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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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33대34대35대
해리 S. 트루먼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존 F. 케네디
공식 초상화
풀네임Dwight David "Ike" Eisenhower[1][2]
출신 정당공화당[3]
생몰년1890년 10월 14일 ~ 1969년 3월 28일
재임기간1953년 1월 20일 ~ 1961년 1월 20일
서명
신체180cm , O형
< 1944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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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 조지 C. 마셜드와이트 아이젠하워1945 - 해리 S. 트루먼
< 1959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190px
1958 - 샤를 드 골드와이트 아이젠하워1960 - 미국의 과학자들[4]


나토 사령관 시절 윈스턴 처칠과 함께.


1966년 사진

"McCarthyism is now McCarthywasm"

매카시즘은 이제 매카시즘이다.[5]

1 개요

1950년대 황금기를 맞이한 미국을 이끈 대통령
19세기에 태어난 마지막 대통령

미국의 34대 대통령. 초대 NATO군 최고사령관이자 컬럼비아 대학 총장 역임. 애칭은 아이크(Ike).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데다가 리틀록 사건으로 인종 차별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혼란에 빠졌던 1950년대의 미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앤드루 잭슨, 율리시스 그랜트 이후로 최초로 정상적인(?) 8년 연임을 보낸 인물. 우드로 윌슨이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정상적인 8년 임기"가 아니므로 제외한다. 윌슨은 임기 중 쓰러져서 반신불수가 된 후 아내(이디스 윌슨)가 뒤에서 대통령 정무를 다 했고(...), 루스벨트의 경우는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을 해서 8년을 훨씬 넘겨버렸으니 정상적인 8년 임기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1980년대로널드 레이건, 1990년대빌 클린턴, 2000년대조지 W 부시, 2010년대버락 오바마 등과 함께 10년 단위(decade)의 한 세대를 대표하는 대통령 중 한명이다. 그러나 워낙 조용해서 그런지 잘 부각되지는 않는다.

여담으로 종신계급인 원수로서 보기 드물게 퇴역을 했다가 다시 복귀한 인물이기도 하다. 강력한 문민통제의 원칙을 따르는 미국이기에 대통령에 취임할 때 아이젠하워는 전역을 신청해 민간인으로서 취임하였다가 8년의 임기를 마친 후 예비역 소집 명령을 통해 복귀하였다.

공화당 대통령이지만 인종 차별 철폐, 부자 증세등 여러가지 진보적인 정책을 펼쳤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텍사스에서 데니슨 시에서 7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계 스위스인 이민자 출신으로 당시 유럽에서는 병역 거부로 이단취급당해서 박해받던 재세례파 메노나이트 교도 였다. 그의 아버지는 종교자유 때문에 이민까지 했으면서도 아들의 꿈을 이뤄주기위해서 장로회로 개종했다고 한다. 군인이 되고 싶어했지만 원래 가고 싶어하던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는 떨어지는 바람에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다.[6] 것도 삼수생 출신인데 고등학교도 남들보다 1년 늦게 졸업해서 나이로는 4수 출신이다. 육군 보병소위가 된 아이젠하워는 진급이 늦어져서 개인적으로는 사관학교 선배인 육군참모총장이자 훗날의 필리핀군 육군 및 육군 원수가 되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밑에서 전속부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맥아더 쪽이 흠좀무 수준의 초고속 진급을 한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의 참모총장 시절부터 전속부관으로 일하기 시작해서 워싱턴에서 5년, 필리핀에서 4년[7]. 무려 9년 동안이나 전속부관 일을 수행했다. 대대장 한 번도 못해봤다는 소리(...)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에 대해 이런 소리도 했었다.

