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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안중근(安重根) |
초명 | 응칠(應七) |
출생 | 1879년 9월 2일, 조선 황해도 해주부(府) |
사망 | 1910년 3월 26일, 청나라 뤼순 감옥 사형장(향년 30년 206일) |
종교 | 천주교(세례명 도마) |
활동분야 | 독립운동·구국운동 |
업적 | 이토 히로부미 처단 |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파일이 없음 |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 | |||
강우규 | 김구 | 김규식 | 김좌진 |
김창숙 | 민영환 | 서재필 | 손병희 |
신익희 | 쑨원 | 쑹메이링 | 안중근 |
안창호 | 여운형 | 오동진 | 윤봉길 |
이강년 | 이승만 | 이승훈 | 이시영 |
이준 | 임병직 | 장제스 | 조만식 |
조병세 | 조소앙 | 천궈푸 | 천치메이 |
최익현 | 한용운 | 허위 | 박정희 |
1 개요
安重根은 以庚戌陽曆三月二十六日上午十時에 立刑場하여 欣然而曰 余爲大韓獨立而死하고 爲東洋平和而死하니 死何憾焉이리오 遂換着韓服하고 從容就刑하니 年三十有二이라.안중근은 경술년 양력 3월 26일 오전 10시에 형장에 서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을 한스러워 하랴?" 하였다. 마침내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용이 형장으로 나아가니, 나이 32세였다.
- 한국통사(韓國痛史)
도마 안중근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무인이자 한반도의 대영웅.[1]
그의 총알 3방에 아시아의 역사가 바뀌었다
1879년 9월 2일에 태어나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한 대한제국 말기의 계몽운동가이며 의병[2]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평화주의적 아시아주의자.[3]
본래는 교육 산업 등 민족의 계몽 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략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그 곳에서 의군을 조직하였다. 곧이어 그는 무력단체의 참모중장으로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최종적으로는 FN M1900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명은 안응칠(安應七)이고 아명인 동시에 이 분의 자(字)이기도 하다.[4] 가톨릭 세례명은 토마스. 이것에서 '도마 안중근'이라는 호칭이 나왔다. 과거에는 가톨릭에서 사도 토마스를 도마로 번역했었기 때문.
2 생애
2.1 하얼빈 의거 이전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부에서 진해현감 안인수의 아들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로 불렸다.
전형적인 무골로,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연마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격의 명수였다. 놀랍게도, 그는 화승총을 쏘아 20보[5]나 되는 곳에 놓인 동전을 맞추었다고 한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을 '안씨 집안의 총 잘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개화파 청년그룹이었는데, 갑신정변으로 일본 유학이 좌절되자 당시 7살의 안중근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으로 은둔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 정현석과 해주감사가 청계동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때 16살의 안중근은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박석골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3년 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다시 정부 문서에 등장하는데 내무 대신인 남정철이 쓴 보고서에 따르면 안태훈이 동학농민군 향장 유만현을 제거하고 빼앗은 세금을 마음대로 썼기 때문에 이를 원상복구하라는 내용이다.(1897년 5월 6일자 조회 제6호) 안중근은 동학군이 버리고 간 쌀 500석을 군량미로 썼다고 한다.
이때 안태훈은 천주교회를 찾아가 프랑스인 니콜라 빌렘[6] 신부의 도움을 받았으며,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 안중근 의사가 진압한 동학농민군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는 만큼 동학농민운동 항목을 참조하기 바람.
2.2 대한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은 그의 전 생애를 설명해주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얼빈 의거 참조. 다만 안중근 본인은 이 일을 의거가 아닌, 김두성의 명령을 받고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적국의 장수를 처단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안중근은 대한의군 소속으로 활동했다.
안중근과 거사를 함께한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얼굴상과 특징 뿐이었는데, 사진을 구하기 쉬운 때도 아니었거니와, 이토 히로부미가 원태우의 돌팔매에 헤드샷 마빡이 터져 죽을 뻔한 일을 겪은 뒤로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러시아어 통역 담당 유동하[7]와 조를 나누어 우덕순과 유동하는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에,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 매복했다. 하지만 차이쟈거우 역의 지하 숙소에 매복하던 우덕순과 유동하는 기차가 멈춘 4분 동안 문이 잠기는 바람에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고, 기차는 그대로 하얼빈 역에 정차했다.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체념하던 순간에,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을 확인하고[8] FN M1900으로 3발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4발 저격했다. 제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제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으로 들어가 좌측 복근에 박혔다.[9]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 俊彦)의 팔꿈치에 1발,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다이지로(森 泰二郞)의 복부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 淸太郞)의 왼쪽 무릎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나카무라 요시히코(中村 是公)의 오른쪽 장딴지에 1발을 맞췄다.[10] 하지만 민간인이 다칠 것을 우려하여 자폭하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체포당했으며 안중근은 체포당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Корея Ура! Корея Ура!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저격을 받고 얼마 후 사망. 일본 야마구치 현 히카리 시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으며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12]
이토히로부미의 죄악하나. 일천팔백육십칠년, 대일본 명치천황 폐하 부친 태황제 폐하를 시살(弑殺)한 대역불도의 짓[13]
둘. 천팔백구십사년, 자객들을 황궁에 돌입시켜 대한 황후 폐하를 시살한 짓
셋. 일천구백영오년, 병사들을 개입시켜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위협해 강제로 다섯 조약을 맺게 한 짓
넷. 일천구백영칠년, 다시금 병사들을 이용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여 강제로 일곱조약을 맺게 한 후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폐위시킨 일
다섯. 한국내 산림과 하천 광산 철도 어업, 농, 상, 공업등을 일일히 늑탈(勒奪)한 짓
여섯. 소위 제일은행권을 강제 하여 한국 내의 땅들을 억지로 팔게 만든 죄[14]
일곱. 국채 일천삼백만원을 한국에 강제로 지게 한 짓[15]
여덟. 한국 학교 내의 서책을 압수하여 불사르고, 내외국의 신문을 인민들에게 전달하는것을 막은 짓
아홉.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수많은 의사들의 봉기를 폭도 취급해 쏴죽이거나 효수하고 심지어 의사들의 가족까지 십수만인을 살육한 짓
열. 한국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짓
열하나. 소위 한국 정부의 대관이라는 오적(을사오적)칠적(정미칠적) 등 일진회 놈들을 통해 일본의 보호라는 헛소리를 운운한 짓
열둘. 일천구백구년 또다시 거짓으로 다섯가지 늑약을 맺게 한 짓[16]
열셋. 한국 삼천리 강토를 욕심내어 일본의 것이라 선언한 짓
열넷. 한국自 일천구백오년 都無安日 이천만 생령의 살육의 곡소리가 하늘에 끊이질 않고 포성과 총알이 비오듯 쏟아져 숨쉴틈 없는 와중에도 한국이 무사태평한것처럼 명치천황을 속인 짓
열다섯. 동양 평화의 영위를 파괴하여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짓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통감부문서 7권[17] / 싱가포르 영자신문 기록. 내용과 순서가 다르다.
