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니탕개(尼湯介)의 난.
조선 선조 16년(1583년) 1월~7월에 걸처 함경도 북부의 6진(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에서 벌어진 여진족의 변란을 일컫는다.
이 당시 여진족 세력은 최대 3만여에 달하는 무장세력으로 조선측 영토를 침범해 왔는데, 이는 임진왜란이전 조선이 직면한 최대규모의 전란이였으며, 조선측은 이 이후 문제로 거론된 여러 방위체제를 재검토하여 진관 체제에서 제승방략으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세종대왕시기의 북방개척 이후 에도 지속적으로 함경도 쪽 방위에 신경을 써 왔다. 4군 6진 중 유지의 어려움으로 인해 4군을 폐한 이후에도(폐사군) 두만강 유역의 6진의 방위에 있어서는 매우 단호한 태도를 보여왔다. 김종서가 집필한 제승방략(해당항목 1번)에 따르면 6진에는 봉수가 총 82개, 수호처(순찰지)가 94곳, 후망(육상의 고정 관측지점) 2, 해망(해상의 고정 관측지점) 11개 등 극히 치밀한 방위체계가 짜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만큼 이곳에 대한 방어 의지가 강경하였음을 뜻한다.
그러나 함경도 북도 일대의 지리적 특성과 부족한 인구로 인해 여타 지역처럼 단일한 진과 관만으로 자체 방어가 불가능했다. 이때문에 진관 체제를 구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실제로 제승방략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수호처가 매우 많고 해당 지역에서 순찰 도중 외침 발견시 즉각적으로 전투를 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함경도 북부의 인적 자원에 비해 방어할 지역이 매우 넓어 모든 요해처에 방위병력을 배치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해당 지역의 토착병들은 지속적인 전투 대비로 인해 여타 지역에 비해 확실히 그 질적 수준에서 우위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해당 지역에서는 "女人이 지킨다 해도 남방과는 다를 것"[1]이라는 호언장담이 있었는데, 이는 그만큼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전투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높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선조 초기의 여진족들의 정세는 상당히 복잡하였다. 특히 누르하치의 발호가 이때무터 시작되었는데,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던 1583년은 이러한 누르하치가 본격적으로 여진족 내에서의 세력다툼에 참여한 시기로, 명나라 측의 막대한 지원을 받던 누르하치의 세력 팽창은 여진족들 내부의 정세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조선 근처에 거주하던 일부 번호들은 마침 몰아닥친 흉년으로 인한 식량부족과 세력다툼 등을 이유로 세력을 결집하여 조선을 공격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시애의 난과 이후 벌어진 요동의 건주여진 토벌 이후부터 건주여진과의 조공관계가 끊어졌고, 중종대 이후 해서여진 및 야인여진과의 조공관계도 단절되어 여진족에 대한 정세를 원활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그 결과 함경북도의 6진은 사전에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1583년 1월 말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여진족의 공세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이 니탕개의 난이다.
2 1차 전역(1월 28일 ~ 2월 16일) - 경원진 전역
최초의 전투는 경원진에 소속된 아산보에서 벌어졌다. 당시 함경북도에서는 분위기 자체는 심상치 않다고 파악하고 있었으나 이전과 비슷하게 식량의 약탈 수준에서 종료될 것으로 보고 별다른 준비는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정탐보냈던 병사들이 사로잡히고 이를 사로잡은 경원 인근의 여진족 우두머리 우을지(迃乙知)[2]. 아산보가 공격받자 경원부사(慶源府使) 김수(金璲)와 판관 양사의(梁士毅)는 구원을 나섰으나 패하면서 경원성으로 철수한다.
이 소식을 들은 북병사는 북도 전역에 비상을 걸었으나 종성(鍾城)과 회령(會寧)의 번호들이 우을지에게 합류해 난에 가담하면서 일은 더욱 커졌다. 특히 회령 지역의 여진족 수장 중 한명이었던 니탕개(尼湯介)의 세력이 가장 컸다.
1월 28일, 여진족 세력은 1만여에 달하는 휘하 부족들을 이끌고 경원진을 공격한다. 당시 경원진 일대의 방위전력은 435명 정도로 추정된다. 당연히 수성전에 전념할 수밖엔 없었으며, 김수와 양사의는 제각각 방위구역을 정하고 방어전에 들어가나 서문을 맡았던 전 만호 이봉수가 여진족 군세의 규모를 보고 달아나는 바람에 서문이 돌파당해 성 대부분이 약탈당하게 된다. 단지 무기고 및 식량창고와 같은 주요 거점만은 조선측이 끝까지 지켜내자 여진족은 일시적으로 철수한다.
