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락리전투 | ||
날짜 | ||
1950년 음력 7월 5일~7월 8일 | ||
장소 | ||
충청북도 음성군 무극리일대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대한민국 | 북한 |
지휘관 | 6사단장 김종오 7연대장 임부택 1대대장 김용배 2대대장 김종수 3대대장 이남호 | 2군단장 김광협 48연대장 김치구 |
병력 | 1750여명 대포 48문 | 불명 |
피해 규모 | 불명 | 1000여명 전사, 포로 132명 대포 15문, 기관총 14정, 소화기 2000정, 장갑차 10대, 차량 80여대 |
결과 | ||
대한민국의 승리 북한군 15사단의 공격 저지 |
동락리 전투에 도움을 주었던 당시 동락초등학교의 여교사였던 김재옥교사의 현충탑
1 개요
1950년 7월 5일부터 7월 8일까지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일대에서 국군 6사단 7연대가 북한군 15사단 48연대에 맞서 승전한 전투.
2 전투 직전 상황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전황이 급박히 돌아가던 6월,
서울을 빼앗긴 국군은 한강방어선을 구축하여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다.하지만 대부분의 부대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이게도 춘천을 방어하던 6사단과 강릉지역을 방어하던 8사단이 춘천-홍천 전투에서 6사단이 엄청난 선전을 하여 적 2군단의 진격을 저지해낸 덕분에 부대를 온전히 보전하고 철수하고 있었다.[1]
이에 따라 국군은 19연대를 이천에, 2연대를 충주지역에, 7연대를 원주에 배치하여 저지토록 했지만 너무넓은 면적을 6사단 홀로 방어하는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였고 8사단이 후퇴하면서 원주내륙지방을 방어할수 있게되자 7연대를 음성지역으로 이동해 무극리일대를 점령한후 장호원을 확보하여 적을 저지하게 하였다.
3 전투
3.1 7월 5일
사단으로 부터 명령을 받은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7월 5일 충주를 출발하여 무극리 일대를 점령하고 장호원을 공격하기위한 준비를 하고있었다.
3.2 7월 6일
그리하여 음성에서 무극리로 이동하던 1대대는 오후 1시쯤에 북한군과 대치하였다. 한편 2대대는 부용산을 선점하여 북한군의 진출로를 사전에 차단하였으며 3대대는 동락리에서 적 정찰대를 격퇴한후 생극으로 이동하였으나 북한군의 역습으로 포위될 상황에 이르자 유천리에 진지를 구축했다.
3.3 7월 7일
이전날의 전투로 아군이 완전히 철수한것으로 착각한 북한군 15사단 48연대는 정찰을 소흘히 한채로 동락리를 통과한채 차량을 이용하여 용원리일대로 진격하고 있었다. 한편 동락리에 진지를 구축한 3대대는 임부택 중령의 명령으로 이동중 03시쯤에 이동중이던 북한군을 발견하여
9중대가 먼저 교전을 실시하였으며 북한군지휘부가 이를 소규모 부대의 소란쯤으로 안채로 차량속에서 대기하고 있자 이틈을타 나머지 2개중대가 합세하여 6시쯤에 적의 주력을 측면에서 기습하였다.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한 북한군은 별다른 저항조차 못한채로 분산되에 도주하였다. 그러자 3대대는 신덕저수지 북쪽으로 신속히 전개하여
적을 섬멸하였고 다수의 장비들을 노획하였다.
한편 북한군의 진출로를 차단하기 위해 부용산을 미리 선점하고 있었던 2대대는 당시 동락초등학교의 여교사였던 김재옥의 제보 덕분에 북한군이 동락초등학교에서 숙영중임을 알고 공격을 준비하던중 새벽에 용원리서 총소리가 들려오자 3대대가 공격중인것을 깨닫고 부용산 점령임무에도 불구하고 적에게 타격을줄 절호의 찬스를 위하여 즉시 동락초등학교로 진격하여 기습을 가했고 갑작스런 기습으로 당황한 북한군은 북쪽으로 후퇴하였으며 운동장에 사열해놓은 적 장비다수를 노획했다.
3.4 7월 8일
그날아침 국군이 후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선을 위하여 후퇴하였다.
4 피해상황
북한군은 1000여명이 전사하고 132명이 포로로 잡히는등 약2000여명의 인적피해를 보았으며 장비 대포 14문 기관총 15정 소화기 2000정과
장갑차 10대, 차량 80여를 잃었다.
5 의의
이전투에서 7연대는 북한군 15사단 48연대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켰다는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소련제 장비 다수를 노획하며 소련이 전쟁에 관련되어 있음을 증명하였다.
6 트리비아
이승만 대통령은 이전투를 보고받은뒤 7연대 장병 전원에게 1계급특진의 포상을 주었으며 김일성은 안그래도 춘천-홍천 전투에서 6사단한테 호되게 당하는 바람에 초기작전이 물거품이 되버린 상황에서 또다시 6사단에게 패했다는 보고를 듣진 "남조선에는 6사단 하나밖에 없다. 그러니 그놈을 당장 섬멸해야 한다" 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한편 당시 동락초등학교 여교사였던 김재옥 여사는 이 일로 연이 닿아 당시 소위였던 이득주 중령과 결혼하여 살던 중 1963년 고재봉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마침 친척집에 가있어서 화를 피한 큰 아들만 빼고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참변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