"아이젠하워는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중 최고의 사무원(clerk)이다."[8]

필리핀을 떠나서야 맥아더의 요청으로 육군 대령으로 승진했고, 그제서야 재능을 인정받아 고속승진해 1941년에는 준장까지 진급했다. 그러나 그의 고속 승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

2.2 제2차 세계대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직후에 소장으로 진급하고, 1942년 6월에는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의 선택을 받아 중장 진급과 함께 유럽 주둔 미군 총사령관이 되어 북아프리카 전역에 참전했다. 1943년 12월에는 아예 유럽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아이젠하워를 다시 대장으로 진급시켰으며, 1944년 말에는 원수로 진급, 5성장군이 된다. 이때 미군은 아이젠하워를 포함 총 7명의 장군과 제독에게 원수 계급장을 수여했다(오마 브래들리 장군과 윌리엄 홀시 제독은 전후에 진급한다.). 그 7명은 최고사령관 참모장 윌리엄 리히 제독[9],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 장군, 해군참모총장 어니스트 킹 제독, 태평양 전선 지상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 육군 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 장군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한 번 만나 보면 그의 팬이 된다고 할 정도로 대인 관계가 좋았고, 대립하는 두 집단의 조정에도 능해서 당시 조지 S. 패튼이나 버나드 로 몽고메리 같은 고집불통 장군들 간의 갈등을 잘 무마하였다. 물론 그 과정이 절대 쉬운 건 아니었지만...저 두 사람이 하나같이 제멋대로인데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콧대에 한 성깔 하는 성격이라서 마음고생이 심했다. 몽고메리 원수는 미군이 실수를 할 때마다 "그러게 내가 뭐랬소?" 하면서 핀잔을 주지, 패튼 장군은 밥 먹듯이 폭주하지...

아무튼 이 사람의 인품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아이젠하워를 만난 한 여성은...

"맥아더를 만났을 때. 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장군인지 알게 됐어요. 하지만 아이크를 만나자 내가 얼마나 매력있고 사랑스러운 여자인지 알게 됐지요."

횃불 작전, 시칠리아 상륙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을 지휘하며 활약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덕분에 인기가 올라가 대통령 출마를 권유받았으나 해리 S. 트루먼과의 신의를 지키려고 사양했다. 그 뒤 20년간 지속된 민주당 정권의 장기집권을 멈추려는 공화당의 요청으로 대선에 출마,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의 임기는 2차 대전 이후로 완전히 보수당으로 돌아선 공화당이 여당이었음에도 인종 문제, 노동 문제 같은 여러 부분에서 진보적인 모습 또한 보여주어 현재도 미국의 좌우를 가리지 않고 어지간하면 존경을 받고 있다. 아이젠하워는 단순히 민주당 독주를 막기 위해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했지, 개인적으로는 인종 문제나 복지 문제 등에서 되려 온건 진보에 가까웠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는 정책이다. 영화 《패스트푸드 네이션》에서는 도축업계의 독점 기업들을 비판하는 한 사람이 "아이젠하워 시대였으면 화형에 처했을 거야."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여담으로 2차대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자뻑하기로 유명한 소련에서 최고 등급의 무공훈장인 전승훈장을 주었다.[10] 서방 연합군에서 이걸 받은 사람은 아이젠하워와 버나드 로 몽고메리 둘뿐이다.

2.3 대통령


대선 당시 캠페인 광고(1952년)[11]

그는 선거 당시 수렁으로 빠져가던 한국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약을 내걸며 "제가 한국에 가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을 내놓았고 실제로 당선 후 전쟁 종결을 위해 한국에 갔으며 방한한 첫 번째 미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1952년의 방한은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었기에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방한은 아니다. 그래도 1960년 4.19 혁명 직후 아이젠하워가 방한한 적이 있기에 대통령으로 방한한 첫 대통령이라는 말은 맞다. 이 쟁점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심지어 이 시기 "go to Korea."라는 표현이 "난제를 정면 돌파하다/맞닥뜨려 해결하다."라는 표현으로 유행하기까지 했다.

1960.6.19. 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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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북괴 격파+막대한 원조 등 지금의 천조국 드립 이상의 위치[12]였는데, 재조지은 그런 미국의 전쟁 영웅 출신에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첫 방한한 미 대통령이다[13]. 그야말로 역대급 이벤트였으므로, 몇 달전부터 관 주도로 준비와 예행 연습에 여념이 없었으며 경찰은 서울시 경찰 6천여명으로 모자라 지방 경찰 4천명을 불러 10,000명으로 수 주일 전부터 연습, 며칠 전부터는 아예 합숙하며 연습하였다. 전국 중고등학생들은 '아이크방한학생준비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각 학교에서 몇 명씩 차출해 피나는 사열 연습을 하고, 신문은 며칠 전부터 석ᆞ조간할 것 없이 거의 전면을 아이크 뉴스로 도배하는 등 온 나라 자체가 들썩였다. 당시 신문

