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마르티네즈

보스턴 레드삭스의 영구결번
1468914
보비 도어조 크로닌자니 페스키칼 야스트렘스키테드 윌리엄스짐 라이스
2627344245
웨이드 보그스칼튼 피스크데이비드 오티즈재키 로빈슨페드로 마르티네즈
이름페드로 하이메 마르티네스 (Pedro Jaime Martínez)
생년월일1971년 10월 25일
국적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지마노과야보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8년 아마추어 자유계약(LAD)
소속팀로스앤젤레스 다저스(1992~1993)
몬트리올 엑스포스(1994~1997)
보스턴 레드삭스(1998~2004)
뉴욕 메츠(2005~2008)
필라델피아 필리스(2009)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페드로 마르티네즈
헌액 연도2015년
헌액 방식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91.1% (1회)
1997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사이 영 상
존 스몰츠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페드로 마르티네즈
(몬트리올 엑스포스)
톰 글래빈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1999, 2000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 상
로저 클레멘스
(토론토 블루제이스)
페드로 마르티네즈
(보스턴 레드삭스)
로저 클레멘스
(뉴욕 양키스)
1999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MVP
로베르토 알로마
(볼티모어 오리올스)
페드로 마르티네즈
(보스턴 레드삭스)
데릭 지터
(뉴욕 양키스)

1 소개

시간을 돌려서 15년 전으로 되돌아간다면, 난 버스비 50센트가 없어서 망고나무 아래에서 앉아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난 뉴욕시의 관심 한가운데에 위치해있다. 그 점을 신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2004년, 양키스는 몇번이고 나에게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어보았지만 레드삭스그들을 닥치게 할만한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1]

Pedro el Grande
라이브볼 시대 가장 압도적인 시즌[2][3]을 보낸 대투수
레드삭스 역대 최고의 에이스

커리어 통산 K/9가 10을 넘어가는 역대 3명의 1000이닝 투수[4]임에도 3000K를 돌파한 16명의 투수 중 2번째로 적은 760볼넷을 기록하였고, 라이브볼 시대 투수 중 통산 K/BB에서 2위에 올라 있다는 점에서 커맨드와 컨트롤 역시 가장 뛰어난 투수 중 한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

커리어 통산 2827.1이닝, 219승 100패, 평균자책점 2.93, 삼진/볼넷 3154/760, ERA+ 154[6], ERA- 66, bWAR 86.0, fWAR 84.5.

2 선수시절

2.1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88년 형인 라몬 마르티네즈가 있는 LA 다저스와 자유 계약 선수로 계약한다. 이후 1993년 LA 다저스에서 주로 불펜 투수로 10승 5패, 자책점 2.61라는 우수한 성적을 내고도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트레이드 됐다. 180cm도 안되는 작은 키(투수는 1루수와 함께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평균 신장이 큰 포지션이다.)와는 상반된 강속구에 대해 부상의 의심이 컸기 때문이다.[7]

사실 몬트리올과 보스턴 시절을 생각한다면 다저스로서는 상당히 아쉬운 일. 하지만 그 시절 다저스에는 신체 건장한 이 남자이때는 건강했던 이 분을 비롯한 좋은 파이어볼러 유망주가 많았고, 또한 2루수가 필요했다는 것도 있었다[8]. 트레이드 상대인 들라이노 드쉴즈 시니어[9] 는 겨우 25세였고, 이전 2년동안 .290의 타율과 40개가 넘는 도루를 기록한 전도유망한 2루수였다. 트레이드 당시 당장의 평가는 말할 것도 없이 다저스의 윈.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미 라소다는 이 트레이드를 다저스 역사상, 그리고 본인의 커리어 사상 최악의 실책으로 꼽았으며[10][11], 페드로도 이후로 다저스 측에는 영 섭섭한 인상을 받아 서먹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래도 자신의 데뷔 팀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애정은 남아 있는지 다저스의 정책이나 선수들에 대해서 신경 써주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2013년 클레이튼 커쇼가 디비전 시리즈에서 3일 휴식 후 등판했을 때 이러한 기용에 대해 비판하며 "앞으로 조심해야 한다. 올해처럼 코칭 스태프가 커쇼의 이닝 관리를 해 주지 않을 경우 커쇼에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지금 커쇼는 리그에서 가장 많은 즐거움을 주는 선수 중 한명이며, 우리 모두가 즐겁게 지켜보는 선수다. 이런 야구계의 보물은 반드시 보호받아야 한다"라며 특유의 달변으로 커쇼를 걱정하는 발언을 했다.

2.2 몬트리올 엑스포스

한편, 1993 시즌이 끝나고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보고 그처럼 되고 싶었던 몬트리올 엑스포스대권에 도전하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12] 당시 몬트리올은 에이스였던 데니스 마르티네즈의 부상과 FA가 겹쳐 즉시 전력감을 구하던 중이었는데 상술한 1993-94 오프시즌에 들라이노 드쉴즈와의 1:1 트레이드로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이적하게 된다. 그리고 이 딜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됐다.

페드로는 1994 시즌부터 몬트리올에서 풀타임으로 선발투수로 생활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 시즌에 메이저리그 선수노조 파업으로 시즌을 완전히 마치지는 못했지만, 시즌이 마감되기 직전까지 페드로는 11승 5패를 거두며 사이 영 상 페이스였던 에이스 켄 힐과 환상의 원투펀치를 이뤘다. 한마디로 선발 풀타임 첫 시즌 치고는 대단한 성적을 거뒀던 셈.[13]

하지만 몬트리올은 1994년 파업의 여파로 팀 전력이 급락하게 되면서 메이저리그 최약체 팀이 돼버렸고, 페드로도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도 1997 시즌에 17승 8패에 평균자책점 1.90, 305 탈삼진, 13완투라는 경악스럽고 가공할만한 기록을 세우고 사이 영 상을 수상한다. 우완투수가 2점 이하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300개 이상의 탈삼진을 기록한 것은 1912년 월터 존슨 이후 처음. 이때부터 페드로의 메이저리그 정복이 시작된다.

