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티 그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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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Robert Moses "Lefty" Grove
생몰년1900년 3월 6일 ~ 1975년 5월 22일
국적미국
출신지메릴랜드 주
포지션투수
투타좌투좌타
메이저리그 입단1925년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 입단
소속팀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 (1925~1933)
보스턴 레드삭스 (1934~1941)
1931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미키 코크런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1]
레프티 그로브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
지미 폭스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레프티 그로브
헌액 연도1947년
헌액 방식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76.40% (4회)
메이저리그 통산 ELO 레이팅 TOP 5
월터 존슨사이 영레프티 그로브피트 알렉산더그렉 매덕스
2,1692,1382,1142,1052,104

1 소개

라이브볼 시대 최강 투수.

커리어

메이저리그 역사상 위대한 좌완 투수들을 몇 명 꼽으라고 하면 흔히 우리 시대의 랜디 존슨, 전 시대의 스티브 칼튼, 전 시대의 워렌 스판샌디 코팩스, 남다른 전문가들 사이에선 베이브 루스(!) 등을 꼽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들을 뛰어넘어 우완 월터 존슨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아니 조정방어율에선 그보다도 뛰어난 역대 최고 투수로 꼽히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좌완이 있는데, 바로 레프티 그로브. 좌렢티 우월터 애초에 이 분은 이름 자체가 왼손잡이다.

그동안 수많은 레프티들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 분의 위엄에 범접하지 못한다. 이분이 활동하시던 때는 스테로이드시대 이전 최고라 일컬어지는 라이브볼 시대 초창기[2], 전설의 타고투저 시대[3][4]였다. 베이브 루스루 게릭이 날뛰던 시대에 홀연 등장한 페드로 마르티네즈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흔히 라이브볼 시대 이래 최강의 투수를 논하는 자리에서는 그렉 매덕스조차도 이분 앞에서는 한수 접고 들어가며, 라이브볼 시대에는 로저 클레멘스 정도만이 그의 성적에 범접할 수 있다. 월터 존슨이 신나게 강속구를 갈기던 시대는 데드볼 시대였고, 그로브는 그 짓을 스테로이드 시대 뺨치는 타고투저였던 라이브볼 초창기에 했으며, 그렇게 300승을 거뒀다.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커리어

2 플레이 스타일

그 시대 맞춰잡는 피칭이 유행[5]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다른 투수들에 비하면 훨씬 높은 탈삼진 개수와 비율을 자랑하였다. 당시 200K는 오늘날로 치면 대충 280K나 300K의 가치를 지녔다고 보면 된다. 또한 그런 막장 타고투저 시대였던 1928년에는 두번이나 한 이닝 9구 3K(Striking out the side on nine pitches)라는 대기록을 기록하기도 했다.[6] 게다가 당시에는 스트라이크 존이 이후의 투고타저 시대에 비해 꽤 좁았기 때문에 볼넷도 많았던 단점이 있지만, 이는 당대 평균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치였다. 또한 지금의 웬만한 에이스들도 그의 커리어 수치인 9이닝당 볼넷 2~3개 정도의 수치는 심심치않게 기록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강속구를 던지면서도 그 강속구를 자유자재로 꽂아넣는 컨트롤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뭐 컨트롤 없이 살아남는 투수가 있겠냐마는...

3 생애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돌멩이를 던지며 재능을 보였던[7] 그는 너무 강하게 던지는 송구능력 때문에 포수가 공을 받지 못해서 광부 야구단에서는 1루로만 줄곧 뛰었다. 하지만 1920년 중순 인터내셔널 리그 볼티모어 오리올스[8]에 입단하였고 투수로서 능력을 발휘하여 4년 반 동안 121승을 거두고 2년차부터는 매년 리그 탈삼진왕을 차지했으며 매년 우승에 큰 공헌을 했다. 그렇게 투수로서 너무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어서 과거 최강의 좌완 베이브 루스도 팔아넘겼던 잭 던 구단주가 그로브만큼은 절대 안팔려고 했고, 덕분에 빅리그 데뷔가 너무 늦어졌다.[9] 그럼에도 기량은 수많은 메이저리그 팀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비시즌 시범경기에서 만난 베이브 루스를 9K로 발라버렸다(...)

