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pope
목차
[숨기기]1 개요
반물질 계의 교황. 가톨릭 교회에서 선출이 적법하지 않거나 교회법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교황의 지위를 주장한 사람을 가리킨다.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교황으로 인정되지 않지만, 당대의 복잡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에 따라 정통/대립교황을 서로 다르게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 통상적으로는 교황청에서 발행하는 교황청 연감을 기준으로 말한다.
대립교황은 여러가지 역사적 정황에 따라서 나타났다. 세속 군주와 기존 교황의 대립이 가장 큰 문제.
2 대립교황의 출현
- 10세기 이전 : 교황 선거의 방식이 불안정했기에 선출 결과에 반발한 이들이 나타났다.
- 11세기-12세기 : 신성로마제국 황제와의 대립으로 대립교황이 여럿 나타났다. 이 시기엔 황제가 마음에 안 드는 교황을 쫓아내고 자기 마음에 드는 교황을 옹립하는 일이 잦았다. 당시 상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카노사의 굴욕을 참고.
- 14세기-15세기 : 아비뇽 유수가 발생, 이후 벌어진 혼란으로 한 번에 교황이 3,4명씩 존재하는 막장 사태가 벌어진다.
3 역대 대립교황 예시
3.1 히폴리토(Hippolytus)
2세기 후반 - 3세기 초반의 교회학자. 그리스어권에서 태어나 로마로 이주한 신학자였다. 교부사에서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유명한 오리게네스도 히폴리토의 강론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가톨릭 역사에서 첫 대립교황이라고 기록되었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갈리스토 1세에게 반발해 217년에 교황임을 선언했으나, 235년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에게 폰시아노 교황과 사이좋게(…) 사르데냐로 유배되어 광산 노역을 당했으며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유배형을 선고받자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 폰시아노와 함께 공동으로 퇴위했으며 죽기 직전에 폰시아노 교황과 화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정말로 히폴리토가 스스로를 교황이라고 자처했는지, 그리고 폰시아노 교황과 함께 사르데냐 섬으로 유배되었는지에 대해 논쟁이 있다. 살아생전에 그리스어로 방대한 신학 서적을 썼으며, 비록 그 중 상당수가 유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 수 서적이 남았다. 신학자로서 보통을 넘는 인물이지만, 비슷한 시기 인물인 오리게네스보다는 조금 떨어진다는 평을 받는다. 사후에도 히폴리토의 추종자들이 로마에서 분열의 불씨가 되었기에 한동안 이단시되기도 했다.
대립교황으로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3.2 노바시아노(Novatianus)
3세기 초중반 인물. 신학적으로는 아프리카의 교부 테르툴리아노의 영향을 받았다. 히폴리토가 정말로 교황을 자처했는지 의심의 여지가 있음을 감안한다면, 대립교황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이다.
당시 로마市 교회에서 뛰어난 학자이자 이름난 신부로, 교황으로 당선될 수도 있었던 유력한 후보였다. 그러나 251년에 코르넬리오 교황이 당선되자 매우 실망하여 지지자들을 모아 주교로 서품받아 교황을 자처하였다. 코르넬리오 교황을 지지하던 주교들이 노바시아노에게 코르넬리오와 화해할 것을 중용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교회조직을 구성하였다. 이 조직은 교리적으로는 당시 가톨릭 교회와 차이가 없었으나, 도덕적으로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하였다. 사실 당시 가톨릭 교회도 지금 기준으로는 매우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했다. 그러나 노바시아노는 그 정도를 뛰어넘는 도덕성을 요구하였다. 그 엄격함에 반하여 노바시아노를 따르는 교회조직이 세력을 넓혔으나, 결국 맥이 끊기고 말았다. 기록에 따르면 258년에 순교했거나, 혹은 박해를 받던 중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3.3 펠릭스 2세(Felix II)
355년, 리베리오 교황이 선출되었을 때,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가 옹립한 대립교황. 대립교황이 되기 전에 대부제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리베리오 교황이 유배되기 전, 로마의 성직자들은 다른 사람을 로마의 주교(교황)으로 인정하지 않으리라 맹세하였다. 하지만 황제의 압력으로 결국 펠릭스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기록에 따르면 밀라노에서 아리우스파 주교들에게 서품을 받았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당시의 상당수 평신자들과 일부 성직자들은 펠릭스 2세를 정통교황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반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서, 펠릭스 2세가 로마에서 교황으로 즉위하자 폭동이 일어났으며, 357년에 콘스탄티우스 2세가 로마를 방문하자 역시 리베리오 교황을 돌려달라는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황제는 리베리오가 로마로 돌아오는 것을 인정하였으나, 펠릭스 2세외 교회를 공동통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러자 시민들이 그런 황당한 전례는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펠릭스 2세를 로마에서 내쫓았다. 리베리오 교황은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펠릭스 2세는 로마의 외곽 지역에 정주하였으나, 황제는 단지 두 교황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막는 데에만 관심하였을 뿐이다. 365년에 펠릭스 2세가 사망하자 리베리오 교황은 펠릭스 2세를 따르던 성직자들을 설득하여 자기 편으로 합류시켰다.
