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산리 고분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width=100%이름백제역사유적지구영어Baekje Historic Areas
국가 위치대한민국 충청남도, 전라북도
등재유형문화유산등재연도2015년
등재기준(ii)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고고학 유적과 건축물은 한국과 중국 및 일본의 고대 왕국들 사이에 있었던 상호교류를 통해 이룩된 백제의 건축 기술의 발전과 불교 확산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다.
(iii)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 볼 수 있는 수도의 입지, 불교 사찰과 고분, 건축학적 특징과 석탑 등은 백제 왕국의 고유한 문화, 종교, 예술미를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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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청남도 부여군의 동쪽에 위치한 고분군이다. 3개의 무덤군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사비 시대의 백제왕릉원으로 알려져 있다. 총 7기의 왕릉급 고분과 동쪽에 5기 서쪽으로 수 기의 왕족귀족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발굴조사 이전에 이미 모두 도굴당하여 소수의 금제, 금동제 유물만이 수습되었다.

무왕선화공주를 제외한 모든 사비시대 백제왕들이 이 곳에 묻혔다.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의자왕[1]

참고로 무왕과 선화공주가 묻힌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익산 쌍릉.

근처에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능사지가 있다.

2 발굴과정

현재 정비되어 있는 고분은 7기이지만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3기, 1917년에 5기, 1937년에 5기가 조사되었으며 1960년에 추가로 수기가 조사되었다.
1915년에 조사된 고분은 동하총, 중상총, 서하총이며 1937년에는 동쪽 5기의 고분이 조사되었으며 이미 완전히 도굴된 상태였기 때문에 유물은 관파편, 관못, 금조각등 극소량의 유물만이 수습되었다.

2016년 조사에서 3기가 추가 확인되었고, 모든 고분의 모습을 드러냈다.

3 출토유물

조사 이전 이미 모두 도굴당하였기 때문에 출토된 유물은 거의 없다

중상총(5호분)에서 당시의 옷조각, 목관파편, 금동투조금구, 금동 꽃무늬 모양금구, 중하총(2호분)에선 금동관못 등, 7호분에선 관장식용 금조각, 금박못, 쇠못, 금사, 관파편, 불탄 나무조각 등이 수습되었다.

극히 소량만이 발견되었지만 관못과 금동유물등을 볼때 이 곳 무덤에도 공주 무령왕릉 못지않은 많은 유물이 묻혀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4 특징

능산리 고분군은 전형적으로 풍수지리사상에 걸맞는 묘지로써의 지형을 갖추고있다 뒤쪽에 산이 있으며 각각 옆산이 동청룡, 서백호 앞산인 염창리산을 남주작으로 삼았다. 고분은 모두 원형봉토분이며 전형적인 굴식돌방무덤이다.

1. 동하총(1호분)
능산리 고분군에서 가장 유명한 고분이다. 바로 능산리 유일의 사신도가 그려진 무덤이라는 것 때문이다. 송산리 6호분과는 다르게 굉장히 정교하고 아름답게 채색되어있어 백제 그림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사신도는 고분을 개방함과 동시에 빠르게 퇴색되어 현재는 많이 손상되어있다. 이에 고분을 영구폐쇄 하고 능산리 모형 전시관에서 동하총의 내부를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사비시대 중후반의 굴식돌방무덤 형식이라는 점과 사신도가 그려져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위덕왕릉으로 추측하고 있다. 맨위의 사진중 고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는 곳이 바로 이 동하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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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하총(2호분)
능산리 고분군에서 가장 먼저 축조되었다고 전해진다. 송산리 고분군의 천장을 아치형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이 이 무덤에 남아 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축조되었으리라 생각되고있다. 단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재료가 벽돌에서 돌로 바뀌었다는 것이다.(벽은 장대석으로 만들었다) 제일 먼저 축조됐다고 하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성왕릉으로 추측하고있다.