원래대로라면 러시아에서 수완을 쌓은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지원을 받아 제3국 입장인 러시아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하였으나, 아래 법률적 평가 문단에서 나오듯 일제의 알력에 의해 뤼순(현재는 다롄의 일부)에 있는 일본 법원으로 송치되어 버리고 만다.
의거 소식이 들리자 한국은 물론 러시아·영국·스페인, 심지어 일본(!)에서까지 수많은 국제 변호사들이 안중근의 변론을 맡겠다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선임이 불허되었고, 일제 측의 관선 변호사가 변론을 맡게 된다. 안중근 평전 - 저:김삼웅(제 7대 독립기념관장)
2.2.1 법률적 평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두고 법률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중 재판상에서도 문제가 된 안중근과 이토의 신분 여부가 가장 큰 문제였다. 뤼순 소재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교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18]
이에 대해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순구 교수는 첫째, '대한의군 참모중장'(군인) 신분이었던 안중근은 1907년 발효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의 "비정규군도 교전자격이 있다"는 규정에 따라서 보호받을 수 있다는 점과 둘째, 이토는 1909년 10월 사망 당시에 이미 조선 통감을 사임했지만, 대신 추밀원 의장을 맡고 있었고 그가 민간인이더라도 하얼빈 방문 자체가 한반도 지배를 포함한 대륙 진출을 목적으로 한 침략 행위였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따라서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교전에 해당될 수 있다고 말한다.[19] 다만 이 주장이 국제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장인지는 의문이 있다. 아무리 침략행위와 연관이 있다하더라도, 단순한 방문이 문언적으로 "교전"에 해당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교전의 의미를 지나치게 넓게 해석하면 당장 비슷한 시기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도 교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극단적으로는 이라크에서 있었던 각종 테러범들도 자신들이 교전자라고 주장할 여지가 있다. 설령 이토 히로부미의 방문이 교전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교전단체에 소속된 자가 교전에 참가한다고 그 자체로 교전자의 자격이 인정되지는 않는다. 당시 적용되었을 헤이그 육전규칙(1907) 교전자격 요건에 의하면 민병이나 의용병단이더라도 부하에 의해 책임지는 자에 의하여 지휘되고, "고착된 표지", 즉 제복(혹은 이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전투원임을 식별할 수 있는 복장)을 갖추고, 공연하게 무기를 휴대하며, 전쟁법을 준수하여야 교전 자격이 인정된다. 다만 군민병이라면 공연한 무기휴대와 전쟁법 준수만으로도 교전자로서 자격이 인정되나, 안중근 의사를 군민병으로 볼 수 있을지도 의문시 되며[20] 안중근 의사가 군민병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공연한 무기휴대 요건이 결격사유가 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모두가 볼 수 있을 정도로 권총을 들고 다녔다면 거사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 아닌가. 물론 이것말고도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재판과정이 불법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요소는 많지만, 적어도 안중근 의사가 당시 국제법을 기준으로 교전자로서 포로 대우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 재판 관할의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일본 검찰 측에서는 "하얼빈은 청국 영토이지만 동청철도의 부속지로서 모든 나라에 대해 자유지역이며, 일본국은 조약상 이 곳에 대해서 치외법권을 가진다."고 주장했으며, "메이지 38년(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일한보호협약(을사조약) 제 1조에 의해 국외에 있는 한국인에 대한 보호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 주장에는 을사조약 체결의 조약상의 문제점(강압적 체결)과 한국인에게 적용될 대한제국의 법률에는 섭외법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상존하고 있었다.[21] 한편 일본 법원은 일본 형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2.3 낯선 타국 이름 모를 야산에 잠들다[22]
순국 5분전 사진. 어머니가 짜주신 새하얀 수의를 입고 찍은 사진이다. |
1910년 2월 14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3월 26일[23] 오전 10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24] 이 때가 그의 나이 32세, 만 31세였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가 처형당한 뒤 두 동생이 유해를 인수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일본 당국은 안중근 의사의 묘지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 온갖 트집을 잡으며 유해를 넘겨주지 않았고, 뤼순 감옥인근 죄수 묘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2.4 유해 발굴 시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김구는 삼의사의 유해를 찾으려 시도했으나 암살당하며 흐지부지 끝나버렸고[25] 유해 발굴에 호의적이던 장제스가 국공내전에서 패전해 현지의 도움은 사실상 기대할 수가 없어졌다.
북한의 경우 안중근을 높게 평한 김일성은 1970년대에 직접 주석명령을 내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 씨를 단장으로 하여 조사를 벌였고, 1986년에도 북한은 대규모 유해발굴단을 보내 조사를 벌였다고 하며 물론 둘 다 성공하진 못했다.
