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역대 국왕 | ||||
14대(?) ○왕 대위해 | ← | 15대(?) ○왕 대인선 | → | 후발해 1대 대정현 |
흥료국 1대 대연림 |
시호 | 알 수 없음 | |
성 | 대(大) | |
휘 | 인선(諲譔) | |
생몰년도 | 음력 | ? ~ ? |
재위기간 | 음력 | 906년(?) ~ 926년 1월 14일 (21년) |
발해의 15대(?) 가독부/왕. 13대 대현석과 마지막 왕 대인선 사이에 공식적으로는 대위해 한 명 뿐이지만 누락된 왕이 있다는 설도 있기때문이다.
1 개요
○왕 대인선(○王 大諲譔).대위해의 아들(?) 마지막 왕. 13대왕인 대현석부터는 왕의 즉위년도와 몰년도가 정확하지 않다. 휘 인선(諲譔)인데 예전 국사책에는 '인전'이라고 잘못 표기된 책들이 많다.
즉위 연도는 미상. 다만 첫 등장연도인 906년이 즉위연도로 추측. 내치, 외치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고 그의 대에 이른 기록은 거란의 침략과 관련된 것 뿐이다.
시호 역시 알 수 없다. 애왕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일본 학자들이 경애왕과 혼동해서 생긴 사건이다. 정확히는 신라 '경애(景哀)왕'에서 앞의 '경(景)'을 발해 13대 왕 대현석에 대입시키고, 뒤의 '애(哀)'를 본 항목인 발해 15대 왕 대인선에 대입시킨 것이다. 대충 적당히 다들 망국 즈음의 군주라서 그랬던 건지... 중간에 빠진 14대 왕인 대위해는 당시에는 유일하게 당회요(唐會要)라는 책으로만 기록된 인물이었다. 그래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왕인지도 몰랐던 것(…). 망국 군주로서의 작명으로는 그럴 듯한 슬플 애(哀) 자이기에 더 인상이 강렬하여 종종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만화 한국사 등에서 아직도 '애왕'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잦다. 근데 대인선은 패망한 국가의 군주라서 의자왕, 보장왕처럼 시호가 애초에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2 거란의 침입과 멸망
거란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발해는 해족, 신라(...응?), 고려, 후량 등 여러나라와 힘을 합쳐 거란을 견제하려고 했으나 당시 한반도나 중국이나 상황이 말이 아니고 해족은 아예 거란에 병합(...)
924년, 거란이 요동을 공격하여 발해인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대인선은 군사를 일으켜 거란군을 무찌르고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포로를 되찾는 등의 대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이 요동 전투는 발해 최후의 승리였다.
925년 12월 21일,요동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거란이 대대적으로 공격하였고, 이는 발해의 마지막이 되었다.거란은 20여년 동안 꿈쩍도 않던 요동방어선을 아예 무시하고(!) 발해의 요충지인 부여부를 직격했다. 부여부는 포위 3일만인 926년 1월 3일에 함락되었고, 발해는 이에 맞서 노상(老相. '늙은 재상')에게 군사 3만(혹은 5천)을 주어 진격을 저지케 하였으나 이 결사대도 맥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렇게 거란은 단숨에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까지 진격하여 상경을 포위하였다(926년 1월 9일). 대인선은 백성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표명했으나 백성들은 고려등지로 오히려 피난을 갔다(...) 사실 그 이전부터 발해인들이 소규모 혹은 대규모로 고려로 망명해왔다. 결국 대인선은 상경용천부가 포위된 지 4일 만에 항복하였다.(926년 1월 12일)
926년 1월 14일, 대인선과 300여 명의 신하들은 야율아보기 앞에 정식으로 항복하였고 발해는 15대 228년만에 멸망하고 만다. 포위 된 지 4일 만, 항복을 결정한지 2일만이었다. 마치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노선을 우회한 독일군의 프랑스 전역과 같이, 발해는 허무하게 멸망해버린 것이다.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는 방화로 인해 며칠간 불타올랐다.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요동 버전?
3 멸망 이후
야율아보기는 발해국왕이었던 대인선을 처음엔 정성껏 대접했다.
하지만 망국의 군주의 운명이란 순탄치 않았다. 발해의 옛 군현에서 반 거란 항쟁 기미가 보이자 야율아보기는 926년 1월 17일 발해의 옛 군현에 조서를 내려 회유를 시도했다. 1월 19일엔 거란장수 강말달을 성으로 보내 수색하도록 했는데 옛 발해 병사들이 강말달을 살해했다.
대인선조차 움츠리고 있지만은 않아서, 다음 날인 20일에 대인선이 남아있는 발해유민들을 모아 부흥운동을 펼치려고 시도했다. 결국 성난 야율아보기가 다시 상경용천부를 공격함으로써 얼마 뒤 성은 함락되었다. 그해 7월에 있었던 거란군의 회군 때 대인선과 그의 부인을 거란 본토로 끌고갔다.
야율아보기는 끌고간 대인선과 그의 부인에게 이름을 새로 줬는데 대인선에게 준 이름은 오로고(烏魯古), 그의 부인(발해 왕후)에게 준 이름은 아리지(阿里只)였다. 야율아보기와 그의 부인이 발해를 멸망시켰을 때 탔던 말의 이름이라고 한다. 흠좀무... 거란이 정해준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의 서쪽에 성을 쌓고 살았다. 와신상담이 생각나는 일화지만 더이상의 복수는 없었고, 그렇게 발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4 평가
망국의 군주이긴 하지만 이렇다할 평가할 만한 기록이 없으므로 정황 추측으로만 평가가 가능하다
혼돈의 10세기 초 동아시아 정세에서 성장하는 거란의 요동공격을 20여년동안이나 계속 저지했고(물론 누대에 걸쳐 요동방어선을 공고히 한 점이 있지만) 이를 보아 대인선 시대의 발해는 상당히 안정적이었으리라 본다.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20여년동안 버텨낼 여력도 없다. 게다가 적대국인 거란과 직접 친선을 도모하기도 하며 중국, 일본, 후삼국 등 활발히 외교를 펼치며 세력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아 대인선이란 군주도 중간은 가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출처: 왕조의 마지막 풍경)
5 발해 멸망의 원인
기록이 없기에 그의 시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복합적인 이유로 발해가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대현석 때부터 이어온 귀족들의 권력다툼과 횡포, 말갈과의 대립(주로 흑수말갈), 자연재해 (그 유명한 백두산 화산폭발설 등등.), (오랜 전쟁과 내분으로 인한)민심이반 등이 합쳐져 발해가 멸망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앞서 보듯 924년때의 기록을 보면 발해가 오히려 역공을 가하는 등 강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그러나 이후 다시 발해는 내분, 말갈과의 대립, 자연재해, 민심이반과 더불어 거란의 첩자들로 인해 너무나 허망하게 무너지고 만다. 그런데 발해의 국경방어체제가 고구려의 국경방어체제처럼 흔히 말하는 요동방어선(요하-부여성)-하천(발해는 제외)-수도 근교-수도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위의 발해도 그랬지만 고구려도 요동쪽의 방어력은 가히 우주방어급이었으나 부여성(부)쪽은 방어력이 낮았고 특히, 부여성(부)을 무너뜨린 당은 이후 국내성까지 쾌속진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