 케인즈주의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