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 방벽

  • 독일어 : Atlantikwall
  • 영어 : Atlantic Wall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프랑스에 상륙하는걸 저지하기 위해 나치 독일이 만든 방어선이다.

전체 구간은 명목상으로는 프랑스의 비스케이만에서 네덜란드독일의 국경까지, 실제적으로는 노르망디에서 시작하여 파 드 깔레까지 이어지는 총 연장이 3,860Km에 이르는 방어선이다.

방어선의 특성은 가장 강력하게 방어된 파 드 칼레 지역은 마지노 선에 버금가는 콘크리트 요새선이지만, 노르망디를 비롯한 나머지 지역은 교통 요충지나 상륙하기 딱 좋은 곳에 원형 진지를 만들고 해안포 등 직사화기를 배치하며, 해안의 원형 진지를 지원해줄 포병 진지를 배치한 후, 그 간격을 각종 장애물로 메꾼 방어선이다. 하지만 연합은 백년전쟁 부터 이어진 폭탄드랍의 상륙지인 노르망디로 상륙했지 따라서 방벽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곳은 파 드 칼레의 일부지역에 한한다.

2 배경

대서양 방벽을 만들게 된 이유는 영국 본토 항공전의 실패로 더 이상 영국을 점령할 수 없으며, 크릭스마리네의 안습한 사정으로 인해 해상에서 연합국 해군 전력을 차단해 상륙을 사전 저지하는 것도 힘들어졌고, 동부 전선이나 아프리카 전선등에서 독일군이 밀리기 시작하면서 프랑스에 주둔한 부대를 빼서 증원군으로 배치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연합국이 프랑스에 상륙할 때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막상 건설을 시작하고 보니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비전문가의 간섭이 많아지고,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가 기를 썼음에도 독일 내의 자원수급에 문제가 생기다보니 다량의 콘크리트, 철강이 필요한 요새의 특성상 건설이 지지부진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이런 방어선을 당장 전선에 필요한 물자를 대량으로 소모하면서 만들 필요까지는 없다는 독일군의 상당수 고위층의 의견 및 프랑스를 휴식을 하고 관광이나 하는 곳으로 여긴 현지부대의 게으름으로 인해 호들갑을 떤 것에 비하면 공사의 진척도는 바닥을 달렸다.

그러나, 북아프리카 전선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면서 갈 곳을 잃어버린 육군원수 에르빈 롬멜 장군이 프랑스에 새로 만들어진 B집단군의 사령관이 되면서 분위기가 좀 바뀌게 된다. 원래 롬멜 장군은 대서양 방벽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연합군이 상륙해서 교두보를 만들면 더 이상 이걸 밀어낼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 후 열성적인 태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필요한 건설물자와 장비는 히틀러가 중시했던 파 드 칼레와 영국프랑스 사이에 있는 채널 제도에 집중되었으므로 위의 두 곳은 중장갑을 갖춘 해안포 진지[1]를 장비하는 등 대서양 방벽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방어진지가 되었지만 실제로 연합군이 상륙할 노르망디는 물자도 제대로 못 받아서 제대로 된 요새시설을 만들지 못했다. 해군과 육군이 섹터를 나눠 운용한 해안포 진지(노르망디는 육군이 맡았다.)들 중 육군 해안포 부대 운용과 진지 공사 및 경계근무에 동원된 육군 병력 상당수가 2~3선급 고령층 예비역 및 외인부대원들이라 사기와 노동의 질이 떨어졌던 점도 이에 한몫했다. 근데 희안한건 그 히틀러가 주요 상륙지는 노르망디가 될것이라고 예측한것, 평소 히틀러의 과대망상을 겪은 장군들과 제독들은 그런일 없을거라고 장담하자 히틀러는 파 드 칼레로 맘을 바꾼다(...). 게다가 파 드 칼레는 연합군이 노르망디 주변에 구성된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때 후방에서 습격을 받아서 점령당했고, 채널 제도는 종전 때까지 무시당한 것을 본다면 엄청난 양의 물자와 장비가 엉뚱한 곳에 사용되었다고 봐도 된다. 물론, 그 방어 시설 때문에 상륙하기 최적의 장소인 파 드 칼레를 연합군이 포기했고, 여건이 보다 좋지 않은 노르망디를 택하게 만들어 상륙 단계에서 각종 애로사항을 유발했으므로 바보짓이라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채널 제도 요새화는 삽질 맞다

설상가상으로 롬멜 장군이 프랑스로 온 지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시간까지 촉박했으므로 롬멜 장군도 몇 가지 간이 방어시설에 추가를 한 것 외에는 크게 방어선을 강화시키지는 못했다.