약체팀에 은근히 불운도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1995년 9이닝 퍼펙트 게임를 달성하고도 팀이 한 점도 뽑지를 못해서 10회 안타를 맞고 퍼펙션을 날린 적도 있었다.

2.3 보스턴 레드삭스

로저 클레멘스와 함께 레드삭스 역사상 최고의 에이스.[14][15]

FA를 앞둔 1997년 11월 보스턴 레드삭스칼 파바노토니 아마스 주니어의 1:2 트레이드를 통해 레드삭스의 유니폼을 입고, 그 뒤에 6년간 7500만 달러의 계약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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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는 19승 7패 평균자책점 2.89, 259탈삼진이란 성적으로 'Rocket who?'(로저 클레멘스가 누구였더라?)라는 환호를 받으며 로저 클레멘스 이후 제대로 된 에이스 투수를 보지 못했던 보스턴 팬들은 이 계약에 대해 환호했다.[16]

특히 1999년과 2000년은 역사에 남을 최고의 시즌이었다. 99년에는 23승 4패, 삼진 313, 평균 자책점 2.04로 아메리칸리그 트리플 크라운[17]을 달성했으며 2000년에는 18승 6패, 삼진 284, 평균 자책점 1.74로 2년 연속 사이 영 상 수상에도 성공했다.

1999년에는 ERA+(조정평균자책점)[18]이 243, 00년에는 291[19][20]을 찍으면서 1914년 더치 레너드의 279를 약 80년만에 경신했다.[21] 또한 1999년, 2000년에는 리그 투수들의 평균 자책점의 평균이 각각 4.86-4.91로서 아메리칸 리그 역사상 리그 평균 ERA가 4번째, 3번째로 높은 타고투저의 시즌이었다. 페드로의 기록은 이러한 타고투저의 시즌에 나온 기록이라 더더욱 대단한 기록이었다.[22] 세이버메트릭스의 관점으로 보면 FIP의 경우 1999년에 1.40을 찍었는데, 이는 라이브볼 시대 역사상 압도적으로 1위인 기록이고,[23] 데드볼 시대의 기록을 합쳐도 3위이다.[24] 의외로 2000년 FIP는 2.17로 그냥저냥(....)한 편.[25]

1999년 9월 10일 보스턴 레드삭스는 같은 지구의 영원한 라이벌인 뉴욕 양키스와의 게임이 있었다. 당시 삭스의 선발은 페드로 마르티네즈. 결과는 9이닝 1피안타 1실점 17탈삼진 완투승. 참고로 이때 1실점 1피안타의 주인공은 은퇴를 앞두었던 양키스의 칠리 데이비스. 뭐 페드로는 첫 타자 척 노블락을 몸에 맞는 볼로 내보냈긴 했지만, 이 경기의 피칭은 가히 퍼펙트 게임을 방불케 했으며, 1983년 7월 4일 양키스타디움에서 데이브 리게티가 레드삭스를 상대로 던진 노히터를 되갚아 줄 절호의 찬스였지만 아쉽게 무산된 점에서 레드삭스 팬들이 특히 안타까워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끝나면 뭔가 아쉽겠다는 생각이 안드는가? 악몽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이어진 악몽은 한달 뒤 있었던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쉽. 물론 상대는 예상대로 그대로다. 덤으로 양키스의 선발투수는 그 유명한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 결과는? 7이닝 2피안타 12삼진 무실점. 경기결과는 보스턴의 13-1 대승. 이 경기는 1999년 월드시리즈 우승팀 양키스가 포스트시즌에서 당한 유일한 패배였다.

또한 1999년에 홈구장 펜웨이 파크에서 열린 올스타전의 선발투수로 나와 내셔널 올스타 1-2-3-4번 타자인 배리 라킨-래리 워커-새미 소사-마크 맥과이어를 차례로[26] 삼진으로 떡실신시키고, 맷 윌리엄스가 실책으로 출루했지만 제프 배그웰을 또다시 삼진으로 잡으면서 동시에 도루하는 윌리엄스를 AL 올스타 포수 이반 로드리게스가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지었다. 당연히 올스타전 MVP는 페드로의 몫. 다만 이때의 영향인지 올스타전 이후 몇 경기는 부진했다.

이 시즌의 최종 성적은 그야말로 너무 충격적이라 세상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으며, 만장일치 사이영상은 물론이거니와 MVP 투표에서도 2위에 오른다. 다만 이 때 MVP 투표에서 8표로 1위표를 최다득표했지만 역사상 최초의 포수 20-20을 달성하여 7표를 받은 이반 로드리게스에 밀려 MVP 1위를 놓친 것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통탄스럽게 생각하고 있다.[27] 페드로만큼 그 기록에 가까이 간 투수도 나오지 않고 있다.

2000년에는 ERA 1.74[28]라는 진기록을 세우며 아메리칸리그 최초로 2년 연속 만장일치 사이 영 상[29]을 차지하였고, 01년 주춤한 뒤에 2002년 다시 20승 4패 2.26의 기록을 세우면서 네 번째 사이영상을 수상하는듯 했으나 데릭 로와 표가 나눠진 데다 지나치게 적은 이닝(199.1)을 기록하는 바람에 배리 지토에 밀려 아쉽게 수상에는 실패했다.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성기에도 시즌마다 먹어주는 이닝이 적은 편인데,[30] 이는 경기당 이닝을 적게 먹어서가 아니라 잔부상을 많이 당해서였다.[31] 가장 많이 등판했던 경기수가 04년의 33경기였고, 보스턴 시절 평균 출장 횟수는 30회 정도였다. 메이저리그의 경기수가 162경기니까 5선발 시스템하에서 일반적인 1선발이 등판할 수 있는 경기 수는 대충 33경기정도인걸 감안하면 적은 횟수이다.

