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토모사부로

역대 일본 총리
20대21대22대
다카하시 고레키요가토 토모사부로야마모토 곤노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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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藤 友三郎 1861.02.22~1923.08.24

일본의 정치인, 총리해군

히로시마 출생. 1861년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와 해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청일전쟁에 순양함 "요시노" 의 포술장으로서 종군하여 황해 해전에서 활약하였고, 러일전쟁 때에는 연합함대 참모장 겸 제1함대 참모장으로서 쓰시마 해전에 참전하였다. 해전 당시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안전이 보장된 사령탑에 들어가지 않고 함교 위에서 군인들을 독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막장인 일본군 중에서 놀랍게도 몇 안 되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흠좀무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뒤를 이어 '88함대' 구축에도 앞장 선 인물.

그 후에는 해군 차관, 오진수부 사령장관, 제1함대 사령장관을 거쳐 1915년 제2차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해군 대신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그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라 타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내각에서 해군 대신으로 유임하였다. 사이토 마코토에 이어 해군대신 제임 기간은 역대 2위. 1921년 워싱턴 회의에는 일본 수석전권 위원으로 출석하였으며, 1922년 6월 22일 정우회의 지지를 받아 내각을 조직하였다.

수석전권 위원으로 출석했던 워싱턴 회의에 출발 하기 직전, 하라 타카시 총리는 "국내의 일은 내가 정리하겠습니다, 가토 대신은 워싱턴에서 마음 껏 회담에 임해 주세요."라고 신뢰 했을 정도다. 참석 당시 각국 기자단에게 '촛불'이라는 별명을 보일 정도로 처음에는 무시당했지만 미국이 주축이 된 군축 방안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오히려 "위기의 세계를 구하는 밝은 촛불"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일본군은 이렇지 않아

당시 가토는 러일전쟁의 참전 경험으로 전쟁으로 인한 재정문제가 발생 할 뿐만 아니라 여러 피해 부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군비 부분에 있어 절대 이길 수 없는 미국, 영국과의 전쟁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일본의 국력을 기르는 동안 외교 수단으로 전쟁을 방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한 것으로 보인다. 선견지명
그러나, 무개념이었던 일본 군부는 이러한 그의 의견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해군성 자료실에 기밀서류로 보관하여 사람들이 열람하지 못하게 했다.(...) 일본이 망한 이유 직접 전선에 나가서 폐혜를 목격한 그와는 다르게 정작 내부에서 친목질과 분열만 일삼고 있었던 군부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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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고레키요 내각이 붕괴되자, 전 총리이자 원로인 마쓰카타 마사요시기요우라 게이고 추밀원 의장개먹튀 괴뢰 내각의 그 분 맞다과 의논하여 당시 몸져 누워있던 사이온지 긴모치 전 총리의 양해를 얻어 가토를 추천했다. 군축이 이루어지는 도중에 일본 해군의 반대를 억누르기 위해 신망이 높았던 가토가 적임자였고, 워싱턴 회의의 수습에도 잘 맞는 인물이었기에 원로들을 중심으로 지지를 받았다. 가토 토모사부로 외의 총리 대신 후보는 헌정회의 총재 가토 다카아키였는데, 반대 세력인 정우회 측에서는 정권 교체를 염려해 가토를 지지하게 된다.

원로들의 지지로 출범한 내각이었기에 주로 차관을 중심으로 내각을 꾸려나갔고, 정당인들이 주축이 된 내각이 아니어서 '사무관 내각'이라는 조롱을 듣기도 했다(...) 철밥통 내각 그러나, 워싱턴 회의를 이행하는 내각의 특성상 경제적 불황 속에서 행정과 재정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해군의 경우 '88함대'구축도 포기하고 전함 14척을 폐기, 건조되던 전함 6척도 생산을 중지했다. 육군삽질 전문 집단야마나시 한조 육군 장관비리로 유명한 쫓겨난 그 조선총독 맞다의 이름을 딴 '야마나시 군축'에 의거, 1922년 8월, 1923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군인들과 군수업 노동자들도 정리해고 되었으며, 병역 단축 역시 시행되었다. 당시 일본에 부담을 주던 시베리아 출병데라우치의 삽질도 기한에 맞춰 철군을 완료시켰다. 군 출신 총리여서 이러한 계획은 성공했다. 일본의 재정 부담은 대폭 줄어들었고, 개혁에도 성공했다. 여러 부분의 현안을 처리하는 것도 이미 계획이 짜여져 있었기에 적절히 실무를 처리하는 차관급 대신으로도 유지가 가능했다. 태평양 전쟁 일으킨 일본군의 삽질을 보고 무덤에서 이불킥
군 출신 총리의 내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심법이 통과 되어 사법과 무관한 민간인들도 재판에 참석할 수 있었으며, 중의원 선거법 조사회를 설치하는 등 보통선거를 원하는 여론을 경청한 것으로 보인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비합법적으로 공산당이 결성되자 공산당원들을 무차별로 체포했다. 일본 공산당은 영원한 샌드백