또한 뤼순 주변은 대부분 1930년대 이후 여러차례 개간되어 이미 1910년대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고, 2008년 남북이 공동으로 진행한 발굴사업에서도 결국 유해를 찾지 못해 사실상 그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1997년 8월 15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안중근의사가 순절한 여순형무소(여순감옥)를 취재하여 시청자들에게 최초로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장소를 공개하였다. 당시 여순형무소는 외국인 방문이 금지돼 있어서 취재직전까지 공식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당시 MBC가 처음으로 취재 비자를 받아서 여순 형무소에 남아 있는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시청자들에게 공개하였다.[26]
당시 MBC뉴스에 보도된 여순형무소에서 안중근 의사 시신 수습에 대해 말하자면
형장에 걸린 밧줄에서 수직으로 2m쯤 아래에는 나무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교수형을 당한 시신을 바로 이 상자 안으로 떨어뜨린 뒤 흙으로 덮으면 사형 집행이 모두 끝나는 형식으로 사형이 이뤄졌다. 안 의사의 처형은, 그러나 이곳이 아닌 본관과 교수 형장 사이의 공터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남은 것은 안 의사가 처형된 곳임을 알리는 현판 하나가 전부. 사형을 당한 시신들은 나무상자에 넣어져 땅 속에 묻혔다. 이 중 어딘가에 안 의사의 유해가 있지만 아직까지는 찾지를 못했다. 안 의사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MBC 뉴스 1997년 8월 여순형무소 안중근 의사 순절현장 취재 내용 -
2010년 3월 중엽, 정보통제기간이 끝난 일본의 기밀정보 중 일부가 일반 정보로 풀리면서, 일제가 안중근 의사를 체포한 이후 철저하게 감시했고 재판에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였단 자료가 튀어 나왔다. 그동안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체포와 이후의 심문과 사형에 이르는 재판과정에 일체 개입을 하지 않았으며, 당시 효력을 발하던 국제법에 따라 매우 공정한 재판을 진행했다고 주장해 왔으나, 풀려버린 자료에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이 다수 실려 있어 결국 사과의 의미로 유해발굴에 협조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고 중국 정부도 당시 재판과정에 대한 책임을 마무리 하기 위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의사만...)[27]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마지막 기회로 보고 한중일 공동유해 발굴단이 결성을 의제로 추진하게 되었으나 이렇다할 결실은 거두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 버렸다. 결국 안중근은 고국이 광복을 맞이하였음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유해의 회수에 실패하였기에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역[28]에 허묘로 비도 없이 모셔져 있다.
3 신앙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 성경 지혜서, 3장 1절 - 7절.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 일각에서는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했던 잔 다르크가 시성된 것처럼 안중근도 시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2011년 10월 31일,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안중근 의사의 시복(諡福)을 추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관련기사.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은 "안중근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모범"이라며, "순교자"는 아니지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신앙 고백함으로써 의연한 신앙의 자세를 견지한 증거자"라고 밝혔다. 염 추기경은 안중근의 동양평화 사상과 노력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다"며, 안중근을 "민족주의 관점에서만 평가되는 반쪽짜리 인간"으로 만들지 않기를 당부하며, 서울대교구는 안중근 토마스 의사를 시복하기 위해 빠른 시일 내에 신학적 검토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서울대교구가 시복을 추진 중에 있는 인물은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1792~1835) 주교를 비롯해 조선시대 및 근현대 신앙의 증인 570여 명이며, 여기에는 안중근도 포함되어 있다.
안중근이 명백히 사람을 죽일 목적으로 총을 쏴 살인한 것은 맞지만 그의 생애를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한정시키지 않고 처형당하기 전 마지막 시기인 ‘동양 평화를 위한 수인(囚人)기’ 등을 깊이 조명하면 성인으로 공경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본 것이다.
구체적으로 성인으로 시성된 전쟁 영웅 잔 다르크[29]와 함께 성경에도 안중근과 비슷한 사례로는 구약시대의 유딧이 있다. 유딧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의 침략을 당하자 적진으로 찾아가 홀로페르네스 장군의 신임을 얻고, 연회 때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장군의 목을 잘라 귀환해 이스라엘을 구한 과부이다. 즉 안중근의 저격은, 유딧의 칼부림을 누구도 살인으로 일컫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2016년 10월 22일 충남 홍성군의 홍주 생매장터 순교성지의 14처[30] 봉헌 미사에서 천주교 대전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는 미사 중 강론을 통해 안중근 토마스 의사에 대한 시복 및 시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추진할 것임을 밝혔다. 본래 시복 및 시성 추진 관련 업무는 해당 성인의 출신지 교구장이 하는 것이나 황해도가 북한에 있으므로 한국 천주교에서는 주교회의를 통해 이 직무를 맡을 주교 한 사람을 선출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유 라자로 주교가 이를 맡게 된 것.
4 가족
- 祖 안인수(安益壽)
사실, 안중근의 집안이 통째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34] 독립운동 때문에 일가가 중국·미국·북한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탓에 이들의 후손들 대부분이 외국에 살고 있어, 안중근의 유명세에 비해 이 집안에 대한 정보는 한국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안중근의 고명딸 안현생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2010년 3월 25일에야 '해방 후 귀국[35]해서 1953~1956년에 효성여자대학교(現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재직했다'는 공식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안중근의 어머니인 조마리아는 안중근이 하얼빈 형무소에서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유명하다.
장한 아들 보아라.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편지는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잘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일제시대의 여성 독립운동가」, 2014. 5, 국가보훈처
이후 안중근의 장남은 어렸을 때 일제에 의해 독살당한다. 그리고 이것 때문인지 안중근의 차남인 안준생은 이후 변절, 1939년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伊藤 文吉)[36]에게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발언을 하고, 나중에 소위 이토 가문과의 화해란 명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모시는 사찰에서 이토 분키치에게 공개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저질렀다.[37] 이 일은 친일 매체에 의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으며, 이에 분노한 김구가 안준생을 죽이라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암살 계획을 세웠었다는 대목이 <백범일지>에 있다. 김구 본인이 안태훈의 집안과 친분이 있었으니 김구의 분노는 더 컸을 듯. 안준생을 죽여야 한다며 암살 계획을 짰다는 부분은 얼핏 보기에 김구가 '배은망덕한 인물'[38]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당시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러한 반응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5 저작물
5.1 동양평화론
세계 열강이 동양을 침범해 옴에 따라 한중일 3국이 서로를 돕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해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일본이 3국간섭으로 뤼순을 청에 반환하고 한중일 3국이 공동관리하는 중립지대를 만들며, 그곳에 3국 평화회의를 설립하고 3국에서 대표를 파견하며 동양 3국의 의견을 조율하며, 3국 청년들로 구성된 군단을 창설하고 은행, 공용화폐 등을 만들자는 주장이 실려있지만 서문만 완성하고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했다.