어찌되었던 간에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던 외계인이었지만 그의 몸에 비해서 과도한 무리를 했던 것이 결국 구위 하락과 잔부상으로 이어졌고, 2004년에는 16승 9패 ERA 3.90의 부진한 성적을 거둔다.16승9패에 3점대 평자가 부진한거라니[32]

2001년 한 번 탈난 거 빼고는 거의 04년까지 꾸준한 활약을 보이며 보스턴의 86년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한다.

2003 ALCS에서는 7차전에 선발로 나와 위기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트라우마가 남게 되었고, 2004 ALCS에서도 7차전 불펜으로 나와 그 설욕을 하려고 했지만 실점하면서 아쉽게도 그 악몽을 완벽히 지우는데는 실패했다. 다만 동굴맨이 그날 폭발하면서 팀은 대승했지만. 월드시리즈에서는 3차전에 등판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고 우승을 맛본다.

그러나 유리몸이라는 단점과 점차 하락하는 구위를 보고 보삭스 GM 테오 엡스타인은 재계약을 제시하지 않았고, 결국 FA를 통해 뉴욕 메츠로 팀을 옮기게 된다. 이후 페드로의 대안으로 온 선수는 조시 베켓.[33]

이 당시 뉴욕 양키스의 보스 조지 스타인브레너브라이언 캐시먼 GM의 반대[34]를 무릅쓰고 페드로 마르티네즈 영입전에 끼어들 것을 지시하여 굉장한 이슈를 낳았는데, 뉴욕 양키스 팬들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양키스를 적대시한 투수를 영입하려는 것은 자존심도 없는 짓"이라며로저 클레멘스는 잊었나보지? 페드로와 사인하지 말 것을 원했고, 뉴욕의 왕 데릭 지터 역시 양키스의 주적인 페드로가 레드삭스에 잔류하길 바란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페드로가 레드삭스 시절 보여준 양키스에 대한 적개심은, 뉴욕 양키스의 라이벌은 보스턴 레드삭스가 아니라 페드로 마르티네즈라는 말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본격 우주전쟁[35]

외계인은 밤비노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떠났다. 아, 물론 양키스와의 라이벌리는 계속되었다. 요태까지 그래와꼬 아패로도 개속(…).

2.4 뉴욕 메츠

정든 보스턴을 뒤로 하고 페드로는 2005년 뉴욕 메츠로 이적하였다. 히스패닉이 많은 뉴욕 퀸즈 지역을 연고로 하는 메츠로서는 페드로를 통해 히스패닉 계통의 팬들을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적 첫해인 05년에는 그럭저럭 이름값에 맞게 활약을 했으나 점점 잔부상이 생기기 시작하며 부상자 명단에 자주 오르기 시작했다. 06년 9승 8패에 4.48의 자책점을 기록한다. 이후 페드로는 떨어진 명성을 되찾기 위해 이듬해 스프링캠프 부터 절치부심했으나 만회하지 못했다.

2007, 08년 두 시즌 다 부상때문에 풀타임을 소화하지 못했고, 그 2년동안 기록한 승수는 고작 8승에 머물렀다. 에이스급 투수를 생각하고 계약한 메츠였지만 첫해 빼고는 그다지 활약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메츠 입장에서는 실패한 계약이었다. 한국의 대중과 언론들은 외계인 페드로가 드디어 지구인으로 귀화했다고 하면서 아쉬움을 표현했다. 결국 냉정히 말하면 흑역사.

한편 2006년 6월 27일~29일 인터리그 시리즈에서 메츠의 보스턴의 펜웨이파크 원정이 잡혔는데, 27일에 첫 경기에서는 펜웨이 파크에서 경기에 앞서 페드로에 대한 특집 영상을 제작하여 방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28일의 등판에서는 3이닝 8실점(6자책)으로 무자비하게 털렸다(...) 그래도 공수교대 때마다 팬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았고, 팬들이 환호하면서 다가가면 웃으면서 맞아주기도 했다. 당시 보스턴 팬들의 반응 페드로는 메이저리그 커리어에서 모든 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지만 딱 한 팀에게만 승리가 없는데, 바로 보스턴 레드삭스다.

그래도 메츠에서도 인터리그에서 자주 만나는 양키스를 상대로 4경기에서 27.2이닝을 투구하며 1승 1패 2.92의 좋은 성적을 찍어서 전 양키 팬들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대성불패랜디 존슨 2루타 폭격을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쿠옹이 기립박수를 받으며 교체될 때 페드로와 목례를 하는 모습을 알 것이다.

2.5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즌 오프 후 메츠는 부상 우려가 짙었고 결국은 실패한 계약이 된 페드로를 재계약하지 않았으며, 페드로는 졸지에 실직자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09년 WBC에 도미니카 공화국 대표로 참가하여 건재를 과시했건만, MLB 팀들의 러브콜은 감감무소식, 시즌 중반까지 팀을 찾지 못하고 은퇴기로에 몰렸지만 다행히 09년 7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1년 계약에 성공하며 현역복귀의 꿈을 이룬다. 사람들은 부상으로 인해 떨어진 구속과 나이 때문에 복귀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노련미와 절묘한 코너웍으로 상대 타자를 농락하며 필리스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일조한다.

2009년 기록은 9게임 출장, 5승 1패 자책점 3.63. 포스트시즌에서도 역투했으나 팀을 우승시키는데는 실패했다.

월드 시리즈에서는 클리프 리에 이어 월드시리즈 2선발로서 2차전에서 8K를 잡아내며 호투했으나 패전했고, 6차전에도[36] 뛰었지만 패배를 막진 못했다. 특히 양키 스타디움에서 마쓰이 히데키에게 얻어맞은 것이 컸다. 물론 이 때도 양키 팬들은 일제히 외쳤다. Who's Your Daddy!

당시 2차전 영상에서 페드로는 강판되면서 쓴웃음을 짓는데, 당시 양키 팬들의 야유는 엄청난 위압감을 자랑한다. 보스턴 팬 중에서는 45번 저지를 입고 페드로를 응원하러 간 용자도 있었다고. 이때 페드로를 구원하러 등판한 투수가 다름아닌 박찬호.