다만 아주 쓸모가 없지는 않아서, 오마하 해변 같은 경우 대전차 장애물이나 상륙정 접안 저지용 부비트랩 바리케이트 등 상대적으로 구색만 갖춘 수준으로도 어느 정도 상륙부대에 피해를 강요할 수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대신이라고 하기는 뭣 하지만 노르망디 지역의 다른 섹터들은 폭격당하고 공수부대가 후방으로 침투하고 시설 이전에 방어부대의 전력 자체가 훈련도나 장비는 차치하고 부대 정족수도 못 채우고 있을 지경이라 거의 의미가 없었지만..

이때 완성된 벙커와 방어진지들은 진정 크고 아름답다. 2차 대전이 끝난후에도 그대로 유지된 이유중 하나가 ..철거공사비용이 천문학적이여서 감당할수가 없어서.. 라는 농담같은 진짜 이야기가있다. 실제로 그 당시 유적을 가보면 그때 철근 공구리 쳐놓은 방벽들이 금하나 없이 멀쩡한데다가 입이 딱벌어질 정도의 규모를 자랑한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해안에 있는 해군 유보트 기지의 경우는 원래 계획의 축소 버전인데도 그 유명한 영국 공군의 톨보이 폭탄을 방어해냈다! 1차 격벽은 뚫었지만 2차 격벽은 생채기만 조금 나고 끝났다...

간혹 그나마 방벽 덕분에 상륙 이후 연합군을 한달여간 저지할 수 있었다던가, 만약 노르망디 지역에까지 본격적으로 방벽 건설이 되었으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건 아마 이탈리아 전선에서 왠 방어선 하나에 개고생한 연합군이 노림수로 안치오에 상륙한것을 보고 한 말일수도 있다, 일단 상식적으로도 노르망디 지역에 교두보가 확보된 이후에는 바다를 향해 구축된 진지의 전투력은 전혀 무의미해지고, 실제 전사적으로도 프랑스 전역에서 연합군의 진공을 저지한 것은 내륙으로부터의 증원부대지 해안방어병력이 아니었다. 게다가 설령 방벽이 완성되고, 또 연합군이 그 방벽에 상륙을 감행했다 하더라도 공수작전 이후 새벽에 기습상륙을 펼친 마당에 요새화된 해안진지의 유효성은 상당히 반감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정작 상륙작전을 실시한 당시 상황을 보면 완벽하게 요새화시켰다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을수도 있고 최소 어느 한 해변은 상륙실패가 발생했을 것이다. 요새선은 공수부대의 침투로 무력화되기 쉽다는 2차대전 초기 서부전역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훈은 차치하더라도, 당장 연합군의 항공폭격과 함포사격은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뭐 항공기는 영국 본토에서 연료 낭비하며 날아와야 해서 루프트 바페가 대응할 시간이 있다곤해도, 하지만 무엇보다 당시 전황상 이탈리아 전선이 붕괴되어 가고 있던 점을 생각하면, 설사 프랑스에서의 제2전선 전개를 막는다 하더라도 남부유럽 방면의 압력으로 되돌아올 뿐이다. 물론 그걸 막았다면 연합군 최정예 공수부대가 전멸했다는걸 의미하니 연합군은 더이상의 공수작전없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계속 진행해야 하는 문제가 남았을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상륙을 막는다면 미군은 남은 상륙지는 이탈리아 전선인데, 여기는 왠 장군 한명이 미친방어선을 형성해놓고 연합군은 그걸 뚫은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여기로 가면 보급선이 엄청나게 길어져서 답이 없는데다 작전실패소식 때문에 연합군 장경들 사기가 남아돌련지(...) 하지만 앞은 소련 뒤와 중앙은 연합군이 오는 상황이라 독일은 엎어치든 메치든 결국 큰 그림에선 의미가 없는 셈이었다.

여담이지만, 2차대전 때 연합군은 여기에 쓰인 방벽 구조물중 철근빔으로 만들어진 대전차장애물을 활용하여 '헷지 차퍼' 혹은 ' 헷지 블로 커터'라는 전차 장비를 제작했다. 미 육군 제2기갑사단의 커티스 컬린(Curtis G. Culin) 하사가 제작했는데, 이는 노르망디 내륙에 길과 밭의 경계용도로 심어진 잡목림(전차도 돌파할수 없을 정도로 빽빽했다.)에 애를 먹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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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예비 포신을 활용한,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 전사한 비스마르크 함의 함장 에른스트 린덴만 해군대령의 이름을 딴 해군 해안포 진지인 에른스트 린덴만 포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