그의 사상은 공용화폐나 유럽의회를 통해 유럽의 평화와 통합을 추구해 나가고 있는 유럽연합과 비슷하다.
5.2 장부가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로 답하였다.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한글시가 함께 전해진다.
丈夫處世兮其志大矣: 장부가 세상에 쳐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時造英雄兮英雄造時: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
雄視天下兮何日成業: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東風漸寒兮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必成目的: 분개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鼠竊伊藤兮豈肯比命: 쥐도젹 이등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豈度至此兮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랄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同胞同胞兮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대한 동포로다
이토 히로부미를 쥐새끼도적으로 표현한 게 인상적이다.
5.3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
뤼순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 항목 참조.
5.4 기타
- 결혼생활의 대부분을 함께 하지 못했던 아내에게 미안함과 애정을 표한 편지를 자주 쓰는 등 로맨티스트로서의 면모도 있었다고 하며 이 편지는 현재에도 보존되고 있다.
- TV쇼 진품명품에도 안중근 의사의 글씨가 나왔다. 경천(敬天)이라고 씌여진 글씨의 감정가는 6억원으로 가치를 측정할 방법이 없어서 전시회시에 보험가격을 내어 6억이라는 가격으로 측정되었다고 한다.#
- 여순 감옥에서 작성한 자서전이 있으나 원본은 유실되었고, 일역본과 중역본이 남아 후에 복원할 때 참고로 하였다고 한다.
6 평가
한국에서는 당연히 의사(義士)[39]로 추앙받으며, 항일 활동가 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인지도 또한 높다. 그의 올곧은 정신과 이를 잘 드러내주는 서예 작품 등 또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온건론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한일 강제 병합을 앞당겼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지만 이미 을사늑약 등에 이토 히로부미가 활발히 참가해 왔고 조선을 일본에 종속시키려는 장기적 계획이 일본 내에서 꾸준히 논의되어왔으며(대한시설강령 등) 일본의 각의는 1909년 7월 조선 병합을 가결하고 가쓰라 수상을 필두로 병합을 추진 중이었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전이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병합이 됐네 어쨌네는 잘못된 지식을 가진 자들이나 일본찬양론자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지금도 넷상에선 이런 개드립을 믿는 자들이 보이며 특히 일본 극우들이 이 떡밥을 물어 안중근 팀킬론을 신나게 떠들고 있다.
무엇보다, 이토 히로부미는 평화주의자, 혹은 친한파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정한론을 반대한 것은 정한파들을 성급한 인물들이라고 생각했고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확실한 계획을 세워서 조선을 완벽하게 지배해야한다고 생각했었다. 즉 그가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강제 병합은 일어났을 것이며, 되려 살아남아 강제병합이 이토의 생각대로 추진됐다면 소설 비명을 찾아서나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같은 끔찍한 현실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6.1 이승만의 평가
한편 미국 유학 생활 중이던 이승만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했다. 이승만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서도 비판한 바 있을 정도로 무력을 사용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성향이었다.
안중근이 일본의 거물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 각종 언론 신문에는 '한국인들은 잔인한 살인마이며 무지몽매하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자주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한국인인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 했고, 교수들은 나를 무서워해서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전년도인 1908년, 친일 외교고문으로 한일합방을 찬미하고 홍보하는 외교관 '더럼 스티븐슨'을 처단한 전명운과 장인환 의사들 법정 통역을 거부했는데 거부 사유가 자신은 '기독교' 신분이라며 살인자들을 변호할 생각없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인들 여론상황 반응만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법정통역을 거부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오히려 이승만의 소극적인 태도를 더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찾아오자 1959년 05월 29일 이승만은 안중근 의사에 헌화하고 참배했다.#
6.2 박정희의 평가
박정희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1972년 1월 ‘祖國統一 世界平和’(조국통일 세계평화)라는 휘호를 보냈고, 안중근 장군 탄신 100주년이던 1979년 9월 2일에는 ‘민족정기의 전당’이라는 휘호를 내려 기념관을 이순신의 현충사에 버금가는 성역(聖域)으로 조성하려고 계획했다. 즉, 안중근을 민족정기의 화신(化身)으로 추앙하여 이순신과 동격의 위인으로 높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해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육군사관학교에 爲國獻身軍人本分를 새긴 바위를 세우기도 하였다.
6.3 일본의 시각
몇몇 일본인들과 일본의 극우 등은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간주하고 있다. 일본 내에서도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일단 이토 히로부미는 예전에는 천 엔 지폐에 실렸을 정도의 위인이다. 몇몇 일본인들은 안 의사가 테러리스트에 지나지 않으므로 한국인들이 안의사를 영웅시 하는걸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고. 그렇지만 어차피 우리들도 이토 히로부미가 탐탁치 않으므로 별 상관은 없는 이야기. 일본의 대중적인 시야는 90년대까지 한국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어서 그저 '이토 히로부미를 쏜 테러리스트' 정도라는 단순한 인식이 전부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 증대와 과거사에 대한 일본 좌파들의 각성 촉구를 통해 혁명 지사였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일본에서 안중근 평전과 안중근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도 나온 적이 있다.
당시 옥중에서 그의 고귀했던 성품, 대의명분, 그리고 인성을 본 일본인들은 안중근을 매우 존경했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재판에 관련했었던 검사, 변호사, 그리고 뤼순 감옥의 간수들도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지금도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 있는 다이린지(大林寺)라는 사찰에는, 안중근을 존경했던 간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와 안중근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 헌신함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유묵을 써서 지바에게 주었는데, 지바는 이를 평생 소중히 간직했으며, 1980년에는 한국에 반환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유묵 외에도 총 26점이 일괄하여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그의 재판을 맡았던 일본 판사 히라시는 그가 그의 책(동양평화론)을 완성할 수 있도록 그의 사형일을 재판이 끝나고서 몇달 후에 집행하려고 했으나, 도쿄에서의 직접명령으로 인해 미룰 수 없었다고 한다.지바 도시치의 이야기
다이린지 사찰에 세워진 안중근의 유묵기념비, 내용은 위와 같이 爲國獻身(위국헌신) 軍人本分(군인본분)
당시 일본 민간엔 비록 일본 정부의 이용으로 변질됐지만 동양간에 뭉쳐서 서구세력과 대항해야 한다는 아시아주의가 유행하고 있었다. 안중근의 사상은 아시아주의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고 또 천황에 대한 적대보다는 간신 이토를 처형했다라고하는 생각이 일본의 지사들에게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이 어느정도 이해를 받을 수 있었다.