후대에 역사가 왜곡되어 펠릭스 2세가 오히려 정통교황이고, 리베리오 교황이 아리우스파 이단이자 대립교황으로 잘못 전해지기도 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다. 정통교황 펠릭스 3세(483년 즉위)와 혼동되기도 한다.
3.4 요한 (8세)
844년, 그레고리오 4세가 사망하자 로마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라테라노 교황궁을 점거하고 박수갈채를 한 뒤 옹립한 대립교황. 즉위하기 전에는 부제였다. 그러나 귀족들은 라테라노 교황궁을 신속하게 재점거하고 요한을 감금했다. 또한 반대세력들을 쫓아내고 귀족 출신의 나이든 사제 세르지오 2세를 교황으로 옹립하였다. 요한을 따르는 세력이 매우 허약했던 듯 진압과정은 신속하였으며 사후처리 과정에서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귀족들은 요한을 사형에 처하자고 하였으나 세르지오 2세는 요한을 수도원에 감금함으로써 마무리지었다. 그 후 요한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언제 사망했는지도 알 수 없다.
원래대로라면 대립교황 요한 8세로 기록되어야 하지만, 워낙에 역사에서 존재감이 없는 듣보잡이라서 그런지 그냥 '대립교황 요한'으로 통한다.
3.5 클레멘스 3세(Clemens III)
11세기 후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에게 반발해 옹립한 대립교황.
1025년생으로 속명은 귀베르토였다. 30대 나이로 이탈리아의 제국상서를 하는 등 유능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1061년에 대립교황 호노리오 2세를 옹립하기를 찬동했전 경력이 있지만, 하인리히 4세가 교황 알렉산데르 2세를 달랜 덕분에 주교가 되었다. 1075년, 그레고리오 7세에게 성무집행중지를 명령받았다. 1076년에는 그레고리오 7세를 반대하는 주교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파문받았다. 1077년에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났다. 하인히리 4세는 1080년에 귀베르토를 교황으로 지명했다.
하인리히가 로마를 점령하자, 1084년에 귀베르토는 클레멘스 3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했으며,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하인리히를 황제로 대관해주었다. 그러나 적군이 로마로 접근하자 로마를 버리고 라벤나로 돌아가, 1080년부터 그곳을 거점으로 삼았다. 1090년대 중반부터 권력과 권위가 흔들리다가, 1098년에 지지세력이 로마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1099년에도 재기하려고 했지만 다시 쫓겨나 1100년에 70대 중반의 나이로 사망했다.
원래부터 잘 교육받은 유능한 정치인이었던 데다가, 말빨도 뛰어나고 특유의 카리스마도 있었다고 한다. 그 덕에 놀랍게도 하인리히 4세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신념에 따라 교황직을 수행했다. 성직매매를 금지하고 개혁을 실천했다. 뛰어난 정치술로 추기경들을 설득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민중에게도 지지받았다. 또한 포르투갈, 헝가리, 덴마크, 영국 등에서도 지지를 받은 적도 있었다.
추기경들에게 당근들 던져주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모습을 보고 적대자였던 교황 우르바노 2세도 따라했다고 하니, 정치인으로서도 고단수였던 듯하다.
3.6 펠릭스 5세(Felix V)
15세기 바젤 공의회에서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 반발해 세운 대립교황.
원래는 (오늘날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에 걸쳐 있는) 사부아(Savoire) 지방의 공작 아메데 8세였다. 아메데 8세는 당연히 평신도였으나, 15세기 중반에 아내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도 사망하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로는 행정업무는 둘째 아들에게 맡기고 자기는 외교만 맡은 채 종교생활에 몰입하였으며 기사수도회를 설립했다.
바젤 공의회가 자기를 교황으로 추대하자 오랜 고민 끝에 1439년에 펠릭스 5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직을 받아들이고 성직자로 서품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다스리던 사부아를 포함하여 몇몇 곳에서만 교황으로 인정받았을 뿐, 가톨릭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인정받지 못하였다. 정치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점점 위협이 다가오자, 1449년에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중재를 받아 교황 니콜라오 5세와 협상하여 스스로 퇴위하였다. 그 대신 니콜라오 5세는 펠릭스 5세를 주교급 추기경, 사부아와 인근 지방의 교황 대리/특사로 임명하였다. 1451년에 만 67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가톨릭 교회 역사에 등장한 <<마지막>> 대립교황이다.