그의 인기는 그야말로 엄청나서 당시 환영 인파가 200만 서울 시민의 절반인 100만여명이었다고 하며 그가 탄 차가 앞으로 나갈 수 없었고 사람들이 하도 달려들어서 차가 일부 파손되었고, 그를 보기 위해 국보1호 남대문 기와 위에 사람들이 올라가는 등의 추태를 보여 당시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과유불급', 극히 귀한 손님에게 큰 실례를 저질렀다며 이를 개탄하였다. 오토바이를 타며 아이크 대통령을 호위하던 박 모 경위가 인파에 밀려 넘어져 졸도하여 병원에 실려가는 등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났다.

그리고 대인배 아이젠하워는 한국인들의 예상 이상의 환대에 감동하여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원래 아이젠하워는 한국 방문 이전 일본 방문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당시 일본은 안보투쟁으로 인해 반미 감정이 극에 달해 있던 상황이었다. 특히 6월 10일에는 아이젠하워의 방일을 협의하기 위해 일본에 온 제임스 해거티가 도쿄 국제공항(하네다 공항)에서 시위대에게 포위당해 미국 해병대에게 헬리콥터로 구조받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로 인해 아이젠하워는 방일을 포기[14]하고 방한만 결정하였다. 일본에서의 냉대와 한국에서의 환대가 겹쳐 보일 수밖에 없으니, 당연히 아이젠하워도 한국인들의 환대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한국 방문.(1분7초부터) 후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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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미국은 전통적으로 전쟁영웅을 추앙하는 분위기가 강하고 일단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부터 독립전쟁 영웅이다. 이후 미국이 승리한 주요 전쟁의 사령관들은 대부분 대통령이 되었다. 1차 걸프전 이후 2000년대까지도 콜린 파월 합참의장, 노먼 슈워츠코프 사령관 등이 유력 대선후보로 거론되었다. 미국 정계에서 참전용사라는 점은 정치인들한테 커다란 자산이다. 심지어는 전쟁 참여 횟수를 4번이라고 했다가 3번인 게 들켜서 선거에서 진 사람도 있을 정도다! 게다가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선거때 '장군'이라는, 그것도 '원수 계급' 이라는 이미지에 걸맞지 않은 옆집 할아버지 같은 부드럽고 자상한 이미지가 강해서 이것이 그의 당선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뭐 만나는 사람마다 매료되는 비단결 인품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을 보면 임기 말에도 인기가 여전히 좋아서 3선 제한만 없었으면 다시 출마해도 가능성이 있었다고도 한다.아이러니한점은 3선 제한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장기 집권에 질린 공화당이 만든 규정인데, 실질적으로 제한받은 건 공화당의 아이크가 처음이었다.

2.4 대통령으로서 업적

2.4.1 인종차별 철폐

대통령이 된 후에는 냉전과 인종 문제에 애를 쓰는데 특히 1957년에 일어난 리틀 록 사건은 미국 내 인종구별 문제에 강경하게 대응하여 뿌리 깊은 흑인 차별을 없애는 데 기여하였다.