전성기 시절 커리어 조정 ERA 170이 넘었던 것에 비하면 메츠 시절 이후의 부진으로 154까지 내려간 상태이다. 다만 이 기록으로도 2위는 하고 있는데 1위는 마무리 투수로서 통산 규정이닝을 돌파한 마리아노 리베라이므로 선발투수로서는 1위라고 볼 수도 있을 듯. 이 떡밥은 왁봑대전에서도 제법 악명높은 떡밥이었는데, 양키빠들은 규정이닝을 달성한 경기 때 "Who's your daddy"를 외치며 흥에 겨웠고 삭스빠들은 치를 떨면서도 "마무리투수가 규정이닝 돌파해 봤자지, 시대를 지배한 에이스는 페드로"라는 식으로 폄하해버리기도 했다.

2.6 2년간의 복귀 시도

2010년 페드로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1년 계약이 끝났기 때문에 자유계약선수였지만 본인은 '아직 은퇴는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10시즌도 필라델피아에서 계속 뛰기를 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복귀는 이뤄지지 않았고, 2011년에는 필리스 선발진이 충공깽한 수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페드로가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복귀는 힘들어 보였다.

결국 2010년에는 새 팀을 찾지 못하면서 휴식을 선언했지만 양키스와의 보스턴 홈 개막전에서 진짜로 45번 저지를 입고 시구자로 나와 무지막지한 환호를 받았다. 물론 그린 몬스터에서 나오는 길에 A로드와 인사를 한 것 때문에 몇초 동안 살짝 야유가 나오긴 했다. 참고로 랜디 존슨 또한 2010년 시애틀 매리너스의 홈 개막전에서 시구를 하며 기립박수를 받은바 있다. 약물시대를 함께 평정하고 같은 해에 양대리그 사이영 수상의 기록을 세우며 서로 투수 트리플 크라운 등극을 한번씩 방해한(...) 위대한 좌우 에이스가 새 팀을 찾지 못하고 친정팀 개막전에서 시구자로 나서는데 그치는 모습에 많은 올드팬들이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2011년 들어 페드로는 필리스가 아니면 레드삭스로 복귀하고 싶다고 밝혔는데, 한국의 보스턴 팬들은 존 래키 쫓아내고 외계인을 데려오라며 과거 로켓 복귀설 때보다 더한 설레발을 떨기도 했다. 실제로 그 인터뷰에서 보스턴을 언급한 후로 레드삭스 프런트에 도착하는 팬들의 메일에는 페드로와 사인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고. 하지만 구단 측에서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 부정하고 있다.

사실 벅홀츠가 조금씩 유리몸의 기질을 보이는 상황이고, 마쓰자카는 아예 토미 존 서저리, 웨이크필드도 아무래도 너클볼러다보니 로테이션에 구멍이 없다고는 할수 없는 상황이라서 가능성이 낮긴 해도 불가능까진 아닌 이야기였다. 또한 그의 복귀가 실제로 이뤄진다면 팀 내 투수진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줄 수 도 있었다.

결국 그의 복귀는 이뤄지지 않았다.

3 은퇴

2013년 자신의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자랑하는 후덕한 아저씨(...)

2011년 12월 4일,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식 같은 건 없었지만 이후엔 삭스 프런트에서 일하기를 희망했다. 다만 공식적인 은퇴 이후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지 2012년 한 해는 휴식을 취하며 간만에 복귀로 인한 심적 부담등을 내려놓고 푹 쉬었다.

레드삭스 프런트로 돌아온 것은 2013년 1월. 보통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그렇듯 벤 셰링턴 단장의 특별 보좌로 일을 시작했다. 복귀하자마자 2012 년 꼴등팀이 2013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감격을 맛보기도 하고, 프런트로써 첫 해는 상당히 기분좋게 보내는 중.

비단 프런트 뿐만 아니라 해설 및 야구 프로그램의 패널로도 활동을 시작했다. 보통 중남미 선수들이 영어가 부족해서 이런 역할을 못 맡는 걸 보면 그의 영어 실력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중남미 특유의 스페인 어 억양이 잔뜩 들어간 억양이지만 아래 나오는 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페드로의 어휘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수준급이다. 보수적인 시청자들은 좀 불만이 있긴 하지만. 특히 최근에는 MLB Network에서 패널로도 활약하고있는데, 전문용어를 모든 사람들이 알기쉬운 영어로 풀어주면서 자신의 경험을 알려주면서, 자라나는 야구선수들에게 참고가 할수있는 지식을 자주 이야기해주고있다.

해설 및 패널 일을 하게 되면서 선수 시절에는 무시했던 기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더 커졌다고 한다. 그냥 의자에 앉아서 편하게 야구 이야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막상 출연하게 되니 경기 내용, 선수 이력과 스탯과 성적 등 찾아야 할 내용도 너무 많고 그 중에서 자료를 선별해서 말할 내용을 골라내야 하는 둥 보통 일이 아니었다고.

양키스에게 계속 안 좋은 성적을 내고 있을 때 '양키스를 내 아버지로 불러야 겠다' 라고 한 유명한 발언에서 착안해 그 날의 플레이어를 페드로가 지정해 칭찬하는 'Who's your daddy?' 라는 코너에서는 NLCS 3차전에서 호투한 류현진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전체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한국어 발음에 곤혹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H와 J 발음을 좀처럼 하지 않는 스페인어 식으로 읽었는지 '현진류'가 '영잉류'로 둔갑하기도 하고 한국어 '아버지' 가 '아부-웻지'(…)가 되는 등.[37]

4 명예의 전당 입성

레드삭스 팬들은 물론 그와 상대하며 화려한 시대를 보냈던 양키스의 팬들마저도 이런 나이 든 페드로를 보며 눈시울을 붉히며 명예의 전당 입성을 기원했다. 헌액식에 가서 Who's your daddy를 외치며 기립박수를 보내겠다 이거지 과거 샌디 코팩스처럼 200승도 못거뒀지만 단기간에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피칭을 선보이며 HoF에 간 케이스도 있어서 페드로의 전망은 밝았다.