펠릭스 5세 이후로도 엄격하게는 대립교황이라고 분류해야 할 인물들이 없지 않았으나, 워낙에 듣보잡들이라 대립교황은 고사하고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신자 수가 백 명 남짓한 '자칭 가톨릭 교단'에서 자칭 교황을 선출한 정도라, 실제 천주교 신자들이 어느 쪽이 정통인지 고민할 이유가 없으므로 무시한다. 역사에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립교황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펠릭스 5세가 마지막이다. 교황청 : 그럼, 당장 내가 교황이오 하는 종자들에게 먹이를 주라고?
4 현대의 대립교황
아직도(...) 일부 독립 교회에서 교황을 자칭하는 이들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 주로 가톨릭에서 분리된 이단 교회에서 이런 이들이 나오는 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역사상 의미있는 대립교황은 펠릭스 5세가 마지막이므로, 이런 대립교황들에 대해 가톨릭 측에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본다. 현대의 대립교황에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있다.
4.1 콜리나이트 교회[1] 소속
- 클레멘스 15세 : 본명은 미셸 콜랭으로 1950년에 프랑스에서 콜리나이트 교회를 창설하고 교황을 자칭했다. 1974년 사망[2].
- 그레고리오 17세 : 본명은 장-가스통 트랑블레. 1972년에서 2011년까지 교황을 자칭했다.
4.2 팔마리안 가톨릭 교회[3]
- 그레고리오 17세 : 위의 동명의 대립교황과는 다른 사람이다. 본명은 클레멘테 도밍게스 이 고메스이고, 1978년부터 2005년까지 교황을 자칭했다.
- 베드로 2세 : 본명은 마누엘 코랄이며, 가톨릭 교회가 베드로라는 이름을 교황명으로 쓰지 않는 암묵의 룰이 있는 것에 비해, 이쪽의 대립교황은 베드로를 교황명으로 사용하는 비범함을 보여준다. 2005년에서 2011년까지 교황을 자칭했다.
- 그레고리오 18세 : 본명은 히네스 헤수스 에르난데스이고, 2011년부터 2016년까지 교황을 자칭했다.
- 베드로 3세 : 본명은 호세 오데르마트이고, 2016년부터 교황을 자칭하고 있다.
추가바람.
5 창작물에서의 대립교황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자신의 캐릭터의 종교가 가톨릭이라면, 자신의 봉신인 주교를 대립교황으로 옹립할 수 있고, 대립교황 한 명당 종교권위를 20씩 깎는다. 이때 자신이 옹립한 대립교황을 지지하는 주교들이 대립교황에게로 세금을 바치게 되며, 그 대립교황을 지지하는 영주들이 다른 교황들이 속해있는 지역이나 타 대립교황의 주군의 영지에 전쟁을 선포할 명분이 생긴다. 만일 진짜 교황이 로마를 점령당해 항복하면 그 교황은 계승권을 갖지 않는 대립교황이 되며, 로마를 점령한 쪽의 대립교황이 진짜 교황이 된다. 자세한 건 크루세이더 킹즈 2/종교를 참조하면 된다.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에는 오늘날 기독교와 비슷한 세력으로 챈트리라는 종교가 있는데, 전통적으로 여성 교황(Divine)이 교단을 이끈다. 예수와 비슷한 위치의 인물인 안드라스테부터가 여성인지라 추기경을 비롯, 대부분의 고위 성직자들이 여성으로 구성되는 종교. 그런데 이 챈트리의 율법에 따르면 마법은 인간을 섬겨야 하는 것으로, 마법사에 대한 규제가 심한 편인데 이는 챈트리가 등장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테다스 대륙의 강대한 국가로 존속되고 있는 테빈터 제국과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테빈터는 전통적으로 마법사에 의해 통치되어왔고, 챈트리를 받아들인 후에도 마법사들이 상류 사회를 꽉 쥐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 결국 제국은 올레이의 발-로이어를 중심으로 하는 챈트리로부터 탈퇴하여 마법사에 훨씬 우호적인 자신들만의 '제국 챈트리'를 세웠으며, 이에 올레이의 챈트리는 십자군과 비슷한 개념의 '숭고한 거병'을 여러 차례 시도하여 제국 챈트리를 다시 합병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따라서 작품들이 진행되는 시점에서 테다스 대륙에는 제국 챈트리와 챈트리 두 분파가 있는 셈이며, 교황도 둘이다. 정통성으로 보나 역사로 보나 당연히 올레이의 디바인이 적법한 교황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남성으로 선출되는 제국 챈트리의 수장 '검은 교황'이 대립교황의 위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