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알리기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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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세워진 단테의 동상. 사후의 위상을 반영하듯 대단히 엄한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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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단테의 초상화. 생몰년을 보면 알겠지만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엄격한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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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 대학에서 2007년 두개골을 바탕으로 재현한 실제 얼굴. 그렇게 잘생겼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동안 전해졌던 것보다는 잘생겼고 엄하다기보다는 친밀한 인상이다. [1]

Dante degli Alighieri
1265~1321

1 개요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lighieri)는 이탈리아의 시인이다.
이름은 두란테'이지만 애칭으로 단테라고 불린 게 더 유명해져 이름보다 더 유명하고 알려졌다.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단테라는 이름은 사실상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후에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나 캐릭터는 이 인물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보면 된다.

신곡으로 유명하다. 단테의 거리 , 단테이즘, 단테학자 등 그의 저서들은 지금도 학술적으로 연구되고 있을 정도로 관련 업계에서는 가히 독보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엄청 오래된 옛날 사람이라 자세한 기록이 부족한 상황. 이탈리아에 있는 생가도 사실 상상력을 더하여 복원한 집이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이행하던 시기의 이탈리아를 대표할만한 석학이자 작가이며, 무엇보다도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로 잘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표준어는 근대국가의 산물이지만 특히 소규모 도시국가가 난립해 있던 이탈리아에서는 각 지역마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방언들을 일상언어로 삼았고, 이런 각 지역 방언들은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건 아니지만 같은 언어의 방언이라고 하기에는 또 미묘하게 차이가 큰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런 방언들 사이에서 '표준 이탈리아어'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중심축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단테가 사용한 언어였다. 즉, 이탈리아의 표준어는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로마말이 아니라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토스카나말을 기준으로 제정된 셈이다.

리다이렉트는 농담이니 그냥 한번 웃고, 사실 토스카나 방언이 근현대 이탈리아어의 모체가 된 것은 로마의 경우 고위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라틴어가 교양인의 언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각국에서 온 고위 성직자나 사절들 덕분에 온 유럽의 언어들의 영향을 조금씩 받았던 탓에 이탈리아어의 모체로 삼기 부적절했던 탓이 크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경우, 롬바르디아 방언은 프랑스의 영향이 큰 데다가 이탈리아에 합류하는 것이 늦었고 베네토 방언의 경우 그리스어, 터키어, 독일어(오스트리아계)의 영향까지 받은데다가 미묘하게 다른 이탈리아의 각 방언들과 차이가 컸으며 남부 나폴리 지역의 방언은 스페인어의 영향을 크게 받는 등 역시 이탈리아어의 모체로 삼기 부적절했던 면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즉, 문화나 지정학적 측면에서 피렌체 방언이 표준어의 모체로써 가장 적절했던 것이지 순수하게 단테의 공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셈.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이탈리아 표준어의 모체가 된 것은 토스카나 방언이고, 자신의 저작을 통해 토스카나 방언을 갈고 닦은 단테가 실질적으로 현대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이전까지 주로 라틴어를 쓰던 토스카나 지방의 교양인들이 지역 언어로 문화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역시 단테가 자기 작품에서 사용한 언어의 완성도가 높았기에 단테의 언어를 기반으로 대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로써의 사회적 영향력은 거의 만렙을 찍은 셈.

이 사람의 일생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1. 몰락귀족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어느정도 여유있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2. 10대 후반에 가장이 되지만 경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힘든 처지는 아니었고.
3. 젊은 시절부터 문학과 학문으로 상당한 명성과 사회적 지위를 얻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당시 공화국이던 피렌체의 정치무대에서도 두각을 드러냈지만
4. 정치적 분쟁에 휘말려 장년의 나이에 추방당했고
5. 이후 망명지에서의 사회적 활동이나 창작활동에 매진하면서도 평생동안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결국 타향에서 죽었다.

정도가 된다. 간단하지만 꽤나 굴곡진 인생.

참고로 그의 무덤은 라벤나에 있다.(피렌체에서 찾지 말자)

또한, 피렌체의 단테 생가같은 경우... 실제 단테가 태어나서 살던 집은 사라진 지 오래고 기록+상상력에 의하여 복원된 것이다. 다만 복원된 건물 내부는 단테 박물관으로써 꽤 잘 꾸며져 있다. 또한, 복원된 건물 역시 단순히 단테가 태어난 자리에 새워진 건물이 아니라 당시 피렌체의 생활상과 문화적 특색을 보여주는 훌륭한 자료다. 예를 들어, 도시국가였던 피렌체의 특성상 성벽 내부는 거주자의 안전과 편리함을 보장해주는 금싸라기 땅이었고 그 제한된 땅을 가능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노력이 어떠했는지를 이 건물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1층은 마구간, 2층은 건물 주인이 직접 운영하거나 빌려주고 세를 받을 수 있는 점포, 3층 이상에는 주인 가족을 위한 응접실이나 생활공간이 있고, 꼭대기층에는 하인들을 머무르게 하거나 세입자를 받을 수 있는 작은 방들이 있다. 이런 건물 설계방식은 현대의 차고 딸린 연립주택이나 주상복합의 설계방식과 매우 유사하지 않은가? 혹시 피렌체에 갈 기회가 있다면, 방문할 가치가 있는 장소.

참고로 신곡 지옥편에는 자기 주적들도 집어넣었다(...)

그리고 베아트리체를 첫눈에 보고 반해서 온갖 시들을 지었지만 정작 베아트리체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못했다고... 이런 소심남

2 매체에 등장하는 단테

  • 이탈리아 최초의 드레드노트급 전함에도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12인치 3연장 주포탑을 거의 세계 최초 수준으로 탑재[2]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신전함이었지만, 아무래도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는지 1척만 건조되고 후속급으로 넘어갔다.
  1. 텔레그레프 기사에 나온 묘사 인용
  2. 오스트리아 해군 의 비리티스 유니부스급도 3연장을 탑재했지만, 양탄기의 문제로 인해 이 전함의 3연장 포는 실질적으로 2연장 포나 다름없었던 반면, 이탈리아의 3연장 포는 포 3문을 모두 운용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