현실적으로 바라보면, 같은 해에 처음 출마하는 선수가 불꽃을 던진 사나이라서 첫해 입성은 많이 힘들 것으로 보였지만, 결국 2015년 1월 6일 이루어진 기자단 투표에서 존슨, 스몰츠와 함께 첫해 명전 입성을 확정지었다.[38] 누적 성적이 딸려서 득표율은 91.1%로 빅유닛보다는 낮았지만 엄청난 단기 임팩트 덕에 득표율이 80퍼센트 초반인 스몰츠는 앞섰다. 식사를 하다가 소식을 접한 페드로는 도미니카 공화국기와 성조기를 양손에 쥐고 흔들면서 신나했고, "나는 절대 지름길을 택하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이 나에게 가르쳐준 방법만을 택했다. 나는 깨끗했다." 라는 자부심 넘치는 소감을 전했다. 거기 30%대에서 허우적대는 누구누구, 듣고 있나?

2007년 쯤에 손윤 기자가 작성한 글에서는 페드로와 코팩스를 비교하며 페드로가 시대를 개발살낸 흠좀무한 먼닭임을 구구절절 읊었으며, 200승과 3000K를 명예의 전당 입성 여부를 가늠할 중요 포인트로 제시하였다. 1편. 2편. 3편. 글쓴이는 버트 블라일레븐이 HoF에 못가면 미쳐버릴 것 같다고 징징댔다(...) 다행히 2011년에 입성했지만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투수로서 HoF에 입성하는 중요 지표로서 200승 뿐만 아니라 3000K를 제시한 것인데, 실제로 2011년 현재 3000K를 돌파한 선수들은 모두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거나 명예의 전당이 100%로 점쳐지고 있지만 약물과 구라 때문에 안 되는 케이스라는 점에서 충분히 일리가 있다.

7월에 열린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모자는 당연히 보스턴 레드삭스의 것을 쓰고 들어갔다. 보스턴 팬들의 환대는 그야말로 개국공신 수준.

이보다 앞선 2014년에는 로저 클레멘스, 노마 가르시아파라와 함께 보스턴 레드삭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2015년에는 쿠퍼스타운 입갤이 발표된 뒤에 로켓과 함께 명전에 가고 싶었는데... 그러게 왜 약인지 뭔지 해서 이모양이냐... 하며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5 플레이 스타일

투수로 180cm의 작은 체격에도 불구하고, 로우 스리쿼터 스로형의 역동적인 투구폼[39]으로 공에 힘을 싣는다. 전성기 때는 구속, 공의 움직임, 제구력, 커맨드, 멘탈적인 측면까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투수였다. 구질로는 최고 90마일 후반대의 포심 패스트볼, 90마일 초중반대의 투심,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 수준의 서클 체인지업, 리그 정상급의 커브와 그 외 슬라이더, 커터를 구사했다. 특히 페드로의 서클 체인지업은 마치 스플리터나 스크류볼 같이 타자 앞에서 뚝 떨어지며 헛스윙을 이끌어낸 마구[40]. 체인지업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서클 체인지업은 패스트볼과의 구속차로 타자의 타격 타이밍을 흔드는 구질이기 때문에 헛스윙보다는 주로 타자의 배트 끝에 공이 빗맞게 만들어서 땅볼을 유도하는 구질이다. 그런데 페드로는 엄청난 낙폭을 지닌 체인지업으로 땅볼을 유도하기 보다는 삼진을 산처럼 쌓았고 200K는 기본에 300K도 달성해버렸다.[41] 과연 외계인(...). 커트 실링이 했던 말에 따르면, 공이 체인지업이라고 느낀 순간 타자는 이미 헛스윙을 하고 난 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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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마구였던 서클 체인지업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준수한 투수였지만, 그의 전성기를 알고 있는 팬들로서는 한참 모자란 모습이었다. 전성기 시절에는 공의 위력 자체만으로도 타자들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면, 부상이 잦아지며 구속이 감소함에 따라 점차 커맨드와 컨트롤로 게임을 진행하는 스타일이 되었다. 팬그래프에서 구속을 집계하기 시작한 2002년의 평속이 90.7마일이었고 이듬해부터는 평속이 89마일대로 떨어졌는데, 위기 시에는 순간적으로 95~96마일까지 끌어올리곤 했다. 어쨌든 저 빠르지 않은 평속으로 2002년 기준 이상(패스트볼 1000구) 선발 투수 중 패스트볼 헛스윙률이 메이저리그 전체 5위였다.