2010년, 동경대의 와다 하루키 명예교수[40]는 자주 등장하시는 쿄토대의 동료 역사학자인 이토 유키오의 2009년 글을 인용해 안중근 의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을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의 통치는 한국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강제 합병의 첫 단계로 인식되어 큰 저항심을 일으켰으며, 따라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의 이데올로기를 모르면서 그를 죽였다고 그를 책망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일본의 지식층에서 안중근을 미화, 신격화하면서 정작 일본인인 이토 히로부미는 안습행보를 걷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의 정치인으로선 대단한 사람이긴한데 행실이 하나하나가 문제점이 많아서 유신지사 중에서도 주로 비판을 받는 측인점도 한몫하는데다가 부인에게 애정의 편지를 보낸 안중근과 달리 여자문제로 항상 추문이 나돌다가 사살 된 후, 일본내에 난잡한 여자문제를 풍자하는 만화가 실린일이 발굴되어 지식층의 접근을 떠나서 그냥 이토 히로부미의 인식 자체가 나빠져버린 일도 있다.[41]
6.3.1 학계
6.3.1.1 이토 긍정파
뜻밖이지만 이토 긍정세력들도 안중근 의사를 높게 평가한다. 이토 유키오는 이토 평전에서 (2014년 번역 정발) 이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안중근 의사의 잘못은 아니며, 의사의 독립운동을 폄훼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안중근 의사를 알아본 후 인간성에 반하게 됐다고 한다.
6.3.2 정치계
6.3.2.1 2013년 아베 정부의 망언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의 시진핑 주석에게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는 표지석을 설치할 것을 제의하였고, 중국이 이를 수락하여 하얼빈역의 의거현장에 표지석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11월 18일, 청와대를 방문한 양제츠 국무위원에게 이에 대한 사의를 표했는데, 이에 일본은 격렬히 반발하며 11월 19일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안중근은 범죄자"라는 망언을 하는가 하면, 관방부장관까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해 사형 판결을 받은 인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망언을 연이어 쏟아내었다.
물론 이 발언은 사람을 죽였다는 팩트만으로 따지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오류가 있는데 우선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이 처단한 것은 사적인 원한 등이 아니라 그가 한국 식민 지배에 앞장섰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처단한 것이고, 또한 재판 자체가 원래 재판이 이뤄져야 할 러시아가 아닌 일본에서 처음부터 불공정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을 쏙 빼고 명백한 독립투사를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해당 발언은 아시아권의 화제가 되었는데, 일본의 현역 공식 관료가 안중근 의사의 표지석 설치를 반대하는 것은 제국주의 시절의 식민 지배와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중국 외교부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안중근은 저명한 항일 의사로 중국 인민의 존경을 받는다”고 일본 측 항의를 일축했다.또 중국 공인일보는 안의사를 "아시아 제일의 의로운 협객" 이라며 높게 평가함과 아울러 그의 삶과 업적을 조명했다.
중국은 일본의 도발에 대해 정정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오히려 중국 공산당이 제대로 된 역사 의식이 없다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취하였고 마루타 같은 망언에 놀아나지 말라는 발언을 내놓았다. 이는 2010년부터 731 부대에 대한 내용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려는 중국 측의 행보를 비꼰 것이라, 사실상 일본 측은 안중근 의사를 빌미로 중국 쪽이 추진 중인 일을 비판한 것에 가깝다. 덕분에 국제정세 전문가들은 "일본이 알아서 어그로를 끌었으니, 중국 공산당은 지침상 빡칠 테고 적극 대응할 테고 하얼빈역에는 표지석 수준이 아니라 아예 번듯한 기념관이 생길 것이다"라며 환호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4년 1월 20일, 진짜 번듯한 건물로 하얼빈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생겼다. 항목 참조.
어찌됐든 안중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일부 일본인도 있겠지만, 보편적인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자국의 초대수상을 암살한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증한 사건이었다. 사실 이 문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6.3.3 기타
6.3.3.1 안중근은 친일파다?
13.현재 한국과 일본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한국이 아무 탈없이 편안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15. 일본 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죄[42]
안중근 의사 본인이 이등박문을 쏘아죽인 이유라고 언급한 13번째와 15번째 이유 때문에 종종 그가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안중근 의사는 천황을 속여 기만하고, 천황의 아버지를 시해한 만고의 역적인 이등박문을 처단한 일본의 충신이라는 얘기다.
허나,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죽인 이유들을 언급했는데, 그 이유들을 보면 안중근이 일본과 천황의 충신이라는 얘기는 신빙성이 낮다.[43] 외려 이것을 언급함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는 당신들 나라의 천황의 아버지도 죽이고 천황을 속인 자인데, 이래도 죄인이 아니란 말이오?' 라는 의미를 전달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애국자 vs 암살자로 극단화된 평가로 인해 잘 부각되진 않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아시아가 단결하여 백인들의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한다는 아시아주의자였다. 한때 이토 히로부미를 좋게 평가했던 것도 한일 양국이 협력해야 한다는 아시아주의 사상에 입각한 것이었고, 이토 히로부미 처단 후 그가 진술한 내용이나 감옥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의 내용으로 보면, 아시아주의가 허상이라고 생각했다기보다는 이토 히로부미가 진정한 아시아주의를 왜곡하여 조선침략의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주의자의 입장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자신의 군주인 일본 천황을 속여 한국과 일본의 진정한 우호관계 수립을 망쳤다고 여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발상이다. 일본의 충신이 어쩌고 하는 얘기는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6.4 북한의 평가
북한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1970년대 김일성의 지시로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을 단장으로 한 안중근 유해 발굴단을 보내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발굴은 실패.