다음날, 여진족은 무기고를 노리고 재차 공세를 가했으나 조선측은 전날과는 다르게 강하게 반격해 왔으며, 때마침 온령부사 신립이 합세하자 여진족은 패퇴하였다. 이에 조선측은 추격전을 벌일 생각을 가지기도 했지만 전력 차가 매우 컸기 때문에 이를 포기했다.
2월 9일, 후퇴했던 여진족은 재차 전력을 정비해 훈융진을 공격한다. 훈융진은 경원진 소속의 주요 진포 중 한곳으로, 두만강의 돌출된 부위를 감제하였기에 병력상 우세를 점한 여진측이 이를 최대한으로 살리기 좋은 거점이였다. 조선측도 이를 알고 있어 총 23개의 진포 중 세번째로 큰 규모의 방어거점을 구축했고, 자체 병력도 평시 153명으로, 5번째로 많은 병력을 배치하였지만 만단위 이상의 전력이 투입된 여진측에 비한다면 극히 부족한 병력임에는 확실했다.
여진측은 성의 사면을 포위하고 충교(衝橋)를 만들어 가며 들이첬으며, 훈융진은 거의 함락 직전까지 몰린다. 그러나 황자파(黃柘坡)에 주둔 중이던 신립과 유원 첨사(柔遠僉使) 이박(李璞)이 재차 구원을 오자 여진측은 산맥을 타고 후퇴한다. 또한 신립은 이때 훈융진을 구원하러 가던 중 공격받던 안원보를 구출했고, 이후 안원보의 병사들은 경원진으로 철수하였다. 또한 첫 전역에서 공격받은 아산보에서도 병사들이 철수했고, 이후 여진족이 이를 점거한 것으로 보인다.
지속적으로 함경북도 일대의 전란이 계속되자 북도우후(北道虞候) 이인길(李仁吉)이 겁에 질려 숨어다니는 등 함경도 일대에서는 전란에 대한 공포가 팽매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후방의 길주목사 이난수도 겁을 먹고 명령에 불복종해 군대를 내지 않을 정도였다고.
이에 2월 16일, 조선측은 여진족에 대한 보복조치로 함경북병사 이제신의 지휘 하에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 부령 부사(富寧府使) 장의현(張義賢), 첨사 신상절(申尙節)과 군관(軍官) 김우추(金遇秋)·이종인(李宗仁)·김준민(金俊民)등이 세 길로 나누어 두만강을 건너 신립과 변국간은 금득탄(金得灘)·안두리(安豆里)·자중도(者中島)의 450여 굴을, 신상절과 원희는 마전오(麻田塢)를, 김우추, 장의현, 이종인, 유중영, 권홍 등은 상가암(尙加巖)·우을기(于乙其)·거여읍(車汝邑)·포다통(浦多通)·개동(介洞) 등의 80여 굴을 불태우고 제각각 수십에서 수백여 급에 달하는 전과를 올렸다.[3] 이후 일시적으로 니탕개의 난은 소강 상태에 접어든다.
이후 조정에서는 도호부였던 경원진의 함락을 이유로 경원부사(慶源府使) 김수(金璲)와 판관 양사의(梁士毅)를 처형하였으며(2월 26일) 이 처형을 3일간 연기시킨 이제신을 파직시켰다. 또한 오운(吳澐)과 박선(朴宣)을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경군 일부를 이끌고 먼저 파견하고, 경기감사 정언신(鄭彦信)을 우참찬 겸 도순찰사로,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용(李)을 방어사로 특별 제수하였다가 다시 이를 조정해 남병사(南兵使) 김우서(金禹瑞)를 방어사로, 이용을 남병사로 삼았다.
이때 이들이 이끌고 간 병력에 대해 선조실록에는 용사 80명, 수정실록에는 용사 8000여 명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데, 먼저 보냈다는 기록이나 남도 일대에서 병력을 추가 모집한 것, 이이갸 병력 확보를 위해 노력한 것 등을 볼때 일단 선발대로 80명을 보내고, 이후 병력을 증강하여 최종적으로 8000여 명에 달하는 병력이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도순찰사와 방어사의 선발과 파견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데, 이전까지의 여진족 침입에 대해서는 함경북병사를 정점으로 하는 함북 일대의 군사지휘체계를 유지하면서 조방장 등 보조적 지휘관만을 보내 이를 보강하는 형식이었으나 니탕개의 난에서는 북병사와 동격인 남병사(종2품)를 방어사로 임명해 파견하고, 북병사보다 우위에 있는 도순찰사(정2품)를 파견하였는데, 이는 함경북도 자체의 방위력만으로는 방어에 성공할 수 없다는 인식을 지니고 남도 일대의 병력에 더해 후방에서의 지원군까지 함께 파견하여 전란이 함경남도까지 퍼지는 것을 사전에 저지하고자 함으로 보인다.