6 이모저모

  • 한국에서는 외계인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출처로는 1999년 ALCS의 페드로 선발 때 13:1 대패를 당한 조 토레 당시 양키스 감독이 '인간이 아닌 자에게 졌으니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이 아니니까 부끄럽지 않은걸라고 했다는 설이 흔히 제시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케네디 스코어와 마찬가지로,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출처를 찾을 수 없는 낭설이다. 외계인이란 별명도 외국에서는 아무도 모른다. 외국에서는 별명이 Pedro el Grande 또는 애칭으로 'Petey'라 불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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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신춤의 달인 페드로 마르티네즈.# 익살스러운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 분위기 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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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스턴 시절 노마 가르시아파라와 함께 펜웨이 파크의 명물이었다. 이렇게 노마에게 테이프로 꽁꽁 묶여버리기도 했다.
  •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굉장히 차갑고 냉소적인 인터뷰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3년 ALCS에서의 카림 가르시아와의 빈볼시비 이후의 인터뷰를 보면,
Karim García, who's Karim García? I have no respect for that guy. I don't have anything to prove to that guy. He needs to be forcing himself to come up to where I am, to my level. When you talk about Jeter, Bernie Williams, Paul O'Neill, guys like that that you really tip your hat, that you can understand. But guys like Karim García, what? So what? Who are you? Who are you Karim García to try to test Pedro Martinez, a proven player for ten years? That's what I don't understand. Why would I hit Karim García?[42]
글로만 보기 부족하다면 인터넷에서 검색하기 바람. 그야말로 소름이 돋는다. 게다가 이 인터뷰를 한 페드로가 도미니칸임을 생각하자. 이 정도면 진짜 네이티브 스피커를 넘어 말빨로 먹고 살 수 있는 정치인을 해도 모자람이 없는 수준이다. 심지어 중남미 선수를 상대하는 영어강사들은 페드로가 영어를 어떻게 배웠길래 이리도 잘하는지 분석하면서 영어 교육에 참고하기도 한다고. 흠좀무. 요새 도미니카 혹은 중남미 선수들이 바글바글하지만 영어를 못 배우다보니 여러 구단들이 골치를 썩이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 자치령 출신이라 영어를 웬만큼 한다는 푸에르토 리코 출신 선수들보다 더 뛰어난 영어 실력을 자랑한다는 점에서 굉장한 모범이 되고 있다.역시 외계인이다. 지구에 들어오기 전에 언어팩 이식받은듯
  • 2004년 9월에 양키스에 한번 떡실신당하고 한 말은 이후 양키스 팬들이 인터리그 메츠전이나 월드시리즈에서 페드로를 만날 때마다 외치는 Who's your daddy 챈트가 되었다.
They beat me. They're that good right now. They're that hot. I just tip my hat and call the Yankees my daddy.[43][44]
카림 가르시아 사건에서도 그렇듯이, 이런 은유적인 표현을 인터뷰에 쓴다는 것은 그야말로 미국인 수준까지 올라온 것이다. 페드로가 무표정한 모습으로 말을 할 때면 언제나 그를 둘러싼 기자단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 2013년 2월 한 인터뷰에서, 현역 시절 내 빈볼의 90%는 의도적이었다라고 발언했다는 기사가 나와서 야구 팬들, 특히 양키 팬들에게 좀 많이 까였다. 하지만 이는 국내 기레기 기자들의 번역 미스로 실제 발언은 "Probably 90 percent of them (was intentional). But, it was always retaliation for my teammates." (아마 90%는 의도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다 팀 동료들이 당한 보복 차원에서 그런 것이다)으로 나와있다.원문 하지만, 빈볼도 제구력이 뒷받침되어야 정통으로 꽂아넣을 수 있는 것이고 현역 시절에도 탈삼진에 비해 볼넷이 적기로 유명했던 선수라 그가 던진 (비보복성) 빈볼들 중 의도적인 게 아닌 게 과연 얼마나 될지 의심하는 시각도 여전히 존재한다. 위에서 보다시피 성격도 한 성격 하고.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된 유화.
  • 2011년 초에는 스미스소니언 미술관(Smithsonian Gallery of Arts)에 초상화가 전시된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50여명 중 최연소이자 로베르토 클레멘테, 새미 소사, 후안 마리샬 등에 이어 중남미 선수로서는 4번째로 초상화가 전시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 당시 복귀 가능성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을 드러내기도 하였고, 가족들에 대한 생각에 연설 도중 울먹이기도 했다.인터뷰 번역글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선발 투수인 카를로스 마르티네즈는 유망주 시절에는 작은 체구에서 강속구를 던질 수 있다는 점과 남미 선수라는 공통점 등으로 인해 한국의 카디널스 팬들에게 짭드로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더 많이 불렸고, 지금 대세로 불리는 별명은 이름의 줄임말인 C-MART.