1979년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1998년 북한 영화로는 최초로 SBS에서 국내에 방영되었으며,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에도 다시 한 번 방영되었다. 하지만 원작에 등장하는 김일성 찬양은 당연히도 삭제되어 있다. 예컨대 안 의사가 순국을 앞두고, 의거를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며 그의 출현을 고대한다던가 하는 장면.[44] 어쨌건 남북에서 모두 존경받는 인물인 만큼, 돌아가신지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민족 교류에 기여하시는 셈.
2009년 북한은 신문을 통해, "안중근은 민족이 기억하는 애국열사이며, 어쩔 수 없이 개인 테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풍운아"라 평가하였다. [1]
그러나 주성하 기자가 블로그에 밝힌 바로는, 2014년 11월 기준으로 북한에서는 해당 영화가 더는 상영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북한 지도부가 암살 한 번으로 민족의 영웅이 된 안중근 의사를 본받는 사람이 나올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북한에서 안중근 의사를 띄워주는 일은 이제 없을 듯하다.
7 오늘날의 안중근
- 안중근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영웅이 그의 사망 100주년을 기념해 2009년 10월 26일 후손들의 참관 하에 초연되었다. 이 뮤지컬은 영웅주의나 민족주의로 기울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뛰어넘어, 뛰어난 완성도로 2010년 6월 7일 제4회 뮤지컬 어워즈에서 최우수창작뮤지컬상을 수상했고, 카리스마 있는 연기로 안중근 역을 훌륭히 해낸 주연 정성화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일본에도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극이 있다.
- 2009년 12월 1일에 대한민국 해군에 그의 이름을 단 214급 잠수함 3번함 '안중근함'이 취역했으며 독립운동가로는 2번째로 해군 함정에 이름이 붙여진 셈. 첫 번째는 이 잠수함의 네임쉽인 손원일함이다.
- 소설 비명을 찾아서와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는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에서 이토를 저격하는 데 실패했다. 이후 역사가 바뀌어서 한국은 실제 역사보다 더 많은 부분에서 일본화가 되었고, 현대에선 소수의 운동가만 독립을 위해 싸울 뿐 계속 일본의 식민지인 걸로 시작된다.
- 인터넷에선 의외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란 말을 안중근이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45] 실은 예전부터 전해지던 말이다. 조선 후기에서 말기 사이의 작자 미상의 글인 추구(推句)에도 나온다. 안중근은 그저 예전부터 전해지는 그 글을 붓글씨로 썼을 뿐이다. 이 말은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매일 교양을 쌓지 않으면 언행이 거칠어진다(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뜻이다.
- 2009년 말부터는 삼익악기에서 안중근 기타를 제작하여 발매하기도 했다.
- 2010년 3월 말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은 가운데 KBS 뉴스에서는 '그의 업적을 잘 모른다'는 내용의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의 업적이 어떤 것이냐는 것에 대한 질문에 많은 학생들은 올바른 답을 적어냈으나 일부 학생들은 오답을 적어냈는데, 오답의 내용은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 '진짜 의사#S-1다' 등이었다.
- 2016년 3월 20일에 방영된 KBS 해피선데이 1박 2일 하얼빈 특집에서 중근의사 하얼빈 의거 전야인 1909년 10월 25일부터 그가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 1910년 3월 26일까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기획을 방영했다. 치밀한 연출과 감동적인 내용으로 1박 2일 역대급 에피소드라는 평가가 지배적.
- 2016년 5월 국내 어떤 걸그룹 멤버와 리더가 방송에서 그의 사진을 알아보지 못하고 긴또깡이라 답하여 인터넷 언론 등에서 큰 논란이 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참고로 김두한은 안중근이 죽고 나서 8년 후에 태어났다.
그리고 차트 논란까지 겹치며 망했어요
- 문명 4에서는 위대한 스파이(Great spy)로 나온다.
- 중국학자가 쓴 안중근 평전을 2010년 최서면교수가 발견해서 널리알렸다. 최서면 교수는 안중근 연구의 1인자다.
- 일본 만화에도 등장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하늘의 혈맥 6권부터 등장한다.
7.1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
1970년에는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41주년을 기념하여 서울 남산공원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세워져 의사가 생전에 사용했던 유품과 명언 및 어록, 붓글씨로 된 휘호 등을 전시하게 되었다. 2010년 10월 26일 의거 101주년을 기념하여 현재의 자리에 신관이 개장되었다.
서울 효창공원에서는 삼의사(三義士)의 묘역 안에 안중근 의사를 위한 가묘(假墓)가 따로 있었는데 이 가묘에는 공식 비석이나 유골이 안장되어 있지않은 빈 묘소로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발견되어서 국내로 운구될 경우 이 묘역에 공식 안장하게 될 예정이며 명칭도 '사의사(四義士)의 묘' 로 변경될 가능성도 있다.
경기도 부천시에서는 관할 지역인 중동에 있는 근린공원의 명칭을 안중근 공원으로 변경하고 공원 내에 안중근 의사 동상을 세우기도 하였다. 부천종합터미널 건너편에 있으며, 부천시청역 3번출구에서 계속 직진하면 나온다.
8 그 외
- 체포당한후 일본 법원에서 공판 도중에 자신의 상관으로 김두성을 거론한 적이 있다. 일본은 당연히 눈이 뒤집혀서 이를 잡으려 찾아다녔지만, 결국 누군지 찾지 못했다. 문제는 현재도 그가 누군지, 심지어 실존하는 인물인지 조차 불분명하다는 점.
8.1 장군인가 의사인가, 공식 칭호 논란
해당 항목 참조.이게 항목까지 분리되다니 안중근 의사(義士)/장군의 호칭 문제는 꽤 오래된 문제다.
일부 '의사'로 지칭하는 것이 안중근의 업적을 폄하하기 위해 일본이 뒷작업을 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는 명백히 잘못된 사실이다.하여튼 맘에 안 드는 거 시비걸고 싶으면 일본 핑계부터 대고 보는 인간들이 있다니까
'의사'란 무력(武力)으로써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의사'와 '장군' 모두가 안중근의 업적을 기리는 칭호이다.
'장군'칭호의 유래를 살펴보면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 직후 체포되었을때 자신의 신분을 '조선의용군 참모준장'으로 밝힌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도 안중근은 북간도에서 김두성과 이범윤의 도움을 받아 일으킨 의병내에서 참모준장의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이 이후 행적에 의해 안중근 칭호에 '장군'이 적합한지여부가 문제된다.