3. 서하총(3호분)

4. 서상총(4호분)

5. 중상총(5호분)

6. 동상총(6호분)

7. 7호분
원래 능산리 고분군에는 왕릉급고분이 6기밖에 없는 줄 알았으나 후에 7호분이 추가로 발견되면서 7개로 늘어났다. 다른 무덤들과 크기가 똑같은 것으로 보아 왕 또는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조사 이전 도굴당해 유물은 얼마 없었다.

8. 의자왕릉(의자왕의 가묘)
()은 능산리 고분군 입구에서 북쪽으로 걸어가다보면 나온다. 이곳엔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의 가묘가 있다. 의자왕이 이곳에 돌아와 다시 잠들기 전까지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의자왕에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의자왕참조) 백제 멸망후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은 그 곳에서 숨을 거두고 낙양북망산에 묻혔다고 전한다. 1920년 부여융 태자의 묘지석만 출토되었고 후에 1995년 부여군은 의자왕의 무덤을 찾고자 하였다. 결국 낙양시 맹진현 봉황대촌 부근에서 의자왕의 묘역으로 추정되는 곳을 확인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시신, 목관의 흔적과 지석은 찾을 수 없었다. 당시 북망산은 이미 오랜 중국의 혼란기를 거치며 도굴로 엉망진창이 되어있었고 의자왕 바로 옆에 묻혔다던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손호나, 진나라의 군주 진숙보의 무덤에 도굴갱이 훤히 뚫려있었으니 진짜 의자왕릉은.... 어떻게 되었을지는 뻔하다. 결국 중국으로부터 부여융 태자의 묘지석 복제품과 의자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의 흙을 퍼서 한국으로 가져왔다. 이 후 부여 고란사에 봉안하였다가 능산리 고분군에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묘를 조성하고 백제의 장례방식으로 묘지신에게 땅을 구입한다는 의미로 매지권과 의자왕의 품성과 일대기를 기록한 자체적으로 만든 지석, 부여융의 묘지석 복제품을 관과함께 각각 의자왕릉과 부여융묘에 매설하였다.

그 외 3, 4, 5, 6호분은 모두 사비 중기의 평범한 굴식돌방무덤이었고 이 무덤들 중에 혜왕법왕 그리고 왕비의 릉도 있을 것으로 추정하나 이 두왕은 재위기간이 굉장히 짧은데다가 기록 또한 많이 남아 있지않다. 무덤에도 특별한 특징이없고.....따라서 추측할 근거조차도 남아있지않다.....안습

5 언제 도굴되었나?

능산리 고분군은 모두 도굴되어 유물은 극소량만이 수습되었다. 다만 언제 도굴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는데 일제강점기에 도굴당했다는 이야기와 백제 멸망당시 도굴당했단 이야기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멸망당시 당나라 군대가 도굴하였다는것이 가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시에는 고분을 만든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후대에 뒤늦게 발견된 7호분또한 그때에는 훤히 드러나 있었을 것이고 때문에 숨겨져있던 고분조차 도굴당한채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당나라 군대에 의한 도굴은 비단 이 곳 능산리고분군만의 문제는 아니다. 부여주변의 지방호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들도 현대에와서 발굴했을때 천정이 뚫려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모두 이때 도굴당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다만 가끔 도굴되지 않은 무덤들이 뜨문뜨문 나오기는 하나 극소수이다. 게다가 능산리고분군은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곳에 무덤을 만들어서 산중턱에 만든 무령왕릉같이 숨어있는 고분조차 없었다... 이는 한국 고대사나 지방사를 연구하는데 굉장히 큰 애로사항이 되고있다. 천하의 개쌍놈들

그렇다고 일본이 잘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발굴조사라는 명목으로 도굴에 가까운 행위를 했기 때문에 능산리 고분군 또한 이것의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하여튼 이래저래 능산리고분군은 수난의 역사만을 가지고 있다. 안습;
  1. 후술하겠지만 가묘다. 실제 의자왕은 낙양 북망산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