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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復興運動 92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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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부흥운동 渤海復興運動 | ||||
동란국 ⑴ ,926년~936년, | 정안국 ,938년?~986년?, | 올야국 ,995년~996년, | 흥료국 ,1029년~1030년, | 대발해 ,1116년, |
후발해 ,926년?~938년?, | ||||
⑴ 동란국은 요나라의 괴뢰국 |
목차
1 개요
926년 거란의 요나라가 발해의 부여부와 상경용천부를 타격하며 발해를 붕괴시킨 이후 만주 전역에서 발해계통의 반요세력들이 등장한 것을 일컫는 용어. 이 시기를 한국사로 본다면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자칭 황제국들이 등장한 시기다.
결국 모두 실패하고 만주 지역이 한국사와 최종 결별하는 결말로 이어졌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이 시기에 대해 별 관심도 없는 편이고 사료도 부족하면서도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연구가 제대로 안 된 시대다. 일단 산발적인 반란이 아닌 나름의 국가 체제를 이룬듯했던 후발해, 오사국, 정안국부터가 중구난방. 이 문서의 서술 내용도 구체적인 존속기간 등의 정보를 완전히 믿지 않는 것이 좋다.
2 약사
한국 국사 교육에서는 여요전쟁 직전 부분에서 정안국을 살짝 언급하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교육되지 않는데 이는 사실상 고려의 후삼국시대 통일과 일부 발해 유민들의 투항을 계기로 고려를 실질적인 한국사의 통합으로 보기 때문이다. "곁가지" 격이었던 발해 유민들은 대다수 거란, 여진, 몽골,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기에 특별히 더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는 취지로 보인다.
그래서 발해부흥운동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물어보면 "엉? 발해도 부흥운동이 있었어?" 라는 반응이 많다.오히려 고구려부흥운동,[1] 백제부흥운동,[2] 신라부흥운동[3]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지경...
3 기록이 적어 대접도 못받는 안습의 국가, 후발해
후발해 後渤海 | ||
존속기간 | 926년? ~ 938년?(12년?) |
정안국보다 먼저 세워졌다. 사료가 워낙 적어서 별로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나라의 멸망시기도 정확하지도 않고 건국시기도 정확하지 않다. 왕의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고 포로가 된 발해왕 대인선(大諲譔)의 동생이 발해유민들을 모아 건국했다고 추정될 뿐이다. 또는 대인선의 아들인 대정현이 세웠다는 주장도 있으나 두 주장 모두 정확하지 않다.
4 길지만 조용한 프롤로그, 정안국
정안국 定安國 | ||
존속기간 | 938년-986년(48년) |
2대 48년으로 그나마 가장 오래 간 나라 장안국하고 헷갈린다 928년 국내성(國內城) 지역에서 정안국(定安國)이 건국되었다. 정안국은 후발해(後渤海)라 불리기도 했으며 나름대로 세력을 갖췄으나 결국은 요에 조공을 바치는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986년 요가 고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여요전쟁)을 계획하면서 중간에 끼여 있던 정안국은 장애물 없애는 겸해서 없어지고 만다. 항목 참조.
5 거란과 전면으로 맞선 흥료국
흥료국 興遼國 | ||
존속기간 | 1029년-1030년(1년) |
세월이 지나 발해 왕족이었던 대연림(大延琳)은 1029년 8월 3일, 요나라의 제2도시인 요동의 동경(東京) 용양부[4]에 흥료국(興遼國)을 세워 발해부흥운동을 벌였다. 자세한 것들은 항목 참조.
6 대발해국의 실패와 금나라의 건국
대발해 大渤海 | ||
존속기간 | 1116년-1116년(5개월) |
이후 1116년 대원국(大元國)이 세워지는 등 발해 부흥 운동이 몇 차례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이 거란 반대 운동 정도의 수준에 그쳤다. 그나마 좀 성공한 운동으로는 "대발해국"이 있는데, 1116년 1월에 고영창이 8천명으로 동경 용양부를 점령하고 스스로 대발해국 황제에 즉위했으며, 건국 10여일만에 요동의 50여주를 지배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금나라와의 협상에서 황제를 고집하다가 건국 5개월 만에 멸망해버린다(...) 내분도 겹쳤다.