총리치고 괜찮은 편이었던 가토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화장실 문 너머로 대화했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고, 내각 성립을 비롯, 워싱턴 회의 때도 '잔촉 내각'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얼굴빛이 창백 했다고 한다. 대장암에 걸려 제국 의회 개원식에서도 참석 못했고, 1923년 8월 24일 사망한다.
그가 사망한 뒤 우치다 고사이 외상이 총리 직무를 대리로 맡았으나, 그 공백기간 중에 대참사가 발생했고, 총리의 공백으로 인해 정부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오래 살아 있었다면 재해 수습이 빨랐거나 조선인 학살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의 민주주의도 빠르게 진행 되었을 것이라는 평이 많다. 뛰어난 능력과 개념에 비해 건강이 받쳐주지 못한 비운의 정치인.

위장이 약한 탓에 건강에 신경을 써야했다고 한다. 폭식을 하지 않고 소식을 했다고. 워싱턴 군축 회의 때도 약간의 식사를 하자 "예전 포츠머스 회의에 나왔던 고무라 대표가 폭식을 하다가 위장을 나빠져서 일을 그르친 것을 보고 반성하는 의미로 가토 대표는 식사를 줄이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취임 전부터 건강이 안 좋았다. 치질, 대장염을 앓고 있어서 지인들이 "가토 해군대신이 총리직에 임명 되면 건강을 해친다. 해군 대신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제발 원로들과 가토 대신을 설득해달라."라고 할 정도로 우려를 표했다. 심지어 임명 직후에도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라고 묻자 "응.."이라고 힘 없이 짤막하게 말했다고.
젊은 시절 해군에서 1,2위를 다툴 정도로 폭주한 애주가였다고 한다. 해군에서 근무 했던 사이토 마코토도 "아침부터 컵에 술을 따라 마시고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라고 할 정도로 해군들은 음주가 많은 편이었다.

같은 지역 사람을 쓰는 일친목질을 싫어했다. 고향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같은 지역 사람이어도 능력의 유무에 따라 기용한다. 고향 사람들은 섭섭하겠지만 공무에 있어 어쩔 수 없다. 공적인 것은 배제하고 내가 사적으로 어려운 자를 도와주는 선에서만 도와준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메이지 시대 당시 사츠마, 초슈 번의 친목질에서 일어난 폐혜를 보고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신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망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만화를 좋아하던 총리였다. 어? 신문이나 잡지에 나오는 만화를 스크랩해서 보존하며 가족들에게 보여주면서 만화에 대해 평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평소 무뚝뚝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대화를 할 때 촌철살인에 가까운 풍자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만화에서 보고 배운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

메이지 시대, 해군 분대장으로 복무 할 때 파나마 지역으로 군사연습을 하러 갔다. 쓰쿠바 호에서 당직 근무를 하던 도중 갑자기 고래가 출몰하자 허공에 발포를 명령했다. 총성에 놀란 함장이 "왜 지시 없이 발포했습니까?"라고 묻자. "놀라실거 없습니다, 함장님. 바다에서 커다란 괴물(...)이 나와 진로를 방해할 경우 큰 일이 날 수 있기에 녀석들을 보호 차원에서 놀라게 하여 조용히 보내주려고 허공에 대고 쐈습니다."(...) 함장은 크게 웃더니 "함부로 쏘면 안 됩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허공에 발포하는 것을 허가했다고 한다. 그린피스가 요기잏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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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사진을 보면 건강도 안 좋았고 무뚝뚝한 군인의 모습을 보였지만, 기념일에 손자와 함께 찍은 사진에서는 기분 좋게 웃었다고 한다. 그 순간 기자가 잽싸게 촬영해서 그 모습이 신문, 잡지 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보도 되었다. 얼마나 안 웃었기에 화제가 된 걸까 손자들에게 편지를 쓸 때는 읽기 편하게 가타카나로 적었다고 한다. 그도 여느 집 할아버지와 다르지 않게 아이들을 좋아했다. 총리에 오르고 나서 후미진 나가타쵸의 관저에서 사는 것보다 그동안 살았던 조그만 집에서 귀여운 손자들과 함께 사는 게 좋다고 말할 정도로 가족을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