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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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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 ||||
1961 - 다그 함마르셸드 | → | 라이너스 폴링 | → | 1963 - 국제적십자사 |
Linus Pauling
생몰연도: 1901년 2월 28일 ~ 1994년 8월 19일.
1 인물소개
오로지 나는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할 뿐입니다.
과학계의 양심
노벨화학상과 노벨평화상을 단독으로 수상한[2], 그리고 소련 레닌상까지 수상한 위대한 미국의 과학자.[3] 그리고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
20세기 과학사의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명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노벨상 2개 부문 단독 수상자인 그는 화학결합론의 기초를 구축한 천재 과학자이자 반핵운동, 평화운동에 앞장섰던 사회운동가로 굉장히 다대한 활동을 해왔었다. 노벨화학상은 전기 음성도 연구로 탔다.
1901년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 에서 태어나, 오리건주립대학교에서 학생 신분으로 강의 조교를 할 만큼 화학에 우수한 두각을 나타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칼텍 대학원에 입학해 박사학위를 받고 28살(!!) 에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20대에 양자물리학을 복잡한 분자 연구에 응용하면서 세계적인 과학자 반열에 올랐으며 화학결합에 관한 그의 이론은 현대 과학에 중요한 부분으로 반드시 거론된다.
2 반핵운동
과학자로서의 업적도 뛰어나지만 이 사람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반핵운동, 평화운동에 앞장나섰던 점이다. 그가 느꼈던 사회와 인류에 대한 도의적 책임은 핵무기 반대와 핵실험의 위험성을 주장하는 데 평생을 헌신케 만들었다. 그 때문에 당시 미국내에서 매카시즘 열풍이 불었을때, 그는 오펜하이머와 같이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실험 반대 운동을 벌여 전 세계 1만명이 넘는 과학자들로부터 핵실험 반대 서명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후 1963년 미국과 소련의 핵협정이 맺어진 이후, 반핵운동에 활동한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3 비타민C
말년에 '비타민C가 암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주장해 이게 논쟁의 중심에 있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실제로 자기 휘하의 대학원생들에게 비타민C 과다복용을 강요했다가 고소당했다카더라....
실제로 그는 메가도스로 비타민C를 매일 매일 과량으로 섭취했다. 그냥 탁자 위에 비타민C 통을 두고 보이는 대로 집어먹었다고 한다. 하루에 수~수십g (mg이 아니다. 보통 일일권장량은 80~100mg = 0.08~0.1g 정도로 책정한다.)[4]을 복용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90이 넘도록 장수했으며 죽기 2주 전까지 대학에서 열성으로 강의를 했다고 한다.
1994년 8월 19일 자신의 주장과는 다르게 암으로 사망한다.
4 DNA에 관련된 일화
거기다 생화학에도 일가견이 있어 DNA의 구조를 연구했다. 그때 당시 라이너스 폴링은 화학 결합에 대한 이론을 완성시킨 최고의 화학자였으므로 분자구조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
...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폴링이 사용한 시료는 손상된 DNA 시료였기 때문에 그는 제대로된 DNA 구조를 밝혀내지 못했다. 게다가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된 탓에 외출이 금지되어 해외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할 수 없었고, 결국 DNA 구조를 밝혀내는 데 결정적인 단서인 DNA X선 회절 사진을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자기 자신이 세운 이론에 위배되는 구조를 만들고 발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주장하던 DNA는 삼중나선 구조였는데 이 구조로는 염기가 어떻게 정보를 갖는지 알 수가 없었고, 또 원자들이 너무 가깝게 붙어있다라는 단점[5]을 가지고 있었다. [6]
결국 DNA 구조를 밝혀낸 공로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폴링의 DNA 구조는 놀림거리가 되었다. 만약 폴링이 그 단서(DNA X선 회절 사진)를 볼 수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을 것이고, 화학상, 생리의학상, 평화상을 수상하며 세상에서 가장 많이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그리고 인지도도 엄청 높아졌을 것이다 재밌는 것은 사실 제임스 왓슨도 폴링과 같이 DNA를 삼중나선구조로 생각하였는데 폴링의 가설을 가지고 월킨스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폴링이 못봤던 위의 그 결정적인 단서인 X선 회절 사진을 보았고 이중나선임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왓슨과 크릭은 노벨상도 받은데다가, 그 위대한 폴링이 조롱거리가 되자 겁이 없어졌는지 DNA 구조를 밝히려고 노력한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는 책을 썼는데, 당연하지만 여기에는 폴링도 포함되어있었다. 근데 정작 크릭은 DNA번역을 rRNA가 주형이 된다고 주장하다가 망했다...허나 폴링은 이들은 파티에 초대해서 자신의 실수를 일깨워준 둘을 칭송하는 성인군자에 필적하는 마음씨를 선보였다.그래서 노벨 평화상을 받은 거다
5 준결정
생전에 일정한 구조를 이루지만 규칙성은 없는 물질인 준결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력 부정하였다. 특히 다니엘 셰흐트만이 준결정을 발견하자 '준결정은 없지만 준과학자는 있다.'라는 발언으로 강하게 비난하였다. 쉽게 말해서 과학자 자격도 없다는 것. 폴링을 중심으로 해서 화학계 전체적으로도 셰흐트만 교수의 연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쉽게 쓰여져 있지만 셰흐트만 교수는 교과서부터 다시 읽으라는 말까지 듣는 등 심각한 왕따를 당했다.
그러나 수학을 통해 준결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셰흐트만뿐 아니라 다른 과학자들도 잇달아 준결정을 발견하면서 폴링이 죽을 때까지 없다고 우기던 준결정이 마침내 학계에서 인정받았다. 결국 2011년, 노벨화학상수상자로 다니엘 셰흐트만이 선정되면서 사후에 그의 병크로 확정. 현재 준결정이 신소재 개발에서 중요한 발견으로 여겨지는 것을 볼 때 준결정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폴링이 저지른 인생 최대의 실수.- ↑ 라이너스 폴링외 14명의 과학자들.
- ↑ 2013년까지 개인으로써 노벨상을 단독으로 2회 수상한 경우는 폴링밖에 없다.
- ↑ 이와 반대로 소련에서 차르 봄바(...)를 만든 후 반핵운동, 반체제 운동에 투신한 인권운동가 안드레이 사하로프도 유명하다. 이 사람 역시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사후 그의 이름을 딴 평화상까지 만들어졌다.
- ↑ 사먹는 비타민C 정제가 보통 한 알에 0.5g~2g이다.
- ↑ 이러면 DNA가 불안정해져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 ↑ RNA의 일부분에선 삼중나선이 나타날수 있긴 한데 폴링이 생각하던 삼중나선과는 조금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