발해부흥운동은 주로 요나라시기에 지속되다가 말갈이 바탕이 된 금나라의 건국과 함께 이들이 발해 유민들을 포용/이주하면서 사라졌다고 보는게 통설이다. 특히 마지막 부흥운동인 대원국이 요말금초에 있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초기의 금은 발해유민을 포용하였다. 이는 완안아골타가 "발해와는 본시 동일한 집안"이라고 말한데서 근거하나, 이런 포용은 금태조 때만 있었다. 더구나 대발해국 운동이 터져버려서(...) 결국 금은 건국시에는 발해 유민을 북송 공격군의 선봉으로 활용하다가[5] 이후 맹안모극 집단에서 배제하여 거란, 여진과 달리 한족과 동일 취급하고 산동으로 내몰면서(1141년, 금희종 신유년) 발해유민은 차츰 정체성이 사라지게 된다.[6] 특히 금세종 때는 한족과 함께 발해인의 형사취수를 금지하고 삼년상을 강요하며 양자 제도를 불허하는 등 철저하게 한족 취급했다. 그리고 몇백 년 뒤에는 자기네 후손이 그짝이다.
7 평가
발해부흥운동을 마지막으로, 부여-고구려-발해라는 굵직한 줄기로 이어지는 북방예맥계의 역사가 소멸한다는 평가가 있다.[7][8] 다만 대원국의 경우에서 보듯 200년 뒤까지도 발해 귀족의 정체성이 남아있는 것은 의의.
희한하게도 후발해나 정안국처럼 비교적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오래 지속되었던 세력들에 대한 기록은 눈물나도록 희박하지만, 단발성으로 일어난 올야국이나 대연림의 난흥료국 고영창의 난대발해는 그 전개과정이 꽤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이것은 흥료국이나 대원국이 짧은 존속기간에 비해 그 반란영역과 성과는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를 자처하고 외교에서 고립되어 그냥 亡... 길고 가늘게 혹은 짧고 굵게
8 발해의 후계 세력들
1대 10년(혹은 6년) | |
후발해(926년?~938년?) | 1대? 10년 |
정안국(938년?~986년?) | 2대 48년 |
연파국[10](975년~995년?) | 1대? 20년 |
올야국(995년~996년)[11] | 2대 1년 |
흥료국(1029년~1030년) | 1대 1년 |
대발해(대원국)(1116년 1월~5월) | 1대 4개월 |
1대 4개월 |
- ↑ 검모잠, 고연무, 고안승이 주도한 고구려 부흥운동이 존재.
- ↑ 부여풍, 흑치상지, 복신, 지수신 등이 주도...
- ↑ 고려시대 초, 중기에 옛 신라 지역인 경상도 일대에서 신라부흥을 내건 몆번의 반란, 봉기들이 존재. 하지만 일각에서는 신라부흥이라는 명목을 앞세워 일으킨 민란들일뿐이라는 반론도 있다.
- ↑ 당연히 일본 도쿄가 아니다.
- ↑ 이는 여진이 거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때부터 그랬다. 여진인과 발해인이 서로 원수였기 때문이다(거란국지 1116년 기사).
- ↑ 물론 금 건국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듣보잡이긴 하지만 딱한번 일어나기는 했다. 발해의 옛 정리부에서 항쟁을 일으킨 적이 있다.
- ↑ 하지만 압록강 이남의 남방예맥계는 고구려, 백제를 통해 고려로 역사가 이어지게 되므로 예맥계 자체의 역사가 소멸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예맥과 한(韓)의 구분은 고고학적으로 볼 때 뚜렷하지 않으며 현재 사학계에서는 한인(韓人)은 한반도 남부에서 토착화된 예맥인이라고 보고 있다.
- ↑ 발해가 건국된 이후 흑수말갈을 제외한 다른 말갈족들을 거의 전부 정복하면서 통합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발해가 멸망할 시기쯤 되면 여진인과 발해인이 서로 원수지간 이라는 기록은 많이 있다. 더군다나 금나라를 세운 후 여진족들은 발해인을 한족취급하며 산동반도로 강제이주를 자행했고, 이후 한족보다 못한 취급을 하면서 엄연히 자신들과는 구분된 인식을 보여주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분이 된 이유는 언어와 생활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았는데, 여진인은 수렵을 주 생활수단으로 삼았으나 고구려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예맥인의 주 생활수단은 농경이었다.
- ↑ 요의 괴뢰국이라는게 통설이다.
- ↑ 연파라는 장수가 부여부에서 항거를 일으켰다. 그 후 그곳에서 세력을 키워서 반란을 하다가 995년 올야에 도망친 후 올야와 함께 거란에게 저항했다고 한다.
- ↑ 兀惹國. 꼴랑 1년 간 지속되었지만 그래도 2대는 갔다(...) 발해계 귀족 오소경이 발해의 고도가 위치한 상경 용천부 주변에서 일어났다. 오사성 발해국 혹은 오사국이라고도 불린다.
- ↑ 다만 한국사로 보기에는 좀 애매하다. 발해부흥운동이고 고욕을 비롯한 발해 유민만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나 발해의 옛 땅이 아닌 거란의 한 주에 일어났던 반란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