북간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안중근은 국내에서 의병활동중인 홍범도에게 군수물자를 지원할 목적으로 국내 진격작전을 펼치게 되는데 두만강을 건너기 직전 일본인 상단을 생포하게 된다. 이에 반일감정이 극도로 달하던 의병들이 생포자들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나 안중근은 이들을 풀어주게 될 경우 다른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의로움을 전파하여 궁극적으로 조국의 독립에 도움이 될 것이라 주장하며 풀어줄 것을 주장한다. 결국 이 사건을 시작으로 의병조직 내에 분열이 일어나며, 이후 일본군과의 충돌에서 패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 이후 안중근은 엔치야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피난하고 그곳에서 단지혈명을 결성한 뒤 이토를 사살하게 된다.
결국, 안중근이 의병 '장군'으로써 활약한 활동상은 사실상 미미하다 할 수 있기에 '장군'의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이토를 사살하고 뤼순감옥에서 사형당한 것을 무력으로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것을 보아 '의사'라는 칭호가 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46]
더구나 장군이란 칭호는 적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군인의 모습이 부각된다. 그에 비해 의사라는 칭호는 일제 전체에 무력과 정신으로 맞선 애국자로서 그의 업적을 더 넓게 인정할 수 있다.[47]
다만, 안중근 의사의 이후 법정 진술을 볼 때, 안중근은 스스로를 군인의 신분으로 이토를 사살한 것으로 주장하였는 바, 이를 고려하여 장군 칭호를 선택할 필요성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의사'와 '장군'의 호칭 문제는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는지에 대한 차이에 불과할뿐 어느쪽을 사용하건 안중근의 업적을 결코 폄하한다고 할 수 없다고 하겠으며, 사실 이 내용자체 또한 '의사'라는 표현이 격하하는 표현이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른 정보를 알리기 위한 것으로 어느 한 표현만 맞는 표현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음에 유의하자.
실제로 민간에서는 "의사"라는 칭호를 주로 사용하는 편이며, 군 내부에서는 "장군"이라는 칭호를 주로 쓰고 있다.
8.2 관련 어록
風蕭蕭兮易水寒(바람은 싸늘하고 역수 물은 차구나)壮士一去兮不復還 (장사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ㅡ형가(荊軻, ?~기원전 227년)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ㅡ1910년 3월 유언.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ㅡ사형 당일 1910년 3월 26일 일본헌병 치바 토시치 간수에게 써준 휘호.[48] 이후 대한민국 국군의 슬로건이 된다.[49]
ㅡ'사군천리(思君千里) 망안욕천(望眼欲穿) 이표촌성(以表寸誠) 행물부정(幸勿負情)'ㅡ"천리밖 임금걱정하니 바라보는 눈 허공 뚫으려 하네 작은 충성 표하였으니저의 충정 잊지 마소서"
9 관련 문서
- 영웅(뮤지컬): 안중근 의사의 삶을 토대로 만든 국내 창작 뮤지컬.
- FN M1900: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때 사용된 권총으로, 총번은 262336이다.
- 김구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 이토 히로부미
- 아시아주의
- 루리웹 안중근 종손사칭사건
- AOA(아이돌)/사건사고[50]
- 워마드/사건사고: 광복절에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를 모욕하는 것으로 이들의 본성을 드러내었다.[51]
- ↑ 과장이 아닌게 이토 히로부미의 체계적이고 유화적인 조선 식민지화가 이루어졌으면 지금쯤 한반도는 그냥 일본이다.
- ↑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장이다.
- ↑ 당시 아시아주의의 지지자들이 워낙 서양 철학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고, 또한 당시 지식인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했던 우생학 때문에 아시아주의의 대외적 인식은 대동아공영권 수준으로 시궁창이다. 그러나 평화주의적 아시아주의는 손문, 안중근 등등 한국과 중국의 많은 네임드 영웅들의 독립운동과 대일항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단지 어디까지나 그걸 악용하고 비틀어먹은 이들이 문제일 뿐이지...
- ↑ 자서전에 의하면 가슴과 배에 걸쳐 7개의 점이 있었던 까닭에 자를 응칠로 하였다고 한다.
- ↑ 대략 10m
- ↑ 한국 이름은 홍석구.
- ↑ 당시 만 17세였다고 한다.
흠좀무 - ↑ 유동하 친척의 증언이다.
- ↑ 3발 다 급소를 맞췄다고 한다.
- ↑ 네이버캐스트 '안중근'과 원재훈의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참조.
- ↑ 안중근이 근왕(勤王)주의자인지 공화주의자인지는 아직까지 논쟁이다.[2]. 즉, 그가 대한제국 만세 혹은 대한민국 만세의 의미로 까레아 우라를 외쳤는가는 아직도 불명확하다
- ↑ KBS 역사스페셜에서 그 박물관을 찾아가 이토가 입었던 내복을 촬영했다.
- ↑ 메이지 덴노의 아버지 고메이 덴노는 1867년 급사하였는데, 공식적으로는 자연사지만, 에도 막부 측의 독살 혹은 그가 토막에 있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존왕파의 독살이라는 설도 있다. 즉 이 부분에서는 존왕파의 이와쿠라 토모미가 고메이 덴노를 독살했다는 주장을 취한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은 심증 내지 카더라 뿐이지 사실로 밝혀진 바 없는 부분이므로 주의.
- ↑ 지폐 이전에 사용된 동전의 경우 구한말 한국 황실이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등의 폐해가 컸다는 점과 휴대가 용이한 지폐가 보급되자 민중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는 점, 안중근이 과거 집필한 동양 평화론에서 한중일 삼국의 화폐 통합을 주장한 점을 들어 이 부분에 대해 되는대로 핑계를 댄 것이라 주장하는 친일파와 일본학자들이 소수 존재한다. 하지만 삼국 화폐통합은 어디까지나 한중일 삼국의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며, 이미 화폐 정리 사업을 진행할 당시 일본의 행보는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는 거리가 멀어진 상태였다.
- ↑ 각종 불평등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시설 개선, 개혁등의 명목으로 강제로 진 빚이다. 당시 대한제국 1년 예산이 600만원 정도였으므로, 2년치 예산이 넘어가는 셈. 이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것이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다.
