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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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相占)
물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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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爲相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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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啓示占)
주물상점
(呪物相占)
점성술풍수지리관상학주역승부점해몽신장대
사주명리학천체점/에어로맨시수상학/카이러맨시육효인사점현몽수정구슬
토정비결천기점족상타로 카드기물점공수동전
아제레 이파(이파 점술)동물점혈액형점윷점심령술신탁방울
이릭 비티그식물점오쿨로맨시카토맨시데모노맨시오룬밀라게티아
  • <한국사주명리연구>(저자 김만태, 민속원) '<그림 4> 점복의 유형' 참고


pungsu1.jpg[1]

내가 만리장성 만들면서 땅의 지맥을 끊었으니 죽어 마땅하다. - 몽염

몽염 항목 봐도 알겠지만, 사마천도 부질 없다고 디스한 바 있다.
한국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사이비이자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믿고있는 미신이자 유사과학이다. 맹신하지 말자.

1 개요

21세기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인간들의 전유물
과 땅, 의 흐름을 읽어 이것을 길흉화복에 연결시키는 지리. 風水地理.

삼국시대불교의 교리와 민간에 뿌리내리고 있던 토속신앙이 결부되어 현재의 풍수지리가 되어 이어져 내려왔다는 설이 대세이며, 이후 조선시대에 완전히 정착해 널리 퍼져나갔다고 한다. 다만 제도화된 풍수지리사상 자체는 일단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2] 사실 정설 정도가 아닌 것이, 중국의 풍수 사상은 삼국시대보다 천년 이전 시대에 등장한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산과 물의 형세, 동서남북의 방위 등을 고려해 입지가 좋은 곳을 찾게 되며, 이렇게 지리적 조건이 좋은 장소를 명당이라고 부른다. 이런 명당에 묘나 집을 짓게 되면 자손대대로 정기를 받아 복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보통 배산임수의 형지가 대개 명당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실 이런 지형은 볕이 잘 들면서도 물을 쉽게 구할 수 있고 겨울에 찬 바람을 뒤의 산이 막아주는 효과가 있어 실제로도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기도 하며, 학계 제도권에서 연구되는 풍수지리는 대부분 이렇게 신비주의적인 측면보다는 자연과학적인 차원에서 풍수지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 학파의 유명인은 최창조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다만 이런 건 어디까지나 그 원리를 자각하지 못한 채 제 나름의 방식대로 정의하려던 옛 것들을 현대과학으로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의 일부에 불과하며 실제 지리학과 교수들도 어디까지나 참조하려고 접근해보는거지 풍수지리 자체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과거 선조들이 풍수지리에서 가졌던 신비주의적인 관점을 유지하거나, 그런 관점의 존재와 유래를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파도 있다. 일반적으로 돈 받고 터 봐주는 대중 사회의 지관이나 지관 시민단체들은 이 쪽 노선이며,(이중에서도 젊은 연령층일수록 후자가 많다) 학계에서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으로는 조용헌 교수가 있다.

이 풍수지리 때문에 너도 나도 묫자리로 쓰기 좋은 명당 자리를 차지하려고 기를 쓰고 싸우게 되었고, 그 결과 명당으로 점지된 장소는 순식간에 땅값이 치솟아오르는 역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일제강점기시절 일본에서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조선의 주요요지에 쇠말뚝을 박아놓았다는 주장도 있다. 대만에도 비슷한 설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이론 자체로만 보면 풍수지리는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일종의 인문지리학적인 학설로 의외로 현실을 반영[3]하고 있다. 이는 풍수지리가 기본적으로 역사적 경험에 의거해 구성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다만 풍수를 설명하는 방법론은 음양오행과 주역을 기반으로 했으나, 그에 못지 않게 경험적 법칙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다 풍수가의 직관을 중시하는 등 전반적으로 논리성이 떨어진다. 때문에 과거나 지금이나 같은 지형을 놓고도 해석이 분분했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도 많았다.

집터나 묏자리, 근처 지형을 바꾸는 공사를 괜히 공포스럽게 만드는 그 연출력은 높이 살 만하다. 물론 정말로 어디 잘못 건드렸다가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글쎄 그게 과연 어디를 잘못 건드렸기 때문에 집안이 박살나는 걸까? 또한 일부 풍수학설에 사고가 매몰된 사람들은 사고나 재앙이 연이어 터지면 그 원인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풍수라든가 묏자리나 집터로만 연관지어 생각하려고만한다. 이는 분명히 풍수학설의 부작용이다.

이 영상을 보면 정말 "아주 근거가 없는건 아니라는게 맞는듯"(...) 명당이랍시고 비싼 돈주고 샀는데 이래버리면 대판 싸움난다(......)
당연한 말이지만 길한 자리라고 해도 목적에 맞게 써야한다. 이건 상식이 부족해서 불러온 참사.