3.1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 시절 : 리그를 휘어잡은 슈퍼에이스

결국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의 코니 맥 구단주(겸 감독)가 과거 잭 던 구단주가 루스를 레드삭스에 팔때 받은 몸값 10만불[10]을 뛰어넘는 10만 6천불[11]을 지불하며 그로브를 데려갔다. 그렇게 데뷔한 25세 시즌엔 부상 때문에 실망스런 모습을 보였지만 이듬해부터 탈삼진 ERA 1위를 따내더니 3번째 시즌부터 매년 20승을 따내고 평균자책 1위와 탈삼진 리그 선두권을 질주했다. 특히 1930년에는 28승을 올리고 2.54, 209K를 따내며 트리플 크라운 달성. 1931년에는 최초의 기자단 MVP 투표에서 1위에 올랐다. 당시 그에게 밀린 선수는 .341 46홈런 184타점을 날린 루 게릭(...)

에이스 시절에는 5년간 109승 36패의 인터내셔널리그 시절을 뛰어넘어, 그야말로 시대만 잘 타고났으면 사이 영 상을 독점했을 페이스를 보여줬다. 그야말로 필라델피아 에이스였다. 27년부터 탈삼진왕을 7연패했고, 다승왕 4번, 4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했고, 30~31년엔 2년 연속 트리플크라운에 MVP를 따냈다. 게다가 종종 불펜 알바도 뛰어서, 51세이브를 기록하였다. 베이브 루스-루 게릭-밥 뮤젤을 10구 3K로 잡기도 했고, 양키스가 역사상 가장 긴 308경기 논-셧아웃 기록[12]도 그로브에 의해 깨졌다. 하여간 그의 업적은 너무 커서 세상 문자로 표현할 수 없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동시대에 양키스에서 뛰었던 HoFer 레프티 고메즈보다 더 뛰어난 당대 최고의 "레프티"로 군림했다.[13]

3.2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 멀어져 가는 리즈시절

하지만, 그런 필라델피아 에이스 시절도 끝이 보였다. 1932년 이후 대공황이 터지며 코니 맥은 주력 선수들을 전부 팔기 시작했다. 결국 1933년 24승을 마지막으로 그는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되는데, 첫 시즌에는 부상으로 그간 20승이나 거두던 투수의 위엄에 걸맞지 않는 8승 6.50에 그쳤다.(...) 이 때부터 그는 중대한 변화를 시작하는데, 바로 패스트볼 일변도의 투구에서 탈피하여 리그 최고 수준의 커브볼을 익히기 시작한 것. 이거 어느 괴수들이 생각나는데...?

보스턴 시절은 엄밀히 말해, 과거 리그를 개발살내던 괴수의 모습에서는 다소 떨어져있었다. 아무래도 부상과 노화로 인해 패스트볼의 위력이 감소한 것이 원인인듯 하다. 하지만 그 떨어진 것도 평균자책 1위 4번이었으니... 답이 없다.[14] 하지만 선수생활 말년에는 결국 하향세가 심화되었고, 통산 300승을 채운 뒤 다시는 승수를 채우지 못했다.[15]

4 세이버매트릭스로 바라본 레프티 그로브

그의 진정한 가치는 세이버메트릭스가 본격적으로 대두한 그의 사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세이버메트릭스의 대부 빌 제임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로 월터 존슨, 그 다음으로 그를 뽑았으며, 본인도 "내가 데드볼시대에 뛰었으면 500승은 했을껴"라고 했는데 그 말에 대해 딱히 태클을 거는 전문가가 없다. 시대와 구장의 차이를 감안하여 투수의 기량을 평가하는 조정 평균자책점(ERA+)[16]에서 그는 커리어 통산 148이라는 엽기적인 수치를 기록하였다.[17] 이 수치는 페드로 마르티네즈[18] 이전까지 라이브볼시대 규정 1000이닝 투수 중 최고였고 지금도 좌완 중엔 최고다. 뭐 마리아노 리베라마무리 투수로서 롱런하다보니 1000이닝을 돌파하여 200대의 초월적인 점수를 찍은 후엔 묻혀버렸다만, 역대 300승 투수만으로 기준을 높인다면 역시 그로브는 넘사벽의 존재. WHIP 1위도 5회, 승률을 계산하면 역대 300승 투수 가운데 최고인 .680. 각종 복잡한 세이버메트릭스 스탯으로도 최고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한 시대를 대표했던 좌완투수들인 좌완투수로서는 역대 최다 363승의 워렌 스판이나 팔이 돌아가도록 스크루볼을 던진 칼 허벨, 짧고 굵게 던진 샌디 코팩스, 꼴라델피아 필리스의 만패 달성을 본인의 힘으로 몇년 늦췄다고 볼 수 있는 스티브 칼튼, 우리 시대의 빅 유닛 등과는 달리 1920~30년대의 선수인데다 그 시기는 워낙 타자들의 시대였다는 점에서 그 시대 투수들이 살짝 잊혀지는 점, 또한 어느 팀에서도 영구결번이 되지 않은 점[19]에서 은근히 잊혀지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브볼 시대 최초의 에이스였다는 점만으로도 그는 MLB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투수라 할 수 있다. 사이영상이 최고 투수의 기준이 된 오늘날, 당시에도 사이영상이 있었다면 그는 못해도 7번은 수상했을 것이라 회자된다.