이때까지의 미국 교육정책은 "분리하지만 평등하게(separate but equal)"라는, 교육시설은 분리하지만 교육과정이나 시설이 동등하다면 차별이 아니라는 눈가리고 아웅 식의 원칙 하에 이뤄졌으나 1954년 연방대법원의 브라운 판결(Brown v. Board of Education)로 이 원칙이 공립학교에서는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워렌 대법원장이 직접 쓴 판결문은 만장일치로 수정헌법 14조 중 "...그 관할권 내에 있는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도 법률에 의한 동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에 위배되어 위헌이라고 판결했는데 유형적 차별뿐 아니라 무형적 차별도 금지된다는 내용으로 분리 자체가 차별임을 명확하게 선언했고 이 브라운 판결을 근거로 공공장소, 기관, 교통수단 등에서의 분리도 위헌으로 선언하며 이후 브라운 2판결을 통해 지방연방법원들이 브라운 판결의 집행을 지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자 리틀 록에서 흑인 학생들이[15] 백인만이 다니는 공립학교로 등교하였고 이 흑인 학생의 등교를 막기 위해 대대적인 백인들의 시위와 학생들을 향한 폭행이 발생, 이에 대한 흑인들의 시위도 계속되었는데 아칸소 주지사 오벌 E. 포버스가 치안 유지를 핑계로 주 방위군까지 동원하여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막자 주 방위군을 연방군에 편입시켜 버리고 "어느 누구도 정의를 방해하지 말라."는 말을 하며 정예 육군 제101공수사단[16]을 보내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호하게 했다. 이 사건은 인종 문제뿐만 아니라 주정부와 연방정부 사이의 힘겨루기도 겹쳐 있었지만 연방군까지 투입하는 아이젠하워의 뚝심에 결국 10년 뒤에는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이 비교적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배째라 하고 버티는 곳이 많아 1963년에도 흑백 통합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2%도 안됐다만...그 후 린든 B. 존슨이 대대적으로 손봤다.

2.4.2 수에즈 전쟁 종식

이집트수에즈 운하 국유화 문제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나세르의 이집트를 침공해 수에즈 전쟁이 벌어지자 소련은 이집트에서 영국 등이 물러나지 않으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아이젠하워도 영, 프, 이스라엘 등에 압력을 행사해 물러나게 했다. 하지만 1957년 1월에 의회에 공산주의 세력의 중동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중동 지역의 미군 주둔 권한을 대통령에게 줄 것, 중동지역에 대한 경제원조로서 이후 2년 사이에 4억 달러를 지출할 것 등이 포함된 특별교서, 즉 아이젠하워 독트린을 보내 미국이 중동지역에서의 우위를 유지하려는 정책을 지속하였다.

2.4.3 군산복합체 견제, 그리고 사회 정책

아이젠하워는 퇴임사에서 군대와 산업이 결합한, 이른바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러나 실제로 군산복합체라는 개념을 꺼내든 것은 아이젠하워의 연설 각본가인 랠프 윌리엄스와 맬컴 무스였고, 이 개념의 최초 제창자는 찰스 트레벌 영으로 그의 요지는 병기산업을 국영화하고 그것을 통제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젠하워의 주장의 요지 역시 '국방예산을 줄이자!'이며, 수상쩍은 악의 단체가 미국을 배후 조종한다는 식의 음모론적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군사예산을 삭감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가깝다. 자세한 것은 군산복합체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아이젠하워는 군 출신이기 때문에 군과 군수 대기업들이 예산을 타내가는 꼼수를 아주 잘 꿰뚫어보고 있었고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과도한 예산이 투입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아이젠하워는 교육이나 복지에 갈 예산이 비생산적인 군사비로 가는 것을 극히 꺼려하여 군부가 요청한 예산을 무자비하게 깎았다.

다들 알겠지만, 군사비(무기, 군수품)은 어떠한 재생산도 하지 못한다. 전쟁에 쓰지 않는다면 결국 시간이 흘러 고철로 그냥 폐기되기 마련이다. 실제로 구형 잠수함면도기 회사에 고철용으로 팔아치운 사례도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평시에 과도한 군사비 투입은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군수기업이 아무리 많은 고용을 창출하고 신기술이 개발된다 하더라도, 결국 산출물은 다른 산업/경제와 완전히 단절된 (사실상) 고철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미국 경제가 처한 딜레마이기도 하다.

아무튼, 군 관련 예산을 삭감하는 정책때문에 군 수뇌부가 크게 항의를 하거나 사표를 던졌지만, 오히려 아이젠하워는 절대로 정책을 굽히지 않았고 오히려 반대하는 군 수뇌부들에게 "야, 너희들? 나보다 전쟁에서 공 세운거 더 많아?" "너희들? 한국전쟁 때 목숨걸고 함경도 가봤어?" 또는 "야, 너희들? 나보다 군대를 더 잘 알아?" "군대 알지도 못하는 놈들아. 니네가 한 번 대통령 해볼래?" 한 마디에 깨갱….

