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하시 고레키요

역대 일본 총리
19대20대21대
하라 타카시다카하시 고레키요가토 토모사부로
29대임시겸임30대
이누카이 츠요시다카하시 고레키요사이토 마코토

高橋(たかはし) 是清(これきよ) / 1854년 9월 19일 ~ 1936년 2월 26일

일본정치인, 총리 및 경제 전문가. 과거 50엔권에도 등장했었다.
인생의 고락이 극명하게 갈렸던 사람으로, 2.26 사건 당시 피습당해 사망했다. 생긴건 고난은 전혀 겪지 않았을 거 같은데...

도쿄 출생. 1854년 에도 막부에 고용된 어용 화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부가 평소 알고 지내던 센다이의 하급무사 다카하시에게 양자로 보내져 그곳에서 자랐다. 두 살 때 자칫하면 과자가게의 양자로 다시 보내질 뻔 하였다가, 조모의 반대로 다카하시 가에서 계속 길러졌다.

그러다가 열세 살때, 미국 유학길을 떠났다가 사기를 당해 오클랜드노예로 팔려나가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다가 1868년 일본 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일본에 귀국했다.

그러나 귀국 이후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1872년 대장성(大藏省)의 임시직으로 채용되었다. 이때부터 대장성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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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성 시절.

그러나 대장성 임시직 이후에도 영어학교 교사, 우유사업, 광산 투자가 등 여러가지 일에 손을 댔으나, 금방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그만두기 일쑤였다. 이처럼 그는 젊은 시절 여러가지 실수와 오판으로 암담한 인생을 살았다.

그러다 1893년, 아는 지인의 도움으로 일본은행 서부지점장으로 발탁되면서 인생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고, 1895년 요코하마 정금은행[1] 지점장을 거쳐 1899년에는 일본은행의 부총재까지 승진했고, 1911년에는 일본은행 총재가 되면서 금융인으로써 명성을 쌓았다.

1913년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의 대장상으로 처음 입각했고, 이후 죽을 때 까지 하라 타카시, 다나카 기이치, 이누카이 츠요시, 사이토 마코토, 오카다 게이스케 내각에 모두 대장상으로 입각했다. 하라 타카시 암살 이후 급거 조직된 자신의 내각에서도 총리에 대장상 겸직이었으니, 그는 무려 23년간 일곱 번의 대장상을 지낸 셈이 된다. 흠좀무. 대장상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기획재정부이다. 즉 기획재정부 장관만 23년...

그는 대장상으로 있으면서 군부에 들어가는 국방 예산을 줄이고자 노력했는데, 당시 일본이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 시베리아 출병 등으로 군대, 특히 육군에 들어가는 예산이 많아져 부담이 가중되자 다카하시는 이 부분에서 예산을 줄이고 부담을 낮추려고 고생 아닌 고생을 했다. 이래저래 육군이 웬수

1921년, 총리 하라 타카시가 도쿄역에서 암살당하자, 정우회 내의 추대와 원로 귀족들의 추천으로 다카하시가 후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7개월의 짧은 임기를 수행했지만, 그 사이에도 육군의 예산 감축과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찬성해 통과시키는 등, 군부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당시 군부의 폭주와 세력 확장은 다카하시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결과를 낳아버리고 말았다. 만주사변5.15 사건이 그 예시다.

별명은 달마 재무장관(...) 별명의 유래는 대머리, 수염이 어우러진 포동포동한 외모가 친근하다는 평이 많았다고 한다. 애주가 라서 그런지 심지어 국회 본회의장에서도 술을 마셨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2.26 당시 암살 당했던 전직 총리이자 조선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와 절친이었다.

일본에서 최초로 국채 발행을 시행하였으며, 역대 일본 은행 총재 중에서 유일하게 그가 1951-1958에 사용된 50엔 짜리 지폐에 초상화가 들어간 인물이 되었다.

쇼와 경제공황을 해결한 사람이며 일본 경제 분야에서는 유명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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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말년의 모습.

1936년, 2.26 사건 당시 대장상이었던 그를 기습한 육군 황도파에 의해 자신의 집에서 살해당했다. 잠을 자고 있던 도중 그의 집에 침입한 황도파 장교가 "천벌을 받아라" 라고 소리치며 리볼버 권총을 난사하자 그도 "바보 같은 놈"이라고 일갈했고, 곧이어 장검으로 배가 갈라져 끔찍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그리고 절친인 사이토도 끔살

이후 일본은 군부를 압박할 재정 전문가를 잃어버려 군부의 폭주를 전혀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고, 군부의 무차별적인 폭주는 결국 일본을 패전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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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하는데...
  1. 후일 도쿄은행으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의 도쿄미쓰비시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