5 트리비아

  • 그는 불같은 강속구와 뛰어난 실력 뿐만 아니라 불같은 승질머리로도 유명했다. 웬만큼 괴팍하기로 유명했던 전설의 타자 테드 윌리엄스조차 학을 뗐다고 한다. 실책을 한 내야수는 매번 무서운 눈총을 샀으며, 득점지원 잘 안되거나 그로브가 지는 날이면 덕아웃과 라커룸은 그야말로 개발살이 났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받아서 기물을 박살낼 때 절대 자신의 밥줄인 왼손만은 쓰지 않았다. 이는 이후 많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어 어린 선수들의 인성교육에서도 중요하게 일컬어진다.(...)[20] 그럼에도 나이가 들어서는 이런 괴팍한 성격은 많이 누그러져 철이 들었다는 평을 들었고, 옛 스승 코니 맥 역시 "이제 투수가 되었다"[21][22]면서 칭찬한 바 있다.

  • 그가 활동을 시작한 20년대부터는 라이브볼 시대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드볼 시대 투수들에 뒤지지 않는 성적을 기록한 그는 라이브볼 시대 최초의 에이스로 불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는 괴팍한 성격과 말년의 급격한 몰락, 초창기였다보니 인식이 부족했던 300승의 위엄 등의 요인으로 첫 턴 입성에는 실패하였고, 3번째 투표에서 76.4%라는 턱걸이 득표율로 입성했다. 근데 모자는 전성기를 보낸 애슬레틱스가 아닌 보스턴 모자를 쓰고 갔다(...)
  • 역대 최고 좌완의 계보를 잇는 투수들의 계보는 레프티 그로브의 은퇴 다음 해에 데뷔한 워렌 스판, 스판의 마지막 해에 데뷔한 스티브 칼튼, 칼튼의 마지막 해에 데뷔한 랜디 존슨으로 이어진다. 2009년 전후에 데뷔한 좌완들을 주목하자.[23]
  1. 1928년 MVP 수상자이다.
  2. 이 시기에는 반발력 높은 공의 도입 뿐만 아니라, 공에 이물질을 묻히거나 손상시키는 행위와 이중 투구동작이 금지되었다. 데드볼과 라이브볼 자체도 있지만 투수들의 무기를 여러가지로 축소시켜 타고투저가 시작된 것이 또다른 요인이다.
  3. 경기당 득점이 5점을 넘었으며, 역대 MLB 단일 시즌 최다 타점 기록 11개 중 9개가 이 시대에 나왔다. 메이저리그 투고타저 시대 평균자책이 3점대 중반까지 나왔고 스테로이드시대에도 4점대였음을 생각하면, 이는 투수들에게는 스테로이드 시대보다 훨씬 더한 지옥이었다.
  4.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서 7번의 단일시즌 1000득점 기록이 있는데, 이 중 5번이 이 시기의 기록이다.
  5. 사실 좋든 싫든 맞춰잡지 않으면 답이 없던 시절이었다. 볼넷이 삼진보다 많은 막장의 시대였으니까.(스트라이크 존이 지금에 비교하면 심하게 좁았다고 한다.) 예를들어 1930년에는 AL 8팀 중 3팀이 팀 타율 3할을 찍었다. 1932년엔 리그 평균 삼진과 볼넷이 9이닝당 3.3삼진/3.6볼넷이었지만 그로브는 5.8삼진/2.4볼넷이다. 그냥 보기만 해서는 영 아니올시다지만 동시대 투수들에 비하면 넘사벽으로 뛰어났다는 것. 2010년 클리프 리와 비슷한 모습이라 보면 된다.
  6. 이 기록을 커리어 내내 두번 해본 선수는 그로브와 샌디 코팩스, 놀란 라이언 뿐이다. 하지만 이 기록을 한 시즌에 2번 한 선수는 그로브 뿐. 아참, 이걸 해본 선수 중엔 애리조나 디백스 시절의 김병현도 있다!!!
  7. 다만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여 평생 문맹으로 살았다. 이는 역시 광부의 집안에 태어났던 맨발의 조 잭슨과 유사한 점이다.
  8.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즈가 옮겨와 지금에 이르는 그 꼴티모어 오리올스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팀은 메이저리그 팀과의 제휴가 없이 독자적으로 운영되던 팀.
  9. 오늘날에도 25세에 데뷔하는 선수들은 대졸투수 중에서도 4~5년을 마이너리그에서 지낸 케이스로서 대부분 장수하지 못한다. 랜디 존슨은 24세에 데뷔하여 300승까지 따냈으니 정말 이례적이었던 것이다.