그 당시를 비롯해 냉전 기간 동안 정부 예산의 상당 부분이 이런 군산복합체로 흘러들어갔고, 이는 냉전이 끝난 현재에는 더더욱 문제였는데, 아이젠하워는 그 당시부터 이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군복합산업체 타도는 결국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핵무기의 대량생산화를 불러왔으니 이는 참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물론, 핵무기의 억제력 덕분에 냉전시기가 비교적 평화적으로 흘러갔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었음에도 원래 민주당 성향이었던지라 FDR의 뉴딜 정책을 임기 내내 옹호했다. 국방비 감축과 적극적인 부자증세[* 그의 재임 당시 최상위 소득분위(연 40만불 이상, 현재 가치로 연 350만불 이상)에 대한 세율은 무려 [92%에 달했다, 괜히 버니 샌더스가 자신이 사회주의자이지만 아이젠하워 만큼은 아니라고 드립을 쳤던것이 아니다 흠좀무.를 통해 확보한 세수는 사회 정책 확장에 투입되었다. 그 일환으로 보건복지부를 신설하였고 사회보장제도를 확장시켰다. 현재 미국의 고속도로 체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시스템도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의 업적이다. 1956년부터 각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려 500억불의 예산을 투입해서 만들었다.[17]

시기적으로도 전쟁이 끝나고 경제는 50년대 내내 호황을 달렸으며.[18] 거의 완전 고용이 실현된 시기였다. 이 때문에, 지금도 아이젠하워의 인기는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10위 안에는 반드시 포함된다. 이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 외에도 임기 내에 벌어진 스푸트니크 쇼크에 대응하기 위해 두개의 연구 기구를 신설하였는데, 바로 DARPANASA이다.

3 개인사

그의 성씨인 아이젠하워(Eisenhauer)는 본래 독일어로 "철(Eisen) 때리는 사람(Hauer)"이라는 뜻이다. 조상이 광부이거나 대장장이 였나보다.적의 철(전차)을 때려부수고... 적의 철(방공망)을 파괴하고...

아내를 사랑한 애처가였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19] 연합군 사령관으로 영국 주재 당시 그의 운전병이자 비서였던 영국인 케이 서머스비와 내연관계에 있었다. 아이크가 워낙 케이 서머스비에게 다정하게 굴어서 두 사람이 내연관계라는 건 당시 아이크 사령부에서 근무하던 사람이나 아이크와 자주 접하는 가까운 사람들은 거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당시 아이크의 나이가 많아서 성생활은 어려웠다고 한다. 케이의 회고록에 의하면 몇 번 성관계를 가졌다고도 하지만 이건 케이 서머스비가 아이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거라는 주장도 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이크의 2차대전 시절을 다룬 1979년작 TV 미니시리즈 '아이크(Ike)'에서도 묘사되고 있는데 두 사람의 내연관계가 표현되는 건 아니지만 케이 서머서비가 또 한 명의 주인공 정도로 비중이 높은데다가[20] 기쁜 일이 있으면 서로 포옹하는 장면이 나오는 등 장군과 비서 치고는 두 사람 사이가 너무 좋다. 유럽전 승리 이후 아이젠하워는 부인 메이미와 이혼하고 케이와 재혼할 생각까지 가졌지만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커리어가 무너질 거라는 조지 C. 마셜과 여러 지인들의 충고로 관계를 정리했다고 한다. 이후 케이 서머스비는 미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에 정착했고 아이젠하워 사후인 1975년 아이젠하워와의 관계에 대한 회고록을 내기도 했다.

그의 미소는 백만 달러짜리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때문에 대중적인 이미지가 무지 좋았고 이후 대통령에 출마하고 당선하는데 이 미소가 중요한 자산이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뒤를 이어서 공화당 대표로 출마한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 시절 부통령으로서 자신을 충실하게 보좌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닉슨에 대하여 명확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고 이것이 알려짐에 따라 닉슨은 정치적인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21] 케네디와의 대선에서의 득표 편차는 표 수로는 약 20만 표였으나 비율로는 고작 0.1%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가 명확한 지지를 표명했으면 닉슨이 이겼을지도 모른다는 것. 근데 케네디 표가 이탈해도 닉슨이 선거인단에서 대패하는 건 안 자랑 원인은 아이젠하워가 개인적으로 닉슨을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강하며 실제로도 닉슨은 항상 아이젠하워의 명령에 충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직접 닉슨을 부통령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불화는 어쨌거나 아이젠하워의 태도 때문에 공화당이 대통령의 자리를 케네디의 민주당에게 빼앗기게 되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도 비판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케네디는 아이젠하워와는 다르게 젊고 활동적인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써먹었기 때문에 그와 대비되어 아이젠하워는 매일 골프장이나 전전하는 퇴물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케네디는 선거운동 도중 아이젠하워가 미국의 안보 수준을 크게 떨어뜨렸다고 계속 선전했는데, 대통령인 아이젠하워가 국가기밀들인 소련의 군사력이나 미국의 군사력을 밝힐수도 없었고, 참 불쌍하다 (실제로 이에 대해 여러번 불만을 표시하였다).