3 2차 전역(5월 5일 ~ 7월 19일) - 종성진 전역
경원진 전역에서 마지막 순간에 조선측의 강력한 보복공격을 당하긴 했으나 경원진을 거의 함락 직전까지 몰고 간 전과는 당시 여진족들 내에서 크게 반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종성과 회령 일대의 번호 대부분이 가담하여 그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
특히 이때 여진족 중 가장 세력이 강성했던 것은 니탕개였으며, 사실상 여진족 세력의 수장으로 활동한 것도 니탕개였다. 그는 조선측에 귀화하였다가 다시 여진족 측에 선 인물로, 함경북도 일대의 지리적 상황과 방어 체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여진족의 준동이 재차 시작된 것은 4월 말에서 5월 초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여진족은 기병 2천여를 강 건너 종성에 포진시켜 대치하면서 10여 명의 첩자를 잠입시켜 상황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이후 5월 5일, 율보리(栗甫里)와 니탕개(尼湯介)가 이끄는 여진족 1만(수정실록)~2만(선조실록)여가 종성진 본진을 공격했다. 조선측은 여진족의 공격에 대응하여 도하 저지를 시도했지만 전력상 크게 열세였기 때문에 출장군관(出身軍官) 권덕례(權德禮)·최호(崔浩)와 그밖의 토병(土兵)들 다수가 피살되고 병사(兵使)도 포위되었다. 이때 종성 부사(鍾城府使) 유영립은 피해 규모를 축소 보고하여 나중에 탄핵[4]된다.
종성진은 당시 6진 중에서도 최북단의 진영이였던데다 종성진 후방의 행영을 지나면 두만강 하류까지 바로 통할 수 있고, 이는 곧 여진족이 함경평야까지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에 종성진에 대한 공격은 조선측에게는 사건의 확대를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것이었다. 이에 조선측은 화포를 쏘아대며 방어하였고, 여타 진영의 구원군이 올때까지 수비에 전념하였다. 여기에 호정이라는, 니탕개와 사이가 좋지 않던 여진족 세력이 조선측에 가담, 니탕개 세력이 종성진을 공격할 때 니탕개 세력의 본거지를 불태우고 견제하여 종성진에 대한 공격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후 니탕개는 세력을 정비하여 5월 13일 약 1천여 기의 기병으로 종성을 재차 공격했으나 패퇴, 5월 16일에는 동관진과 방원보를 상당한 병력을 모아(방원보를 공격한 여진족이 약 5천여 였다고 한다)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19일, 2만, 또는 3만여에 달하는 병력을 모아 동관진 한곳을 집중공격하였는데, 종성진 공격 때와 마찬가지로 이 사실을 투을지가 조선측에 밀고하여 사전에 험지를 방어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대대적인 공세가 사전의 밀고로 실패하자 니탕개는 조선측에 타협안을 제시했고, 심지어는 항복하겠다는 제안도 했지만 조선측은 니탕개를 원흉으로 보고 잡아 죽이려 했기 때문에 니탕개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를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병력을 모아 7월 19일, 2만여에 달하는 병력으로 방원보을 공격한다.
그러나 방원보는 성 전체가 강과 하천으로 둘러싸인 요새지였기 때문에 주변 진영의 구원 없이도 여진족은 방원보를 함락할 수 없었고, 이후 니탕개 세력을 중심으로 모인 여진족들은 조선에 대한 공격을 멈춤으로써 니탕개의 난이 끝난다.
조선측의 대응은 2월의 1차 침입때 걸었던 비상 체제를 유지하는 정도였다. 방어사로 임명되었던 김우서를 북도병마사로 임명해 지휘권을 통일시키고, 4월여에 전라 수사였던 이일을 경원 부사로 임명했으며 필요로 하는 물자 요청을 그때그때 수용하였다. 또한 비정기적인 무과의 선발 인원을 대폭 늘려 이 시기 전후의 무과 선발자가 약 천여 명에 달했다.
마지막으로, 난을 시작한 경원 여진족 우두머리 우을지(迃乙知), 또는 우을기내(于乙其乃)가 조선측 및 조선에 가담한 여진족들에 의해 건원보로 유인되어 포획, 참수당했는데[5] 이때 조선측에서 이를 계획한 군관이 이순신이었다고 전한다. 이는 그 이름이 최초로 조정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4 이후
니탕개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여진족의 침입은 이것으로 끝이 났으나 여진족들의 조선에 대한 노략질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것이 이순신이 첫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된 이유인 녹둔도 전투. 신립과 이일 또한 함경북병사, 남병사직을 번갈아 가며 역임하여 북방 방위에 힘썼다. 애초에 이 둘이 임란 이전 조선 최고의 무장으로 평가된 것이 이 니탕개의 난진압 과정이었다.