서구권에서는 중국어 발음을 따서 Feng shui라고 한다. 사실 풍수를 가장 진지하게 따지는 곳은 역시 중국. 다만 본토보다는 홍콩, 대만에서 더 잘 따지며 본토는 문화대혁명과 대약진 운동을 거치고 난 이후 풍수를 거의 따지지 않게 되었다. 홍콩에서 풍수와 관련된 유명한 사례가 바로 HSBC중국은행이 마천루를 짓게 되면서 일어난 해프닝.[4] 각 항목을 참조할 것.

사족으로 수맥은 동양의 풍수지리사상이 아닌 서양에서 유래한 개념. 그런데 자칭 풍수지리의 전문가라는 사람 중에서도 두 가지를 구별하지 못하거나 뒤섞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더 볼 필요도 없는 사이비.

2 한국의 풍수지리

한국의 풍수지리의 유래에 관해서는 흔히 신라 말기에 불교 선종의 승려들[5]중국에서 수입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생설[6], 신라 중기 도입설 등도 근거를 갖고 있어 여전히 논의중인 상태이다.

다만 이 학문이 역사적으로 눈에 띄게 성장한 것은 후삼국시대로, 신라 말기 이전 도입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 이전에는 극히 일부 지배계층만의 고급 지식이었다고 주장한다.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의 호족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선종과 함께 인기를 끌고, 사회 전환의 추진력이 됐을 때였다. 호족들은 저마다 자신의 근거지를 명당화해 자기 권위를 확립하였으며, 지방에서 어느 정도 커진 호족들은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반란 루트를 타기도 했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발전하여 조선시대에 가장 번성하게 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사람이 살아가는 땅인 양택을 중심의 풍수학설이 사람이 죽은 뒤에 묻히는 땅, 음택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설화나 야사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신라시대에는 석탈해가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호공의 집을 뺏었다고 하며 고려 시대에는 왕건의 아버지가 왕기를 받기 위해 개경에 자리잡았다고 하는데, 이는 주거 중심의 풍수지리의 학설을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반면 조선 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묏자리가 좋았던 덕에 이 되었다, 세종의 묘를 잘못 써서 장손이 망했다, 흥선대원군이 묏자리를 '만 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두 사람의 황제가 나오는 자리'에 잡아서 대한제국의 말로가 비참했다는 등 묏자리 중심의 풍수학설을 반영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조선시대의 사대부 유학자들은 '풍수지리는 미신같은 괴력낙신이니, 그렇게 풍수가 중요하면 공자님이 왜 한 마디도 언급을 안했냐느니 이런 걸 추종해서야 되겠냐'고 신나게 떠들다가 조상 무덤 자리는 풍수지리 상으로 좋은 곳에 잡으려고 몇 대에 걸쳐서 산송을 일삼곤 하는 참으로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다. 풍수를 믿던 유학자와 공자 말씀대로 미신이라고 까던 유학자가 따로 있었던 것 아닐까

현재의 풍수학설은 민간에서는 토착신앙 비스무리한 것이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묏자리 잡는 용도로 사용되는 일종의 미신 취급을 받지만,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조상 묘는 명당에 모시려 기를 쓰고 있으며 관공서나 건물의 입주 등 실생활에도 응용되고 있다. 국립묘지, 박물관, 시청과 도청 급의 건물들은 모두 풍수를 고려하여 위치를 선정한다고 하며, 홍콩은 도시 자체가 풍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세종시 건설에서도 풍수지리가 고려되었다. 정치에 이용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물론 정치에 이용된 것치고 좋은 결말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기업 건물이 풍수지리 자문을 받아 짓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도시전설의 영역.

한국사에서 풍수지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도시는 단연 개성으로, 도시 배치 자체가 송악산자락의 지형에 최대한 맞춰져있다. 궁궐인 만월대를 둘러싼 궁성은 시가지 서북쪽 끄트머리를 차지하고 있고, 궁궐의 정문은 동향으로 나 있으며, 도로망 역시 바둑판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궁궐이 도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바둑판처럼 구획이 나뉜 부여군, 경주시, 서울특별시를 생각하고 개성시가지 지도를 들여다본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체제도 어찌하지 못한 그 난개발스러움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고려는 한국 양택풍수의 최전성기였던 시기로, 묘청이 풍수지리에 입각해 천도대상지로 건설한 평양 대화궁도 드넓은 대동강변이 아닌 평양 동북쪽 입불산 기슭에 쳐박혀있다. 서울로 따지면 풍수지리 좋다고 경복궁을 우이동에 박아넣은 꼴이다.이러니 나라가 그모양이지