사실 아이젠하워의 정치적인 능력에 대한 평가는 그 후로도 회복되지 못했으며 대통령 당선도 오직 군인 시절의 업적에 의한 것이라는 혹평도 있다. 그러나 비슷한 비평은 케네디에게도 있어서 케네디는 아무것도 못하고 암살당한 대통령이라는 비평을 듣기도 하니까...판단은 각자의 몫.

하루 60개비 이상의 담배를 피우는 대단한 애연가이기도 했는데, 1948년 컬럼비아 대학의 총장을 지낼 때 맥박이 지나치게 빨라져서 의사의 권고로 금연을 시작했다. 1주일이 지나지 않아 맥박은 정상으로 돌아왔으나, 그는 그 후 평생에 걸쳐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흡연자들의 방문을 받았을 때 괴롭지 않습니까?"라고 누군가 묻자 그는 대답했다. "천만에요. 우월감을 느낍니다. 그들에게는 담배를 끊을 만한 의지력이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소탈한 성격이라 역대 웨스트포인트 출신들의 사열을 받을 때 동기 한 명이 "아이크, 내려와 같이 걷자"고 외치자 단상에서 내려와 동기들과 같이 행진하기도 했다. 사열을 받는 당사자가 말이다!

"대통령 못해먹겠다!"의 원조(?)라고도 볼 수 있는 분. U-2기가 소련 영공에 들어갔다가 작살나고 나서, 기껏 조성되었던 냉전 화해 분위기가 개발살나고 여론은 여론대로 들끓고 하자 백악관 집무실에 출근하면서 대통령 못해먹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롤스로이스하고의 악연도 있다. 아이젠하워가 대장시절 롤스로이스에다 전화를 걸어 차 구입을 원했지만 롤스로이스의 대답은 "그런 건 전화로 하지 마시고 직접 우리 매장에 오셔셔 사가슈~ 아니 4성장군이나 되는 사람이 쪼잔하게 전화까지해서 사람 귀찮게 하나?"라고 핀잔을 들었다. 후에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자 롤스로이스가 롤스로이스 차량 한 대를 선물로 주겠다고 하자 "장군 시절엔 무시하더니 대통령이 되더만 아부하는 거요?"라고 했다. 어차피 대통령 전용차가 있으니 롤스로이스 받아도 별로...

4 대중매체 등의 등장

미국 대통령들의 공식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는 아이젠하워의 손자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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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에는 1달러 주화에 얼굴이 새겨져 있기도 했으나 80년대에 들어서기 전에 생산이 중지되었다. 해당 주화는 Ike Dollar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유통용 주화는 니켈을 도금한 구리이고, 기념 주화는 구리에 은도금을 하여 은의 비율이 40%이다. 위 사진의 Ike Dollar는 은도금 버전이다.

니미츠급 항공모함 2번함에 이름이 쓰였다.