7 주요수상

년도주요수상
1996올스타
1997사이 영 상(NL), 올스타, TSN 올해의 투수상(NL)
1998올스타
1999사이 영 상(AL), 올스타, 올스타전 MVP, TSN 올해의 투수상(AL)
2000사이 영 상(AL), 올스타, TSN 올해의 투수상(AL)
2002올스타
2005올스타
2006올스타
2015명예의 전당 헌액(기자단 투표 1회 입성, 득표율 91.1%)
통산사이 영 상(3회), 올스타전 MVP(1회), 올스타(8회)
TSN 올해의 투수상(3회)
  1. 출처는 위와 같다.
  2. 2000년 ERA+ 291
  3. 예전에는 데드볼 시대까지 합쳐도 1위였으나, 19세기의 기록이 발견되면서 역대 2위로 밀려났다. 1위는 데드볼 시대의 레전드 중 한 명인 팀 키프
  4. 랜디 존슨, 케리 우드, 페드로 마르티네즈 순.
  5. 두 부문 모두 커트 실링에게 뒤쳐진다. 실링의 K/BB는 3116K/711BB이고 페드로의 경우는 3154K/760BB.
  6. 베이스볼 레퍼런스 기준. 1000이닝 이상 투구한 투수 중 3위이다. 1위는 전업 마무리 투수인 마리아노 리베라, 2위는 클레이튼 커쇼, 커쇼가 지금 얼마나 엄청난 페이스로 달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
  7. 몇년 후 전성기를 생각한다면 트레이드가 삽질이었겠지만, 전성기에도 잔부상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었기에. 그리고 다저스는 메이저리그 구단들 중에서도 유망주의 신체조건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단 중 하나다.
  8. 93년 다저스의 주전 2루수였던 조디 리드는 시즌을 마치고 밀워키 브루어스에 FA로 입단했기 때문에 다저스는 2루수가 공석이었다.
  9. 현재 추신수와 함께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뛰는 들라이노 드쉴즈 주니어의 아버지.
  10. 결과적으로 드쉴즈는 다저스에서 타율 .240-출루율 .350-도루 30개 내외의 평범한 선수가 되버리면서 다저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결국 1997년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FA 이적을 했다. 그리고 다저스는 1997년에 신인이었던 윌튼 게레로(블라디미르 게레로의 친형)가 신인왕 페이스였다가 코르크뱃 사건으로 나락에 떨어지고, 후반기에 에릭 영 시니어의 영입으로 그간의 문제를 해결했다.
  11. 그런데 이 트레이드 당시 다저스의 단장은 프레디 클레어였고, 토미 라소다는 감독이었다. 트레이드에 라소다가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12. 당시 클로드 브로쉬 구단대표와 댄 두켓 단장이 중심이 된 '팀 재건 3년 계획'의 마지막 실행 시즌인 1994 시즌을 앞둔 상황이었다.
  13. 페드로는 결국 레드삭스에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맛보긴 했지만, 그 이전까지 엑스포스의 1994년 시즌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고 한다. 실제로 2004 월드시리즈 우승 인터뷰 때 '이제는 (엑스포스가 워싱턴 DC로 연고지 이전을 하여) 몬트리올에서 메이저리그 경기가 열리지 않지만,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와 벅차오르는 마음을 몬트리올에 전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14. 로켓맨이 약을 한 건 사실이나 보스턴에서 뛰었던 시절에는 약을 하지 않았다. 그가 약물에 손을 댔던 때는 토론토 2년차 시절부터...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약물러가 언제부터 약을 시작했는지는 본인만 안다. 보스턴 시절 안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에이로드만 해도 텍사스 시절 부담감에 사용하였다고 본인은 주장하지만, 고등학생때부터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5. 사실은 한 명 더 있다. 말년에 뛴 사이 영
  16. 많은 이들이 레드삭스가 하향세인 클레멘스를 보사구팽 버리고 페드로를 샀다고 하지만, 실제 이 두 선수의 사이엔 97년 한 해 동안 댄 듀켓 단장이 천하의 개쌍놈으로 불리던 시기가 존재한다. 이 당시 클레멘스가 토론토 가서 화려한 부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더욱. 로켓의 금지약물 투약 시점은 토론토 2년차에 브라이언 맥나미를 만나며 시작된 것이 정설이니 당시 그의 부활 자체가 약빨이었던 것은 아니다.
  17. 랜디 존슨이 탈삼진을 364개 잡아서 메이저리그 트리플 크라운은 달성하지 못했다. 2002년에는 랜디 존슨이 24승 5패, 탈삼진 334, 평균 자책점 2.32를 기록하면서 네셔널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는데 메이저리그 트리플 크라운은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평균 자책점 2.26을 달성했기 때문에 실패. 재밌게도 서로간에 메이저리그 트리플 크라운 달성을 한번씩 방해(?)한 셈이 되었다.
  18. 리그 평균 투수를 100으로 환산했을 때의 상대 점수. 보통 시대와 구장이 다른 투수들을 비교할 때 자주 사용한다.
  19.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이 시즌에 페드로는 리그의 보통 수준의 선발투수보다 3배 정도 잘 던진 것이다.
  20. 참고로 선동열 커리어하이가 86년인데 ERA+가 300을 넘는다. 통산을 봐도 ERA+ 300을 넘는다.
  21. 이 때는 데드볼 시대였으며, 레너드는 레드삭스 소속으로 MLB 역사상 가장 낮은 시즌 ERA 0.96를 찍었다. 페드로가 1.74를 찍고 291을 찍었다는 것에서 이 스테로이드 시대의 무지막지한 타고투저를 실감할 수 있다. 사실상 페드로의 2000년은 1920년대 시작된 라이브볼 시대 이래 68년 밥 깁슨의 ERA 1.12 ERA+ 258과 함께 투수 개인으로선 최고의 시즌이었다 할 수 있다. 2011년 중 1880년 팀 키피(Tim Keefe)의 295 기록이 발견되어 페드로는 2위로 밀리게 되었다. 그런데 팀 키피가 데드볼 시대 당시 세운 기록에 해당 시즌에 키피가 채운 이닝이 겨우 105이닝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페드로가 1위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월터 존슨이 1913년에 346이닝동안 ERA+ 259를 기록한 것은 어떻게 해석할 터인가? 월터 존슨이 지금의 투수들과 비슷한 수준인 200~250이닝만 던지면서 컨디션을 조절했더라면? 팀 키피의 기록이 공식기록으로 인정받는 것은 그가 그 당시 규정이닝을 돌파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의 기록이 사실상 2위 라는 둥 폄하받을 이유는 하등 없다. 그렇다고 해서 페드로의 기록 또한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팀 키피는 데드볼 시대에 가장 압도적인 시즌을 보낸 투수, 페드로는 라이브볼 시대에 가장 압도적인 시즌을 보낸 투수인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음을 잊지 말자.
