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빈드라나트 타고르(রবীন্দ্রনাথ ঠাকুর, Robindronath Ţhakur) | ||||
생몰 | 1861년 5월 7일 - 1941년 8월 7일 |
< 191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 | ||||
1912 -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 →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 → | 1914 - 수상자 없음 |
인도의 시인. 1861년 5월 7일, 인도 벵골 주 캘커타의 저명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19세기 초에 영국 동인도회사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부친 데벤드라나트 타고르(দেবেন্দ্রনাথ ঠাকুর, 1817~1905)는 힌두교의 개혁에 관심을 두어 '마하르시(মহর্ষি, 위대한 성자)'라는 호칭을 얻은 인물이었다.
영국의 명문대학이자 간디가 졸업한 university college london (UCL 런던 대학교)에서 법을 전공했으나 중퇴하였다.
벵골 문예 부흥의 중심이었던 집안 분위기 탓에 일찍부터 벵골어 시를 썼고 16세에는 첫 시집 《들꽃》을 냈다. 초기 작품은 유미적이었으나 갈수록 현실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졌다. 교육 및 독립 운동에도 힘을 쏟았으며, 시집 《기탄잘리》(গীতাঞ্জলি, 신께 바치는 노래)로 191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아시아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다. 더불어 아시아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
타고르는 한국을 소재로 한 시,《동방의 등불》을 남겼다. 《동방의 등불》은 1929년 타고르가 일본에 들렀을 때, 동아일보 기자가 한국 방문을 요청하자 이에 응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겨 그 대신 동아일보에 기고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이 기고라는 것이 처음 4행만 메모 형태로 기고되었고 나머지 11행은 누군가가 타고르의 다른 작품인 '기탄잘리 35'의 글귀를 짜집기해 이어붙이고 마지막엔 출처도 알 수 없는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라는 문구가 붙여진 물건이라고 한다. # 이런 걸 좋다고 숭상하고 인용하고 교과서에 실어온 사람들은..
타고르의 또 다른 작품인《패자(敗者)의 노래》는 최남선의 요청에 의하여 쓴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전에 타고르 자신이 번역해 미국에서 발간한 시집인 '채과집(Fruit-Gathering)'에 실린 것을 그냥 보낸 것이다. 최남선이 이를 타고르가 한국을 위해 쓴 창작물로 오해한 것. 거기다 문구도 원문과 비교하면 그것조차도 오역이 들어가 있는 상황이니.
거기다 위의 시들로 인해 한국을 우대한 인물로 국내에 알려져 있지만 실은 일본의 문화에 매료된 자포네스크적 기질의 인물로 '일본은 시심을 자아내는 나라'라든지 '일본은 아시아에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이 해 뜨는 나라에 감사한다'라든지 하는 말을 하며 일본을 5차례 방문하고 러일전쟁에 일본을 숭상하는 시를 써 기고하기도 했으며 군국주의를 밀어주던 일본 우익의 거물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와도 친분이 있는 인물이었다.[1]
다만 일본에서의 강연에서 "이 나라(일본)는 물질적으로는 진보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퇴보하고 있다"라고 하거나, "일본이 인도에도 야심을 품고 있는 듯하다. 굶주린 그들은 지금 조선을 잠식하고 중국을 물어뜯고 있다"라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으니 대놓고 일빠는 아니다.
한편 타고르의 고향은 지금의 인도 영토인 캘커타이고 힌두교도임에도 불구하고 방글라데시인들도 같은 벵골어 사용자라 그런지 타고르를 열렬히 사랑한다. 방글라데시의 국가인 "나의 황금빛 방글라"도 타고르가 작사, 작곡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