2008년에 개봉한 미국 할리우드 영화 《인디아나 존스 4: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에서는 인디아나 박사가 조국을 배신하라는 소련군 여장교의 말에 "I like Ike(난 아이크가 좋아)."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Ike(아이크)는 아이젠하워의 별명이며, 저 문구는 아이젠하워의 선거 로고이다. 한국에서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당시의 영화관 자막에서는 이 대사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로 번역되어 나왔다. 아이젠하워에 대해서 잘 모르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쪽이 더 친숙할 듯하다.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 하프를 들고있는 야스(나나의 등장인물)의 모습을 하고 나왔다. 패튼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흠좀무. 그리고 롬멜유언에 따르면 반댓말은 아이젠 추워(...) 정말 끝까지 썰렁개그. 사약 효과가 늦네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콜 오브 후아레즈 : 건슬링어에 등장하신다? 주인공 사일러스 그리브즈의 무용담을 듣는 젊은이인 드와이트가 이 사람이다. 막 20살 되던 시점인 듯. 서부시대부터 될성부른 떡잎 세간에 알려진 온화하고 상냥한 성격과 달리 어릴 적부터 무용담이나 전설, 괴기 민담 등을 무척이나 즐겼던 모양이다. 야사에 따르면 아이젠하워는 동네에서 만난 한 늙은 카우보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것이 그의 영웅적 기개에 불을 질러 훗날 군인의 길을 걷도록 이끈 것 같다.

아이젠하워부터 레이건까지 대통령의 집사로 지내온 세실 게인즈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버틀러즈》에서는 로빈 윌리엄스가 아이젠하워를 맡았다.[22] 게인즈가 섬긴 첫 번째 대통령으로 게인즈가 대통령의 집사가 된 계기가 그 전까지 일하던 호텔에서 위의 브라운 판결에 대해 토론하던 백인 고객이 세실에게 그의 생각을 묻자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이 백악관 행정관의 눈에 들어서였다. 아이젠하워가 리틀 록에 연방군을 파견한 것에 감명을 받은 듯. 한국판 성우는 로빈 윌리엄스의 전담 성우인 배한성.

5 유언

퇴임 후에는 펜실베이니아게티즈버그의 농장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9년 3월 28일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전 항상 내 아내, 내 자식들, 내 손주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전 항상 조국을 사랑했지요. 이제 전 떠나기를 원합니다. 전 떠날 준비가 됐습니다. 주여,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I've always loved my wife, my children, and my grandchildren, and I've always loved my country. I want to go. I'm ready to go. God, take me."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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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외계인을 3번이나 만났다 카더라[23]