- ↑ 기유각서
- ↑ 안중근기념관에서 실문서를 확인 가능하다.
- ↑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현재도 안중근 의사에 대해 테러리스트 내지 살인범으로 평가한다. 다만, 일부 양심적 지식인들은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해 사죄하면서 안중근을 그러한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 ↑ 명순구,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접점에 대한 법적 평가 - 일본인이 안중근을 흉한으로 부르기 어려운 법리적 이유", P.157~161
- ↑ 군민병은 적의 접근으로 민병, 의용병단을 조직할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고 적과 저항하는 주민들을 의미한다. 이때 적의 접근이란 적어도 무기를 들고 저항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적의 공격을 의미하는데, 현실적으로 이토의 방문을 적의 접근이라고 볼 수 있으려면 위의 교전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 ↑ 명순구,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접점에 대한 법적 평가 - 일본인이 안중근을 흉한으로 부르기 어려운 법리적 이유", P.153~154
- ↑ 1박2일에서 내보낸 자막중 하나.
- ↑ 원래는 3월 25일 집행 예정이었으나 한국의 의병 항쟁이 거세짐과 동시에 순종 황제의 탄신일이라 하루 늦춰졌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당시 대한제국이 거의 모든 것을 빼앗겼기 때문에 황제 탄신일 같은거 씹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시 대한제국은 외교권, 경찰권, 사법권, 군대를 뺏긴 고자 상태였지,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아니었다. 참고로 대한제국이 법적으로 완전히 소멸된 날은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 조약 체결일이다.
- ↑ 여담으로 1박2일에서 사형장을 공개했을때 김준호,차태현(나머지 넷은 스케줄상 귀국)등 현지 출연,촬영진들은 물론이요 보는 사람들마저도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한다.
- ↑ 그리고 본인도 효창공원의 삼의사와 안중근의 허묘 옆에 묻혔다.
- ↑ 안중근 의사 순절한 중국 여순형무소 취재
- ↑ 출처 필요
- ↑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 ↑ 다만 잔 다르크의 경우엔 검이나 창 등의 무기로 직접적인 살인을 한 적이 없고, 살인을 피하려고 깃발을 휘둘렀다고 스스로 밝혔고, 오히려 부상당한 영국군 포로들을 위로해주거나 살려줬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 ↑ 조각가 고영환(세례명 토마스) 作.
- ↑ 동학군을 이끌다 관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김구를 보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를 계기로 안중근과 김구는 안면이 있었는데, 이 둘은 나이대도 비슷했지만 그리 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 ↑ 안중근의 순국 뒤에 많은 독립운동을 지원하였고 임시정부에서는 그녀를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라고 불렀다. 200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 ↑ 김구의 장남
- ↑ 게다가, 안태건의 손자인 안민생(安民生)과 안경근은 4.19 혁명 이후 통일 운동에 나섰다는 이유로 5.16 군사정변 이후 투옥당하기도 한다. 출처
- ↑ 주로 중국에서 살았으나 러시아로 망명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 ↑ 소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에서는 히로쿠니(博邦)에게 사죄했다고 나오는데, 당시 기사를 보면 서자였던 분키치(文吉)에게 사죄했다고 나온다.
- ↑ 그런데 2014년 광복절 특집으로 MBC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안중근 -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는 안준생의 퍼포먼스가 일제에 의해 꾸며진 퍼포먼스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안준생은 이토 분키치에게 영어로 "네 아버지는 잘못했고 우리 아버지는 희생되었다"고 일갈했는데 일제는 안준생이 사죄를 했다고 보도한 것이라고 한다.
- ↑ 안경근·안춘생·안진생은 진짜로 '배은망덕한 김가 놈'이라고 펄펄 뛰었으며 김구 장례식도 안 갔다.
- ↑ 호칭에 대해서 장군이냐 의사냐 논쟁이 좀 있었다. 하단 내용 참고.
- ↑ 참고로 이분은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일본의 진정한 사과가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시는 일본 개념 지식인 중 한 명이다. 국내 신문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인터뷰도 자주 하시는 분.
- ↑ 설상가상 이토 히로부미는 남자는 배꼽아래론 인격이 없다는 말을 남기기도 영웅호색이란 식의 쉴드질도 불가능하다.
- ↑ 사실 이 조항은 음모론 단계이고, 범인으로 지목되는 인물도 원래는 이토가 아닌 이와쿠라 토모미이지만 이런 사실이 안중근 의사의 귀에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 ↑ 애초에 안중근 의사는 한국 사람이며 처단 까닭도 일본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국을 위해서이다. 일본과 천황의 충신이라는 얘기는 그의 국적도 안 보고 하는 얘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충신이라면 말이 되겠지만
- ↑ 김일성은 안 의사가 순국하고도 한참 뒤에 태어났다...
- ↑ 인터넷 뿐이 아니다. 1993년 어린이 위인전으로 출판된 유레카 한국위인특대전집 32권 중 '안중근' 편에도 수록돼 있다.
- ↑ 의병활동 그 자체가 대단한 활동이지만 이후 이토사살이라는 위업이 안중근의 가장 주요한 업적이라는 점과 의병활동 결과 자체만 두고 평가했을때 장군으로써는 좋은 평가를 하기 곤란한 면이 있다.
- ↑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사형될 때까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한중일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즉, 투사뿐만 아니라 사상가의 면모도 지닌 셈.
- ↑ 치바 토시치는 안중근에게 사형집행을 알린 헌병이었는데 소식을 알린후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안중근이 써준 글이 바로 이 글이라고. "나에게 미안해 하지 마라. 당신이 하는 그 행동은 군인으로써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라는 의미라고.(2016년 3월 20일 1박 2일 하얼빈 특집 중 소개)
- ↑ 육군사관학교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휘호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 ↑ 방송에서 문제를 푸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 ↑ 위에 언급된 AOA의 경우, '공부를 안했다'로 넘어갈 여지라도 있지만, 이들은 광복절에 독립유공자분들을 자발적으로 모욕했다. 참고로 아카이브에 저장된 이들의 게시물과 댓글을 보면, 하나같이 독립운동가 분들을 모독하는 발언으로만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