이러한 전체적인 여진족 침입은 1588년 시전부락 전투 이후 잠잠해진다.
5 결과
니탕개의 난은 임란 이전 조선측이 직면한 최대의 군사적 위협이었으며, 이는 조선 전기의 군사력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최초의 전역이었다. 특히 조선측은 병력 부족으로 인해 고민했는데, 이는 물론 함경도 일대에 지속적으로 닥친 자연재해와 전염병 등으로 인해 인적 자원 자체가 심각하게 고갈되어 그런 것도 있고, 함경도 일대가 원체 인구밀도가 적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후방에서 이를 충원하기 쉽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조선의 군제가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당시 무관들도 상당수는 겁먹고 제대로 싸우지 못하다가 신립이 활약한 후에야 이를 따르기 시작하는 등 질적으로도 그리 좋지 못했다. 군량미 조달 또한 문제 중 하나였다.
조선측, 특히 선조는 이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해결을 위해 부심하였다. 우선 병졸 자체를 구하기 힘들다는 데에 있어서는 군역의 대상이 아닌 공사천[6]의 신분 상승을 대가로 한 군역 편입, 군대로의 징발을 시작했다. 특히 이에는 선조가 적극적이었지만 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유연한 태도를 보였고, 사노비들을 징발하면 주인들에게 적절한 보상책을 제공해 반발을 무마하는 것으로 절충되었다.[7] 이는 양인개병제가 현실적으로 무너졌음을 인지하고 이에 집착하지 않는 특단의 대첵의 필요성을 인지한 것이다. 무관의 질적 부족에 대해서는 엄벌주의로 나아가 1차 전역에서 초전에 패전한 장수들에 대해서 사형을 내리는 등의 강한 처벌을 가해 기강을 다잡았다. 또한 동시에 무과에서 무관을 대량으로 선발하고, 서얼과 공사천 또한 무과 선발 대상임을 공시하여 신분보다는 실력에 우선시된 선발을 시도했다. 군량미에 대해서는 최초로 공납 개혁과 수미법 등 대동법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논의가 시작되게 된다.
여기에 더해, 니탕개의 난으로 시작해 시전부락까지 여진족과의 잦은 충돌 과정에서 조선측은 기존의 군제, 즉 다수의 궁기병 중심의 체제가 한계에 직면했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즉, 후반으로 갈수록 여진족들은 더 잘 무장된 중기병 중심의 군 체제로 나아갔는데, 조선측은 이에 대해 기존의 강력한 궁시만으로는 갑옷을 잘 차려입은 중기병에 심각한 대응력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인지할 수밖엔 없었던 것이다. 또한 기병이라는 전략적 기동력이 우수한 병과를 상대로는 기존의 대형 화포는 기동력에서 부족하였기에 대응이 힘들었다.
임란 이전, 조선이 이에 대응책으로 삼은 것은 총통, 특히 승자총통이었다. 선조는 명종 및 당시의 실권자들에 비해 불교에 그닥 애착이 없었고, 때문에 사찰에서 종을 몰수해 이를 총통 제조에 활용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시기 승자총통의 추가 제조는 쉽게 이루어졌고 기존의 승자총통이 포신 파열을 일으키는 사례가 많자 무쇠 대신 정철을 사용하고 포혈을 조정하는 등 승자총통의 성능 개선에도 관심을 주었다.
임란 이후에는 승자총통보다 개인 화기로 더 나은 화기, 즉 조총이 대대적으로 도입되었다. 실제로 선조는 임란 이후 여진족의 준동에 있어 조총을 상당히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광해군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에서 과도한 조총 중시는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또한, 만단위 이상의 외적은 기존의 진관체제가 상정한 외적의 규모 이상이었으며, 이에 대응하여 경장, 즉 수도에서 내려온 장수가 함경도 전체의 군을 지휘통솔하여 막아낸 것이 제승방략의 체제로 완전히 굳어진다. 즉 대규모 외침에 대응하여 도단위 이상의 군을 통합하여 방어하고, 이 지휘를 한성에서 내려온 경장이 한다는 제승방략이 완전하게 정리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적의 규모가 더욱 커지고, 지형적으로 사전에 차단하기 힘들었던 임진왜란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전체적으로 미루어 볼때 조선측은 니탕개의 난으로 인해 자체적인 군제의 문제점을 최초로 인식할 수 있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을 시작하였다. 다만 그 노력은 불충분했고, 임진왜란에서 이러한 불충분한 노력은 초반의 패전과 심각했던 임진년 전황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점에 있어 어느정도 평가절하할 수도 있을 것이나, 니탕개의 난 이후의 노력이 없었다면 상황은 더 심각했을 것이라는 데서 이는 낮게 볼 수만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