  10. 이것도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몸값이었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이는 아마 일본프로야구에서 포스팅 시스템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선수들의 이적료와 맞먹을 것. 자세한 수치는 경제 전문 위키니트의 추가 바람
  11. 2012년 기준으로 당시보다 미국 물가는 1,199.9% 인플레이션을 일으켰으므로 이는 2012년의 137만 달러 정도에 해당한다.
  12. 쉽게 말해, 308경기 내내 무득점 경기가 없었다는거.
  13. 게다가 고메즈는 그로브와 달리 루스와 게릭을 상대하지 않았다(...)
  14. 역대 방어율왕 9회로 최다 수상. 2위는 7회의 로저 클레멘스.
  15. 네이버 칼럼 레전드 스토리나 여러 사이트들의 소개글에 의하면 그는 300승을 채운 후 다신 등판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기록을 찾아보면 그해 9월까지는 등판하였다. 마지막 경기는 친정 필라델피아 원정이었고, 1이닝 3실점으로 무너지며 패전하였다. 아마 그런 소개글이 작성된 이후 새로운 기록이 발견되어 업데이트가 안된 것일지도.
  16. 이 수치에서 리그 기본이 100점으로 계산되며, 120이 넘어가면 준수한 선발로 평가하며, 140을 넘어가면 사이영상급 에이스로 평가한다. 150을 넘기면 그냥 인간이 아닌거다.
  17. 우완 본좌라는 월터 존슨 역시 146으로 그보다는 살짝 떨어지며(하지만 근소한데다 승수는 훨씬 높다), 레프티 그로브 이전에는 19세기 단 3년간 1405이닝을 던져 규정이닝을 인정받아 151이 나온 짐 데블린이라는 투수만이 그보다 나은 성적을 찍었다.
  18. 154의 페드로도 말년에 굉장히 하락한거다(...) 빨간 양말 시절 페드로는 그야말로 역대 유례가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전대미문의 7년이었다. 레프티 그로브의 필라델피아 에이스 시절 통산 ERA+ 161보다 훨씬 더한 레드삭스 통산 191(...)
  19. 그가 처음 10번을 단 때는 1931년인데, 그는 그 번호를 3년만 달고 필라델피아를 떠난다. 보스턴 레드삭스에서는 활약이 조금 떨어졌다고 해도 그의 위업을 생각하면 영구결번이 당연하긴 하지만, 명예의 전당 입성하고 레드삭스에서 은퇴까지 했음에도 7년만 뛰었기에 10년을 뛰어야 하는 조건을 맞추지 못했다. 안습... 게다가 서부로 옮긴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역시 워낙 오래 전에 던졌던 옛날 선수라 기억이 희미한 듯 하다.
  20. 물론 다른 손으로 쌈박질하고 때려부순다는게 좋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랜디 존슨도 혈기왕성할 젊은 시절엔 괜히 왼손 다친 줄 알고 오른손으로 벽을 쳤다가 정작 왼손 멀쩡한데 오른손 다쳐서 골치 썩인 적도 있으니까. 하지만 윤석민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투수는 죽었다 깨어나도 던지는 손으로 험한 짓 하면 안된다.
  21. 저녀석 예전에는 던지는것만(Throwing) 할줄 알더니 이제야 던질줄(Pitching)도 아는구만.
  22. 물론 힘으로만 윽박지르던 젊은 시절의 모습을 고쳐 컨트롤로 맞춰잡는 습관을 들인 것에 대한 칭찬으로도 볼 수 있다. 이것도 이제 투수가 되었다는 말의 의미가 엇나가는게 아니니깐...
  23. 현재는 2008년 데뷔한(풀시즌 데뷔는 2009년) 클레이튼 커쇼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고, 마찬가지로 2008년 데뷔해 2009년에 처음으로 풀시즌을 치른 데이비드 프라이스나 2009년 데뷔한 매디슨 범가너등이 후보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