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Ostracism
고대 그리스어: ὀστρακισμός
1 개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민주정을 유지하기 위해 실시한 정치 제도의 일환으로, 독재자(참주)가 될 위험성이 있는 인물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 조각에 적게 하는 방식이었기에 도편 추방제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뽑힌 인물은 아테네 국외로 10년간 추방되어야 했으며, 변론 혹은 항소는 허용되지 않았다. [1]
2 절차
매년 1월에서 2월 사이에 정기적으로 열리던 민회에서 아테네의 시민들은 당년의 도편추방 투표를 실시할 지 여부를 결정했으며, 만약 결론이 실시로 내려진다면 투표는 2달안에 실행되어야 했다. 실시 여부의 결정과 투표일이 2달간이나 차이가 나는 이유는 '냄비근성 방지 + 각종 토론/변론을 통하여 시민들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2500년도 더 전에 실시된 투표였음을 생각하면 상당히 흠좀무할 정도로 선진화된 절차.
투표는 아고라에서 동시에 실시됐으며 시민들은 자신들의 견해에 따라 독재자로 발전할 위험이 있는 자들의 이름을 도편에 적어냈으며 개표는 투표 종료와 동시에 진행됐다. 투표 결과가 어떻게 도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의 사료들조차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데(...) 일단 학계에서는 당시 아테네 시민권 보유자의 수를 감안해서 '총 투표 가운데 6000표 이상을 득표한 자가 추방당한다.'는 주장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2] 추방당하는 것으로 결정된 자는 투표로부터 10일 이내에 아테네를 떠나야 했으며, 추방을 거부하거나 혹은 10년간의 추방기간 중 아테네로 돌아올 것을 시도하는 경우 사형당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3 주요 추방자
- 기원전 487년 : 히파르코스
- 기원전 486년 : 메가클레스[3]
- 기원전 485년 : 칼리크세노스
- 기원전 484년 : 크산티푸스[4]
- 기원전 482년 : 아리스티데스[5][6]
- 기원전 471년 : 테미스토클레스
- 기원전 461년 : 키몬[7]
- 기원전 460년 : 알키비아데스
- 기원전 457년 : 메논
- 기원전 442년 : 투키디데스
- 기원전 416년(?)[8] : 히페르볼루스
4 폐지
처음에는 본래의 목적 그대로 독재자의 등장을 막기 위해서 도편추방제가 실시되었지만 점차 그 목적이 변질되어 페르시아 전쟁 무렵부터 도편추방제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게 된다. 대표적인 경우로는 스파르타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하다가 반대파에게 추방당한 테미스토클레스와 페리클레스가 주도하는 아테네 제국 정책을 반대하다가 추방당한 투키디데스. 결국 페리클레스의 사후 중우정치 시기가 되면 말 그대로 개판이 되고 만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기원전 416년 혹은 417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와중에 히페르볼루스가 추방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도편추방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도편추방제는 이 때를 전후로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후 1세기의 그리스 역사가였던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리클레스의 사후 아테네의 중우정치에 질린 아테네인들이 자발적으로 도편추방제를 폐지한 것으로 표현된다. 또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패배한 이후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강요에 의하여 과두정을 정치체제로 채택하였고 과두정의 특성상 개인 독재자가 등장하기는 힘들었다는 점도 도편추방제가 폐지되는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여겨진다.
5 여담
- 페리클레스는 도편추방제를 가장 잘 활용한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30년 가까운 집권시기 동안 자신의 정적은 싸그리 도편추방으로 배제시켜버리면서 정작 본인은 한번도 도편추방제에 발목을 잡힌 적이 없다.
- 현대 영어에서 Ostracism은 도편추방이라는 본래의 의미 뿐만 아니라 왕따, 소외 등을 표현하기도 한다.
- 오늘날 발굴된 그 당시 도편을 보면 실명 옆에 각종 조롱과 별명들도 적혀있다. 가령 '아리스티데스 멍청이' 이런 식으로(...) 물론 이런 조롱과 별명들의 유무에 상관없이 실명만 명확히 적여있으면 유효한 표로 인정됐다.
- 최근 사회학에선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사이버 도편추방(Cyberostracism)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대표적인 사이버 도편추방의 사례는 바로 읽씹이라고(...)
- ↑ 그렇지만 아테네 시민권이 박탈된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아테네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10년간 금지됐을 뿐이며 10년이 지난뒤에는 공직에 복귀하는 것도 허용됐고 페르시아 전쟁의 경우와 같이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 경우에는 기한조차 단축됐기 때문에 고대라는 시대를 감안하면 굉장히 온건한 정적 배제 수단이었다고 평가받는다. 훨씬 후대 중세의 동로마제국에서는 정적의 코를 잘라버리고는(...) 죽이는 것보다는 인도적이지요? 라고 주장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 ↑ 영문위키판에는 '일단 총 투표수가 6000표 이상이 되어야지 투표가 유효하다'는 가설도 서술하고 있다.
- ↑ 히포크라테스의 아들인 걸로 유명하다.
- ↑ 아테네의 황금기를 열어제낀 페리클레스의 아버지이다.
- ↑ 다음과 같은 일화로 유명하다. 도편추방제 선거 당일, 문맹이었던 어떤 시민이 '난 글자를 몰라서 그런데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을 써주실 수 있겠소?'라고 물었다. 이에 아리스티데스는 '그 자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소?'라고 되물어봤다. 그러자 그 시민은 '아뇨. 그렇지만 주변에서 하도 아리스티데스를 칭찬해대니 진저리가 나서요.'라고 답했고 이에 아리스티데스는 묵묵히 자신의 이름을 도편에 써주었다.
그리고 추방 - ↑ 하지만 추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해서 아테네로 다시 복귀하게 된다.
- ↑ 이때 키몬의 추방을 뒤에서 공작한 인물이 바로 페리클레스. 키몬의 추방과 동시에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손에 들어갔고 이 시기의 아테네를 '페리클레스의 아테네'라고 부른다.
- ↑ 정확한 연도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