주코프에게 콜라를 권한 사람이다.이후로 주코프는 콜라를 달고 살았다고. 흠좀무
  1. 스위스미국인으로 원래 성씨의 철자가 Eisenhauer였으나 바꿨다. 참고로 그 전의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 또한 성씨를 Huber에서 Hoover로 바꿨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기간 동안 많은 독일계 미국인들은 성씨를 영어식으로 바꿨다.
  2. 애칭으로는 아이크라고 불렸다. 그래서 대선 후보 당시 선거구호도 'I like Ike'였다. 꽤 적절한 언어유희를 사용한 셈.
  3. 출마는 공화당으로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젠하워는 진보적인 색채를 띈 인물이었다.자세한 것은 후술
  4. 라이너스 폴링외 14명 공동 선정
  5.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조지프 매카시 견책결의안에 서명하면서 한 말. 보면 알겠지만 영어 be동사의 현재형과 과거형을 가지고 한 말장난이다.
  6. 어릴적엔 바다를 본적도 없는데다 자신의 집이 경영하는 여관에 숙박한 육군 장교들의 태도에 반해 육군 장교가 되려 했던 텍사스 촌뜨기 체스터 니미츠가 원래 육사를 지망했다가 국회의원의 추천서를 선착순으로 받지 못해서 해사 추천서로 대신 받은 것과 겹치는 부분. 니미츠 제독의 해사 추천서도 당시로선 육사에 비해 듣보잡 취급받았던지라 상원의원의 해사 추천 TO가 남아서, 낙심한 니미츠에게 의원들이 "해군은 자리가 있는데 그거라도 갈래?"라고 제안한 걸 니미츠가 별다른 고민 없이 수락해 얻어낸 것이다. 대조적인 것은, 니미츠는 원래 고등학교 졸업반도 아닌데 추천서와 학교 선생님들의 특별과외를 받아서 동기들보다 어린 나이에 입학했다. 여러모로 인생을 바꾼 신의 한수였던 셈이다.
  7. 맥아더가 필리핀으로 그를 끌고 가려 하자 그는 절망했다고 한다.(...)
  8. 나중에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자, 맥아더가 "저 친구는 훌륭한 대통령이 될거야. 내 부하들 중에서 꽤 유능했거든"이라고 평했다는 후문. 다만 이는 그레고리 펙이 주연했던 맥아더의 전기 영화에 나온 내용이며, 실제 발언인지 여부는 확인 후 수정 바람.
  9. 리히 제독 개인의 능력도 나쁘지 않았지만, 해군이 사사건건 통합군 드립을 빌미로 육군이 해군을 집어삼키려 드는 거 아니냐는 불만 종식 차원에서 해군 출신인 그를 육해군 최고 선임자로 임명했다.
  10. 본디 최고등급의 무공훈장은 적기훈장이지만 이 전승훈장은 그걸 뛰어넘는 것으로 소련이 판단하기에 2차대전에 큰 공헌을 한 17명에게만 주었다.
  11. "Ike for president!(아이젠하워를 대통령으로!)"라는 리드미컬한 구호가 돋보인다. 앞서 서술했듯 'Ike'는 아이젠하워의 애칭이다. 영상에 아이젠하워의 그림을 등에 얹은 코끼리가 북을 치는 장면이 나오고 당나귀가 이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각 정당을 비유한 것이다. 코끼리는 아이젠하워의 소속 정당인 공화당의 비공식적 상징 동물이고 당나귀민주당의 비공식적 상징 동물이다. 공화당이 비유적으로 민주당을 까는 셈이다. 영상 막판에는 어두운 배경 앞으로 누군가가 당나귀를 타고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민주당 소속의 해리 S. 트루먼 33대 대통령이 백악관을 떠나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트루먼이 가고 난 자리에 아이젠하워를 세우자는 것.
  12. 이런 이미지는 광주 5.18 민주항쟁까지 이어졌다. 당시 미해군의 항공모함이 한국으로 온다는 소식을 광주 시민군이 듣고는 '미국이 우리 민주주의를 위해 도와주러 오는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사실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 반미 운동이 촉발되는 계기가 된다.
  13. 아이젠하워는 방한 며칠 전인 1960. 6. 14., 과거에는 누군가에게 끌려왔던 필리핀을 방문하였는데 이 또한 필리핀에 방문한 첫 미 대통령이라고 한다.
  14. 오키나와는 예정대로 방문하였다. 일본 본토를 방문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은 1974년의 제럴드 포드이다.
  15. 이 학생들을 Little Rock Nine이라 하는데 버락 오바마의 취임식 때 초청되기도 했다.
  16. 흔히 울부짖는 독수리(Screaming Eagle)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진 그 사단 맞다.
  17. 당시 의회에서 이를 뒷받침한 게 고어 상원의원으로 그의 아들이 클린턴 밑에서 부통령을 역임한 앨 고어. 고어가 부통령으로 초고속 통신망 건설을 '정보 고속도로'로 명명한 것은 아버지의 업적에 빗댄 것이다.
  18. 이 점은 1차 대전 직후처럼 세계 대공황을 기대한 스탈린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19. 이 부인이 좀 유별났다. 신혼 초에 공무 때문에 아이젠하워가 자주 귀가를 못하자, 결국 부인 메이미(Mamie Geneva Doud Eisenhower, 1896.11.14 ~ 1979.11.01) 여사가 어느날 남편을 본다고 차를 끌고 부대로 쳐들어왔다(...) 그때 메이미 여사는 앞, 뒤로 가는 법밖에 배우지 못한 생 초짜였고 거기다 임신 중이었다니 흠좀무(...)
  20. 두 사람의 출연 빈도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21. "일주일 정도 시간을 주면 아마 한 가지 쯤 기억이 나겠지요." 이 말은 아이젠하워가 '부통령 닉슨이 8년동안 어떤 주요한 정책 결정에 참여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한 답변이었다. 나중에 농담이라고 하긴 했지만, 질문에 대한 진짜 대답은 끝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게 대선 가도를 달리던 닉슨에게 말 그대로 크리티컬 히트가 되고 말았다.
  22. 비록 한 명(테디 루스벨트)은 밀랍인형으로서였지만. 로빈 윌리엄스는 미국 대통령 두 명을 맡게 되었다.
  23. 이 기사가 인용된 영국 데일리메일은 말그대로 찌라시언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