반면 한성은 세간에 파다한 인식과 달리 그다지 풍수지리의 영향을 크게 받은 도시는 아니다. 애초에 형세가 좋다고 하여 처음 도성공사를 시작한 곳은 계룡산 신도안이었고, 신도안 건설이 중지된 이후 천도논의에서 이 분야 전문직인 서운관 관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소명당, 즉 송악 잔류를 강력하게 밀었으며, 그 와중에 하륜의 무악천도론도 제기되었다. 이런 모든 논란을 일거에 잠재운 것이 명에 사신으로 출장갔다가 돌아온 정도전으로, 그는 상소를 통해 송경(개성)이 국토의 중앙이기는 하나 땅이 너무 비좁아 도읍으로는 마땅치 못하다고 비판하는 한편, 쟤들이 음양술수 소리만 해대는데 중국사 봐도 그딴거 없거등요?라며 한양 천도를 반대하는 풍수쟁이들을 대차게 디스하기도 했다.

이곳이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漕運)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한되는 것은 한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안으로 궁침(宮寢)과 밖으로 조시(朝市)와 종사(宗社)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으니 왕자의 거처로서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말씀에, ‘어릴 때에 배우는 것은 장년이 되어서 행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평일에 배운 바로써 말하겠습니다.(중략) 천하의 큰 나라로서도 역대의 도읍한 곳이 수사처(數四處)에 지나지 못하니, 한 나라가 일어날 때, 어찌 술법에 밝은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진실로 제왕의 도읍한 곳은 자연히 정해 좋은 곳이 있고, 술수로 헤아려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후략)

태조실록 6권 3년, 8월 12일(기묘) 2번째 기사.

도시의 입지 선정에 있어서 북악을 진산과 주산, 주맥 등을 따지는 수준의 기본적인 배려는 있었으나 기존에 아마도 풍수에 입각해 지었을 남경 이궁은 완전히 배제해버리고, 대신 북악산 아래에 네모반듯한 형태의 경복궁을 새로 지었는데 처음부터 풍수지리를 최대한 따졌다면 아마도 창덕궁과 같이 비뚤어진 모양새의 궁궐이 나왔을 것이다.풍수쟁이들은 경복궁을 저렇게 지어서 나라가 망한거라고 이빨을 깐다

과학적 근거는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숭례문 화재 당시 수호상인 해태상이 이전되고, 서울역 앞에 있다던 화기를 가라앉히는 연못은 사라진지 오래고, 관악산 서울대학교 출신 고위직이 많아졌을때 비로소 숭례문에 화가 났다는 말도 있다. 물론 후자의 이야기는 군사정권 시절을 설명하지 못해 이야기 정합성이 떨어진다.

오늘날 매스컴에서 논하는 풍수는 거의 말장난으로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식이 많다. 성공한 사람이 많이 나오면 대충 말로 둘러대서 이러쿵 저러쿵하여 말빨로 대충 처리한다.

미스터리, 심령 프로그램도 많이 다루는데, 프로그램 연출을 아주 무섭게 한다.

3 구분

양택 풍수사람이 사는 집을 지을 자리의 위치나 방향 등을 따져 좋은 자리에 집을 짓고 거주자와 후손들이 좋은 기운을 받는 것을 연구하는 풍수다.
음택 풍수죽어서 묻힐 때 무덤 자리를 따져보고, 좋은 자리에 묻어 그 후손이 이익을 받는 것을 연구하는 풍수다. 우리나라는 현재 이 음택풍수가 과열되어 지나칠 정도로 호화롭게 장례를 하는 문화가 생기는 데 영향을 주었다.
실내 풍수홍콩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인구가 밀집하여 더이상 음택 풍수를 논하기 힘들어지자[7] 그대신 실내의 가구 배치나 배색 등으로 복을 불러들이고자 하는 풍수다. 홍콩 외에는 일본에서 상당히 성행하고 있다.

4 하위 항목

  1. 여자의 성기가 연상된다고 개드립 치는 사람이 있는데 실제로 과거 중국의 문헌에도 모습이 음부 닮았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여성기를 본따서 모사한 것일수도?
  2. 애초에 풍수지리라는 말 자체가 중국어다.
  3. 일례로 배산임수(산을 등지고 물을 근처에 둔 지세(물을 앞에 둔 지세는 아니다. 그렇다면 배산전수라 하였을 것이다.))는 실제로 농경사회에서 집 짓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4. 중국은행이 빌딩을 모양으로 지으니까 바로 옆에 HSBC가 빌딩 옥상에 대포모양 장식을 해버렸다는 흠좀무한 이야기이다.
  5. 도선 등
  6. 이쪽은 입지가 좁다.
  7. 현재 홍콩은 공동묘지가 일반적인 매장방식이며 그 공동묘지에서 산책을 하고 점심식사를 할 정도로 주거지와 밀접해있다.
  8. 좌청룡 우백호는 배산임수를 논할때 필요한 형세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