  22. 2008-09년의 아메리칸 리그 평균자책점 평균은 각각 4.35, 4.45이었다.
  23. 라이브볼 시대 2위 1984년 드와이트 구든이 1.69로 전체 14위이고, 3위인 2014년 커쇼가 1.81로 역대 24위이다.
  24. 데드볼 시대까지 합치면 1위가 1908년 크리스티 매튜슨의 1.29, 2위가 월터 존슨의 1.39이다.
  25. 사실 2.17 정도만 돼도 라이브볼 시대 30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기록이다.
  26. 당시 타순대로 시즌 최종성적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라킨 .293 .390 .420 12HR 75RBI 30SB, 워커 .379 .458 .710 37HR 115RBI, 소사 .288 .367 .635 63HR 141RBI, 맥과이어 .278 .424 .697 65HR 147RBI.
  27. 당시 투표를 돌아볼 때, 이반 로드리게스의 퍼포먼스가 워낙 강렬한 임팩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MVP를 따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포수로서 20-20은 워낙 전대미문의 대사건임에 분명하고 부상만 없었다면 30-30까지 노려볼 기세였다는 점, 포수로서 140경기 이상 출전했다는 점에서 MVP로서 손색이 없는 위대한 업적이지만, 사람들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왜 하필이면(…) 페드로를 묻어버렸나고.
  28. 아메리칸리그 평균자책 2위였던 로저 클레멘스의 기록이 3.70이다. 1위와 2위가 평균자책이 두배가 넘게 차이가 났다. 그저 흠좀무.
  29. 내셔널리그에서 2년 연속 만장일치 사이영상을 탔던 샌디 코팩스에 이어 메이저리그 사상 2번째. 그러나 이 해에도 MVP는 1~4위 제이슨 지암비, 프랭크 토마스, 알렉스 로드리게스, 카를로스 델가도에 이어 5위에 머물고 만다.
  30. 옆동네에서 본좌놀이하던 랜디 존슨과 비교되는 점
  31. 오죽하면 8이닝 3실점 패배를 기록했을 때 시즌 최악의 피칭이라 혹평을 당했을까...
  32. 외계인의 시점에서 부진하다는 거지 일반적인 투수가 저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으면 준수한 성적이다. 2004년에도 MLB 역사에서는 타고투저의 시대였다보니 조정 ERA도 125로 준수했다. 참고로 당시엔 요한 산타나가 만장일치 사이영상을 받았고, 경쟁자들 역시 커트 실링, 마리아노 리베라, 조 네이선, K-ROD였던 마당이라 페드로도 사이영 표를 하나 받기도 했다.
  33. 보스턴은 과거 로저 클레멘스를 토론토로 보낸 후 1년간 욕을 가지가지로 먹고 페드로를 영입했다. 테오 엡스타인이 단장이 된 이후 2004년 저주를 깨는데 성공하지만 페드로의 하향세 때문에 보스턴은 역시 부진했던 데릭 로우와 함께 재계약을 포기했고, 그들 대신 영입한 선수가 데이빗 웰스와 맷 클레멘트, 웨이드 밀러인데 이들은 망했고, 팬들에게 잠시 비난받다가 빡쳐서 단장직을 때려치기까지 했다. 그렇게 테오가 때려쳤다가 복귀하기까지의 공백기간에 이 트레이드가 단행되었는데, 이 트레이드로 핸리 라미레즈아니발 산체스가 말린스로 갔다. 물론 지금은 로웰과 베켓의 활약으로 07년 우승을 차지하여 우승과 유망주를 맞바꿨다는 추억으로 남았지만, 유격수 포지션이 보스턴에게 고질적인 약점이 되었고 베켓의 포스는 과거 로켓과 외계인 두 위대한 에이스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영 안타깝다. 다행히 베켓이 2011년 제대로 각성했고 팜에서는 존 레스터클레이 벅홀츠도 자라나긴 했다만.
  34. 이제 곧 몸이 망가질 것이라 오래 못간다는 것으로, 이는 안타깝게도 당시에 야구계의 주류 의견이었으며 (이후 서술하지만) 실제로도 나타났다. 이 때문에 레드삭스가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페드로를 포기했던 것이며, 메츠의 오마 미나야 GM이 어메이징한 욕을 듣는 것이다.
  35. 페드로와 싸우고 있는 사람은 당시 양키스 코치 '뽀빠이' 돈 짐머. 싸움의 발단은 2003년 ALCS에서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카림 가르시아에게, 로저 클레멘스매니 라미레즈에게 빈볼을 던진 것. 이 후에 인터뷰에서 페드로가 'Who is Karim Garcia?'라고 말해서 굴욕을 줬다.(이 글 맨 밑에 전문이 나와있다.) 참고로 당시 돈 짐머의 나이는 72세. 탬파베이 레이스 고문으로 재직중이던 2014년 4월경 심장수술을 받았고 끝내 회복하지 못하며 6월 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36. 두 경기 모두 양키 스타디움 게임이었다. 물론 우연의 일치라고는 하지만, 이는 사실상 양키스 자체를 도발하기 위해 기용한 것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고, 양키 팬들도 그에 대해 굉장히 모욕감을 토로했다. 뭐 본 경기에서 페드로를 공략하는데 성공했고 6차전에서 페드로를 능멸하며 우승을 차지했으니 통쾌해했다.
  37. 참고로 스페인어에서 h와 j는 거의 묵음처리가 난다. --특히 j 발음은 뻘플의 소재이기도(...) 그것 때문에 발음이 개그화 되었을지도...
  38. 크렉 비지오도 3수 끝에 함께 입성
  39. inverted-W 계열의 딜리버리다. 혹자들은 이런 투수들을 보며 채찍을 휘두르는 듯 하다고들 하는데, 페드로가 키를 키우고 양말을 올려 신는 것을 그려보면 그것은 바로 스티븐 스트라스버그. 스트라스버그가 데뷔한 2010년 경기에서 사람들의 여러 감상평 중엔 '페드로가 돌아왔다'는게 많았다.
  40. 상대한 타자들에 따르면 홈플레이트에서 누군가 공을 살짝 잡았다 놓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41. 200K 이상을 잡은 시즌이 총 9번이고 그 중 300K를 넘긴 시즌은 2번이다.
  42. 간단히 해석해 보면 '나는 이미 10여 년을 빅리그에서 검증받은 선수인데, 데릭 지터, 폴 오닐, 버니 윌리엄스 같은 선수라면 모르겠지만 카림 가르시아 같은 애송이에게 일부러 빈볼을 던질 이유가 어디있냐' 는 것. 왜 '너같은 듣보를 이 몸이 굳이 상대해야 하나' 라는 뉘앙스가 전체적으로 깔려있는, 매우 시니컬한 내용이다.
  43. 이 인터뷰 이후 2004 ALCS 2차전에서 페드로를 상대할 때와 7차전에서 승부가 많이 갈린 상황에 페드로가 자신감을 회복하는 차원에서 나왔다가 실점을 하면서 양키스 팬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처절하게 Who's your daddy를 외친 장면은 아직도 두 팀간의 명승부에서 손꼽히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여담으로 레드삭스 팬들은 이런 챈트에 "Who's your Papi?"로 대응했다.
  44. 훗날 페드로 본인은 인터뷰에서 이 말을 한 게 후회스럽다는 뉘앙스의 말을 남겼다.
  45. 2009년 도미니카 공화국의 한 언론이 발표한 도핑 테스트에서 양성반응을 보인 103명의 리스트에 그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는 점을 볼 때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비공식적인 확인이라는 점에서 공신력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찌라시 수준도 안되는 리스트라는 것이 정설이다. 페드로도 강하게 부정했다.